이십년래귀향리(二十年來歸鄕里) 스무 해가 지나고서 고향 땅에 돌아오니 구우영락사다비(舊友零落事多非) 옛벗은 아무도 없고 모든 것이 변해버렸네.
일본 에도(江戶)시대 다이구 료칸(大愚良寬 1758~1831) 스님은 학문과 시를 좋아하는 명문가 출신답게 많은 한시를 남겼다.
출가한 지 스무 해쯤 됐을 때 아버지 부고를 받았다. 교토(京都)의 절에서 49재를 마친 뒤 고향인 니가타(新潟)에 들렀다. 하지만 집안 살림은 이미 기울어진 상태였다. 장남의 직분을 다할 수 없었지만, 가세 몰락의 책임에서 정서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인지라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불가(佛家)와 속가(俗家)의 경계에서 양가(兩家)를 동시에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친구는 모두 고향을 떠났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없고(零落) 익숙해야 할 주변사는 오히려 대부분 생경했다(事多非). 그 이유는 출가 시점에서 본 고향 모습이 의식 안에서 멈춘 까닭이다. 이 시는 그 무렵의 심란함을 잘 보여준다.
당나라 마조(馬祖 709~788) 선사는 “개울가의 할머니는(溪邊老婆子) 나의 옛날 이름을 부르네(喚我舊時名)”라는 귀향시를 남겼다. 이 말 속에는 과거사의 고정된 시각에 대한 섭섭함이 그대로 짙게 배어 있다. ‘장시(江西)의 마조’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중국 강남을 대표하는 선(禪)불교계 대부로서 금의환향이었다. 하지만 고향 쓰촨(四川)성 스팡(什方)현 동네 할머니의 눈엔 아직도 ‘보잘것없는 마씨집 둘째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료칸(良寬)은 ‘자기 정지’ 때문에, 마조는 ‘상대방의 정지’로 인해 각자 한 편의 시를 남기게 됐다. 사별삼일괄목상대(士別三日刮目相對)라고 했다. 글 읽는 선비는 헤어진 뒤 사흘 후에 만나더라도 눈을 부비고 다시 봐야 할 만큼 일취월장하기 마련이다. 어찌 선비뿐이랴. 열심히 사는 사람은 대부분 그렇다. 어쨌거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주위의 변화를 함께 읽어야만 쓸데없는 번뇌를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