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3:1-17, 요단을 건너다. 21.9.29, 박홍섭 목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넌 이야기입니다. 요단강은 레바논 북쪽의 헐몬산에서 발원하여 훌레 호수(너비 약 3.2㎞, 길이 약 4.8㎞)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16㎞ 정도를 흘러 갈릴리 호수를 거쳐 팔레스타인을 종단하여 최종 종착지인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약 130㎞의 강입니다. 구불구불한 굴곡을 모두 측정하면 약 320㎞가 넘죠. 지금 이스라엘이 있는 싯딤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남쪽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통상적으로 요단강 하면 갈릴리부터 사해까지의 북쪽 요단강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우기와 건기가 아주 뚜렷한 지역입니다. 비가 올 때는 아주 많이 오고 적게 올 때는 근 6개월 동안 아예 비가 거의 안 옵니다. 요단강 물 높이도 우기와 건기 때에 아주 큰 차이가 납니다. 건기 때에는 평균적으로 폭이 30m, 깊이는 약 1m 정도로 어른 배꼽 정도의 얕은 지역들이 많았지만, 우기 때는 낮은 지역도 3-4m 정도의 높이에 폭은 거의 1.6km로 아주 넓어집니다. 지금 이스라엘에 가 보면 요단강이 너무 작아서 모두 놀랍니다. 강이 아니라 시냇가 같습니다. 상류에서 보와 댐을 만들고 농지 용수로 많은 물을 빼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는 이 시기는 곡식을 거두는 우기의 막바지요 겨울 동안 헐몬 산에 쌓인 눈까지 녹아서 내려오는 물 수위가 가장 높은 시기, 적어도 깊이 4m, 넓이 1.6km의 강에 물이 넘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상류와 하류의 해발 차이로 인하여 물의 속도도 매우 빨랐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했죠. 지금 건너기에는 불가능한 매우 위험한 강의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요단강이 위험한 때에 건너가라고 하십니다. 왜 이때에 건너라고 하실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있던 것처럼 여호수아와도 함께하심을 알게 해서 여호수아의 리더 십에 권위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7절이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다른 하나는 그렇게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셔서 가나안 족속을 요단을 건너는 방식으로 쫓아내실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또 말하되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이 두 가지를 알리고 가르치기 위해서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는데 그 전에 하나님께서 사흘 동안 싯딤에 머물게 하십니다. 1-2절입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사흘 후에 관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이 3일 동안 이스라엘이 뭘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들에게 강의 어떤 쪽이 얕고 깊어서 어디로 건너야 가장 잘 건널 수 있는지를 살피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들의 능력과 지혜와 기술로는 지금 이 강을 건널 수 없고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조용히 자신을 생각하고 왜 하나님이 자신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 무슨 말씀을 주실 것인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사방팔방 돌아다니면서 이 방법 구하고 저 방법 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길을 열어주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사흘이 지난 후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3-6절입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사흘 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강의 얕은 곳을 찾는 것도 아니고 다리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배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언약궤를 따라가라고 하십니다(3). 만나와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는 언약궤는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백성 앞에서 언약궤를 메고 이천 규빗(약 1km)의 거리를 두고 백성들이 언약궤를 따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사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로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눈앞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은 조용히 하나님이 내시는 길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나의 모든 방법보다 하나님의 인도와 말씀을 앞세우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함께 시간을 정해 모이는 공적 모임에 참여해서 말씀을 듣는 시간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시간을 소홀히 여기고 이 시간에 자기 방식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주의 말씀을 앞세우지 않고 세상의 방법과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앞세우는 교인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사람 만나고 강의 얕은 곳을 찾고 다리 만드는 기술 찾고 배 만드는 방법 찾는다고 돌아다니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강물이 멈추고 갈라지는 기적을 맛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건너야 할 두 가지의 경계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애굽을 나오면서 건너야 할 경계선인 홍해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려면 죄와 사망을 대변하는 애굽의 가치관과 세상의 풍습을 건너와야 합니다. 그걸 버려야 합니다. 또 하나 건너야 할 경계선이 요단강입니다. 홍해를 건너 애굽의 가치관과 풍습을 버리고 나오면 어디입니까? 광야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는 신앙의 훈련을 받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훈련을 받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고 반석에서 생수를 주시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훈련을 합니다. 그 훈련이 끝나면 제2의 애굽인 가나안이라는 세상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그때 건너는 경계선이 요단강입니다.
어떻게 건넙니까? 지금까지 광야에서 받았던 훈련 그대로입니다. 말씀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삶입니다. 그것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가라는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언약궤와 이천 규빗쯤(약 1km) 떨어져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리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5).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은 죄와 욕심을 버리고 말씀 중심으로 삶을 단순화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복잡한 생각 내려놓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자기 수단, 자기 생각 다 갖고 있으면 언약궤를 봐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죄를 버리고 생각을 단순하게 하고 삶을 단순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때 믿음이 생깁니다. 생각이 복잡하고 삶이 복잡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면서도 믿음이 생기지 않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순종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여 말씀 중심으로 삶을 단순화시켜서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14-17입니다.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요단이 곡식을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던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들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4절 말씀처럼 지금까지 한 번도 지나가지 못한 길을 지나가는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물에 잠기자 위로부터 사해를 향하여 흐르던 물이 멈추고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쌓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는 곳에 마른 땅이 드러나고 이백만 명이 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마른 땅을 건너서 가나안의 여리고 앞으로 들어갑니다. 홍해를 건널 때와 똑같이 물이 쌓여 드러난 마른 땅을 건넙니다.
차이가 있다면 홍해는 양쪽으로 벽처럼 물이 쌓였고 그 중간에 마른 땅이 드러났다면 요단강은 사해 쪽은 완전히 물이 끊기고 아담 성읍 쪽으로 한쪽만 쌓였다는 차이가 있죠. 홍해는 먼저 하나님이 바다를 갈랐지만, 요단강은 제사장들이 먼저 믿음으로 요단강에 발을 담갔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에는 믿음이 없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기적을 먼저 보여서 건너게 했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에는 40년의 광야훈련을 거친 후입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먼저 요구하십니다. 홍해는 길을 열어놓으시면 따라가는 경우이고 요단강은 말씀으로 부딪쳐 하나님이 여시는 길을 보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알게 하시고 앞으로 가나안의 모든 전투는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전투를 요구하십니다. 믿음의 첫걸음, 순종의 첫걸음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불러옴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언약궤를 앞세우고 하나님이 보내는 이 세상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앞서고 하나님이 뒤따라 오게 하고 있습니까? 나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고 나는 그 뒤를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우상 신앙이 됩니다. 자기 뜻과 계획을 정해놓고 도와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처럼 여기는 신앙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앞세우고 따라가야 합니다. 지도자는 그렇게 가르쳐야 하고 백성들은 그렇게 배워서 가나안의 모든 삶을 그렇게 살아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시작을 요단강을 갈라서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모든 일에 이렇게 길을 내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맛보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그를 위해 3일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자기 경험과 방법을 버리고 자신을 성결하게 하며 하나님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왜 기적이 없습니까? 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합니까? 내가 하나님보다 앞서고 말씀보다 앞서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지 않고 죄와 욕심으로 복잡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녁,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