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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 만공월면 덕숭산 머물며 선풍 올곧이 세운 ‘대 자유인’
불교에서 달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능엄경>에는 “달을 보라고 하니 손가락을 본다”는 구절이 나온다. 부처님 가르침은 깨달음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강을 건너면 뗏목이 필요 없듯 정각을 성취한 수행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전월사(轉月舍). ‘달을 굴리는 집’이란 뜻이다.
경허스님 법맥(法脈)을 계승한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스님이 만년(晩年)에 머물던 곳으로, 선지식의 경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불교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자유자재하게 살았던 만공스님 처럼 눈이 내려앉은 덕숭산을 찾았다.
덕숭산 머물며 선풍 올곧이 세운 ‘대 자유인’
김좌진 장군과 인연 깊어
○… 만공스님은 홍성 출신의 김좌진 장군과 각별하게 지냈다. 18살 차이가 났지만 조선독립이라는 공통된 소원과 열린 마음을 지녔기에 의기투합했다.
‘갈미 김씨’ 불리는 김 장군 집안은 선대에 스님들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 우호적이었다.
<사진> 덕숭총림 정혜사 능인선원 앞 눈 쌓인 만공대. 만공스님이 좌선하던 곳이다. 만공대 오른쪽으로 스님이 주석한 금선대가 있다.
이런 인연으로 만공스님과 김좌진 장군은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 막역했다. 덕숭총림 수좌 설정스님은 “두분은 정신적인 면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장사였다”면서 은사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교자상을 놓고 마주 앉았다. “오늘은 힘 한번 시험 하시죠” “소승이 무슨 힘이 있겠소.” 장군이 앉은 자리서 상을 뛰어 넘었다. 스님은 “대단하시네요”라고 칭찬했다. “저도 했으니, 스님도 한번 해 보세요” 사양하던 스님은 가부좌인 채로 몸을 날려 장군 뒤에 가서 앉았다.
홍성에 구전되는 또 다른 이야기. 이번에는 팔씨름으로 힘을 겨뤘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일어나 보니 방구들이 꺼져 있었다. 설정스님은 “힘내기를 했다기 보다는 두 분이 친분을 나눴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말했다.
간월암 복원 불사로 독립 염원
총독부는 이장 비용을 스님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복원을 허용했다. 벽초스님에게 소임을 맡기고 복원에 들어갔다. 수덕사를 오가며 복원 불사를 지도했던 만공스님이 불사를 회향하는 날 지은 게송은 독립을 염원했던 간절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한글풀이는 설정스님.
“불교 망친 총독 지옥에 있다”
“절대 세상에 나서지 말라”
○… 만공스님이 원적에 든 1946년은 해방 직후로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좌익 활동을 했다. 일본 예술대학을 나온 상좌인 중은스님도 그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세상에 나서지 말라”는 의미로 거듭 중(重)과 숨을 은(隱)을 넣은 법명을 지어 주었다. ‘거듭거듭 숨으라’는 의미였다.
이 같은 당부에도 은사스님 입적후 세상에 나온 중은스님은 한국전쟁 당시 목숨을 잃었다. 정혜사 앞 만공탑을 디자인 한 인물이 바로 중은스님이다. 당시로는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 깨달음 이룬 봉곡사 범종.
좌우 대립의 희생양이 된 상좌가 디자인한 만공탑에 들어 있는 세계일화는 생전에 무궁화를 이용한 근화필(槿花筆)을 즐겨 쓴 만공스님 친필이다. 설정스님은 “모든 생명은 차별 없이 하나임을 꽃에 비유한 것”이라며 세계일화 의미를 설명했다.
일제는 집요했다. 주지 정동산스님을 압박했지만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만공스님을 잡아갈 수밖에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수시로 협박을 일삼자, 동산스님은 만공스님의 안위를 걱정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저 사람들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결국 정혜사 종은 덕숭산 상봉으로 옮겨져 한티고개(광천리) 쪽으로 던져졌다. 마지막까지 시봉한 원담스님
스님은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초당(草堂) 옆 솔밭에서 다비를 모셨다. 설정스님은 “덕숭산 가풍은 경허.만공선사도 그렇지만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공연히 상 내고 요란 떨지 말라는 것이 어른들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수덕사=이성수 기자 ■ 행 장 ■ 정체성 확립 ‘앞장’
1871년 3월7일 전북 태인(정읍) 출생. 세속 이름은 송도암(宋道巖). 13세에 김제 금산사, 전주 봉서사, 논산 쌍계사를 거쳐 계룡산 동학사에서 진암(眞巖)스님 문하서 행자로 생활했다. 이듬해인 1884년 10월 경허스님 권유로 서산 천장암 태허(泰虛)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사진> 서산 천장암에 있는 만공스님 사진.
1904년 입전수수(入廛垂手)하기 위해 북녘으로 향하던 경허스님을 서산 천장암에서 만나 전법게와 법호 만공(滿空)을 받았다. 1905년 수덕사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수행하며 수좌들을 맞이했다. 1933년부터 유점사 금강선원과 마하연 선원 조실을 지냈으며, 1935년 5월 마곡사 주지로 추대됐다.
만공스님의 친필 ‘世界一花(세계일화)’
[출처 : 불교신문 2391호/ 2008년 1월30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