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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지식 스크랩 가야금을 만들어낸 우륵
luvseul 추천 0 조회 65 12.01.18 13: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비단치마저고리에 가야금을 휘감고 고운 손을 물결치듯 놀려가면서 부르는 여성들의 맑은 목소리, 이것은 참으로 신비경입니다. 우리나라 어디서나 가야금의 우아한 선율은 흥겨웁게 울리고 거기에 맞추어 부르는 민족고유의 노랫가락은 저절로 어깨가 들썩이게 합니다.

 

과연 가야금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그대로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야금을 만들어 나라의 음악발전에 기여한 우륵은 6세기 가야국의 뛰어난 음악가입니다. 그는 이름 있는 작곡가였고 무용에도 조예를 지닌 예술가였습니다. 우륵은 생애의 전부를 음악창작에 바쳤고 음악 후비를 교육하는 등 나라의 예술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6세기 전반기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민족음악전통이 형성되는 시기입니다. 4세기경에는 고구려의 음악가 왕산악에 의해 거문고가 개작되었고 5세기경에는 백결이 이를 이어 나갔습니다. 6세기경에 이르러서 우리 음악은 독자적인 예술의 한 부분으로 제 얼굴을 드러내면서 그 전통이 이룩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나라들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륵은 그 출신자체가 인민들 속에서 나왔으므로 생애와 출신에 대해서는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대를 이어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륵은 낙동강유역 가야국의 성열현이라는 곳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남달리 음악에 깊은 뜻을 두고 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를 좋아 했고 그 어떤 소리도 그냥 스치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도 노래로 받아들였고 물을 길러 동이를 이고 우물에 모여선 여인들의 맑은 웃음소리도 노래로 귀에 담았습니다.

 

우륵은 조상들이 이미 이룩한 음악의 성과들을 익혔으며 자기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에 지혜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우륵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우수한 음악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려한 강토와 그 속에서 아름답게 피어나는 인간들의 생활을 마음껏 담을 수 있는 음악적 수단과 방법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으며 가야금을 만들어 내는 일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는 그때 널리 이용되던 슬(13줄)의 부족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수년간 고심어린 노력으로 마침내 오늘날 가야금이라고 부르고 있는 악기를 만들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 시기 우륵이 만든 가야금은 인민들 속에 널리 퍼졌고 비파와 함께 기본현악기의 하나로 일러지게 되었습니다.

 

가야금을 완성한 우륵은 사랑하는 제자였던 니문과 함께 자신이 작곡한 곡들을 타면서 수십 년 간 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녔다고 합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우륵은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 가야금을 탔으며 가난한 그들의 살림을 동정하여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이러한 방랑생활과정에 우륵은 자신과 꼭 같은 천민들의 처지를 절감했고 그에 뜨거운 동정을 보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하층백성들의 절절한 감정을 선율에 재현시켜 가야금에 담았으며 흥겨운 노동 속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와 춤을 음악적 언어로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삼국시기악지?에 의하면 우륵은 가야금곡으로서 12곡을 창작했는데 그것은

 

?하가라도,상가라도,보기,달기,사물,물혜,하기물,사자기,거렬,사팔혜,이사,상기물?

 

등이다.

 

우륵이 뛰어난 재간을 가진 음악의 명수라는 소문은 신라의 여러 지방에까지 퍼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진흥왕에게까지 미치었습니다.

 

진흥왕은 우륵을 받아들여 국원에 안착시켜 살게 하면서 법지, 계고, 만득을 붙이어 가야금음악을 전수하도록 했습니다. 우륵은 여기서 창작활동과 함께 후대양성에 적지 않은 힘을 들였습니다. 그 세 사람은 각기 소질에 따라 가야금, 노래, 춤을 배웠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인재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은 우륵이 이미 가야에서 창작한 열두 곡 중에서 열한 개 곡까지를 익혔는데 서로 의논하기를, ‘이 음악은 번잡하고 또 음탕하여 아악과 정악으로 될 수 없다.’고 하면서 합심하여 다섯 개 곡으로 완성했습니다.

 

처음 우륵은 곡들을 다시 편성하자는 말에 성을 내었으나 그들이 만든 다섯 곡을 들어보고는 감탄했다고 합니다.

 

“흥겨운 감을 주면서도 방탕에 흐르지 않았고 애달픈 맛이 있으나 비애조로 되지 않았으니 과연 성악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대들은 임금 앞에서 이를 연주케 하라.”

 

그러던 어느 봄날 우륵과 그의 제자들은 왕의 부름을 받고 하림궁에서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계고는 가야금을 뜯고 법지는 노래를 불렀으며 만득은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음악연주회에 참석하여 왕의 곁에 붙어 앉았던 한 간사한 신하가 진흥왕에게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저 가야금에서 울려나오는 음악은 가야국을 망친 음악이니 장려할 수 없다고 보나이다.”

 

수염을 싹싹 내리쓸며 두 손을 매만지면서 왕의 비위를 맞추어보려는 신하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륵은 통분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왕 앞에 나서서 자기의 생각을 주저 없이 아뢰었습니다.

 

“대왕님, 우륵이 아뢰나이다. 말로나 행동으로 감히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나 슬픔을 전하거나 토로하자고 한 것이었으니 그것이 어찌 나라쇠락의 근원으로 되겠나이까?

 

음악이 나라의 쇠락과 멸망의 근원으로 된다면 이 세상에 성하는 나라에는 음악이 없을 것이고 망하는 나라에만 음악이 있어야 할 것이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음악에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려있다고 보나이다. 흥하는 나라에선 음악을 바로 쓰고 망하는 나라에선 음악을 바로 쓰지 못할 뿐이라고 보나이다.”

 

누구도 감히 어쩌지 못할 사리 정연한 우륵의 논거에 왕도 감동되어 두 손을 내저었습니다.

 

“네 말이 옳거니, 가야가 망한 것은 가야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정사를 바로 못한 탓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러니 어찌 나라의 태평과 어지러움을 음악에 달려있다고 하겠느냐!”

 

왕은 우륵의 말대로 음악에는 죄가 없다하면서 간사한 신하를 돌아 보았습니다.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그를 조절 억제하도록 한 것인바 나라가 태평하고 어지럽고 하는 것은 음률과 곡조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말을 꺼내었던 신하는 그만 머리를 푹 숙이고 말았습니다.

 

왕은 우륵과 제자들이 작곡해낸 것을 나라의 주되는 음악으로 삼았습니다.

 

그 후 가야금곡은 궁중음악으로 되었고 하림조, 눈죽조 등 두 개의 조가 생겨나 모두 185개의 가야금곡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궁중에 있으면서도 우륵은 나라의 높고 낮은 산 언덕에 오르기를 즐겼으며 그 속에서 재능 있고 근면한 백성들의 소박한 생활을 가야금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버들방천에 앉아 열정에 넘쳐 가야금을 뜯음으로써 아름다운 노랫가락을 이 마을, 저 마을로 실어 보냈습니다.

 

여기에 우륵의 인간됨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우륵과 함께 궁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만득의 가슴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가야금을 만들어내어 온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둘도 없는 스승인 우륵이 자기의 외동딸을 며느리로 삼겠다니 이 어인 일이냐? 자신과 같이 보잘것없는 악공의 딸에게 귀한 아들을 장가들이겠다니 예상치도 못했던 경사였습니다.

 

얼마 전 자기 집에 우연히 들렸던 그가 다 큰 딸을 보고는 인물맵시와 예의범절에 깊이 탄복하고 오늘아침 정식 청혼해왔습니다.

 

“우리 서로 사돈이 됨이 어떠하오. 우리 애 녀석과 집의 딸이 내보기에는 짝이 될 것 같은데.”

 

“아니, 황송하기 그지없나이다.”

 

만득은 이 좋은 자리를 놓칠까 두려워 한시바삐 딸과 의논하여 곧 성례를 치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만득은 집에 들어서자 바람에 이 기쁜 사실을 부인과 딸에게 전하면서 어서 빨리 준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웬 일인지 딸은 기뻐할 대신 금시 수심에 잠겼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아버지 앞에 나섰습니다.

 

“아버님은 저더러 언제나 사람은 도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옵더니 오늘은 어찌하여 소녀를 다른 곳으로 시집가게 하시나이까?”

 

딸의 말에 만득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우륵의 제자들인 만득과 법지는 동갑이었는데 그들 둘은 장가도 같이 들고 신통히도 자식까지 같은 날에 보게 되었습니다. 만득은 딸을 낳고 법지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기쁜 나머지 그날에 혼사까지 정해 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법지의 내외간은 불행하게도 몹쓸 병을 만나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은 노비로 사는 여인이 하도 불쌍하여 데려다 길렀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뒷날 그 아들은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득은 친우의 우정도, 그때에 맺었던 사돈도 다 잊어버리고 이미 법지의 아들을 사위로 제쳐놓은 지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딸은 오늘까지 그 일을 잊지 않고 아버지의 친분을 지켜 새삼스럽게 그 일을 들고 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달래고 얼리어도 또 욕으로도 막무가내었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말을 따를 수 없나이다. 우륵의 아드님으로 말할 진대 인물도 잘나고 재간 또한 당할 이가 없으니 그런 분이 제 아니고 다른 처녀를 구할 수 없겠나이까?”

 

아버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딸의 말이 옳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고이 기른 외동딸을 어찌 법지의 병신자식에게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딸은 눈썹 한 오리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 못 보고 말도 못하는 병신이기에 절대로 홀로 세상을 마치게는 할 수 없나이다.”

 

만득은 큰 소리를 쳐댔습니다.

 

“벗의 도리도 도리지만 부모자식간의 도리라는 것도 있지 않느냐? 이건 우륵선생과 결말을 맺은 혼사이니 이제는 달리 할 수 없느니라. 당장 몸단장을 잘하여라.”

 

이튿날 아침 궁궐에 나가 일을 보다가 딸의 거동을 살피러 들어가 본 만득은 그만 깜짝 놀라 기절초풍할 지경이었습니다. 딸의 삼단 같은 머리채는 간 데 없고 그 예쁜 얼굴은 금시 얽은 것처럼 검은 점으로 뒤덮여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을 형편이었습니다. 딸 필란이는 간밤에 제 몸을 이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꼴을 보면 총각도, 우륵선생도 혼사를 물리겠지. 아버님은 내가 잘되기를 원하여 법지의 아들을 그만 두라 하지만 그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만득은 부들부들 떨면서 딸을 그러안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장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 대궐로 다시 나간 만득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우륵은 그의 어깨를 가벼이 짚었습니다.

 

“아니, 갑자기 몸이라도 편치 않아 그러오?”

 

“아니오이다. 글쎄, 글쎄, 세상에…”

 

만득은 그 사연을 눈물로 이야기했습니다.

 

전후사연을 듣고 한동안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기었던 우륵은 심중한 어조로 되뇌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일을 저지를 번했소. 친우의 도리를 저버릴 번한 것도 큰일이지만 우린 음악을 하는 사람들로서 더 좋은 노래를 지을 수 없고 더 훌륭하게 가야금을 탈 수 없게 될 번했소.

 

친구의 도리를 어긴 우리가 노래를 지은들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으며 또 남의 행복을 앗은 우리들이 가야금을 탄들 백성들의 경탄을 어찌 자아낼 수 있단 말이요. 어서 빨리 두 젊은이의 성례를 잘 치르기오.”

 

우륵은 곧 옛 제자인 법지의 아들과 만득의 딸의 혼례를 치르자고, 이 경사에 자기도 한몫 끼이겠다고 나섰습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 위에도 꽃이 핀다더니 필란의 극진한 지성에 법지의 아들은 칠년 만에 앞을 보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낭군을 구완하는 과정에 좋다 하는 약물이란 약물은 다 대리면서 맛을 보니 필란의 얼굴도 예전같이 예뻐지고 머리채도 치렁치렁 늘어졌습니다.

 

법지의 아들은 장인인 만득에게 거듭 절을 했습니다.

 

“아버님이 도리를 지켜 저에게 필란을 주어 돌봐준 은혜 황공할 따름이옵니다. 아름다운 노래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인간의 도리를 굳게 지키시는 아버님의 마음이 아마도 하늘을 감동시켜 저를 구해 준 것 같소이다.”

 

그는 거듭 절하며 뇌었습니다.

 

만득은 그만 쑥스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이 광경을 그윽이 바라보던 우륵이 나섰습니다.

 

“내 평생 내 가야금이 내는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더니 도리를 지켜 가는 필란의 마음은 참으로 노래보다 아름답구나. 내 오늘 노래가 아름다워야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워지기보다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워야 노래 또한 아름다워짐을 다시 한번 느끼는 바이로다.”

 

우륵은 두 젊은이를 오래도록 두드려 주며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원했습니다.

 

이렇게 우륵은 진실을 노래에 담으려 했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실으려 했습니다. 하기에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사랑했습니다.

 

인민의 음악가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은 깨끗한 것이었습니다.

 

충주의 ?월락탄?은 우륵이 유람한 곳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고 견문산에 있는 ?탄금대?는 그가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우륵은 전 생애를 통하여 참된 음악을 창조하기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가 초기에 지었다는 곡명만 보더라도 열두 곡 중에서 세 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야국의 지방 고유의 명칭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륵의 창작이 백성들의 생활과 나서 자란 고향의 자연풍토와 연결된 고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륵이 이룩한 모든 성과들은 나라의 음악발전을 공고히 하고 풍부화한 것으로서 그 공로가 큽니다.

 

5~6세기에 벌써 가야금 대합, 중합 등 기악곡들이 창작되고 널리 퍼졌다는 사실은 16세기에 들어와서야 기악의 독자적인 형성이 이룩된 서유럽나라들과 비해 볼 때 발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야금의 연주

 

 

 


    
    침향무(沈香舞) / 황병기님 가야금 연주
    
    주옥같은 창작 가야금 곡을 발표해서 음악애호가들의 
    귀를 국악으로 돌려놓은 황병기, 그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며 가야금연주자로 손꼽힌다. 1963년 가야금독주곡 <숲>을 작곡하여 창작 가야금 곡의 새 장을 연 이후 새로운 조현법과 주법을 사용한 <침향무>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황병기의 학력은 가야금과는 전혀 무관하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나온 
    그의 학력 어디에서도 가야금과의 연관성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국립국악원에서 김영운, 김윤덕, 
    심상건과 같은 당대의 가야금 명인들로부터 가야금을 배웠고 
    전국 국악콩쿠르에서 2회나 최우수상을 탄 경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면 의문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6.25 동란의 어려운 시기에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와 
    가야금을 배운 인연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도 
    전공과는 거리가 먼 음악대학 국악과 강사가 되므로써 
    가야금과 함께하는 그의 여정은 화려하게 꽃피게 된다.
    
    한국인 최초로 해외에서 레코드를 출반하여 
    미국의 오디오지 '하이파이 스테레오'로부터 
    "현대인의 정신을 해독시키는 음악"이라는 
    평을 받은 그의 경력은 다채롭다.  
    
    1965년 6개월간의 미국 순회연주, 74년 3개월간의 유럽 순회연주, 
    그리고 86년 미국 카네기홀 독주회 등 수많은 연주회와 
    한국과 미국에서의 레코드 취입을 통해 가야금의 아름다움을 
    국내외에 알렸고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65년에 국악상, 
    75년에 한국영화음악상, 92년에 중앙문화대상을 수상하였다. 
    
    새로운 음의 세계를 추구하면서도 우리다움을 잃지않은 
    그의 음세계에 관해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서양음악이 벽돌이라면 동양음악은 소리 하나 하나를 
    정원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서양곡은 벽돌을 쌓아가듯이 작곡하지만, 
    동양곡은 정원에 돌을 배열하는 기분으로 만들지요. 
    돌 하나 하나의 모습, 즉 소리 하나 하나가 어떻게 
    오묘하게 변하는가에 귀가 열려야 
    우리음악의 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소리 하나 하나의 오묘한 변화는 
    전통음악의 농현과 퇴성 그리고 전성과 추성 등의 주법에서 
    얻어지는 미묘한 음의 변화와 그로 인한 곡선의 
    부드러움과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로운 음의 세계를 추구한 <침향무>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는 조선조 후기음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 
    <침향무>를 작곡하였는데 '신라 무용인들에게 
    작곡을 위촉받았다면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74년에 작곡된 <침향무>는 새로운 조현법과 주법에 의한 
    이국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 때문에 발표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조의 가야금산조와는 다른 새로운 음계를 선보인 
    <침향무>는 1장에서는 전통적인 장단과 선율로 동양화와 같은 
    깊이 있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펼쳐지고  
    
    2장에서는 분산화음으로 서역의 이국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킨 후 오른손의 스타카토를 반주로 
    왼손에 의한 서정적인 가락이 노래하듯이 흐른다.  
    
    3장에서는 이 곡의 제목에 나타나듯 침향이 서린 속에서 
    춤을 추는 듯한 분위기의 휘모리 가락이 
    왼손의 화음을 타고 환상적으로 전개된다.  
    
    정열적으로 진행되던 선율이 갑자기 멈춘 다음 
    이어지는 트레몰로는 이전까지는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연주법으로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점차 커지며 
    긴장감을 주다가 다시 피아니시모로 약해진다.  
    
    약해진 소리의 여음이 사라질 즈음에 이어지는 영롱한 분산화음은 
    이전까지의 혼돈을 일시에 잠재우는 천사의 날개짓을 연상시킨다.  
    
    혼돈과 해결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3장의 이 부분이야말로 
    침향무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된다.
    침향무가 실린 음반은 79년도에 성음에서 발매된 뒤 
    스테디셀러로 자리하며 국악애호가를 늘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황병기를 감성의 작곡가라고 부른다. 
    
    정원석같은 소리를 오묘하게 엮어나가는 그의 작품을 
    듣고 있노라면 논리적인 구조에 앞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롱한 음색으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면서 펼쳐나가는 
    그의 이야기는 현대인의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며 달래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음악의 보존과 함께 국악이 발전하려면 
    좋은 창작곡들이 많이 나와야한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줄 주옥같은 가야금곡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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