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인도양보다 험난하다는 행정의 바다를 건너셨군요. 축하합니다.’ 임시국적선박증서를 받았다는 소식을 가까운 분들에게 알렸더니, 모 대학 교수님께서 이렇게 축하해주셨다.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세일요트를 사서 한국으로 항해하거나 운송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모두 해당국 주재 한국영사관에서 임시국적선박증서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번 항해를 준비하면서 한국의 지방해양수산청에서 이메일로 발급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아직까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부 24에는 인천지방해양수산청에 신청한다고 되어 있지만 전화번호부터 없는 번호로 나온다. 정부에서 준비해 두었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3시간 40분 떨어진 바스토 산살보의 마리나스베바에 있다. 만약 영사관에 가야 한다면 일처리에 이틀은 족히 걸린다.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누구든 자신이 한국에 선적을 둘 곳 지방해양수산청에 자료를 이메일로 전달하고 담당관과 상황을 조정해 가며 서류를 발급받으면 된다. 아주 상식적이다. 나는 이런 자료를 세일 요트 하시는 분들께 공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상은 좀 다르다. 위에 교수님의 말씀처럼 인도양보다 험난하다. 비상식의 블랙홀이다.
일단 이런 일이 많지 않으니 공무원 분들도 잘 알지 못한다. 엔진달린 세일요트가 범선인가? 기선인가? 추진기가 어떤 방식인가? 범장의 종류는? 슬루프가 뭔가? 이런 것을 하나하나 공무원 분께 알려 드려야 한다. 또 신청서에 총톤수를 적어야 하는데, 유럽에서는 Displacement(배수톤수)를 쓴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청서의 총톤수는 Gross Tonnage 다. 물론 배를 수입할 때는 그냥 외국 서류에 적힌 대로 옮겨 쓰긴 하지만, 총톤수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니 이걸로 3일을 허비한다. 이탈리아에 총톤수를 물어보니 뭔지 몰라 답변이 없다.
이렇게 5~6일이 지나가고, 서로 시차가 있으니 나는 매일 새벽 2~3시에 일어나 서류를 확인하고, 현지시간 오전 9시부터 이탈리아 브로커와 선주에게 필요한 서류를 보내달라고 한다. 그래서 보내면, 물론 이탈리아어를 해독하는 공무원은 당연히 별로 없다. 보내나마나한 서류다. 물론 나만 고생한 게 아니라 처음 보는 요트 용어에 기괴한 이탈리어어 서류에 담당관도 엄청나게 고생했다. 담당 공무원도 서류 발급을 위해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확인하는 거다. 유럽에서 배를 사서 세계일주 항해를 하려면 이런 험난한 행정의 바다를 건너야 한다. 미안한 것은 담당관도 나의 항해 중, 뜻하지 않게 행정의 바다를 함께 건너는 크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가의 녹을 먹는 일은 결단코 만만치 않다. 이 글을 빌어 고생해 주신 담당관께 다시 감사한다.
항해용품점을 검색하다 인근 20Km 지점의 테르몰리에서 하나 찾았다. 오전에 돌체비타500을 몰고 달려갔다. 해양용품점이라기보다는 그냥 낚시가게인데, 보트 용품이 좀 있다. 마린 배터리나 리깅용 밧줄이 구비되어 있다. 찾던 것은 스위블스냅샤클. 한 개에 10유로다. 그것도 전부 4개밖에 없다. 고무보트를 고정할 때 쓸 것이다. 몽땅 산다. 조리슬리퍼 두 개와 함께 사니 무려 6만원. 요트 용품 사기가 두렵다.
물건을 차에다 두고 테르몰리 마리나로 갔다. 넓은 주차장과 해양경찰소가 있고, 거대한 클래식 범선들이 육상계류장에 있기에, 잔뜩 기대하고 갔더니 아주 작은 마리나다. 마리나 클럽하우스도 50미터 가량 건물 한 동이다. 잠시 촬영을 하고 음악소리가 들리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본조르노. 카운터 아가씨가 반겨준다. 한쪽 구석에는 이탈리아 노인네 세 분이 앉아 열심히 손짓을 하며 이야기 중이다. 에스프레소도 맛나고 빵도 맛나다. 서비스로 준 샌드위치도 맛나다. 뭔가 유럽의 바닷가 분위기가 물씬 나는 작지만 멋진 카페. 리나는 곤하게 잠들었다. 이런 곳에서 늙어 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노년을 맞이하는 것이 후회 없을 삶일까? 물론 나는 강릉의 바닷가에서 머물며 신토불이로 늙어갈 게 분명하다.
잠시 후 이탈리아 할머니 몇 분이 들어오자, 다들 동네 친구 분들인 듯 이탈리아 할아버지들이 카운터로 몰려온다. 콧구멍만한 카페는 엄청난 웃음소리와 왁자지껄 소음의 도가니가 되어 버렸다. 우리가족은 이 소란 통을 피해 얼른 바를 나왔다. 늙었지만 청춘에 머물러 사는 분들이다. 건강한 노년이다.
테르몰리에서 일찍 돌아오기 아까워 바닷가를 슬슬 드라이브하다 숨이 딱 멎는 풍경을 보았다. 우리는 즉시 차를 돌려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해안의 오래된 성곽아래 나무로 만든 아슬아슬 작은 제티(jetty : 육상에서 바다로 다리처럼 뻗은 구조물) 가 있다. 제티 끝에는 허름한 통나무집이 있는데, 그 아래엔 작은 카누가 있다. 어떻게 저런 집에 허가가 날까? 저런 집에는 누가 살까? 우리 부부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한 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 오두막 뒤로 에메랄드 및 아드리아해가 넘실거리고 있다. 저 집에서는 물만 마셔도 커피나 위스키 향이 날 것만 같다. 이런 건 영원히 잊지 못할 장면. 여행의 고단함이 단숨에 보상 받는 순간이다. 부러운 것은 저런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