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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0월15일 주일오전설교
성경합독: 이사야19장, 사도행전3장
성경낭독: 창세기11:1-9절
설교본문: 사도행전2:1-13절
설교제목: 약속하신 성령하나님의 강림
예배찬송: 143장(시47편), 353장(시131편), 60장(시23편), 357장(시134편).
창11장 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행2장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오순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였습니다. 오순절이 얼마나 큰 절기였는지는 9절 이하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열국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해지는 것은 왜 성령하나님께서 곧바로 임하지 않으시고 시간의 뜸을 들이셨다가 오순절에 강림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이 지난 이 날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킨 이후 50일 째 되는 날에 율법을 받았던 날과 같은 날입니다. 돌비에 새겨진 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심비에 계명을 새기신 날이 바로 오순절의 성령강림입니다.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이 주어졌지만, 주님의 구속의 성취이후에 임한 성령의 강림은 온 열국에서 올라온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도록 부어졌습니다. 오순절은 그야말로 막대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때였고 주님의 구속의 성취와 은혜의 복음의 증거오 부여 지는 성령의 역사로 증거 하기에 너무도 적절한 시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열국의 사람들에 의해서 유대 뿐 아니라 온 세상의 후미진 곳까지 복음이 증거 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1. 바람소리와 불의 혀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절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셨다는 것을 부여주시는 가장 첫 번째 현상은 ‘바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사를 알아보는데 너무도 우둔하기 때문에 제자들의 감각과 경험을 일깨워주셔야 했습니다. 드러나고 경험되는 현상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제대로 감지하지도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강한 바람소리가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안에 가득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소리’에 강조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바람으로 등장한 것은 성경 여러 곳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으로 바꾼 일에도 크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빚어진 이적이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에는 ‘폭풍’(왕상19:11-12)을 통해서였습니다.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셨다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예비적인 조치였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는 연약한 제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 역시도 연약한 교회 공동체를 위한 자비였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어떤 현상이나 징조가 없이도 자신의 뜻과 복음을 전달하시는데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를 보내신 것과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을 나타내심으로 성령강림을 확고하게 확신하고 확증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과 더불어 눈에 보이는 세례와 성찬으로 허락해 주심으로 은혜를 확신할 수 있도록 방편을 주심과 같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을 때 그들의 마음에 발생한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하시기 위해 주신 정서가 두려움과 겸손입니다.
교만하고 자민만만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은혜를 베푸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상대해 주시기는커녕 물리치십니다.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심으로 은혜를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성령하나님은 삼위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그 자체로는 결코 파악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바람이 부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를 차용해서 성령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하나님을 ‘혀’의 모습으로 기술 된 것은 이곳이 유일합니다. ‘불의 혀’라는 표현을 통해서 앞으로 성령강림을 통해 사도들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사역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했고 어눌했던 사도들의 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불같이 선포되고 증거 될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은 말씀이 지닌 효력을 의미합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말에 효력이 없다면 허무하고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사도들의 혀에 더해진 성령의 불은 세상의 허망한 것들을 다 불살라 버리고 만물을 정결케 하고 성결하게 만드는 불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도록 역사할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을 부어주셔서 반대하고 저주하고, 적개심을 가진 험난한 도전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전하는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변화시키고 천국을 열망하고 주를 사모하게 만드는 심령으로 바꾸게 하실 것이었습니다. 말씀의 능력은 사도들 시대 한 번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주님은 성령의 역사로 교회와 강단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효력 있는 은혜를 베푸시고 계십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그들의 혀를 갈라놓으셨다는 뜻입니다. 오순절에 올라온 유대인들은 당시 전 세계에 해당되는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람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라틴어, 아프리카 지역 뿐 아니라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라비아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언어를 갈라놓아 다양하게 갈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악하고 불경건한 인간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이키시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기 위해 사도들에게 다양한 언어들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충만의 결과가 즉시 나타났는데 온 세계로부터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사도들이 다른 언어, 즉 외국어로 말하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며 보잘 것 없는 배움은 물론이고, 다른 언어를 배운 일이 없었지만 라틴어와 아라비아 언어와 아프리카언어까지 구사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모국어가 아니라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의 난 곳 방언, 외국어로 전했습니다. 성령강림의 뚜렷한 증거로 외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던 일로 놀라운 일이며, 이적이었습니다.
2. 어찌된 일이냐
5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들이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 한 때는 천하 각국으로부터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였습니다. 외국에 제대로 가 본 일도, 배운 일도 없던 사도들이 외국어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큰 무리가 모여서 이것을 듣고 소동이 났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기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갈릴리 사람인데, 우리가 태어난 고향, 외국어로 듣게 되기 “어찌된 일이냐”라고 반응하고 있습니다. 성전 되신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깨뜨리시고 구속을 성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시의 성전은 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는 성전은 여전히 오실 주를 기다리며 예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강림과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 한 이 일은 세계적인 일이며, 매우 놀라운 일이라는 점을 누가는 여러 나라들을 들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각각 다른 시간대에 다른 장소에서 사도들이 다른 언어로 복음을 말했다면, 대단한 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던 곳에서 다른 언으로 말하는 이적이 일어남으로 사람들은 이적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9-11절을 다시 봅시다.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이토록 광범위하게 흩어진 사람들. 인접한 지역에 속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었겠지만 먼 거리에서 온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지만 서로 언어소통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와 아라비아, 카파도키아와 트라키야까지 먼 거리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천하각국으로부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세상의 많은 여러 지역과 나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너무도 먼 지역들에서 모여 들었습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사건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사건인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진 백성들 가운데서도 얼마간의 남은 자들을 보존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멀어졌고 율법도 없어 소경이며 원수 되었던 삶을 살던 이방인들 또한 하나님나라에 합류할 수 있도록 불러내셨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을 향한 대적으로 인해 흩어졌고 분리되었던 인류가 머리되신 주님의 몸으로, 하나님의 하나 된 권속으로 부름 받아 회복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사람들의 언어를 나누어 지면에 흩으셨으나 이제 다시 부르시고 계십니다. 창세기11:6-9절을 봅시다.
6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타락한 인류가 한 족속이 되고 언어도 하나여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똘똘 뭉쳐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나누심으로 사람들 가운데 균열을 만들었습니다. 언어를 나누심은 심판이지만 동시에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분리된 언어 가운데서 한 족속을 택하시고 다시금 천하 만민이 하나로 회복될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불의 혀들이 갈라져 제자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외국어 곧 듣는 사람들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도는 라틴어로, 어떤 사도는 헬라어, 또 어떤 사도는 아랍어로 말하였습니다. 무엇을 말했습니까? 11절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타락으로 죄와 비참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생에게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죄를 사하시고, 부활을 통해 보좌우편에 앉아 통치하시며,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신 일에 대해서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큰일 곧, 복음은 천하만국에서 올라온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조용히 성령강림 때 까지 기다렸던 사도들이 일제히 담력 있게 만국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의 큰일은 선포하였습니다. 복음의 설교와 선포에 대한 반응은 놀람과 조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12-13절입니다.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온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서로서로 물어 “어찌 된 일이냐”며 어리둥절했습니다. 성령의 강림과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고서 일어난 반응에는 경이로움었습니다. 더불어 복음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도들의 말이 쓸모없던 언어들이나 내용들이었다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일 곧,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듣고 배웠던 예언과 약속의 성취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는지를 놀랍게 선포하는 갈릴리 출신의 사도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좋은 현상이고, 성경의 사실을 따라 바르게 알아간다면 생명의 복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과는 정반대의 반응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기이하고 놀라운 이적 앞에서도 사도들을 조롱하였고, 새 술에 취했다고 모독하였습니다. 분별력을 잃은 사람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사악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이적은 마치 하나님께서 눈앞에 드러날 만큼 선명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두려워하지도, 놀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조롱하며 모욕하고 있습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복음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까지도 조롱거리로 만들고자 하는 모습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의 무감각과 생명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눈앞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일조차도 인식되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반응이 발생하지 않을 만큼 교만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오만하게 주의 복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그 때에도 지금도 여전합니다.
사실, 누가가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이러한 반응은 구원의 가망성이 없는 사람들의 소망 없음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이적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이적이 드러날 때에도 하나님을 느끼고, 의식하는 일은 언제나 희귀하였습니다. 잠시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두려움으로 인한 정서로 일시적인 요동이 있기는 하지만 생명의 유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요, 진실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사도들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유효하게 역사하였고, 놀람과 관심으로 복음에 대해 더 알기를 원했고, 생명으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선물로 얻지 받지 못한 오만한 이들에게는 조롱의 재료일 뿐이었습니다. 눈 먼 자들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복음의 말씀으로 주님의 소유된 사람들을 불러내시고 계십니다. 정하신 수가 차기까지 건져내시고 계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