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3:1-21,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 24.1.3, 박홍섭 목사
사무엘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사사 시대 말기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주로 대조 기법으로 서술해나갑니다. 처음의 대조는 엘가나의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의 자식의 유무이고 불임여성 한나를 통해 사무엘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인한 한나의 찬송과 서원 이행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그다음은 제사장 엘리의 가문과 사무엘의 대조로 이야기가 이어지고 엘리는 처음부터 영적으로 둔감한 제사장으로 등장합니다. 기도하고 있는 한나를 술에 취한 여자로 오해하여 포도주를 끊으라고 책망한 것부터 영적 둔감을 드러냅니다(1:13-14). 그 영적 둔감함은 자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착취하여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을 섬기는 여인들을 욕보이는 극악무도한 죄를 범하는데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데서 더욱 두드러집니다(2:22-25). 엘리는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긴 영적으로 비대하고 둔감한 제사장이었습니다(2:29).
이런 제사장 엘리의 집안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대변합니다. 하나님은 한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이런 엘리 집안에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엘리 집안의 부패와 영적 무감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한 진노를 넘어 이들이 대변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는 2:35-36에 언급된 엘리 집안을 대체할 새로운 제사장 가문에 대한 설명에서 잘 드러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엘리 집안을 대신하는 충실한 제사장은 일차적으로는 사무엘이고 나중에는 다윗 왕, 그리고 다윗과 더불어 등장하는 사독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며 선지자이며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고 하나님은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예고하신 대로 엘리 집안의 몰락을 시행하시고 그를 대체할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한나의 기도 응답으로 태어난 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께 바쳐져서 여호와를 섬겼으며(2:11, 18, 3:1), 여호와 앞에서 자라났고(2:21), 여호와와 사람들 앞에서 은총을 받았습니다(2:26), 사무엘이 자라면서 여호와와 사람들 앞에서 은총을 받았다는 이 언급은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킵니다. 그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선지자와 제사장의 중보 역할을 하며 다윗을 왕으로 세우게 된다는 암시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에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말씀으로 찾아오시는데 그때의 상황을 굳이 “당시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라고 밝힙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제사장과 백성들의 영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였다는 2절의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엘리의 시력은 육체의 시력만 아니라 앞에서 일관되게 지적해왔던 둔감한 영적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그 와중에 3절과 4절은 아직 하나님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때에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워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으로 그를 찾아오셨다고 또 다른 대조를 보여줍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등불을 비추겠다는 의미심장한 암시입니다. 이 암시의 정점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던 때에 말씀으로 어린 사무엘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어린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도 엘리가 부르는 줄 알고 엘리에게 달려갑니다.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오랜 제사장의 경험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함에도 세 번씩이나 같은 사건이 반복되자 비로소 알아차리는 엘리의 모습에서 그의 영적 둔감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그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앞서 한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엘리 집안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10-18). 사무엘은 고민하다가 엘리에게 자신이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했고 엘리는 그 말씀을 수용합니다. 사무엘의 선지자 사역이 이렇게 시작되고 하나님은 사무엘과 함께하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간섭하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사무엘이 여호와가 세우신 선지자임을 인정합니다. 이로써 제사장 엘리의 가문이 사무엘로 대체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을 통하여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 백성들에게 선포되기 시작합니다(19-21).
오늘 본문은 말씀이 중단되어 희귀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중단된 말씀이 다시 선포됨으로 시작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집니까? 왜 이상이 막히고 중단됩니까? 백성들이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포해도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면 하나님이 말씀을 중단하십니다. 그러면 말씀이 희귀해지고 이상이 막히면서 제사장이 엘리 가문처럼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고 타락합니다. 제사장의 가문이 무감각해지고 타락하면 백성들도 당연히 그 길을 따라갑니다. 그것이 사사 시대 말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한나를 불임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그의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연단하셨고, 주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실행하는 사람으로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믿음의 서원대로 바친 사무엘에게 때가 되어 말씀으로 찾아오셨고 당신의 뜻을 알리셨고 나타내셨습니다. 그 극심한 혼란과 영적 어둠의 때에 어린 사무엘을 찾아오셔서 말을 거셨던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겉으로 위대한 사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초라한 불임의 여성 한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시고,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다시 말씀하심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초라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흑암과 혼돈과 공허로 뒤덮인 세상이 밝아졌고 보시기에 좋도록 질서가 잡혔습니다. 아담 이후 죄에 빠진 인간이 온 세상을 악으로 관영하게 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노아에게 찾아가서 심판과 구원을 행하셨습니다. 바벨탑을 쌓으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말씀으로 불러 믿음의 조상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체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건지려고 모세를 말씀으로 불러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출애굽 2세대를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 약속의 땅에서 부패하여 타락한 삶을 살고 있는 자기 백성을 회복하고 구원하기 위해 사무엘을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구원 역사를 시행하고 계십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아담에게 찾아오신 것처럼,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사사들에게, 사무엘에게, 다윗에게, 수많은 선지자와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부르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당신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이루고 계십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대속의 사역을 성취하셨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 속에 심겨놓으신 생명의 씨앗에 말씀을 던져 이 어둠의 시대를 밝힐 진리의 불을 붙이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엘리처럼 둔감하게 반응하지 말고,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불신앙으로 대적하지 말고 한나와 사무엘처럼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명하는 대로 힘들고 거북해도 엘리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말씀하시면 종이 듣겠다고 들을 준비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