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일반부 <최우수상>
초록의 점화
박은숙
황철나무로 성냥개비를 만든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초록의 이파리들은
모두 덜 익어 떫은 불꽃 같다.
초여름에 점화되어서 늦가을까지 꺼지지 않는 이파리들은
사실 나무의 집열판들이다.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별
지구도 새파란 풋열매 같다.
도톰한 달걀모양의 작은 이파리들은
조랑조랑 달아놓은 자연의 등잔불 같다.
초록의 이파리로 캄캄한 밤은 밝히지 못하지만
한낮을 밝혀주는 뜨거운
햇빛의 저장고다.
여름, 황철나무 그늘에 누우면 속눈썹 사이로
잘게 부서지며 흐르던 물여울 같은 나뭇가지에서
어떻게 물 흐르는 소리가 나는지 궁금했다.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별이라서
첫 번째, 두 번째, 별에 들렀다 오는 동안
피곤한 햇살의 휴양지 같은 곳이다.
성냥개비 같은 버찌들이 익어가고 있는
산벚나무는 황철나무 군락지로부터
세 번째 나무다.
대학.일반부 <우수상>
나무들의 옷장
최병석
두툼하고 튼튼한 다리를 가진 나무들이
눈앞에서 초록빛 울창한 망토를 갈아입는 순간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무들은 겉으로는 그냥 말쑥한 신사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모르는 깊숙한 곳에 옷장을 두고
나열되는 순서에 따라 하나씩 둘씩 갈아입는 것이 분명하다
설레이는 봄날 알록달록한 꽃무늬 옷을 원 없이 갈아입고
뜨거운 여름날 무수한 초록 옷을 껴입을 수 있는 것은
살랑거리는 가을날 구멍송송 뚫린 옷을 수차례 갈아입을 수 있고
찬바람 흉흉한 겨울날 거울처럼 투명한 옷으로 또 다른 연출을 선보일 수 있는 것은
나무들의 옷장 말고는 까닭이 없다
나무들은 그토록 변화무쌍한 경우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언제고 어느 때고
완변히 준비되어 있는 옷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도대체 그 옷장들을 어디에다 감춰 둔 것일까?
나무들의 옷장이 알고 싶어 몸살이 났다
몸살약을 먹고 나면 그 옷장들이 보일까?
옷장이 보고 싶어 약국으로 달려간다 보일까?
대학.일반부 <장려상>
나무 도시락
서영진
어린 단종이 잠들었다는 장릉 뒤편 숲속에는 물무리골이 있습니다
작은 몸뚱어리가 정말 묻혔을까 사육신이라도 된 듯 시대를 살았던 친구들
6년 내내 소풍의 명소였던 그곳에는 아직도 보물 적은 쪽지가
어느 나무 어느 껍질 틈바구니에 감춰져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소풍 가는 날이면
나이테가 감기듯 김으로 감싸 안은 설렘이 짭조름하게 손끝에 배었습니다
나이만큼이나 두꺼웠을 나이테를 되짚으며 얇게 저며 만든 나무 도시락, 아프다
소리도 없이 노쇠한 손목만큼이나 가늘어진 당신은 더욱 소멸에 가까워진 모습입니다
살갗에 참기름을 펴 바릅니다 꼭지가 베어지기만을 기다리던
아이는 무른 나이테를 가지고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입 안에 넣어주시던 반지레한 손가락에서는 단무지 맛이 났습니다
어깨를 비비며 낑낑 김밥이 놓였던 나무 도시락
나눠 먹은 친구들 얼굴 위로 당신의 미소가 깨처럼 뿌려졌습니다
옹이가 박혔던 자리는 각질처럼 떨어져 나가고
텅 빈 도시락 바닥에는 노랗게 그리움이 베여있습니다
짭조름한 손가락을 빨던 아이는 이제 김밥을 말고 있습니다
단단해진 나이테를 두른 아이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봅니다
고소한 향은 그대로인데 나무 도시락에 담겼던 당신의 미소는
아무래도 물무리골에 남겨두고 왔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