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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성공은 참된 예배의 회복(2289.2025.1.19)
요4:19-26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금년한해 동안에는 예배에 성공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성공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감동, 감화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생이 변화됩니다. 따라서 교회는 전 역량을 집중하여 예배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아야 교인들이 삽니다. 예배가 습관화되고, 형식화되고, 죽어 있으면, 교회도 죽고, 교인인 우리도 죽습니다. 문제는 예배입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삶의 회복이 없습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가정의 회복도 없습니다.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교회 부흥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먼저 저의 마음속에 일어난 질문은 ‘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예배 문제로 귀결되었는가?’하는 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창조자이신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이루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의 신앙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배가 회복되어야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고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의 기쁨과 만족을 얻는 최상의 길입니다. 우리가 무력하고 힘이 없고 나약해지는 이유, 죄악에 끌려다니므로 어둠에 사로잡히는 이유,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의 모든 것은 공급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히4:16절‘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했습니다. 여기에서 ‘때를 따라’로 번역된 ‘유카이론’은 ‘때를 잘 맞춘’, ‘적절한’을 의미합니다. 도움이란 때를 잘 맞춰야 그 효력이 증대되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꼭 필요할 때, 가장 적절한 시기에 최선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도우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도우시되 때를 따라 도우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회복함이 우리 신앙의 회복이며, 축복의 회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영혼의 갈망이 있습니다. 이 영혼의 갈망을 보이는 세상물질로 채우려 하니 끝이 없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은 필요한 만큼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따라 가다보면 물질을 지배해야 할 인간이 물질에 의해 지배를 받음으로 물질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골3:5절‘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이렇게 우상의 노예가 되면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죄악의 어둠이 그를 끌고 다닙니다. 행복할 줄 알았는데 모든 관계가 깨어지면서 기쁨을 상실하고 감사를 상실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수가 성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성을 만나서 그녀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알게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읽어보면, 아주 섬세하게 구성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주 우연한 만남인 것 처럼 보입니다. 시간은 정오쯤이어서 가장 뜨거운 때였는데, 지칠 대로 지친 예수는 우물가에서 쉬고 있었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로 들어간 사이에, 사마리아 여성이 우물가에 나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수가라는 동리에서 물을 길으러 나온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셨습니다. 요4:6절에 보면 그 때가 여섯 시쯤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전12시, 가장 태양빛이 강하게 내리쨀 때 남들이 쉴 시간에 이 여인은 혼자 우물가에 물을길러 나온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예수가 그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는 것으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마치 동문서답처럼 서로 겉돕니다. 현실의 때가 잔뜩 묻어 있으며, 닳을 대로 닳아버린 사마리아 여성이 예수의 깊은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지요. 비록 물과 기름처럼 이질감을 느껴지는 이야기였지만, 예수는 단념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러는 중에 사마리아 여성의 마음이 열리고, 그녀는 자기가 가진 깊은 고민과 자기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간절한 바램을 드러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마리아 여성이 가장 해가 뜨거운 한 낮에 우물가를 찾아 왔다는 것에서부터 좀 심상치 않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하는 여성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예수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사람이기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녀는 혹시라도 이 낯선 사람에게 자기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가 그녀에게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10절)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자기에게 그녀가 관심을 가지도록 하십니다.
그녀는 예수를 다시 보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구인데 나에게 물을 준다고 하는 것인가? 또 하나님의 성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궁금함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우리는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판 이래로 오로지 여기서만 물을 길어서 마시며 살고 있는데요. 여기 이 우물 말고 다른 곳에서 생수를 구하여 오시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혹시 선생님은 야곱보다도 더 위대한 분이신가요’ 그녀는 이렇게 예수에게 묻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러자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은 주님께서 보내실 성령을 뜻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때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생수를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대뜸 여인을 향해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여인은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합니다. 17-18절‘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말하자면 이 여인은 탕녀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여섯 번을 바꿔가며 살아보아도 삶의 참만족을 얻을 수 없었던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자기의 추하고 복잡한 과거를 송두리째 폭로하시는 이상한 유대인을 향해 그녀는 ‘주여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러니까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 대해서 이 여인은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도 자신의 죄악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놀라운 변화가 올 것입니다. 예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이 자신을 사로잡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긴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것은 바로 영혼의 갈망입니다.
20절‘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이 여인이 갑자기 예배에 대한 관심으로 화제를 옮겨 갑니다. 예수님을 만날수록,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분이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그러나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해 의문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디서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장소의 문제를 묻고 있습니다. 물을 길러 온 여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 문제로 관심이 바뀐 것입니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인으로서 그리심산을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성전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자라 온 것입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으냐?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에 대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21-24절‘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르쳐 주시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적합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곧 장소나 의식이나 예식에 중점을 두지 아니한, 마음의 상태에 중점을 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올바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시고, 그들의 예배만 받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여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25절‘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메시아 신앙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하나님에 대해, 예배에 대해 분명하고 충족하게 가르쳐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도 교회만 다니지 말고 정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입니다. ‘아... 나에게도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구나... 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바램은 단 한 번만이라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구나’ 자기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도 그녀는 몰랐습니다. 늘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그러는 동안에 그는 참 비참한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당하고 그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정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어떤 일인지 자기가 수렁과도 같은 현실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도무지 그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물가에서 만난 한 낯선 사나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그녀는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에게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나의 가장 깊은 내면 가운데 있는 소망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소망이라는 것’을 그녀는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오늘 이 차가운 날씨에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은 마치 오래도록 세상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느라고 모든 기력과 삶을 다 탕진해버리고, 지칠 대로 지친 한 나그네의 귀향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치 나에게서 진정한 휴식은 가정뿐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나그네가 오랜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오듯 ‘내가 쉴 곳은 오로지 하나님의 품 밖에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고, 존귀하며 고상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처럼 나의 삶 가운데서 소중한 일은 없어’ 이런 마음이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셨습니까?
사마리아여성에게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비록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여전히 부족한 것 같고... 더 온전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녀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이라는 한계를 무시하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고 싶은 더 정성을 다해서 더 온전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그녀에게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26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지금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네가 그토록 기다리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다’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여인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리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하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전도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니까 영혼구원에 관심을 갖고 동네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 처음에는 유대인이 상종을 꺼려하는 사마리아인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상한 유대인 정도로 알았다가, 다음에는 훌륭한 선지자로 알았다가, 마지막에는 예수를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바로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들중에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성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는 중 예배 문제가 나왔을 때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모든 것, 특별히 하나님께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정확하게 가르쳐 주시리라고 믿었던 메시아, 곧 그리스도 자신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된 예배, 진정한 예배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24절‘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까? 큰 교회에 다니는 한 청년이 한번은 시골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교회는 성가대도 없고 교인도 몇 명 안되어서 도무지 예배드리는 것 같지가 않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상적 예배란 웅장한 교회당과 수천명의 교인들, 성가대의 장엄한 합창이나, 격조 높은 목사의 설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상주에 떡 장사하러 온 어떤 권사가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아이구 우리교회 구역만도 못하네 하고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다닌 교회가 크다고 자기의 믿음도 큽니까?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는 작은 것 같지만 성도여러분의 믿음만은 큰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수없이 드리는 예배속에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창조자, 나의 구원자, 나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 하나님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이 하나님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한 시간을 드려도 이렇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예배할 때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감격과 기쁨,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예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1.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참된 예배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기도하는 중에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스랍 천사들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특별히 성도들이 예배하는 곳에 반드시 계십니다. 합2:20절‘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히11:6절‘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마18:20절‘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배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까? 왜 우리의 예배가 불경건하고 무성의하고 형식적인 예배가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예배 시간에 늦는 분은 항상 늦습니다. 딴 생각을 하시는 분은 자주 딴 생각을 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찬송할 때도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고백임을 생각하고 중심으로 찬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입도 벌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안된 채로 예배를 드립니다.
저는 가끔 상주시장이나 국회의원을 만나러 갈 때 옷을 차려입고 마음준비를 하고 갑니다. 만약 도지사나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준비하고 가겠습니까? 일반적으로 결혼식이나 동창회나 친교모임에 나갈 때는 온갖 정성을 다해 몸치장을 하고 나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올 때면 복장도 아무렇게나 하고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경건한 신자들은 주일에 교회갈 때는 모두가 정장을 하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나갑니다. 일국의 대통령 앞에만 나아가려고 해도 온갖 예절을 다 갖추게 되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왔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은 성도들은 그의 복장부터 앉은 자세, 예배드리는 모습, 마음 자세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거룩한 시간에 ‘오늘 예배 끝나고 누구를 만나야 할 텐데 어쩌지’,‘예배 끝나면 빨리 갈데가 있는데 오늘따라 목사님의 설교가 더 기네’ 이런 딴 생각으로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 오전 예배로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일오후에나 수요일에는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 앞에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예배하는 모습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면서 예배할 때, 보다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2.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한 이사야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함으로서 구원의 문에 들어서는 종교입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할 때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성전에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할 때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피가 없는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듯이, 회개없는 예배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시51:17절‘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아 올 때,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보다는 오히려 한 방울 회개의 눈물을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령하게 예배드리려면 먼저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예배의 성공은 예배 시작 10분전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신령한 예배를 드리시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내가 누구인가를 알면, 내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면,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런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면 그 은혜앞에 감사의 눈물, 회개의 눈물이 나오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대표기도하시는 분들이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병원에 가시는 분은 한결같이 자신의 질병을 느끼고 가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막2:17절‘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주님을 찾는 자들은 이렇게 주님이 절대 필요함을 깨닫고 자신의 죄악을 진솔하게 고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를 덮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의 참 모습을 주님앞에 솔직하게 내어놓고 중심으로 회개하며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주님의 피가 우리를 덮어주실 것입니다. 죄사함의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불러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베드로를 초청하여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 사도가 들어설 때에, 그 앞에 엎드려 절하고 꿇어 앉아서 말하기를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참으로 예배하는 자의 심정입니다.
우리의 전심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는 것이 예배라는 말입니다. 참 예배하는 마음이란 이 시간 나에게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어떤 때는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과 경고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위로와 소망의 말씀도 들어야 하지만, 징계와 심판의 선고도 들어야 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다 들으려고 하는 마음의 준비가 된 사람에게 하나님은 비로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어렸을 때 엘리 제사장을 받들며 여호와를 섬기면서, 하나님의 궤가 있는 전 안에 누워 자는데, 어느 날 여호와께서 ‘사무엘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제사장에게로 달려가서 ‘당신이 나를 부르시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엘리제사장은 ‘나는 너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가서 자거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이 가서 자는데 다시 그를 부르는 음성이 들리고, 사무엘은 엘리제사장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하면,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자라고 합니다. 이러기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엘리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을 깨닫고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침내 네 번째의 부르심이 있었을 때, 사무엘은 엘리제사장이 가르쳐주신대로 했습니다.
사무엘은 엘리제사장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사무엘에게 모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설교자의 말이 아니고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려는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예배하려는 마음이 있는 성도는 주님의 음성에 대한 기대와 갈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 내게 말씀하여 주소서. 주의 종의 듣겠나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명령이 떨어지면 곧 그 명령을 수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종처럼, 성도들은 예배드릴 때 오늘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내게 주실까 준비하고 있다가, 말씀을 주시면 아멘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자세입니다.
4.하나님께 헌신의 결단이 있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을 했습니다. 예배라는 말의 히브리어‘아바드’는 ‘섬긴다, 복종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예배는 곧 헌신인 것입니다. 롬12:1절‘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없는 모든 예배는, 사실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의 선교사 리빙스톤이 공포와 미지의 대륙 아프리카에 개척 선교를 결심한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참석했던 어느 예배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찌 리빙스톤 뿐이겠습니까? 많은 주의 종들, 모든 충성스런 성도들이 다 예배 시간에 헌신을 다짐한 결과일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앞으로 일평생 동안 많은 예배를 드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주일 낮 예배, 밤 예배, 수요예배, 속회예배, 금요기도회, 새벽 기도회, 교회학교, 학생회, 청년회 예배 등등.. 예배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그리고 참되게 잘 드린 예배라고 하면, 많은 예배를 드린 성도들이 하나님을 많이 섬긴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되고 신실한 성도들이라면, 주일낮 예배 한 시간 드리는 것으로 끝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그리고 자주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되어 버리면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1:13절‘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절‘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을 받아야 할 예배가, 오히려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 된다면 이 얼마나 죄스런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가장 큰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예배의 중요성을 망각하기 쉽고, 타성에 젖어서 아무런 의미없이 드릴 때가 많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몸만 왔다가면 예배 드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신자는 물질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알고, 헌금만 하면 예배드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설교만 듣고 가면 예배드린 것으로 생각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모두 다 교회는 왔다 갔으나 예배는 드리지 않고 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예배하는 자가 아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본문 23절‘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찾으시느니라.’로 번역된 ‘제테오’는 ‘집요하게 찾다(seek)’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어떤 것이나 자기와 관계를 맺고 싶은 사람을 성심껏, 마치 수색하듯이 찾는 행동을 말합니다.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적다는 말이 아닙니까?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가 귀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까? ‘찾으신다.’는 것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를 쓰시겠다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인물 좋은 사람도 아니고,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지위 높은 사람도 아니고,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최고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축원합니다. 교회 청소를 잘한다는 칭찬보다는, 봉사를 많이 한다는 칭찬보다는, 한 가족처럼 분위기가 좋다는 칭찬보다는, 전도를 많이 한다는 칭찬보다는, 최고의 예배를 드린다는 칭찬을 받는 상주감리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입니까? 참된 예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는 마음이 있고. 자기의 허물과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눈물이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을 결단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왜 찾으십니까? 복 주시려고, 은혜 주시려고, 응답하시려고, 상주시려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금년한 해동안에는 모두가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함으로 날마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시셔 하나님이 찾으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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