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예수의 이적 일화가 나의 이야기가 될 때
갈릴래아(갈릴리) 호숫가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생각했다.
‘쉼’이란 뭘까.
회사에서 휴가를 받은 뒤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도심의 극장에서 만사를 잊고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별이 쏟아지는 캠핑장에서 바비큐를 하며 자연을 즐기는 것일까.
이 모든 순간에 ‘쉼’이 있을 수도 있다.
또한 이 모든 순간에 ‘쉼’이 없을 수도 있다.
진정한 안식은 몸이 편하다고 생겨나는 게 아니다.
마음도 포맷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식을 누릴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가 회당에서 고친 것이 오그라든 손뿐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가 회당에서 하늘의 속성을 전하며 진정으로 고친 것은
사람들의 ‘오그라든 마음’이 아니었을까.
‘오그라든 손’ 대신 ‘오그라든 마음’을 성경에 대입하면 어떨까.
그러면 멀찌감치 서 있던 예수의 이적 일화가
성큼성큼 걸어와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각자의 이야기가 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예수가 말했다.
“손을 뻗어라(Stretch out your hand).”
영어 성경에서는 ‘Stretch out ’이라는 동사를 썼다.
성경에는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
나는 회당의 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구체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회당의 입구, 그늘진 자리에 내가 앉아 있다.
‘오그라든 손’이 아니라
‘오그라든 마음’을 가진 내가 앉아 있다.
그때 회당 안으로 예수가 들어온다.
나는 예수를 쳐다보고, 예수는 나를 쳐다본다.
눈이 마주친다.
예수가 내게 말한다.
“네 마음을 뻗어라(Stretch out your mind).”
우리의 마음은 꾸깃꾸깃하다.
수시로 구겨진다.
감당해야 하는 온갖 세상사로 인해
마음의 도화지는 구겨진 종이 뭉치가 된 지 오래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구겨진 마음만큼 우리의 삶도 뻣뻣하고 빡빡해진다.
그래서 ‘안식’이 없다.
구겨진 마음에는 안식이 없다.
예수는 그런 우리를 향해 말했다.
“네 마음을 뻗어라.”
구부러진 것을 펴고
오그라든 것을 펴고
접힌 것을 펴라는 말이다.
그렇게 본래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그걸 위해 예수는 다림질을 한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에크테이노(ekteino)’라는 단어를 썼다.
구겨진 것을 ‘펴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가 설한 산상설교의 메시지와 팔복
‘주님의기도’는 모두 다림질이다.
오그라든 우리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다시 펴게 하는 예수의 다림질이다.
성경에는
“(오그라든 손을 가진) 그가 손을 뻗자
다른 손처럼 성해져 건강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해지다’는 영어로 ‘restore’다.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곡(曲, 굽을 곡)’을 ‘직(直, 곧을 직)’으로 바꾸는 일이다.
삶의 이치, 세상의 이치, 우주의 이치에 대한 곡해.
그로 인해 구김살이 생긴다.
구김살이 심해지면
우리의 손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오그라들고
마음이 오그라든다.
결국 우리에게서 ‘안식’이 없어진다.
그래서 곡해를 직해로 바꾸어야 한다.
그럴 때 ‘곡(曲)’이 ‘직(直)’이 된다.
굽은 손이 펴지고, 굽은 마음이 펴진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율법을 깨는 파격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안식 그 자체였다.
이 일화를 통해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진정한 안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되묻는다.
[출처:중앙일보] 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