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조지 A.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
부친인 "조지 A. 테일러"(Taylor, George Alexander,1829-1908)는 1829년 3월 17일 미국에서 출생했다.
그는 버지니아와 알라스카에서 금(金)을 채굴한 경력이 있으며, 1896년 11월, 67세의 고령으로 내한했다.
평안북도 운산(雲山)금광의 "제임스 모스"(James Morse)와
동업자 "레이 헌트"(Leigh S. J. Hunt)의 금광에 한국 최초 채금(採金) 전문가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이 금광은 1896년 미국무역(American Trading Co.)이 광권(鑛權)을 허가받아
동양연합광산(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에 승계되었다.
이 광산은 많은 금이 생산되어 일명 “노다지”로 불렸다.
당시 광산에서 금을 채취하는 모습.
"노다지"란 목적한 광물이 쏫아져 나오는 "광맥"(Bonanza)의 뜻으로 사용 되지만
이 용어는 “운산금광”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
금을 찾아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여 “노터치"(No touch)라고 접근 금지 경고판을 써 놓았는데
이 표시가 금이 많이 나오는 상징으로 오인되고 ”노터치“가 “노다지”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금광은 고종 황제에 의하여 1910년까지 광권(鑛權)이 보호되고,
그 후 총독부도 개입하지 않아 1939년까지 미국인 광산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조지 테일러"는 이 광산에 종사하면서 한국 무역업의 기반을 구축할 정도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1908년 12월 10일 79세로 한국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
"앨버트 테일러"는 1875년 3월 14일. 미국 네바다 실버 시에서
금광 기술자였던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광 기술자가 되었고,
1896년 그는 조선 정부로부터 평안도 운산광산의 채광 허가를 받은
동양합동광업사의 운영책임자였던 아버지 "조지 테일러"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운산금광에서 생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광물의 채광을 담당한 감독자가 됐다.
1908년아버지 조지 테일러가 사망한 후에도 테일러는 조선에 남아
직산광업사에서 기술 및 경영책임자로 일하며, AP통신의 한성 특파원으로도 활동했다.
1912년 "앨버트"는 동생 "윌리엄"과 함께 태평동 2丁目 40번지에 "테일러상회"를 설립한다.
또 고미술품 수집이 취미였던 "앨버트"는 장곡천정(長谷川町)113-1번지(지금의 소공동)에
테일러상회에 속한 사업부 중 하나인 테일러 골동품점을 열어서
조선의 전통 가구나 의상, 도자기, 병풍을 비롯한 고미술품, 여러 전통 공예품을 판매했다.
1916년 준설기 구입을 위해 일본 요코하마에 들렀다가 당시 여러 나라에서
순회공연을 하던 영국출신의 연극배우 "메리 린리"를 극단 단원 파티에서 만나게 되었다.
둘은 요코하마 그랜트 호텔에서 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앨버트가 메리에게 "호박 목걸이"를 선물하며 사랑을 전했다.
엘버트가 부인에게 선물한 호박목걸이.
당시 앨버트는 준설기 구입을 한 뒤 조선으로 가야했고,
메리는 공연을 위해 인도로 떠나야 했기에 앨버트는 이별하기 전
인도로 떠나는 메리에게 자신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둘은 열 달 뒤 약속대로 인도에서 재회하였고,
1917년 6월 15일 인도 뭄바이 성 토마스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여러 항구를 거쳐 조선으로 입국해 신혼생활을 보내게 된다.
1919년 2월 28일 경성 세브란스병원에서 외아들 "브루스"를 얻었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 지하실은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던 곳 중 하나여서
일제가 이 사실을 알고 세브란스 병원에 들이닥치자 조선인 수간호사가 외국인 병실은
함부로 탐색하지 못할 것임을 판단하고 미국인 병실에 이를 숨겼는데
그곳이 바로 "메리"가 막 출산을 마친 병실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독립선언서.
메리의 침상 밑에 숨겨져 있던 "독립선언서"를 병실에 방문한
"엘버트"가 우연히 발견하고 이것을 동생 "윌리엄"에게 맡겼다.
"윌리엄"은 이를 구두 뒤축에 숨겨 순사의 눈을 피해 도쿄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고,
도쿄의 통신사망을 통해 미국으로 타전하면서 한국의 3.1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테일러 부부는 인왕산 주위 성벽을 따라 산책하다 만난 큰 은행나무 아래에
1923년 붉은 벽돌로 집을 짓고 이름을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을 가진 "딜쿠샤"로 정하며 조선에서 정착하기로 결심한다.
이후에도 "제암리 학살사건"을 취재하고,스코필드, 언더우드와 함께
조선 총독에게 항의 방문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27년 10월 4일자 동아일보에 게시된 테일러상회의 시보레 자동차 광고.
윌리엄이 자동차 판매를 전담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윌리엄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입차 딜러인 셈이다.
또한 윌리엄은 시보레 뿐만 아니라 포드와 제네럴 모터스의 차종들도 취급했다.
형제는 무역업으로 돈을 벌어 조선호텔 옆에 빌딩 몇 채도 사들여 소유했다.
서울 서대문 돈의문 박물관마을에는 테일러상회 전시실이 있다.
1930년 12월 테일러골동품점 자리에 새롭게 테일러빌딩이 지어
테일러골동품점은 테일러상회와 통합 운영되었고,
동생 윌리엄이 중국으로 영업 활동을 옮긴 1930년대 후반부터는 앨버트가 주로 맡아 운영하였다.
1940년 아들 "브루스"가 미군 입대를 위해 "딜쿠샤"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앨버트는 서대문 형무소 옆에 위치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사우어하우스"에 구금되었고, 부인 "메리"는 "딜쿠샤"에 가택연금되었다.
1942년 5월 테일러 부부는 조선총독부의 외국인추방령에 따라 조선에서 추방되었다.
경성에서 부산 - 고베 - 요코하마 - 홍콩 - 싱가포르 - 로렌수 마르케르 - 리루데자네이루 -
뉴욕을 경유해 마침내 켈리포니아 롱비치의 도착하기까지
동해와 태평양, 남중국해, 말라카해협,인도양,대서양을 거친 기나긴 항해를 했다.
8.15광복 직후인 1945년에는 한국에 남겨두고 간 재산을 찾기 위하여
미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잠시 한국에 입국하기도 하였다.
1948년 6월 29일 미군정청 광업담당관으로 새 일을 하기 직전 그는
미국 켈리포니아에서 73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전에 미리 유언을 했다고 한다.
"When I die, please bury me next to my father in my beloved land of Korea."
"내가 사랑하는 땅 대한민국, 아버지의 묘소옆에 나를 묻어주시오."
사후 그의 유언에 따르기 위해 부인 "메리"는 성공회 헌트 신부님과
언더우드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군함을 타고 인천항으로 입국해
1948년 10월 23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앨버트를 묻고 딜쿠샤를 방문했다.
테일러의 집 딜쿠샤는 이후 앨버트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에 의해 잠시 관리되었고
6.25 전쟁시기에도 끄떡없이 살아남아 1959년 정치인 "조경규"가 매입하여 그의 소유가 되었다.
1963년 군사정권에 압수되었으나 정부는 건물을 방치하였고
불법주거자가 임의로 이 건물을 증개축하여 왔다.
1997년 유태흥 전 대법원장이 "딜쿠샤"가 대한제국 시절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인 것 같다고 제보하면서 "딜쿠샤"가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는 딜쿠샤를 복원하고 역사 전시관을 개설해 기존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가 거주할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고,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과 테일러의 언론활동 등을 조명하는 6개의 전시실로 구성했다고 한다.
2006년 "딜쿠샤"를 떠난 지 66년 만에 "앨버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아내 조이스, 딸 제니퍼와 함께 딜쿠샤를 찾았다.
군대 입대를 위해 그 곳을 떠난 브루스가 87세의 노인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을 방문한 "엘버트 테일러"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와
그의 가족들에게 명예 시민증을 부여하였다.
9년 뒤 딜쿠샤에 직접 방문했던 "브루스 테일러"는 2015년 4월29일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테일러 父子의 묘.
아버지 알렉산더 테일러의 묘비.
묘비에는 "Pioneer mining engineer to Korea"(한국 광산의 개척자),
“Master, the long, long shift is o'er, I have earned it Rest."
(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라 쓰여 있다.
앨버트 테일러의 묘비.
"앨버트"의 묘비에는윌리엄 셰익스피어의
"Fear no more the hert of the sun"이라는 시의 구절 중 하나가 쓰여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Thou thy worldly task hast done, Home hast gone and ta'en thy wages."
(그대여, 그대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마치고 돌아가 보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