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신과 통제
우리 겉사람이 파쇄되기 위하여는 주님 앞에서의 우리의 헌신이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헌신은 우리 편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우리가 아무 조건이나 아무 보류함이나 제한 없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을 표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오 분이나 일 분 내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오 분이나 일 분 내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처리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완전히 자신을 헌신하고 싶어하는 것은 영적인 길에서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역사를 다 마치셨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는가는 헌신의 전부가 아니다. 헌신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의 통제가 필요하다. 성령의 통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과 큰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의 헌신에다 성령의 통제가 있어야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있다. 헌신이 없을 때 성령의 통제는 많은 경우 어려움에 처한다. 그러나 헌신은 결코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통제를 주의해야 한다.
헌신은 우리가 얻은 빛 안에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고, 통제는 성령이 그분의 빛 안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이다. 헌신은 우리가 깨달은 것에 따라 드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영적인 눈이 열린 정도에 따라 헌신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헌신이 어떤 범위까지 포함하는지는 우리 자신도 잘 모른다. 우리는 한량 없는 빛으로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 우리의 가진 빛은 상당히 한도가 있다. 우리가 가장 큰 빛이라고 느끼는 것도 하나님은 흑암으로 보실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빛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은 영영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바꾸어 말해서 하나님의 요구는 우리가 드린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제한되었고 우리의 빛도 제한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드림은 자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통제는 이와 완전히 다르다. 성령의 통제는 그분의 빛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지를 보시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필요가 있음을 아실 때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겉사람을 파쇄하기 위하여 환경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환경을 안배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통제는, 우리의 헌신을 훨씬 능가하고 몇 배나 더 능가한다. 여기에 극히 큰 차이가 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빛에 근거한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보신 것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통제만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이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어떤 환경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을 택했다고 한 것에도 실수가 가득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필요라고 생각했던 것까지도 종종 하나님이 보시게에 그것은 우리의 필요가 아니다. 우리 편에서 본 것은 천분의 일의 영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환경을 안배하실 때 성령은 하나님의 빛에 근거하여 안배하신다.
성령이 안배한 통제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런 통제를 받기 위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또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통제가 임할 때 우리는 놀라고 이상히 여긴다. 환경에서 성령이 우리에게 안배해 주신 것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많은 성령의 통제는 마치 하나님이 미리 통보하지 않고 큰 타격을 준 것같이 모두 돌발적인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 그것은 아주 세미한 빛에 지나지 않고 심지어는 빛이라고 할 수도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빛으로 우리를 처리하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아신다. 우리가 그분을 영접할 때부터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환경을 안배하셨다. 그분이 안배하신 모든 환경은 다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몸에서 이루시는 역사에는 적극적인 부분인 세우는 부분과 소극적인 허는 부분이 있다. 거듭난 뒤에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지만, 우리 겉사람은 그분에게 자유함을 드리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좁고도 딱딱한 새 신발을 신고서 걷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겉사람이 속사람에게 어려움을 주고 속사람이 겉사람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로부터 하나님은 우리 겉사람을 처리하시고 파쇄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겉사람을 처리하실 때 그분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쓰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우리의 어떤 부분이 유난히 강하고 속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인가를 찾아내셔서 그분이 아시는 바대로 우리를 처리하신다.
성령이 우리 겉사람을 파쇄시키는 방법은 우리 속사람을 강하게 하거나 속사람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속사람이 강해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뜻은 우리 겉사람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달리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령은 밖의 일로 말미암아 우리 겉사람을 쇠약하게 만든다. 우리 속사람을 사용하여 겉사람을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속사람은 겉사람에게 상처를 주기가 쉽지 않고 타격을 주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겉사람은 밖의 일과 그 성질에 있어서 같다. 아주 쉽사리 밖의 일의 영향을 받는다. 밖의 일들은 겉사람에게 타격을 주고 아픔을 느끼게 한다. 밖의 일들을 속사람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겉사람을 파쇄할 수 있다. 하나님은 밖의 일들로 우리 겉사람을 처리하신다. 성경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참새가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를 사고 두 앗사리온에 다섯마리를 사는 것은 아주 값싼 것이다. 다섯번째 것은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이 공짜로 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아버지게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성경은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신 바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세었다는 말은 번호를 매겼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다 세었을 뿐 아니라 번호까지 매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모든 환경은 하나님께서 안배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우연히 당한 환경이란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그분의 안배 아래 있음을 우리가 보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는 것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안배하신 것이다. 그분은 어떤 것이 우리 속사람에게 가장 유익한지를 아신다. 어떻게 해야 우리 겉 사람을 깨끗이 파쇄할 수 있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우리 겉사람을 파쇄할 수 있는 밖의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아신다.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과거 5년, 10년 동안 당신의 당한 모든 일이 당신을 교육하기 위해 안배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누가 당신을 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손을 너무나 모르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운명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당신이 성령의 통제를 조금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임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척량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들이다. 우리 자신들은 그것을 택하지 않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다는 것을 아신다. 만일 하나님이 이런 통제를 안배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로 타락했는지 모른다. 이 안배들은 우리를 깨끗이 보존하고 그분의 길에 있게 한다. 이 안배들은 가장 좋은 것들이다. 하나님은 그것들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하지 못하고 입에 원망을 갖고 마음에 거스림을 갖는데 이것은 아주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성령이 안배하신 가장 좋은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구원받자마자 성령은 구원받은 사람 위에 이런 역사를 하신다. 그러나 성령이 자유로이 이런 역사를 하시기 위해 어느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언제 성령이 자유로이 역사하실 수 있는가? 우리가 헌신할 때이다. 구원받은 그 날부터 성령은 사람 속에서 그를 통제하시기 시작한다. 구원받고 아직 헌신하기 전에 사람은 다 자기만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성령의 통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성령은 변함없이 그를 위해 안배하셨고 여러 가지 일들로 말미암아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으며 그의 겉사람을 깨뜨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헌신하지 않은 사람에게 성령은 자유로이 역사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빛 비춤을 얻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에야 비로소 성령은 자유로이 역사하신다. 당신이 자신으로는 살 수 없고 자기를 위해 살 수도 없음을 느끼고 당신 편에서 본 미세한 빛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자신을 당신께 드립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도될 때 비로소 당신 몸에 있는 성령의 역사가 강화된다. 헌신은 중요한 것이다. 헌신은 성령으로 하여금 자유로이 아무 제한 없이 우리 몸에 역사하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헌신한 후에 당신의 상상 밖의 환경이 임할 때 그것에 대하여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런 환경이 임하는 것은 당신이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주님 손에 맡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주님께, <주여, 당신이 보시기에 내게 가장 유익한 것을 내게 이루소서>라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헌신할 때 성령은 자유로이 아무 고려 없이 당신에게 역사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야 말할 것이 없겠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성령의 통제하는 역사를 주의해야 한다.
은혜받는 최고의 방법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그가 구원받은 날부터 그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계속 은혜를 주신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얻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은혜를 받는 방법들>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은혜를 받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왜냐하면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는 것도 은혜를 받는 한 가지 방법인데,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 받는 방법>이라는 말은 매우 적합하다. 수백 년 동안 하나님은 이런 용어를 사용해 오셨다. 우리에게는 은혜를 받기 위한 방법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날부터 우리의 매일의 생활은 은혜 받는 방법 위에 한 가지 방법이 더해지고 계속 더해지는 생활이다. 이것은 우리가 집회에 참석하든 말씀을 듣든 기도를 하든 이것을 하든 저것을 하든 그것들로부터 은혜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은혜 받는 한 가지 방법인 성령의 통제를 주의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대부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이 다 성령의 통제 안에 있다는 말이다. 당신의 기도, 당신의 성경 읽기, 당신의 집회, 당신의 말씀을 들음, 당신의 기다림, 당신의 묵상, 당신의 찬미 이 모든 은혜 받는 방법들은 성령의 통제와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 받는 방법들 중에서 성령의 통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성령의 통제가 최대의 은혜 받는 방법이다.
돌이켜 우리의 은혜 받는 방법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걸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일 우리의 영적 성장에서 기도만 의지하거나, 말씀 듣는 것 또는 성경 읽기만 의지한다면, 또 은혜 받는 방법들이 주로 이것뿐이라면, 우리는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은혜 받는 방법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거치는 일들, 그것들이 가정의 일이든 학교나 공장의 일이든 심지어 길에서 발생한 일이든, 이 모든 일들을 전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최대의 도움을 얻고 최대의 유익을 얻도록 우리를 위해 안배하신 것들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 유익들을 얻지 못하고 은혜 받는 최대의 방법을 모르며 이 은헤 받는 최대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것은 막대한 손실인 것이다. 성령의 통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은혜 받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 읽기가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 없고, 기도도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도 없으며, 집회도 결코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하고 말씀을 들어야 하며, 여러 가지 은혜 받는 방법들이 필요하다. 비록 이것들이 우리에게 다 중요한 것이지만 그중 어떤 것도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통제 방면에서 잘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어려울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할 것이다. 말씀 듣는 것은 우리로 속에 영양분을 얻게 하고 기도는 우리 속을 소생케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우리로 속에 적셔짐을 얻게 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우리의 영을 해방되게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 겉사람이 여전히 강하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만날 때 우리에게서 섞임을 만지게 되고 우리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한면으로 당신의 열심을 느끼면서도 다른 면으로는 당신의 혼잡됨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한면으로 당신이 진실로 주님을 사람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다름 면으로는 당신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한면으로는 여기에 귀한 한 형제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다른 면으로는 여기에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강팍한 형제가 있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나 기도할 때에나 성경을 읽을 때만이 아니다. 가장 온전케 하는 것은 성령의 통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면에서 완전한 헌신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코 헌신이 성령을 대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헌신이란 성령에게 기회를 부여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주여! 당신 손에 내 자신을 맡기오니 당신이 자유로이 역사하소서. 주여! 내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을 내게 주옵소서> 성령이 안배하신 것에 대해 굴복할 때 우리는 유익을 얻게 된다. 바로 이 굴복함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 만일 굴복하지 못하고 계속 하나님과 따지고 자신을 좇아 행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의 길은 올바른 길이 아닌 것이다. 우리 쪽의 기본적인 문제는 바로 아무 조건과 제한 없이, 아무 보류함이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어 하나님으로 우리를 자유로이 처리하시도록 할 수 있느냐에 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안배가 우리의 최고의 유익을 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가 가장 괴로움으로 느끼는 일도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한다면 성령은 여러 가지 일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다루실 것이다.
여러 가지 다루심
어떤 사람은 특정한 것에서 해방받지 못한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다루시되 한 가지씩 그 사람을 다루신다. 심지어는 의복, 음식, 가장 미세한 것들까지도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신다. 성령은 아주 섬세하기 때문에 한 가지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어떤 물건이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것을 처리하시되 아주 세세히 처리하신다. 당신의 이런 것들이 제해지고 이것들로부터 당신이 해방받을 때, 비로소 당신은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성령은 그가 버리기를 아까와하는 것들을 한 가지 한 가지 처리하신다. 이런 다루심 안에서 우리는 성령이 얼마나 세밀한지를 볼 수 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주님은 기억하시고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하다. 완전한 데 이르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은 그분의 역사를 멈추지 않으신다. 완전한 데 이르지 않고서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으신다.
때때로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용하여 당신을 다루신다 당신에게 화를 내고 당신을 시기하는 사람을 안배하시거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안배하여 당신을 다루신다. 때로는 종종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안배하여 당신을 다루신다. 다루심을 받기 전에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혼잡한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이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을 때 비로소 당신의 혼잡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게 될 것이다. 전에 당신은 자신을 주님께 완전히 드린 사람으로 생각했을지 모르나 성령의 통제를 받고서 당신은 많은 밖의 일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알게 된다. 때때로 그분은 우리의 생각을 다루신다. 우리의 생각은 혼잡되고 야만스러우며, 자신을 좇아 생각하며, 속박을 받지 않고 스스로 독똑한 체하며,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종종 자신이 남보다 더 섬세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가 우리 생각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한 번 두 번 우리를 벽에 부딪히게 하고 심지어는 넘어지게 하신다. 만일 우리가 큰 은혜를 입었다면 불을 무서워 하는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의 생각을 두려워할 것이다.
손을 불에 댈 때에 우리는 즉시 손을 회수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이 우리의 생각이라고 느낄 때 우리는 즉시 뒤로 물러나서 주님께, <이것은 내가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나의 생각을 두려워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혹 하나님은 여러가지 환경을 안배하여 우리의 감정을 다루실 것이다. 어떤 사람의 감정은 지나치게 열렬하다. 그가 즐겁다고 느낄 때에 당신은 그를 멈추게 할 수 없다. 그가 답답해할 때 당신은 또한 그로 위로를 얻게 할 수 없다. 그의 온 존재가 감정 안에서 생활한다. 그가 답답함을 느낄 때 당신은 그로 찬송을 부르게 하지 못하고 그가 즐거움을 느낄 때 그로 진중하게 하지 못한다. 즐거움은 그를 경솔함으로 이끌고 답답함은 그를 게으름으로 이끈다. 그는 완전히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감정 안에 살 때 그는 감정을 옳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각종 환경을 일으켜서 그의 감정을 다루신다. 이로써 그로 하여금 근심하고 싶어도 근심하지 못하게 하고 즐거워하고 싶어도 즐거워하지 못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감정으로 살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야 살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의 문제는 유난히 그의 생각에 있다. 어떤 사람의 문제는 감정에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이런 비정상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지라도). 겉사람의 가장 크고도 일반적인 문제는 의지에 있다. 우리의 감정이 문제 되는 이유는 우리의 의지가 아직 다룸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의 뿌리는 우리의 의지에 있다. 우리의 생각이 문제 되는 것도 우리의 의지가 다룸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뿌리도 의지에 있다. 우리가 입으로,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나 환경을 만날 때 진정 주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시게 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는가? 자신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이런 말을 잘 한다.
하나님 앞에서 빛 비춤을 받지 않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용이하다고 생각한다. 가볍게 말을 하는 사람일수록 그가 댓가를 지불한 적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말을 친근하게 하는 사람은 아마도 하나님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빛이 없는 사람은 친근한 말을 하기가 쉬운데, 사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모른다. 하나님의 처리하심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강팍한 사람이고 얼마나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인가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부드럽고 온순하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의지를 처리하신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의 의견과 느낌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방법과 관점이 항상 옳다고 생각할 정도로 의지가 강팍하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이 은혜 받은 비결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빌립보서에서 말한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들도 우리 자신의 결정에 대해 확신을 갖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의 다룸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과거나 장래가 다 틀렸고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하도록 계속 우리를 틀린 상태에 내버려 두신다. 많은 때 주님은 당신의 어떤 결정으로 인해 아주 심각한 결과를 얻게 하신다. 당신이 한 가지를 결정해도 그 결과가 실패요 다른 일을 결정하여도 실패일 뿐이다. 심지어 그분은 어떤 일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만드신다. 주님은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도록 계속 당신을 치신다. 즉 <주여, 저는 지옥불을 두려워하듯 저의 결정을 두려워합니다. 저의 결정에 문제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저의 관념과 방법에 문제가 있을까봐 두렵습니다. 주여, 저는 잘 틀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틀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주여, 만일 당신이 제게 긍휼을 주시지 않고 저를 부축하시지 않는다면 당신의 손으로 가로막지 않으신다면 저는 또 틀리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의 겉사람은 파쇄되기 시작하고 당신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많은 때 우리는 가볍게 결정하고 우리의 관념은 그렇게 간단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번, 두 번 다룸을 받고 파쇄되며 여러번의 실패를 거친 후에는 그분께 굴복하며, <하나님, 제멋대로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일과 사람들로 말미암아 여러 방면으로 우리를 처리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통제이다.
성령의 통제를 받는 이 공과는 영원히 결여되어서는 안 될 공과이다. 많은 때 말씀의 공급이 결여될 수 있고 다른 은혜 받는 방법도 결여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의 통제를 받는 이 은혜 받는 방법은 영원히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때로 환경의 제한 때문에 우리가 말씀의 공급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통제는 환경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도리어 환경으로 인하여 더욱 나타난다. 당신은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성령의 통제를 받을 기회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당신은 말씀의 공급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은 매일 우리를 위하여 환경을 안배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당신에게 배울 공과를 주시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항복한다면 성령의 통제는 당신의 필요를 채울 것이다. 또한 이것은 말씀의 공급보다 훨씬 뛰어나다. 우리는 마땅히 이 길을 알아야 한다. 오직 말씀의 공급만이 은혜 받는 방법이라고 결코 잘못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성령의 통제가 최대의 은혜 받는 방법임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은혜 받는 이 많은 방법들 중에서 오직 성령의 통제만이 최대의 은혜 받는 방법이다. 성령의 통제는 학문 있는 사람만이 얻는 것이 아니라 학문 없는 사람도 이것을 얻을 수 있다. 영리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고 우둔한 사람은 얻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은사 있는 형제만 얻을 수 있고 은사없는 형제는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통제는 우리 각 사람을 달리 대하지 앟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길 수 있고 누구나 성령의 통제가 그의 몸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의 통제 안에서 우리는 매우 실제적인 공과를 배우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은 말씀의 공급과 기도의 은혜와 믿는이와 교통하는 이러한 은혜 받는 방법들이 좋지 않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은혜 받는 방법들 중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기도가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 없고 말씀의 공급도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 없으며 묵상도 성령의 통제를 대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온전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파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몸에 아직 파쇄되지 않은 것들, 영원 안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실행적인 십자가
십자가는 교리만이 아닌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우리 몸에서 실행되려면 우리 자신의 것들은 다 허물어져야 한다. 우리가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치심을 받을 때 우리는 자연히 방자히 행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교만할 때 기억력을 사용하여 교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다. 기억력을 사용한 겸손은 오 분밖에 지속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치심을 받을 때 비로소 우리의 교만이 거꾸러진다. 본래 나는 교만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의 치심을 받을 때 나는 항복하고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된다. 가르침과 교리와 기억력은 겉사람을 허물어뜨릴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매질과 성령의 통제만이 우리 겉사람을 허물어 뜨릴 수 있다.
하나님께 어느 단계 다룸을 받을 때 나는 감히 교만할 수 없게 된다. 이 길은 억지로 기억하거나 며칠 전에 어느 형제에게서 들은 대로 행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어떤 그르침을 좇아 행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교만이 제해지고 쫓아내어짐으로써 불을 두려워하듯 자신의 방법과 관념을 두려워하고 그것에 이해 태워져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기억력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그분의 원하시는 단계에까지 우리를 치신다. 이런 일만이 우리 몸에 이루신 그 때에 우리 속에 은혜를 얻고 우리 속이 강건케 될 뿐 아니라, 전에 주님을 저지하고 주님의 역사와 그분의 뜻을 파괴하며 하나되지 못했던 겉사람이 이제 속사람과 다투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하게 무릎을 꿇게 된다.
우리 모든 사람은 주님 앞에서 다룸을 받아야 한다. 과거 우리의 나날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깨뜨리고 겉사람의 단독적임과 교만과 이기적인 것을 제하기 위하여한 가지 한 가지씩 처리하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주님이 행하신 모든 역사는 다 의미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통제가 무엇인지를 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다음 사실을 인식하기 원하신다. 즉 <나 자신은 가련한 사람이고 여러 번 주님을 대적했으며 여러 번 실패했고 수차 빛을 보지 못했고 자신을 좇아 행했으며 수차 교만하고 방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주님의 손이 나를 파쇄하심을 알았습니다. 나는 아무 제한과 보류 없이 주님 손에 자신을 맡기기 원하고 이 파쇄가 내 몸에 이루어질 수 있기 바랍니다> 형제 자매들이여, 겉사람은 반드시 파쇄되어야 한다! 겉사람이 파쇄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 한 번 속사람을 온전케 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가 파쇄의 역사를 주의할 때 온전케 되는 역사는 당연히 이루어 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