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3대 전투 -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전투 ※ 오장원 싸움(4대) □ 관도의 싸움(200년) 관도대전(官渡大戰), 200년, 관도는 현재의 하남성 중모현 근처)은 적벽대전, 이릉전투와 함께 삼국지의 3대전투로 유명하고 삼국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전투다.
여기서 당시 하북지방의 점령하고 위용을 떨치던 원소가 천자를 등에 업고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간 조조에게 대패하면서 원소는 역사속에서 사라졌고.. 조조는 제일 큰 영토와 군사를 가지면서 삼국 정립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조조에게 유리했던 전쟁은 아니었으나.. 병력수나 식량에서도 원소군 70만대군의 기세에 제압당하며 외견상으로 조조가 이길 확률은 희박했던 전투였다.
그런데.. 무려 10배 이상의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원소를 대파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간단히 갈펴 보면은.. 먼저 조조에게는 대의 명분이 확실했다는 것이다. 즉, 한왕조의 천자 헌제를 등에 업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른 군웅들보다 우위를 정했고 또 이런 도덕적 명분을 얻은 군대는 심적 안정감을 가지며 아무런 두려움 없이 목숨을 던질 수 있었고 상대방에게는 반대의 동요를 일으키는 심리적인 효과가 컸다는 것이다.
당시, 실제 관도대전의 결전에서 원소가 준비한 병력은 10만정도, 조조군은 1~3만정도였다는게 정설인데, 중요한 것은 관도대전의 전초전인 백마성 전투에서 안량을 앞세운 원소군을 조조군에 잠시 있었던 관우가 목을 배면서 승기를 잡고, 몇 달후 문추를 선봉으로 한 원소군 주력부대가 연진으로 진출했을 때 조조군을 보급부대를 미끼로 속여서 원소군을 무찌르게 된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패한 원소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관도에서 대전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장기전으로 치닫을 기미에 조조군이 식량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될 때 원소군에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니.. 바로 원소의 취하 모사 심배와 봉기에 눌리며 음해를 받아온 허유가 조조군에 투항하면서, 원소군의 대병력의 식량저장소인 오소공략에 대한 정보을 흘리게 되고, 이 과정에서 조조 본진을 치려던 장합과 고량은 도려 포위망에 빠져 백기를 들어 항복했고.. 결국, 조조가 오소공략에 직접 선봉에 서서 쳐들어가 원소군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으며 무너지고 원소는 자기의 본거지 북방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런 관도대전은 조조에게 있어서 건곤일척의 결전으로 그를 중원의 패자로 만든 기적같은 승리였다. 이것은 조조의 비상함이 돋보이는 승리기도 했지만, 반대로 군주로써 사람을 부리는데 실패한 원소의 자질문제 즉, 막대한 물량과 군사를 가졌지만 자만심과 감점으로 치우친 용병술과 아랫사람에 대한 의심들로 인해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도 불구하고 패망한 것이다. 그럼 관도에서 무참히 패하고 북방으로 돌아간 원소는 이후, 조조의 십면매복에 걸려 무참히 깨지며 피를 토하며 죽고 마는데, 이에 원소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면 원소(袁紹, ?~202)자는 본초(本初) 위, 촉,오 삼국이 정립되기 전까지 가장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자가 바로 원소다. 그의 고조부 원안이 조정의 사도를 지낸 이후 4대에 걸쳐 삼공을 배출한 명문가 가문의 배경, 그 배경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세력과 권세가들, 사사에 의하면 원소는 풍모가 빼어나고 위엄스런 용모가 있었으며, 지위가 낮은 선비들에게도 허리를 굽혀 존경하니 많은 선비들이 그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즉, 주위의 환경적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그는 엘리트 정규 코스를 밟으면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며, 하북의 패자로 거듭난다.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십상시의 난 때 하진의 속관으로 환관들을 주살하며, 동탁 집권때는 반동탁군이 결성돼 맹주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리게 된다. 이 후 자신의 본거지 돌아온 원소는 저수의 간언대로 내실을 다지고, 북방의 공손찬을 제압하며, 하북 4주(기주, 청주, 유주, 병주)를 병합하여 당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게 된다. 이런 원소의 세력은 점점 자만심과 측근 모사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기울게 되는데 특히, 자신이 정복한 하북4주를 아들들과 친족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으니.. 맏아들 원담은 청주를 다스리고 둘째 원희는 유주를 외조카 고간은 병주를 다스리는 등 이를 보고 원소의 제일모사 저수는 ‘이와 같이 하는 것은 화(禍)의 시작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원소는 그말을 듣지 않았으니, 실제로 이 때문에 원소가 죽고 나서 형제, 친족간의 사투가 벌어져 스스로 원씨 일가의 무덤을 파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원소는 천자를 옹립하라는 곽도의 의견도 묵살하며 천자 웅립의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 등 내면적으로 이미 몰락의 징조를 보이며 조조와의 관도대전에서 이것은 불거져 나온다. 이 관도대전에서 병력이나 식량에서 우월함을 앞세워 지구전으로 전투를 몰아가야 한다는 전풍의 의견을 무시하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투옥시키고 나중에 용서하지만 중용하지 않고 도려 죽이고 말았으니 사세에 의하면 그때 그가 한말은 ‘내가 전풍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결국 그에게 조소당할 것이오’존망의 위기에에서 자신의 자존심이 손상당하는 걸 더 걱정했으니 진수의 삼국지에서도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고 아량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희노애락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오히려 질시하고 거리끼는 것이 심했으며,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 매사가 이런식이니 관도대전에서 그가 보여준 작태가 충분히 수긍이 가면서 패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그렇다고 범인보다 못한 인물이라고 매도만을 할 수 없는게 아무리 집안 배경이 크다 하더라도 원소가 해낸 하북 4주의 정복은 아무나 할 수 있는게 아니거니와 사서에는 조조가 원씨 가문을 몰락시키고 지배한 하북 지방의 주민들은 원소의 정치를 흠모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론을 말하면 원소는 조조나 유비만큼 큰 인물은 아니었으나, 한 시대를 풍미한 호걸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대한 진수의 평은 가혹하기까지 하다. ‘원소는 황하북쪽에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관대했지만, 속으로는 질시하고 모락을 좋아했으며 결단력이 없고, 인재가 있어도 등용하지 않고 좋은 말은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적자를 내쫓고 서자를 세우고, 예의를 버리고 편애를 숭상했으며, 후계자의 시대에 이르러서 고통을 당하고 사직이 없어졌어도 불행한 것이 아니다. 초나라 향우는 범증의 계략을 듣지 않아 왕업을 잃었는데 원소가 전풍을 죽인 것은 향우의 실책보다 더한 것이다’ 1. 배경 조조는 환관 가문 출신이지만, 부친 조숭(曹嵩)이 삼공(三公)중 하나인 태위(太尉)까지 올랐었고, 조조 자신도 군웅할거 중기에 두각을 나타내 헌제(献帝)를 손안에 넣어 도의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고, 여포(呂布), 원술(袁術), 장수 등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하남(河南)에서 강소성(江蘇省) 장강(長江)이북에 걸친 지역을 지배했다. 한편 원소는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불리는 명문 출생으로 비록 노비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 청류파의 사상,정치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를 바탕으로 빠르게 군벌화하여 한복(韓馥), 공손찬(公孫瓚), 장연(張燕), 공융(孔融) 등의 군벌들을 격파,병합해 청(靑), 기(冀), 유(幽), 병(幷)의 4주(州 : 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를 지배했으며가장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서 최고의 위세를 떨쳤다. 처음에 조조는 원소의 지원으로 인해 세력을 성장시킬 수 있었고, 이후로도 줄곧 조조는 원소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헌제 옹립을 계기로 완전히 원소와 결별했고 대립이 깊어져갔으며, 원소는 공손찬을 격파한 뒤 정병 10만을 선발하여 조조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이때 참모 전풍(田豊)과 원소군의 2인자 격에 위치에 있던 저수(沮授) 등은 아군이 공손찬과 싸우느라 국력이 피폐해져 있고, 천자를 끼고 잇는 군대를 치는 것은 의로움에 위배된다고 하여 원소의 출정을 만류했으나 당시 원소에게 크게 중용되고 있던 곽도(郭圖)등은 객관적으로 조조의 국력을 하북의 강역을 차지하고 있는 아군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며, 황실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칼날이 역신 조조만을 향하는 것이므로 지지를 받을지언정 의로움에 위배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박했고 오히려 저수의 위세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탄핵했다. 원소는 이를 받아들여서 강대했던 저수의 권한을 삼분하고 저수와 곽도, 순우경(淳于瓊)이 각각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199년 유비가 서주(徐州)에서 조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원소와 손을 잡았다. 이에 조조는 직접 출진해 유비를 격파하고 패배한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으며, 관우는 조조의 포로가 되어 조조의 객장으로 지내게 되었다. 삼국지 원소전에 의하면 이때 원소의 참모 전풍은 조조가 유비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타 배후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원소의 진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지 무제기와 곽가전에 의하면 원소가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의심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다만 우금전에 의하면 원소는 조조가 유비를 공격하는 틈을 타 연주를 공격했다. 당시 우금은 조조를 대신해 주요 거점이던 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사이에 원소군이 남하해 연진을 공격하자 굳게 수비해 이를 막아냈으며 악진 등과 함께 황하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며 오히려 반격을 가해 급(汲) · 획가(獲嘉) 2개 현에 주둔하던 원소군의 수비초소 30여 개를 불태우며 하무(何茂) · 왕마(王摩) 등을 항복시켰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한결같이 원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우금전에서도 이에 대한 원소의 적극적인 응전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봤을때 당시 원소의 움직임은 견제 수준에서 그쳤던 것 같다. 2. 백마 전투 원소는 격문을 돌려 조조의 부정을 성토했으며 10만의 대군을 편성해 조조와의 결전을 감행한다. 이때 전풍은 “조조는 유비를 격파해 허(許, 허창(許昌)을 말함. 조조의 본거지로서 헌제의 거주지)는 비워있지 않습니다. 지구전으로 끌고가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본거지를 지키면서 조조의 후방을 교란한다면 3년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원소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풍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피력하며 억지로 원소를 막으려고 하다가 대노한 원소에게 투옥되었다. 다음해 2월. 원소는 곽도와 순우경, 안량(顔良)을 파견해 백마(白馬 : 현재 황하 남쪽 강변)에 포진한 조조군의 동군 태수 유연(劉延)을 공격하게 했다. 이때 원소군의 참모 저수(沮授)는 안량을 기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간언했으나, 원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조조 측은 순유(荀攸)의 진언에 따라 연진(延津)에 주둔하며 미끼 및 견제로서 원소군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후, 장료(張遼)와 관우를 선봉으로 삼아 안량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관우는 적 진영에 파고들어가 단칼에 안량을 베고 수급을 얻었다. 이에 곽도와 순우경 등은 백마의 포위를 풀었고 이 사이에 조조는 백마의 군대와 백성들을 모아 철수한다. 하지만 원소는 결과적으로 백마,연진에 이르는 주요 도하 거점을 확보했고, 조조는 더욱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 원소는 문추(文醜)를 보내 이를 추격하게 했으나, 조조는 다시 순유의 진언에 따라 수송대를 미끼로 사용해 문추군의 대열을 어지럽히게 한 뒤에 서황 등이 습격해 문추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다만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죽인 것으로 나온다. 3. 관도 대전 이 시점에서 양군은 일시적으로 태세를 정비한다. 조조군은 관도로 물러났고, 원소 진영에서는 저수가 “북쪽(원소 진영)은 숫자가 많으나, 용맹함에는 남쪽(조조 진영)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군량에 대해선 남쪽은 적고, 북쪽은 풍족합니다. 남쪽은 속전속결을 바라니 북쪽은 지구전이 유리합니다.”라고 말하며 또다시 지구전을 간언했으나 원소는 이를 듣지 않았다. 원소는 직접 군을 움직여 양무(陽武)까지 진군했다.(여기서 곽도,순우경 등과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저수는 본대를 움직이지 조조를 치지 말고 연진에 본영을 두면서 별군을 보내 관도를 칠 것을 진언했다고 하나 원소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원소는 조조군을 공격해 동서 수십리에 걸쳐 진을 구축하고 서서히 전진하는 전술로 조조의 진영을 압박했다. 조조도 똑같이 수십리에 걸쳐 진영을 구축하며 전진해 이에 대응했다. 마침내 양군이 회전을 벌였는데, 조조군이 패주하여 요새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원소는 더욱 진군하여 관도까지 조조군을 몰아붙였고, 토산을 쌓거나 지하도를 파서 성벽을 무효화하려고 했으나, 조조도 내부에 똑같은 것을 만들어 대응했다. 원소는 망루를 만들어 토산에서 조조 진영 안으로 화살을 쏘았다. 조조군은 이 공격에 크게 고전하였으나, 우금이 토산의 지휘를 맡아 분전하여 조조군의 전의를 불태웠다. 또한 조조는 발석차를 만들어 망루에 대응했다. 전황은 지구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조조군은 크게 고전하고 있었고, 조조 진영의 식량 역시 나날이 줄어들어갔다. 걱정이 된 조조는 본거지를 지키던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보내 철수에 대한 상담을 했으나, 순욱은 철수에 대한 상담 대신 예상 밖의 일을 예측하고 기회를 노리면 기필코 승리할 수 있다고 조조를 격려했다. 한편 남쪽 여남에서 조조의 형세가 나빠진 것을 본 유벽(劉辟)이 원소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고, 원소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 유비를 파견했다. 조조는 조인(曹仁)을 파견해 이들을 격파했다. 패배한 유비는 유표곁으로 도망쳤다. 또한 조조는 순유의 진언에 따라 서황(徐晃)과 사환(史渙)에게 명령해 원소군의 수송대를 공격해 수천대의 곡물수송차를 불태웠다. 하지만 원소는 관도에 조조를 묶어둔 채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호응하는 반란을 유도했고, 조조군의 전황은 점차 절망적으로 악화되었다. 이 무렵 원소 진영의 허유(許攸)는 비리가 탄로나 가족들이 투옥당한 일이 있어다. 허유는 좁아진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원소에게 군사를 나눠 허도를 습격하자는 적극적인 헌책을 했으나 원소는 관도에서 조조를 포위해 사로잡는 것으로 완전히 결착이 날 것으로 여겼으므로 보아 거절하였다. 자신의 계책이 거절당한 데에 분노한 허유는 더이상 원소 밑에서 출세하기가 어렵다고 보아 조조 진영에 투항해 왔다. 허유는 순우경(淳于瓊)이 원소군의 병량을 운송하는 것과 순우경이 오소(烏巣)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이곳을 기습할 것을 진언했다. 조조의 측근의 대부분은 이 허유의 발언을 의심했으나, 순유와 가후(賈詡)만이 이 의견을 지지했다. 이에 조조는 즉시 행동을 개시해 직접 보병과 경기병 5천을 이끌고 기습해 순우경의 군량 경비군을 섬멸하고 순우경을 참수했다. 한편, 오소에 있는 순우경이 습격당한 것을 알게 된 원소는 순우경이 지키는 오소가 쉽게 함락 당할 리 없다고 여겼으므로, 오히려 조조의 주력이 빠져나가 수비가 약해진 본진을 더욱 몰아붙여야 한다고 판단, 장합(張郃)과 고람(高覧)에게 주력군을 내어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게 했으며 순우경에게는 기병을 보내 지원했다. 하지만 결국 오소의 군대는 전멸당했고, 순우경군이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 진영은 책임 소재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다. 이에 장합이 배신하여 원소를 공격했으며 진영을 불태우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장합의 공격을 받은 원소는 단지 800명의 기병만을 이끌고 갑옷도 입지 못한 채로 급히 도망쳤는데, 예상치 못한 아군의 습격에 더해 총사령관의 행방과 생사마저 알 수 없었던 나머지 군사들은 대혼란에 빠져 사실상 완전히 무너졌다. 원소의 패배를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은 부패한 관료 허유의 배신이었지만,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군의 수장 원소와, 근위세력인 곽도 등의 지나친 독선과 오만함이었으며 이로 인해 간부들의 배신이 속출한 것이다. 4. 관도대전 후 원소의 패배를 본 기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원소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패군을 수습해 귀환했으며, 반란을 일으킨 군현을 공격해 모두 평정했다.(201년 4월.) 또한 원소는 전풍을 처형했는데, 이는 원소가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원소와 합류하지 못한 군사들은 조조의 공격을 받아 죽거나 사로잡혔는데, 조조는 사로잡은 병사들도 모두 생매장해 죽였다고 한다. 이때 죽은 원소의 군사들은 7만, 혹은 8만이라고도 하는데, 조조군의 병력이 1만이었다고 기록된 것과 더불어 조조의 승리를 미화하기 위해 과장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한편, 조조 역시 원소의 침입으로 영내에 큰 피해를 입어 내부 정리로 시간을 써야 했으므로 관도전 이후 원소와 조조는 황하를 두고 군대를 주둔시켜 약 1년간을 대치했다. 202년 5월. 관도의 패전 이후 건강이 악화된 원소는 병이 들어 피를 토하며 죽었다. 원소의 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으나 나이가 어렸으므로 원소의 조카 원담은 원상에게 공공연히 불복하며 자신이 원소의 후계를 이어받을 것을 주장했고, 이로 인해 원소의 세력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조조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기주를 공격했으나 원상에게 격파당하여 철수한다.(203년 4월) 하지만 원담이 원상을 공격함으로써 내전이 발발했고, 이 틈을 타 조조는 원담과 연합하고 다시 원상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이로써 원소가 세운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조조는 뒤이어 원담과 싸워 그를 죽이고 기주를 평정했다.(205년 1월) 이로써 조조는 당대의 최대세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5. 의문점 관도의 병력에 대해선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寿)가 쓴 본문부분에는 원소군 10여만, 조조군 1만에 불과하다고 적었으나, 이것에 대해 배송지(裴松之)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 이유로써는 조조가 세력을 일으켰을 때 5천의 병사를 갖고 있었고, 그후 황건적의 잔당 30만을 항복시키고, 기타 수많은 세력을 병합하였다. 그런데도 겨우 1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적다고 생각된다. 원소는 수십 리에 걸쳐 둔영을 연결하며 군대를 진군시켰는데, 조조가 원소군의 1할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전력으로 이에 똑같이 대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원소군이 조조군의 10배였다면 이치상 포위하고 출입을 단절해야 하나, 조조가 별군을 나눠 원소군을 공격할때도 이것이 저지된 일이 없었던 것은 원소의 군사수가 조조를 완전히 압도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원소군이 붕괴한 후 원소군의 병사 8만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고작 1만에 불과한 병사로 8만 명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진수가 왜 책에 그렇게 기술했냐는 것에 대해선 조조의 군략을 돋보이기 위해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삼국지] 위서 국연(国淵)전에서는 도적의 무리를 격파한 상황에서 이것을 보고할 때 상주문에는 1을 10으로 과장해서 기재하는 것이 그 시대 통례라고 일지에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연의에서는 조조군 8만, 원소군 80만이라고 기술한 것도 있다. 덧붙여서 이 전투 후에도 세력적으로는 여전히 원소가 우세했다. 원씨 가문의 멸망을 결정짓게 만든 것은 그 후 일어난 원소의 급사와 어린 후계자 원상의 집권으로 인한 내부분열 때문이었다. 6. 기타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도 대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은 듯이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만 서술의 관점이 관도 대전이 아니라 유비가 원소에게서 벗어나는 일이나, 관우의 오관참장(五關斬將, 또는 오관육참(五關六斬)이나 단기주천리(單騎走千里))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읽고도 모르는 때가 많다. 중국 삼국시대에서 중요한 전투이나 《삼국지연의》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아서 적벽대전에 비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 적벽싸움(208년) 적벽 대전(赤壁大戰)은 중국의 삼국 시대, 통일을 목표로 세력을 계속 팽창하던 조조에게 , 손권과 유비가 연합해 대항하여 양자강에서 벌어진 큰 전투이다. 정사 《삼국지》에서의 적벽대전 정사 《삼국지》에서는 〈위서〉 무제기에서 적벽대전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매우 간략하게 적혀 있다. 원문 : 公至赤壁, 與備戰, 不利. 於是大疫, 吏士多死者, 乃引軍還. 備遂有荊州, 江南諸郡. 번역 : 조조는 적벽에 도착해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유행해 관리와 병사가 많이 죽었다. 그래서 조조는 군대를 되돌리고,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반면 상대편 쪽에는 좀 더 자세히 적혀 있다. 제갈량전 손권은 즉시 주유, 정보, 노숙등 수군 3만을 파견하여 제갈량을 따라 유비가 있는 곳으로 가서 힘을 합쳐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조조는 적벽에서 패하여 군대를 이끌고 업으로 되돌아갔다. 선주전(유비전) 유비는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손을 잡았다. 손권은 주유, 정보등 수군 수만을보내 유비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움을 하여 크게 격파시키고 그의 군선을 불태웠다. 유비와 오의군대는 바다와 육지로 동시에 나아가 추격했다. 그당시 역병이 발생하여 북쪽의 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았으므로 조조는 후퇴하였다. 오주전(손권전) 주유와 정보는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을 인솔하여 유비와 진격해 적벽에서 조조군대를 크게 격파시켰다. 조조는 남아있는 배에 불을지르고 군대를 이끌고 물러났다. 사졸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유행하여 죽은자가 대부분이었다. 주유전 조조의 군대는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질렀다. 바람이 사나와 해안위의 진에까지 불길이 번저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퍼졌고, 불에 타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수 없었다. 조조의 군대는 결국 패하여 군사를 돌렸다. 1. 배경 조조는 205년 원담을 멸망시키고, 206년 고간을 멸망시키고, 207년 오환·원상 연합군을 무찌르고 원상을 멸망시킴으로써 원씨 일가의 세력권이던 기주, 청주, 병주, 유주를 손에 넣고 오환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 하남, 하북의 패권을 확립했다. 승상에 오른 그는 통일의 의지를 표명했으며 다음 해 여름 본격적으로 남진을 개시했다. 갓 병사한 유표의 뒤를 이어 형주목으로 옹립된 유종은 조조에게 그대로 항복하고, 한수 북부를 포기한 유비는 강릉으로 향했으나 같이 따르던 피난민들의 속도가 느려 조조군의 기병에게 당양에서 따라잡혀 위기에 빠진 후 결국 한진에서 수로를 따라 하구에 주둔하는 유기에게로 피신했다. 여기에 유기와 손권은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손권은 주유, 노숙, 정보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비, 유기 등과 연합해 조조에게 맞서기로 결정내렸다. 손권의 선친인 손견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력이 있는 유표의 가문에 대해 손권의 이러한 조치는 엄청나게 파격적이었다. 2. 준비 과정 유종의 항복과 유비의 피신 이후 거의 형주 전역을 장악한 조조는 강릉에 주둔하며 수군이 채비를 갖추길 기다렸다. 조조는 이끌고 온 보병을 나누어 수병으로 재편성하였다.조조 원정군의 대다수가 물에서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항복받은 후 새로 편입한 형주 수군과 함께 수전 훈련을 시키는 한편 적선보다 중량이 큰 함선을 대량으로 건조하도록 하였으며,배멀미를 막기 위해 배들을 튼튼한 쇠고리로 종횡으로 연결해 흔들림을 낮추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에서 배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해서 해결했다. 다만 이 점은 나중에 화공을 받았을 때 선단 전체가 불타버리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조조군은 익숙하지 못한 기후와 여름기후, 강릉에서 주둔지로 여겨지는 오림까지의 늪지대 등으로 인해 역병이 도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는 데다, 접전한 결과, 손권의 수군이 강 위에서는 우세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우위를 확보할 때까지는 장강 북안에 포진한 채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지 않기로 했다. 유비는 유기에게 몸을 의탁한 이후 하구에서 좀 더 하류에 위치한 번구에 자리잡았는데 전부터 유기가 매우 신뢰했으므로 매우 병약한 그에게서 군무를 사실상 위임받았다. 이후 유비군은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손권과 동맹하고, 주유와 같이 적벽 대전에 참가하게 된다. 손권은 주유를 도독, 정보를 부도독으로 임명해 군의 지휘를 일임하고, 자신은 시상에 주둔했다. 주유는 함대를 이끌고 하구를 지나 조조의 수군을 마주보는 형태로 장강 남안에 포진했다.조조의 수군은 소극적으로 일관했고 주유도 조조의 대함대를 단번에 격파할 만한 기회를 노리고 있어서 당분간 대규모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208년은 말에 접어들었다. 3. 전투 경과 주유의 부장 황개가 화공책을 건의하였고, 주유는 이를 받아들였다. 먼저 몽충과 투함 수십 척을 취해 풀을 가득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휘장을 씌우고, 위에 아기(牙旗 ; 장군기)를 세웠다. 그리고 먼저 황개가 조조에게 편지를 써서 조조에게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알렸다.또 빠른 배를 미리 준비하여 각각 큰 배의 뒤에 매고 순서대로 함께 전진했다. 조조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목을 빼고 바라보며 황개가 투항한다고 말했다. 황개는 여러 배를 풀어 동시에 불을 질렀다. 당시는 바람이 매우 사나웠으므로 해안 위의 진영에까지 불길이 번졌다. 순식간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 가득 퍼졌고, 불에 타 죽거나 익사한 병사와 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도 동남풍을 감지하고 선단을 재배치하려고 했으나 배들이 집단적으로 묶여 있는 상황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고 작업이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손권, 유비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조조는 접근하는 적 선단을 향해 화살을 쏘도록 지시했으나 화살은 역풍으로 인해 제대로 날아가지 않았고 불붙은 손권군 배들은 순풍을 타고 난입하여 목적한 바대로 조조군 선단에 불을 옮겨 붙였다. 서로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어 불타는 배들과 무사한 배들을 떼어놓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배에 있던 병사들은 수영할 줄 아는 자도 많지 않아 다들 작은 배에 옮겨 타 대피하려고 애썼다. 바람을 받는 쪽에 정박해 있던 조조군 함대는 빠르게 번져 오는 불과 손권군 함대의 공격으로 괴멸되었다. 손권, 유비 연합군은 완전히 흐트러진 조조군을 수륙 양면으로 협공했고 전의를 상실한 조조군 병사들은 패주하다가 거의 전멸했다. 정사에 따르면 황개가 조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저 황개는 손씨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며, 언제나 장수를 맡았고, 받은 예우는 얇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천하가 이루어질 때에는 큰 형세가 있어야 하고, 강동의 육군과 산월 사람들로 중국의 백만 병력을 감당한다는 것이 중과부적임은 천하가 모두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오)의 부장들도 어리석든 어질든 간에 모두 불가능한 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유와 노숙만이 편협되고 생각이 얕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귀순하여 의탁하려는 것은 사실을 헤아린 것입니다. 주유가 이끄는 것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제가 선봉이 된다면 정세를 보고 변화하며 목숨을 바쳐 가까이 있겠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조조는 황개의 사자를 특별히 만나 자세히 묻고 “너희들이 속일까 두렵다. 황개가 만일 신실하다면 당연히 앞뒤를 뛰어넘는 작위와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직접 말했다. 4. 전후 적벽의 대패로 원정을 계속하는 것이 곤란하게 된 조조는 형주를 떠나 조인, 서황에게 남군을 맡기고 자신은 허창으로 귀환하였다. 유비와 주유·정보 연합군은 남군까지 진격해 조조 군과 싸웠다. 건안 14년(209년), 조인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마침내 주유는 남군을 손에 넣었으며, 손권은 주유를 남군태수로 임명했다. 한편, 유비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무릉, 장사, 계양, 영릉 4군 태수의 항복을 받았다. 조조는 쉽게 항복받은 옛 유표령 형주의 남반부를 잃고, 강하군 북부와 양양 이북만을 유지했다. 나머지 땅은 손권과 유비의 손에 넘어갔다. 손권은 주유에게 형주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대군으로 합비를 공격했다. 조조는 장희(張憙)에게 기병 1천을 딸려서 합비로 보냈는데, 장제가 4만 대군을 파견했다는 거짓 문서를 만들어서 합비성으로 보냈다. 이 소식이 합비성과 손권 군 양측에 모두 전해지자, 손권은 이를 믿고 진영을 불태우고 달아났으므로 합비성은 무사했다. 5. 소설 《삼국지연의》에서의 적벽대전 삼국지연의에서 보면 유표사후 채모가 유종을 유표의 후계자로 앉힌 후에 형주 전지역을 조조에게 주고 항복한다. 그러나 그때쯤에 조조는 신야에 머물고 있는 유비를 공격하여 신야,번성,양양성을 되찾고 유비를 저멀리 장판까지 쫓아낸다. 하지만 장비가 조조군을 막고 있을 무렵 유비는 백성을 데리고 도망가고 있었는데 조조가 물러가자 제갈량은 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시킨다. 손권이 결심하고 주유를 대도독으로 삼고 정보를 부도독에 삼고 노숙을 군사에삼고 조조와 전쟁을 일으킬 것을 결심한다. 적벽전초전으로 유.손 동맹군의 약 5만 군사와 조조군의 80만 대군이 맞붙었다. 물량적으로는 훨씬 조조군이 유리했으나 유.손 동맹군의 지략으로 조조군을 물리쳤다. 조조군 이 군사를 이끌고 적벽 반대편에 대수채를 세우고 대치한 후 조조는 주유와 친했던 장간을 오에 보내서 주유를 설득 시키려고 하나 주유는 그것을 간파하고 일부러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태사자에게 전쟁이야기를 꺼내는 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자 장간은 항복이란 말도 못 꺼낸다. 허나 장간은 주유가 자고 있을 때 채모와 장윤이 주유와 내통하고 있는 가짜 편지를 발견 하고 그 편지를 가지고 도망간다. 그걸 본 조조가 노하자 채모와 장윤을 베고 장간을 다시 보낸다 하지만 주유는 편지를 가져갔다는 명목으로 산속 처가에 가둔다. 하지만 장간은 그곳에서 탈출해 방통을 만나는데 이를 본 장간은 방통을 데리고 조조를 찾아간다. 방통은 조조군사들이 배멀미를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조군의 배를 서로 연결하도록 한다. 서서가 이를 간파하고 방통에게 자신이 살 길을 묻자,서서에게 마초가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거짓명목으로 허창으로 돌아가라고 하여 서서는 목숨을 건졌다. 한편 조조는 장간의 내통 편지가 주유의 계략인 걸 알아차리고 채모의 동생인 채중과채화를 를 주유에게 잠입시킨다. 하지만 주유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황개의 교육계를 활용, 황개를 처벌하였다. 이때 감녕도 황개가 맞으려고 할 때 너무 늙었다고 항의하자 감녕도 처벌된다. 채중과 채화는 이것들을 날날이 조조에게 보고하고 황개와 감택 감녕이 청룡기를 달고 군량을 실은 배를 타고 항복한다고 하였다. 채중과 채화로부터 황개와 감녕의 처벌 소식을 듣을 조조는 둘의 투항을 기정사실화 하지만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게 한 후 황개가 항복하는 척 접근해서 군량을 실은 배에 불을 붙이고 조조군 수채에 불이 붙자 연환계에 의해 배가 다 타버고 조조 군대는 몰살한다. 그리하여 조조는 번성으로 도망간다 6. 실제와 허구 논란 적벽 대전에 대해서 김운회 교수가 "삼국지 바로 읽기 2" 책에서 허구설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는 그 책에서 적벽대전과 관도전투를 비교하면서 위서엔 세줄에 불과하고 촉서나 오서를 합해도 70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사에 양이 매우 짧아서 적벽대전의 허구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김운회 교수의 잘못된 생각으로서, 정사 오나라쪽 기록에 보면 풍부한 기록을 보유한 전쟁으로, 허구성은 잘못된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부 장수의 경우는 적벽대전에서 사망하거나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연의의 영향으로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다. 태사자가 그 대표적인 예로,태사자가 적벽대전에 참전했다는 것은 완전히 허구이며 태사자는 206년 풍토병으로 병사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미 사망한 태사자를 적벽대전에 참가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정사 오서 태사자전을 보면 태사자의 최후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으므로 태사자의 적벽대전 참전은 완전히 허구이다. 태사자는 신장이 7척 7촌(177.1cm)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팔은 원숭이처럼 길며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 일찍이 손책을 따라 마보(麻保)의 적을 토벌하러 갔었는데, 그 중 어떤 적이 군영 안의 망루 위에서 욕을 했다. 그 도적은 손으로 누각의 기둥을 잡고 있었는데, 태사자가 활을 끌고 그를 향해 활을 쏘았다. 화살은 손을 관통하여 기둥에 박히자, 밖에서 포위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묘기(훌륭한 활솜씨)는 이와 같았다. 조공(조조)은 태사자의 명성을 듣고 편지를 써서 상자속에 편지를 봉했는데, 그가(태사자가) 열어보니 말하는 바가 없고 단지 당귀(當歸)가 쌓여있을 뿐이었다. 손권이 정사를 통솔한 후, 태사자에게 유반을 제압할 힘이 있었으므로 남방의 일을 맡겼다. 태사자는 41세, 건안 11년(206년)에 세상을 떠났다.[1] 아들 태사향은 관직이 월기교위까지 올랐다. 7. 참전 장수들 ※ 마연, 장의, 모개가 참전한 것은 《삼국지연의》의 각색이다. 조조 진영 - 조조,하후돈,서황이전조인허저장료장합채모장윤우금순유정욱악진모개마연장의 손권 진영 -손권 : 적벽 싸움 그 자체에는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고, 합비를 공격했다. - 주유, 노숙, 여몽, 능통, 정보, 황개, 제갈근, 한당, 동습, 장흠, 진무, 감녕, 감택, 여범 유비 진영 - 유비, 제갈량, 유기, 장비, 관우, 조운 □ 이릉전투(221-222) 이릉 대전, 또는 효정 전투(猇亭之戰)는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수복하기 위해 손권의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한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유비는 육손의 화공(火攻)과 뒤이은 공격에 의해 참패하고 백제성까지 물러났다. 이로 인해 실의에 빠진 유비는 223년 사망한다. 1. 배경 남군태수 주유가 사망한 후, 손권은 주유가 지키고 있던 남군을 유비에게 임대했다. 손권 측은 적벽대전의 공로가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여기고 유비는 자신들의 묵인 하에서 형주 남부를 점거했으므로 형주 전체를 유비에게 임대했다고 여겼으나, 유비 측은 적벽대전은 어디까지나 공동작전이었으며 형주 남부는 자력으로 획득한 것으로 여겼다. 215년 익주 점령 후, 손권과 유비는 형주 반환 문제를 놓고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강하, 장사, 계양의 세 군을 손권에게 반환하고 강릉, 무릉, 영릉은 유비의 영지로 삼는 것으로 협약을 맺었다. 219년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관우가 북상해 위를 공격하자 손권은 유비가 가지고 있는 형주의 나머지 지역을 되찾기에 좋은 기회로 보고 관우가 부재중인 유비령 형주를 은밀히 습격해 점령했다. 임지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되돌린 관우는 위군과 오군에게 협공받아 결국 패전, 마충에게 생포된 후 손권에게 처형되었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제갈량, 조운을 비롯한 다수의 중신들은 보복전을 일으키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유비는 장비와 회견한 후 오를 직접 공격하기로 뜻을 굳혔다. 전쟁 준비가 한창이던 때, 장비는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당하고, 이들은 장비의 목을 가지고 손권에게로 달아나 유비의 손권에 대한 적의는 더욱 강해졌다. 관우를 처형한 이후부터 유비의 침공을 예상해온 손권은 위의 황제가 된 조비에게 형식적으로 신종하며 촉과의 전쟁에 대비했다. 이 즈음 손권은 조비로부터 정식으로 오왕(吳王)으로 책봉되었다. 221년 여름, 후한이 멸망하자 제위에 오른 유비는 승상 제갈량을 수도인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주둔시켜 후방을 맡긴 후 직접 수만 병력을 인솔하여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2. 전쟁의 경과 유비는 오반, 풍습 등을 선봉으로 삼아 형주로 진격을 시작해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이 지키는 무성(巫城)과 자귀성(秭歸城)을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자귀에 본영을 설치한 유비는 장무 2년(222년) 정월, 오반, 진식 등에게 먼저 수군을 이끌고 이릉으로 나아가게 했다. 손권으로부터 전군을 위임받은 육손이 이들을 상대하는 동안 유비 자신은 본대를 이끌고 육로로 진군할 생각이었으나 육손이 이 의도를 눈치챘기 때문에 작전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222년 봄부터 유비는 다시 공세를 폈다. 황권은 형주로 더욱 깊숙히 쳐들어가면 전세가 불리해질 경우 후퇴하기가 어려울 것을 우려해 유비에게 전선 지휘를 자신에게 맡기고 후방에 머무르도록 권하였으나 유비는 이를 기각하고 황권에게 수군을 이끌고 장강 북안을 따라 계속해서 하류로 내려가도록 한 후 자신은 이도(夷道)를 따라 진군해 손환을 이릉성으로 몰아넣고 성을 포위했다. 손환이 육손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육손은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부장들에게 "내게 촉군을 물리칠 계략이 있으니 참으라"고 말하며 구원 요청을 묵살했다. 이 시점, 육손은 촉군에게 점차 밀려 삼협 내의 모든 거점을 잃고 후방인 강릉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진을 치고 있었고, 많은 장수들은 육손의 군사적 재능을 불신해 육손은 부하 장수들에게 손권에게서 받은 검을 내보이며 권위를 세워야 할 정도였다. 유비는 승세를 타고 효정으로 진군하면서 마량(馬良)을 만족(蠻族)에게 보내어 이들을 회유했고, 여기에 사마가(沙摩柯) 등이 호응해 오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그러나 육손이 요새화한 진영에서 수비로 일관하며 촉군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자 전선은 교착되었고 촉군의 사기도 점차 떨어졌다. 이때 유비는 전선 주변부에 50여 개의 진을 세워 두고 유사시에는 서로 지원하게 했는데, 이를 전해들은 조비는 "유비는 병법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 많은 진영들을 세워두고 전쟁을 하려는 것인가? 유비는 반드시 패배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3. 이릉 전투 222년 6월, 육손은 촉군의 강약을 시험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으로 촉군 진영을 공격하도록 했다. 공격에 나섰던 오군은 촉군의 반격을 받고 몹시 심한 피해를 입었으나 육손은 여러 진영에 분산된 촉군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계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 무렵, 유비가 이끄는 촉군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비교적 시원한 숲으로 진영을 옮긴 상태였는데, 이를 탐지한 육손은 대대적인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했다. 이를 위해 육손은 수군을 적진으로 급파하는 한편 육상에서도 전군을 동원해 동시다발적으로 촉군 진영들의 주변에 불을 놓은 후 맹공을 가했다. 수많은 진영들이 동시에 화공과 기습을 받는 사태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던 촉군 진영들은 혼란에 빠졌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각개격파식으로 무너졌다. 전황이 위급해지고 진영들이 서로 도울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나자 유비 역시 본진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수군은 육상군의 대패로 인해 수십여 진영이 삽시간에 함락당하자 퇴로가 끊겨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도 오군의 추격을 뿌리칠 방법이 없게 되었으므로 지휘관인 황권은 위에 항복하고 오군은 수많은 군선과 병기를 노획했다. 이때 40여 채 이상의 촉군 진영들이 오군의 손에 떨어졌고, 유비는 효정과 이릉에서 퇴각한 후 다시 진을 세우고 패잔병을 수습해 오군에게 대항해 보려 했으나 이미 전세는 기울어 이 시도 역시 오군의 공격으로 인해 무산되어 유비는 백제성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일련의 전투에서 촉한은 풍습, 장남, 부융, 사마가 등 다수의 무장들과 왕보, 마량 등의 문관, 수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4. 전후 이릉 전투의 대패 이후 촉한은 멸망할 때까지 형주로 다시는 세력을 뻗치지 못하게 되었다. 유비는 의형제들의 죽음과 패전으로 인한 자책감과 슬픔, 허탈함이 겹쳐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번민하다가 223년,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백제성에서 사망했다. 한편 오군이 역으로 촉을 침공할 것으로 예상한 조비는 손권과의 우호를 일방적으로 깨고 조인, 조휴, 조진, 하후상 등에게 명령해 오를 침공하도록 하였으나, 촉군을 대파한 뒤 본국으로 되돌아와 이미 위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던 오군에게 오히려 역습당해 패배, 후에 손권이 촉과 제휴하는 데에만 일조하게 되었다. 이릉 전투로 확정된 오와 촉 양국의 경계는 이후 263년 촉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이릉 전투 연의에서는 유비가 장비의 죽음 후 75만의 대군을 일으켜 오를 공격한다. 서전에서 관우의 차남 관흥과 장비의 장남 장포가 유비 앞에서 의형제지간이 되고 이 둘은 손환의 부하 장수로 나오는 이이, 담웅, 사정 등을 죽이고 촉군의 승리에 기여한다. 이로 인해 손환은 이릉성에서 3천 명의 병력으로 농성하게 되고, 뒤이어 오군 본대를 이끌고 출전한 용장 한당, 주태 역시 촉군에게 패배하여 오는 수세에 몰린다. 병을 앓는 와중에도 참전한 감녕은 후퇴하던 중 만왕 사마가의 화살에 맞아 숨지고, 관우를 사로잡고 청룡도를 받았던 반장은 관흥에게 쫓기다가 관우의 망령을 보고 놀란 사이에 관흥에게 죽임을 당한다. 미방은 촉군의 연전연승으로 인해 불안해 하다가 반장의 부장으로 실제로 관우를 포박했던 마충을 암살한 후 그의 목을 가지고 촉군 진영으로 가 유비에게 항복해 용서를 받으려다가 분노한 유비에게 처형된다. 위기를 느낀 손권은 범강과 장달을 죽여 유비와의 전쟁을 끝내려고 하였으나 유비는 이를 거부하고 손권과의 결전에 임한다. 이 와중에 노장 황충은 자신의 정정함을 과시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으로 오군을 공격했다가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손권이 유비를 막을 인물을 찾자 감택이 육손을 추천하여 육손은 대도독이 되어 곧바로 전선으로 부임,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부하 장수들을 제지하며 촉군과는 대치만 하다가 222년 여름에 유비가 진영을 숲 속으로 옮긴 것을 노려 화공을 가해 촉군을 완파한다. 이후 촉군을 추격하던 육손은 어복포(魚腹浦)에서 제갈량의 석진(石陣)에 갇혀 익사할 운명이 되었으나,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나타나 도와줌으로서 살아나게 된다. 한편 다른 길로 유비를 쫓던 주연은 추격 도중 조운의 구원군과 맞닥뜨려 조운에게 죽임을 당한다. 6. 양군의 전력 육손전(陸遜傳)에는 이 전투에 참가한 오군의 병력이 5만 명, 촉군은 "대군"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위서 문제기(魏書 文帝記)의 주(註)에 나오는 222년 2월 8일자 손권의 상소문에 의하면 「유비는 4만 병력과 2천-3천 군마를 이끌고 자귀를 출발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선주전(先主傳)에는 「222년 정월, 유비는 자귀에 주둔하고, 오반과 진식 등은 수군을 이끌고 이릉에 진을 쳤다」, 「2월에 선주(先主)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자귀를 떠나 효정으로 진격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촉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오주전((吳主傳)에는 「죽거나 투항한 자가 수만 명에 달했다」고 적혀 있고 육손전에도 촉군 전사자에 대해 이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편 유엽전(劉曄傳)의 주에는 「육의(陸議, 육손)의 군사는 8만여 명을 죽였다」라고 나와 있으나 이 8만여 명은 오나라를 공격하는 데 동참한 만족의 민간인들도 포함한 수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촉군이 오군을 상회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확증은 되지 않는다. 참고로 자치통감은 촉군의 전력을 4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협댐을 지나 의창까지 제법 험한 길을 지나고 나니 낯익은 지명이 나온다. 이릉(夷陵)이다. 이릉은 의창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릉전투는 의창 동남부에 있는 '효정(猇亭)'에서 시작해서 이릉에서 마무리된다고 할까? 이(夷)는 평탄하다는 뜻이 있다. 강물이 평탄해지고 비로소 산이 끝나고 평평한 구릉(陵)이 나온다는 뜻에서 '이릉'이 된 거다. 삼협의 험악한 물과 산이 이릉에 이르러서 비로소 얌전해진다고 할까. 삼국연의에서는 76만 운운하지만 삼국지에서는 유비군이 십만이 좀 넘는 걸로 나온다. 육손군은 몇 만 수준이었고, 700리에 걸쳐 진을 세웠다는 건 중국식 과장이랄까 소설적 과장이 많이 들어간 거고, 중요한 건 육손군은 집중된 상태였고 유비군은 분산된 상태에서 각개격파 당한 듯. 이릉전투의 시작은 효정에서 화공으로 육손군이 선기를 잡았고 후퇴하는 유비군을 차례차례 격파한 듯 싶다. 삼국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묘책으로 나름대로 수습하는 걸로 나오지만 이릉부터 서쪽은 산악지형이라 맹추격을 했다가는 복병에게 역습당하기 쉽다. 역시 삼국지에서는 육손은 후방을 지키지만 삼국연의에서는 육손이 직접 백제성까지 처들어갔다가 제갈공명이 만든 팔진도에 갖혔다가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구해주는 걸로 나온다.
삼국연의에서 황당한 설정이 나오면 무조건 허구라고 봐도 무방하다. 제갈공명이 정말 똑똑했다면 양군이 1년간 대치했던 무모한 상태는 피하게 했어야 하는데도.. 의창에서부터 동쪽으로 넓은 곡창지대가 이어진다. 의창은 촉으로 이어지는 목구멍에 해당되는 전략적 요충지이고 촉에게는 형주를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였지만 육손의 방어에 밀려 참패. 병력손실뿐만 아니라 쓸만한 장수들을 많이 잃은 것도 가득이나 인물부족였던 촉으로는 생각하기도 싫은 손실. 형주는 원래 9군으로 이루어졌는데 촉,위,오가 삼분하는데 그중에서도 유비가 차지한 건 지금의 호북성 남쪽 절반과 호남성 정도. 관우가 오에게 뺐긴 지역이고 이릉전투의 참패로 촉은 동쪽으로 진출을 포기하게 된다. □ 오장원싸움(234년) 제갈량의 북벌(諸葛亮 - 北伐)은 227년부터 234년까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량이 추진한 군사 정책이다. 촉한은 후한(後漢)을 계승한 왕조이기 때문에 후한을 무너뜨린 위나라(魏)를 정벌해야 한다는 유비의 사명을 제갈량이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시행되었다. 1. 제갈량의 제1차 북벌(227년~228년) 1) 지역 - 위나라 남안, 천수, 안정, 가정 일대, 2) 결과 - 전략적으로는 위나라의 승리 3) 교전국 : 촉나라 - 위나라, 서강 4) 지휘관 - 제갈량,조운,마속,관흥,장포,등지,맹달,위연,왕평 - 진식, 사마의,하후무,조진,손례,한덕,곽회,강유,최량,양릉,마준,왕랑,서황,월길 5) 병력 : 10만 명 - 30만 명, 서강병 25만 명 총병력 55만 명 6) 내용 226년 위나라에서 초대 황제 조비가 사망하고 22세의 젊은 황제 조예가 즉위한다. 사마의가 서량 자사로 떠나자 제갈량은 부하 마속을 시켜 사마의가 역모를 꾸민다는 거짓 방을 붙여 사마의를 물러나게 만드는 계책을 편다. 사마의가 조예의 명령으로 물러나자 227년에 제갈량은 유선(劉鮮)에게 출사표(出事表)를 상주하여, 북벌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이후 전쟁 준비에 들어가고, 228년에 제갈량은 기산으로 제1차 북벌을 개시했다. 이에 위나라에서는 하후연의 아들이자 조조의 사위인 하후무를 대도독으로 삼아 내보낸다. 하후무는 부하 한덕을 선봉으로 삼고 조운과 대치한다. 한덕은 아들 한영, 한요, 한경, 한기를 내보내 조운과 맞서 싸우게 하지만 조운은 한덕의 네 아들의 목을 모두 베고 한덕도 아들들의 원수를 갚으려 조운에게 덤볐다가 죽고 만다. 전투에 크게 패해 남안성으로 달아난 하후무는 10일 넘도록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도록 하였다. 시간이 급박하게 되자 제갈량은 부하 등지에게 배서를 시켜 근처에 있는 안정 태수 최량에게 거짓 교서를 보내게 한다. 남안성으로 구원병을 보내러 가던 최량은 관흥과 장포의 기습으로 크게 패해 사로잡히고 안정성은 위연의 손에 넘어간다. 제갈량에게 자신의 양아버지의 조카이자 남안 태수 양릉을 설득해 데려오라고 지시해 풀어난 최량은 양릉을 만나 제갈량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미 발각당해 최량과 양릉 모두 관흥과 장포에게 죽고 하후무는 달아나다가 촉장 왕평에게 사로잡힌다. 제갈량은 등지에게 명령해 천수성을 공격하라고 명해 배서를 시켜 천수 태수 마준에게 똑같이 교서를 보내지만 마준의 부하로 있던 강유가 이를 이미 알아차리고 기습을 해 공명은 크게 패한다. 강유의 능력을 탐낸 제갈량은 계책을 세우고 위연을 시켜 강유의 모친이 있는 기현성을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강유를 설득하라고 명령해 하후무를 풀어주고 제갈량은 부하들을 시켜 하후무에게 강유가 배신을 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다. 기현성을 위연에게 빼앗기고 떠돌던 강유는 제갈량에게 귀순하고 친분이 있던 마준의 부하 양서와 윤상, 양건을 귀순시켜 천수성을 빼앗는 데 성공한다. 하후무와 마준이 도망가자 조예는 왕랑의 추천으로 대장군 조진에게 20만 군사를 주어 제갈량을 막으려 하지만 크게 패하고 조진은 서강의 장수 월길과 그의 25만 대군을 끌어들어 촉군을 막으려 하지만 제갈량의 계책으로 서강병도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으며 왕랑도 직접 전투에 나갔다가 죽었다. 결국 조예는 사마의를 다시 불러들인다. 한편 제갈량은 옹주와 양주 지방을 대부분 수복하였고 곧이어 부하 이풍에게서 옛 촉의 사람이었던 신성 태수 맹달이 낙양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전한다. 맹달은 금성 태수 신의와 신탐을 설득하지만 신의가 배신하면서 맹달의 음모는 발각되고 결국 사마의와 서황이 신성을 공격하고 맹달에 의해 서황이 죽지만 결국 신탐과 신의 형제에 의해 맹달은 목이 베어진다. 이 부분의 본문은 가정 전투입니다. 맹달이 죽자 제갈량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마속과 왕평, 진식을 보냈으나, 가정에서 마속이 그릇된 군사 행동을 하여 패하였고, 제갈량은 군대를 철수한다. 위의 장수 곽회와 부장 만정의 군대는 조운의 군대를 추격했으나, 조운의 활약으로 추격이 저지되었다. 촉한으로 돌아온 제갈량은 마속을 참수하고(읍참마속<泣斬馬謖>, 제갈량휘루참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 유선에게 상주하여 자신의 직위를 우장군으로 낮추었다. 그러나 승상의 직무는 계속 행했다. 2. 제갈량의 제2차 북벌(228년) 1) 지역 - 위나라 진창, 기산 일대 2) 결과 - 전략적으로는 위나라의 승리 3) 교전국 : 촉나라 - 위나라 4) 지휘관 - 제갈량, 강유, 관흥, 장포, 위연, 사웅, 공기, 오의, 장억 - 조진, 왕쌍, 비요, 학소, 손례 5) 병력 : 15만 명 - 30만 명 6) 내용 228년 위나라는 오나라를 공격하다가 석정 전투에서 크게 패해 힘이 약해진다. 이 틈을 노려 제갈량이 2차 북벌을 계획하지만 그 전에 촉나라의 마지막 오호대장군이던 조운이 사망하고 만다. 제갈량은 황제 유선에게 후출사표를 올려 2차 북벌을 개시한다. 제갈량이 군사를 일으키자 소식은 조예에게로 전해져 조예는 대장군 조진과 부하 왕쌍을 내보낸다. 제갈량은 진창성을 목표로 삼아 공격하지만 진창성의 장수 학소의 격렬한 저항을 20일 동안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고 동쪽에서 조진과 왕쌍이 이끄는 구원군이 온다. 이에 촉나라의 장수 사웅과 공기가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막으려 했으나 사웅과 공기 모두 왕쌍에 의해 죽고 장억도 큰 부상을 당하면서 위군은 큰 승리를 거둔다. 이에 강유가 조진에게 거짓으로 항복을 하고 조진은 부하 비요에게 5만 군사를 주어 촉군을 습격하려 하지만 오의의 공격으로 비요는 자살한다. 이에 조진의 부하 손례가 함정을 파려는 작전을 세우지만 제갈량의 기습으로 손례는 크게 패하고 만다. 하지만 촉군 역시 군량 부족으로 인해 후퇴하고 제갈량은 위군 쫓아올 것을 대비해 계책을 세운다. 예상대로 조진의 부장 왕쌍이 촉군을 추격했으나 촉의 장수 위연에 의해 목이 베이고 만다. 3. 제갈량의 제3차 북벌(229년) 1) 장소 - 위나라 진창, 음평, 무도 2) 결과 - 전술적으로는 촉나라의 승리 3) 교전국 : 촉나라 - 위나라 4) 지휘관 - 제갈량, 관흥, 장포, 강유, 위연, 진식 - 사마의, 장합, 곽회, 손례, 학소 5) 병력 - 10만 명 30만 명 6) 내용 제2차 북벌의 실패 후 229년 제갈량은 진창성의 장수 학소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제갈량은 위연과 강유에게 5,000명의 군사를 주어 진창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관흥, 장포와 함께 진창성을 몰래 기습 공격한다. 학소는 결국 병으로 죽고 진창성은 함락된다. 뒤이어 제갈량은 촉나라와 국경을 접하는 요충지인 무도와 음평을 공략하기 위해 강유와 왕평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각각 공략을 하게 하고 사마의가 곽회와 손례에게 지원군을 주어 막게 하였으나 이미 두 곳은 함락되고 곽회와 손례는 크게 패한다. 그러나 곽회와 손례를 뒤쫓던 장포가 벼랑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당하고 성도로 이송된다. 사마의는 장합과 함께 다시 공격을 하려 하지만 다시 크게 패하고 만다. 이에 사마의는 방비만 할 뿐 더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계책을 쓰려 한다. 장합은 다시 촉군을 공격하지만 제갈량의 함정에 빠져 또다시 패하고 만다. 그러나 제갈량은 역시 성도에서 장포가 상처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에 걸려 계책을 더 이상 쓰지 못한다. 그 뒤 제갈량은 사마의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한중으로 철수한다. 4. 위의 반격(230년) 1) 지역 - 위나라 기곡, 기산 일대 2) 결과 - 전술적으로는 촉나라의 승리 3) 교전국 : 촉나라 - 위나라 4) 지휘관 - 제갈량, 관흥, 위연, 진식, 등지 - 사마의, 조진, 유엽 5) 병력: 10만 명 - 50만 명 6) 내용 230년 위나라의 대장군 조진과 사마의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촉나라를 침공한다. 그러나 진군 도중 큰비가 내려 철수하기로 결정한다. 철수 과정에서 복병을 두는 문제가 일어나 사마의는 기곡에 복병을 두었으나 조진은 사곡에 진을 쳤다. 제갈량은 위연과 진식에게 군사를 내주어 위군을 추격하지 말라고 했으나 위연과 진식은 명을 듣지 않고 기곡으로 갔다가 사마의의 복병으로 대패하고 진식은 그 책임으로 처형당한다. 이에 공명은 방비를 소홀히 한 조진을 기습 공격해 승리를 거두고 조진은 병으로 사망한다. 이에 조예가 사마의에게 조진의 복수를 하라고 명하고 사마의는 제갈량과 진법 싸움을 한다. 사마의가 혼원일기진을 펼치자 제갈량은 팔괘진을 펴 위군을 위협하고 사마의는 부하 대능, 장호, 악침을 시켜 팔괘진을 뚫으려 하지만 크게 패해 사로잡힌 후 돌려보내 진다. 전투에서 패하고 사방에서 몰려오자 사마의는 겨우 남쪽을 뚫고 탈출한다. 제갈량은 많은 승리를 거두고 중원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이엄의 부하 구안이 제갈량에게 앙심을 품고 위나라에 항복하는 바람에 회군 명령으로 인해 한중으로 물러난다. 5. 제갈량의 제4차 북벌(231년) 1) 장소 - 촉나라 노성, 검각 2) 결과 - 전술적으로는 촉나라의 승리 3) 교전국 : 촉나라 - 위나라 4) 지휘관 - 제갈량, 양의, 관흥, 강유 - 사마의, 장합, 곽회, 손례 5) 병력 : 10만 명 - 20만 명 6) 내용 231년 봄에 제갈량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북벌을 감행한다. 제갈량은 그동안 문제가 되었던 군량 보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서 지방에서 보리를 수확해 조달하기로 한다. 이에 위나라의 사마의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농서를 공격하나 제갈량은 무사히 보리를 수확해 노성으로 운반한다. 결국 사마의는 지구전으로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옹주와 양저우 시양주에서 위나라의 20만 대군이 노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노성의 군사들에게 3달마다 한중으로 귀향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터였다. 제갈량이 한 번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말하자 군사들은 사기가 올라 위군을 기습 공격으로 무찌르고 대승을 거둔다. 그러나 오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한다는 이엄의 거짓 상소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촉군은 한중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촉군을 뒤쫓아오는 장합을 활을 쏘아 죽인다. 6. 제갈량의 제5차 북벌(234년) 1) 장소 - 위나라 오장원, 북원, 위수, 기산 2) 결과 전략적으로는 촉나라의 패배 3) 교전국 : 촉나라 - 위나라 4) 지휘관 - 제갈량,강유,마대,위연,양의,오반,오의, - 사마의,,사마사,사마소,곽회,손례,장호,낙침 5) 병력 : 12만 명 - 30만 명 6) 내용 제갈량은 4차 북벌의 실패 후 3년 동안 국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하고 북벌을 계획하지만 그 중에 관흥이 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준비를 한다. 드디어 234년에 제5차 북벌을 감행해 장안에서 위나라의 주력 부대를 무찌르기로 하여 오장원에 진을 친다. 그리고 제갈량은 기산에 본진을, 사곡과 검각 사이에 진영을 친다. 한편 사마의는 위수 기슭에 진을 치고 곽회와 손례에게 북원에 요새를 마련해두고 적의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제갈량은 북원을 공격하는 척하며 위수를 공격하려 한다. 그러나 사마의는 이를 간파하고 북원에서는 위연이 위군의 기습으로 후퇴했으며 위수에서는 오의와 오반이 장호와 악침의 공격으로 오의는 도주하고 오반을 전사해 제갈량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에 제갈량은 비의를 오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손권에게 군사를 일으키라는 전한다. 손권은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의 조예와 격전을 벌였으나 육손이 이끄는 선발대가 위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오군은 철수하고만다. 결국 제갈량은 마지막으로 사마의를 죽이기로 결정해 사마의를 호로곡으로 유인해 화약을 터뜨린다. 그러나 때마침 엄청난 폭우가 쏟아져 사마의는 호로곡을 무사히 빠져나간다. 한편 제갈량은 지병이 재발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7일 동안 기양법을 한다. 하지만 위연의 실수로 6일째 되는 날 등불 하나를 꺼뜨리고 병세가 악화된 제갈량은 다음날 사망한다. 그리고 촉군의 신속히 퇴각을 하는데 퇴각 도중 위연과 양의가 의견차로 갈라서고 강유, 양의, 마대가 위연을 모살한다. 양의 역시 성도로 돌아간 후 파직되고 자살한다. 하지만 제갈량의 죽음으로 촉나라는 크게 쇠퇴한다. 7) 연의에서의 북벌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은 6번의 북벌을 행하였다고 나와 있다. 8) 북벌의 결과 촉한은 삼국 중 가장 국력이 미약했으며 영토 또한 가장 적었다. 특히 북벌의 대상인 위나라는 삼국 중 가장 국력이 강했고 군사력은 대략 다섯배 정도 차이가 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갈량은 수차례 북벌을 감행함으로써 촉한의 국력을 소진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촉한은 익주라는 불리한 산간지형에 위치했으며 형주 또는 북쪽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위나라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북벌은 그런 상황에서의 타개를 위한 촉한의 마지막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혹자는 차라리 위연의 계책처럼 자오곡으로 습격해서 사마의를 기습하거나 아니면 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북벌을 준비했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여러번 북벌을 감행하고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시종일관 수비가 아닌 공세로 일관했다는 것만으로도 제갈량의 뛰어남을 알 수 있다. 또한 자오곡 기습 작전은 촉군에게는 너무도 큰 도박이었다. 사마의가 이끈 위의 군사는 위나라 전력의 일부였다. 사마의는 패배하더라도 전력을 보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이 이끌고 간 촉의 군사는 촉나라 전력의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국의 전력을 걸고 기습 작전을 감행하기에는 실패의 위험이 너무도 컸다. 기습이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만일 기습이 실패한다면 촉나라는 바로 멸명하고 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갈량은 기산을 거점으로 하여 정석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 참전 장수 - 촉한 제갈량, 장완, 강유, 조운, 위연, 진식, 장억, 장익, 관흥, 오의, 양의, 왕평, 마대, 마속, 마충, 등지 - 위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조진, 학소, 왕쌍, 손례, 곽회, 하후패, 하후혜, 하후상, 하후무, 장합 •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주요 등장인물 ○ 군주 - 한 영제 · 소제 · 헌제 - 위 : 조조 · 조비 · 조예 · 조방 · 조모 · 조환 - 촉 : 유비 · 유선 - 오 : 손견 · 손책 · 손권 · 손량 · 손휴 · 손호 - 진 : 사마염 - 기타 : 공손찬 · 도겸 · 동탁 · 마등 · 여포 · 원소 · 원술 · 유언 · 유장 · 유표 · 장각 · 하진 ○ 참모 - 위 : 가후 · 곽가 · 만총 · 사마사 · 사마소 · 사마의 · 서서 · 순욱 · 순유 · 정욱 · 종회 · 진군 - 촉 : 강유 · 동윤 · 등지 · 마량 · 마속 · 방통 · 법정 · 비의 · 양의 · 장완 · 제갈량 - 오 : 감택 · 고옹 · 노숙 · 육손 · 육항 · 우번 · 장굉 · 장소 · 장제 · 제갈각 · 제갈근 · 주유 - 진 : 가충 · 순욱 · 장화 - 기타 : 곽도 · 괴량 · 괴월 · 봉기 · 심배 · 왕윤 · 이유 · 장송 · 저수 · 전풍 · 진궁 · 허유
○ 무장 - 위 : 등애 · 방덕 · 서황 · 악진 · 우금 · 장합 · 장료 · 전위 · 조인 · 조진 · 조홍 · 하후돈 · 하후연 · 허저 - 촉 : 관우 · 마초 · 마대 · 엄안 · 요화 · 위연 · 이엄 · 장비 · 장익 · 조운 · 진도 · 하후패 · 황충 - 오 : 감녕 · 능통 · 서성 · 육손 · 육항 · 여몽 · 정보 · 정봉 · 주태 · 태사자 · 한당 · 황개 - 진 : 두예 · 문앙 · 양호 · 왕준 - 기타 : 고순 · 기령 · 노식 · 동승 · 문추 · 안량 · 장임 · 제갈탄 · 주준 · 채모 · 화웅 · 황보숭 ○ 비한족 - 가비능(선비) · 동천왕(고구려) · 구력거(오환) · 답돈(오환) · 맹획(남만) · 비미호(일본) · 어부라(흉노) - 기타 관로 · 남화노선 · 사마휘 · 예형 · 우길 · 좌자 · 채염 · 초선 · 화타
◎ 삼국지의 주요 전투 - 황건적의 난 · 동탁 토벌전 · 형주 전투 · 계교 전투 · 연주 전투 · 복양 전투 · 곡아 전투 · 서주 전투 · 낙양 전투 · 완성 전투 · 수춘 전투 · 하비 전투 · 관도 대전 · 여남 전투 · 하북 쟁탈전 · 장판 전투 · 적벽 대전 · 남군 전투 · 형주 평정전 · 동관 전투 · 합비 전투 · 서촉 공방전 · 한중 공방전 · 한중 전투 · 번성 전투 · 이릉 대전 · 제갈량의 남정 · 제갈량의 북벌 · 가정 전투 · 석정 전투 · 강유의 북벌 · 위의 촉 정벌 · 진의 오 정벌
삼국지 전면지도
삼국 칼라지도
관도 대전 지도 (후한 헌제 5년 서기 200년)
조조의 북방 평정 지도 (서기 203~207년)
적벽대전 지도 (서기 208년 겨울)
적벽대전 전후의 형주지도 (손권, 유비의 형주 쟁탈전)
유비의 서촉 정벌 지도
여몽의 형주쟁탈지도
이릉대전 지도 (221년 여름 ~ 222년 여름)
제갈량의 북벌지도
종회와 등애의 촉 평정도 (촉한의 멸망)
진나라 장군 두예의 오 정벌도 (동오의 멸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