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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전반부는 다니엘의 예언에 주목하고 있다. 페르시아, 헬라, 로마, 유대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유익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로마시대의 배경을 다루고 있지만 성경과 관련된 사항들을 선별하여 다루고 성경본문에 관계된 성경구절을 제시한다.
제1부 유대에 영향을 미친 국가들
1. 다니엘의 예언과 열방---이 신상은 역사적으로 보면 '머리'가 금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바벨론(바빌로니아, B.C.606-538)을 가리키고, '가슴과 팔'이 은으로 되어 있는 것은 바사(페르시아, B.C.537-332)가 일어날 것을 가리키고, '배와 넓적다리'가 놋으로 되어 있는 것은 헬라(그리이스, B.C.331-64)가 일어날 것을 가리키고, '종아리'가 철로 되어 있는 것은 로마(로마, B.C.63-A.D.476)가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두 발'이 철과 진흙으로 되어 있는 것은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A.D.364) 동로마는 오래 지속되나(A.D.1453멸망) 서로마는 일찍 망하게 될 것을 가리키며(A.D.476멸망) '열 발가락'이 있는 것은 로마 제국이 후에 여러 제국이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뜨인 돌'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가리킵니다. 복음으로 세워진 하나님 나라가 계속 확장하여 온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2. 페르시아 시대(B.C. 539∼330)
1) 페르시아의 정치와 영향---제국이란 하나의 세계(지역), 하나의 국가를 넘어 다른 세계, 다른 민족, 다른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의 정치권력, 국가권력을 말한다.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1)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주변의 자극과 역사경험을 축적할 수 있으며, 2) 여러 민족, 국가 간의 문명충돌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해야 생존할 수 있는 지역이며, 3) 농업경제와 교역경제가 발달한 지역으로 제국의 형성이 가능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집트는 지리적, 문화적으로 고립적인 곳이라 초기에는 4대문명 가운데 가장 발달하였으나 서기전 7-5세기에 이르러 철기문명의 도래와 함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낙오되고 결국 문명의 소멸로 이어졌다. 페르시아는 북부 이란의 척박한 곳에서 출발하였지만 주변의 문화에 자극받고 수용하여 제국을 이루었다.그런데 페르시아보다 먼저 제국을 구축했던 앗시리아가 제국으로서 역사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앗시리아가 이룩한 문명적 성과가 주변민족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한 반면에 페르시아는 그리이스, 헬레니즘, 로마의 성장과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제국의 역사에서 커다란 평가를 받는 것이다. 페르시아인(성경에선 바사인)은 B.C. 1000년부터 러시아 남부로부터 이란 지역으로 이동한 유목민이다. 그들은 페르시아만 동쪽에 정착해 살았다. 기원전 549년, 메디아(성경에선 메데, 지금의 터키)를 병합한 키루스(성경에선 고레스) 대왕은 ‘아케메네스 왕조’로 불리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남유다 멸망 이후 이스라엘의 자주적인 역사는 막을 내리고 세계사적인 역사의 흐름에 그 운(運)을 함께 하게 되었다. 한 시대를 휩쓸었던 종주국이 새로 일어난 신흥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면 속주에 불과한 이스라엘은 고스란히 그 신흥 제국의 신민이 되었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우스(B.C.555-539)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게 근동의 맹주 자리를 내어주면서 이스라엘은 페르시아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때문에 이 당시 이스라엘 역사란 페르시아의 역사와 정책에 무관 할 수 없다
2) 페르시아의 종교와 유대교---페르시아 혼합주의에 나타난 종교적 모티브 ⓵하늘을 왕궁의 형태로 이해⓶자연과 인간의 대립이라는 이원론적 경향⓷세계제국이 교체될 수 있다는 교훈⓸인간과 예언자와구원자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중재자⓹천사와 악마 혹은 선과 악에 대한 이원론적 개념⓺부활과 심판에 대한기대
3) 고대신화와 그리스도교---오시르시-디오니소스 신화와 예수의 이야기가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⓵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육체를 가진 신이며 구세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사실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오시리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소아시아의 아티스, 페르시아의 미트라스 등 어느 신도 세상을 구할 구세주며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시대적으로 이런 신화들에 대한 이야기는 기원후 1,2세기에나 등장합니다 )⓶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며 어머니는 인간 처녀이다.(사실이 아닙니다.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출생은 인간으로 변장한 신적인 존재가 성적 욕구를 이기지 못해 인간인 여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생명이 태어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탄생은 신과 인간의 성적 접촉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태어났으며 신화와는 달리 구체적인 역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신화에서 발견되는 처녀 탄생 이야기는 기독교 발생 이후에 등장합니다.)⓷ 그는 3명의 양치기가 찾아오기 전인 12월 25일에 누추한 곳이나 동굴에서 태어났다.(기독교가 생기기 전 어느 신화에서도 신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양치기가 찾아오거나 누추한 곳에서 태어났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미트라스 신화에서 미트라스가 바위에서 태어났을 때 목동들이 선물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긴 하나 기독교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오히려 기독교가 생기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12월 25일을 예수 생일로 기념하지 않았습니다. 이 날은 기원후 336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승인한 날에 불과합니다.)⓸ 그는 신도들에게 세례(침례) 의식을 통해 다시 태어날 의식을 준다. 그는 신도들에게 세례((고대 신비주의 종교들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는 것에 전해질 뿐 구체적으로 어떤 의식을 베풀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으며 설령 알려져 있다 해도 후대의 자료들입니다. 게다가 지금 알려져 있는 이시스의 의식에는 제사를 지내기 전에 새끼 돼지와 함께 목욕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바카스의 신비종교의 경우도 정결한 물로 몸을 씻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런 관습은 정결함과 관련된 어느 문화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기독교의 침례 의식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⓹그는 결혼식장에서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을 행한다.(디오니소스가 포도주의 신이기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며 하는 제례 의식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결혼식 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과는 공통점이 없으며 그나마 기원후 160년경의 기록입니다.) 그 외 고대 신들이 예수님처럼 부활되었다거나 구체적인 점들까지 동일하다고 보는 몇가지 신화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습니다.⓺ 오시리스-디오니소스는 예수님처럼 부활했는가?스웨덴의 저명한 학자로 고대 유물 왕립아카데미 회원인 메팅거는 ‘부활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기독교 이전에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들이 없었다는 데에 대부분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런 신들이 등장하는 시점은 2세기 이후입니다.” 게다가 그는 고대의 신화와 예수 부활 사이에는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신화에서 나오는 부활의 이야기는 계절에 따라 살다가 죽는 식물의 순환과 관련이 있으며 누군가의 죄를 대신하여 당하는 고난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4) 페르시아 시대 유대인의 포로 귀환---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시대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귀환시대 이후를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분류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에 기록된 말라기서 이후 신약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예수님이 탄생할 때까지의 기록이 성경 속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침묵시대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당시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포로귀환의 시대가 페르시아 시대였음을 우리는 앞서 배웠습니다. 그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오3세 때에 페르시아는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승자는 알렉산더였습니다. 알렉산더는 B.C. 356년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다른 이름은 필립포스 3세입니다. 에페이로스의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이 그의 어머니로 이름은 올림피아스 얻습니다.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가 아들을 위해 청해온 당시의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유명한 플라톤의 제자였으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운 자였습니다. 알렉산더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영향을 받아 그리스문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그의 아버지로 부터 배워 지덕과 용맹을 갖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B.C.336년 아버지 필립포스 왕이 암살 되자 군대의 추대로 20세에 그는 왕이 되었으며, 그리스 대표자 회의에서 헬라의 맹주로 뽑혔습니다. 그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지금의 터키가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부터 수리아지방과 팔레스틴, 그리고 이집트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그는 새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동으로 계속 진군하여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 등이 위치한 페르시아의 마지막 영토를 빼앗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칸지역과 인디아의 인더스강 지역까지 점령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친 부하들의 건의레 따라 군사를 되돌린 알렉산더는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오3세의 딸과 결혼하지만 모기에게 물려 학질로 B.C. 323년에 죽었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14년 만에 죽은 것입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의 부하들에 의해 나라가 분할통치 되다가 각각의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카산더는 마게도냐와 헬라, 리시마쿠스는 그리스 동북부의 트리키아, 프톨레미는 이집트, 그리고 셀류코스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땅은B.C.305년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미가 이집트에서 왕조를 열고 지배하다가 B.C.198년에 셀류코스왕조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정복한 영토에 자신 이름의 도시를 70개나 세웠는데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곳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는 또 곳곳에 헬라문화와 헬라어를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기간 동안 나라를 잃기는 했으나 문화적인 동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인 보다 나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가 유대를 통치한 때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는 곳마다 지혜를 강조하였으며, 그 곳에 헬라주의의 문화를 심으려고 했습니다. 헬라는 교육을 통해 인도주의 문화를 건설했으며, 유대인들에게도 헬라화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유대인들은 헬라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5)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갈등---
사마리아 역사의 윤곽은 고고학적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사마리아를 정복한 이후부터나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사마리아는 시돈의 식민지로 약 150여 년간(BCE 480-330)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불모지는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제의 동방정벌이 시작되면서부터 비로소 마케도니아의 식민도시로서 화려하게 부활하기 시작했다.16) 그는 이 도시를 파괴한 이후, 마케도니아인 지배자들을 이곳에 이주시켜 그곳 원주민들과 함께 세겜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건하게 하였다(BCE 331). 유대지역 중심의 통합과정에서 소외된 사마리아 지역의 ‘남은 자들’이 느헤미야 시대 이후 계속해서 야웨 신앙을 지켜가고 있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들은 세겜을 재건함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구약 이스라엘의 야웨 신앙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이 사마리아 재건을 통하여 그리심 성전을 짓고, 이스라엘의 제사직을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근간인 토라를 자신들의 역사와 신학적 관점에서 해석하여 예루살렘 전통과 대립되는 ‘사마리아 오경’으로 편집하였기 때문이다.17) 이러한 일련의 ‘사마리아주의’의 재건은 유대지역 중심의 통합 여파가 가져오게 될 필연적인 반대급부였다. 유대교의 문헌들에는 이 시기에 대한 유대교와 사마리아의 뿌리 깊은 반목이 반영되어 있다. 기원전 2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벤 시라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마음으로 미워하는 민족이 둘 있고, 세 번째 것은 민족이라 할 수 없다. 사마리아 산에 사는 주민들과 블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그들이다(50:25-26; 비교. 신 32:21). 또한 기원전 150년경 프톨레마이우스 IV세 필로메토르는 이집트로 망명한 예루살렘의 대사제 온니아스 IV세로부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을 위하여 레온토폴리스라는 지역에 예루살렘 성전을 본떠 건축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이에 사마리아인은 세겜의 그리심 성전을 모델로 제시하며 맞섰는데, 결국 그들의 주장은 거절되고 만다(유대고대사 13.74-79).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의 예루살렘 성전과 그리심 성전을 중심으로 한 대결 양상은 기원전 2세기 중반의 디아스포라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3. 헬라 시대(B.C. 330∼142)
1) 다니엘의 예언--- 거대한 제국 등장
2) 알렉산더 Ⅲ세의 페르시아 정복과 유대---페르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서쪽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 반란 국을 그리스가 도우며 개입합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침공할 좋은 구실이 되었다며 좋아하지만
결과는 뜻 밖에 결과가 납니다. 페르시아를 막고자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들이 연합하여 동맹을 맺습니다. 그 동맹을 '델로스 동맹'이라 하는데 이로 그리스가 페르시아에게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델로스동맹 안에서의 최강국인 아테네에 부패로 인하여 그 안에 있던 나라들이 다시 반 아테네의 뜻을 가지고 동맹을 맺게 되는데 그걸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라고 합니다.이 동맹 안에는 스파르타가 있습니다. 아테네를 그대로 지지하고 있는 델로스 동맹과 반 안테네 정책의 펠레폰네소스 동맹이 전쟁을 하게 되고 이 싸움 때문에 양쪽에 힘이 약해지자 마케도니아의 필립과 그의 아들 알렌산더가 그리스를 하나로 통일됩니다.
3) 네 나라로 분열된 헬라제국---성경은 이러한 헬라 제국을 ‘놋과 같은 나라’(다니엘 2:32,39), ‘표범과 같은 짐승’(다니엘 7:6), ‘수양을 쳐서 엎어뜨리는 수염소’(다니엘 8:5-8)로 묘사하고 있다. 이 수염소는 두 눈 사이에 현저한 뿔이 있는데(다니엘 8:5) 이 뿔은 헬라의 첫째 왕으로 가장 강력했던 알렉산더 대왕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큰 뿔이 꺾이고 네 뿔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나옴으로써 알렉산더 사후에 나라가 넷으로 쪼개질 것을 말해주고 있다(다니엘 8:22).다니엘서의 예언처럼, 알렉산더 사후 시리아 지역을 다스리던 안티고누스(Antigonus)에 맞서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Diadochi, 디아도키)를 자처하는 장군들의 권력다툼 시기인 ‘디아도키시대’(BC 323-301)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안티고누스가 BC 301년 입수스(Ipsus) 전쟁에서 죽자 디아도키 시대가 끝나고 네 왕조로 분열되었다. 북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스리던 셀류큐스(Seleucus), 애굽과 팔레스타인, 남부 시리아 지역을 다스린 프톨레미(Ptolemy), 소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리시마쿠스’(Lysimachus), 헬라(마게도니야, 그리스) 지역을 다스리던 카산더(Cassander)가 이들 네 지역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이 네 왕국 중 특히 성경의 역사와 관련되는 왕국이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이다.
4)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팔레스타인(B.C. 320∼200)---먼저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하여 다스리던 왕조는 프톨레미 왕조다. 이들은 이방 종교에 관대해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에 이주시켰으며, 프톨레미 2세 지원 하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당시 세계적 공용어인 헬라어로 번역하였다(70인경). 헬라어가 당시 세계 공용어가 된 배경에도 세계를 정복하고 헬라어를 보급한 알렉산더가 있다. 그러나 주전 198년, 셀류쿠스의 왕 안티오쿠스 3세가 프톨레미 5세와의 파내우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팔레스타인 통치권은 셀류쿠스 왕조로 넘어가게 되었다. 프톨레미 왕조는 유다 관습과 전통에 관용적이었던 반면, 셀류큐스 왕조는 헬레니즘 문화를 강압적으로 이식시키려 하고 많은 세금을 부과했으며 성전 보물을 약탈하기까지 함으로서 강력한 저항을 초래하였다. 특히 셀류쿠스의 왕 안티오쿠스 4세는 자신을 스스로 신의 현현(顯現)으로 자처하여 ‘에피파네스’(Epiphanes)라 칭하였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성소’를 더럽혔고(다니엘 11:31) 주전 167년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였으며 12월 8일에는 성전의 제단에 ‘제우스 신상’(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숭배하게 하였다(다니엘 11:31). 심지어 율법을 지키는 자는사형에 처하고, 왕의 생일을 기념케 하기 위해 매월 25일마다 돼지를 잡아 제단에 바치도록 하였다. 성경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하여 “네 뿔 중에 한 뿔에서 나오는 작은 뿔”로 칭하고 그가 영화로운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하늘 군대인 이스라엘 백성을 쳐서 별들을 떨어뜨리고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제하고 성소를 헐어버린다고 기록하고 있다(다니엘 8:8-11).
4. 시리아 시대(B.C. 200∼142)
1) 예루살렘의 변화와 헬라화---기독교는 유대교를 뿌리고 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 성서를 수용하였다. 그래서 유대교의 성서를 구약 성서로 명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는 책들을 신약 성서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서에 제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서와 유대교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신약 성서가 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은 다양한 관련 배경들을 통해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신약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초기 기독교가 살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특히 고대 근동의 지중해 문화, 그리스의 헬라화 정책,로마의 정치적 통치, 구약 성서 및 유대교 등을 배경으로 하며, 시기적으로는 주전 4세기 중엽에서부터 주후 1세기까지를 말한다. 신약 성서는 당시에 세계를 지배하였던 그리스와 로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는 신약 성서가 그리스어로 기록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의 지배는 알렉산더 대왕(356-323 B.C)의통치 하에서 이루어졌고,그의 사후에는 셀류시드 왕조와 톨레미 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를 관통하고 있던 것이 헬레니즘 문화였다. 셀류시드는 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였으며 톨레미는 이집트를 지배하였다이후 마카비 전쟁으로 다양한 유대 종파가 출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마카비 전쟁의 승리로 셀류시드 왕조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한 동안 누리게 되었고, 그 후 로마에 의해 정복되기 전까지를 하스모니안 통치 시기라고 부른다. 그 이후에 로마는 이두메 출신의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세워 통치하게 하였으며, 그의 사후에는 세 아들에게 지역을 나누어 분봉왕으로 삼았다.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잠시 동안 다스렸던 아켈라오스와 갈릴리와 요단강 동편의 베리아 지방을 다스렸던 안티파스가 신약 성서와 관련된다.그리스는 당시 동서양을 통합시키고 그 지역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만들려고 알렉산더 대왕이래 헬라화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시행되었다. 헬라화의 정책은 세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다 첫째로, 헬라화는 많은 헬라식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졌다.헬라식 도시는 성벽 안에 아고라로 불리우는 광장을 중심으로 신전, 공공 건물, 극장, 학교, 시장 점포 등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그곳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접근하여 정치적인 토론, 종교 의식 거행, 교육 활동, 문화적인 활동, 상업적인 활동 등을 하였다.둘째로, 헬라화는 코이네 헬라어의 보급을 통해 이루어졌다. 코이네 헬라어는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 지역의 사람들이 쉽게 헬라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구어체 헬라어로서 당시의 국제어였다. 원래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 성서까지도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번역을 70인역 성서라 한다. 언어의 통일은 제국의 통합과 의사 소통의 활설화를 가져왔고, 후에 기독교 선교에도 도움이 되었다셋째로, 헬라화는 종교적 혼합주의라는 관용 정책을 통해 활성화되었다. 지방신의 이름을 헬라식과 로마식으로 바꾸고, 황제 숭배만 인정하면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출었다.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는 다양한 종교 활동(신비 종교,예언 활동,치유 활동,축귀,영지주의 등)과 철학 운동(스토아학파,견유학파,에피큐로스학파,피타고라스학파 등...)이 넘쳐나고 있었다. 헬라화가 진행되던 이 시기에 다양한 형대의 유대교로 존재하였으며, 단일한 유대교를 형성하기 위해있었다.헬라 문화는 유대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춰 지기도 했다. 특히 갈릴리 지역은 헬라어를 많이 사용하였고,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노도 팔레스틴 태생이었다. 헬라화에 반대해 마카비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마카비 일대기가 헬라어로 쓰여진 것을 보면 헬라화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팔레스틴 유대교는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마카비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제1차,2차 유대인 전쟁에서는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에서 추방되어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많은 문학 작품들이 기록되기도 하였다. 박해 상황 속에서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하며 기록한 묵시 문학, 토라에 대한 재해석의 결정체인 미쉬나와 탈무드 같은 랍비 문학, 성전 의식과 회당 예배의 말씀 연구와 기도문, 그리고 유대 가정에서의 종교 의식 등에 관련되는 많은 예배 문서 자료들이 있었다. 유대교는 다른 지역에서도 발전하였는데, 디아스포라의 발생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용병에 지원하거나 장사를 목적으로 타지로 나가게 되었고, 이주 정책에 의해 강제로 고향을 떠나기도 하고, 정치적 박해나 천재 지변을 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그네길에 나서거나, 그리고 선교나 관광, 또는 친지 방문 등의 목적으로 여행길에 오르기도 하였다.실제로 북이스라엘 왕국은 많은 이주를 당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 유대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고, 그 결과 A.D 5세기에 바빌론 탈무드를 완성하였다.헬라 문화 속에서 유대인들은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문제와 관련하여 세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었다. 즉, 헬라 문화에 동화되는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완강하게 거부하는 길로 나가든지, 헬라 문화 속에서 유대 전통을 설명하거나 변중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헬라화 정책에 대한 반발과 민족적 독립을 향한 신앙적인 열심의 향방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는 종파들이 생겨났다.
2) 예루살렘 성전 강탈과 우상숭배---에스겔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지 6년째 되던 해 6월 5일입니다. 이때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기 약 4~5년쯤 전입니다. 그때 에스겔은 유다의 장로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에게 임하여 그를 환상 중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에스겔이 처음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 안뜰의 북문 입구입니다. 그곳에 질투를 일으키는 우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질투를 일으킨다는 것은 음란(성적인 욕망)을 일으키는 뜻도 담겨 있으니, 이 우상은 사람의 마음 내면에 질투와 성적인 욕망이 끝없이 일어나게 하는 아주 흉악한 신입니다. 구약 학자들은 이 질투의 신이 바알과 아세라 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가장 널리 퍼져 있던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중의 하나가 바알과 아세라인데 예루살렘 성전 안에 이 우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3) 하시딤---유대왕국에서는 안티오코스 4세와 개혁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그리스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일련의 것들이 유대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체육학교를 개설하고 모든 젊은이들과 제사장들까지 나체로 운동을 시키는 일이 있게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한편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점점 더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사독가(家)출신 대제사장 시몬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오니아스 3세가 대제사장 직책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는 친 이집트 세력인 보수파에 동조하는 사람이었고 율법에 대한 생각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니아스'는 안티오코스의 눈에 가시와 같았기 문에 기원전 175년 결국 축출되었으며, 제사장직책은 그의 형제인 '야손'이 안티오코스 에게 거액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매수하였다. 야손은 자기 형과는 반대로 개혁파에 동조하여 예루살렘을 그리스식 도시로 재건한 후 시리아의 수도를 본받아 안티오크로 으로 개명할 것을 재가해 허락을 받게되었다. 기원전 172년 성전관리인 시몬의 형제인 '메네라오스'가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게되었다. 결국 야손 또한 축출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유대주민들의 반발 속에서 보수파에 의해 '아크라'라는 그리스식 요새에 감금당해버린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그러한 행동을 반란의 신호라고 단정해버리고, 시리아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진군시킨다. 시리아군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닥치는데로 주민들을 살해하고 추방했다. 그런 다음 병사들, 퇴역군인들 및 시리아인 식민지개척자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재개발 한 후 아폴로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총독 아폴로니오스는 예루살렘을 정치, 종교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그리스의 신 제우스와 그의 동료신들(아테나와 디오니소스)을 섬기는 신전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제우스신을 섬기며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하였으며, 거부하는 자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당했다. 이와 같은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화 정책과 종교탄압 정책에 강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하시딤 운동이다
4) 하스몬 가문과 마카비 전쟁---유대왕국에서는 안티오코스 4세와 개혁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그리스화 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일련의 것들이 유대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체육학교를 개설하고 모든 젊은이들과 제사장들까지 나체로 운동을 시키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반발을 사게 되었다. 한편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갈등은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점점 더 심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사독가(家)출신 대제사장 시몬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오니아스 3세가 대제사장 직책을 위임받게 되었다. 그는 친 이집트 세력인 보수파에 동조하는 사람이었고 율법에 대한 생각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니아스'는 안티오코스의 눈에 가시와 같았기 문에 기원전 175년 결국 축출되었으며, 제사장직책은 그의 형제인 '야손'이 안티오코스 에게 거액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매수하였다. 야손은 자기 형과는 반대로 개혁파에 동조하여 예루살렘을 그리스식 도시로 재건한 후 시리아의 수도를 본받아 안티오크로 으로 개명할 것을 재가해 허락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172년 성전관리인 시몬의 형제인 '메네라오스'가 야손보다 더 많은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게 되었다. 결국 야손 또한 축출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메넬라오스는 유대주민들의 반발 속에서 보수파에 의해 '아크라'라는 그리스식 요새에 감금당해버린다. 안티오쿠스 4세는 그러한 행동을 반란의 신호라고 단정해버리고, 시리아의 군대를 예루살렘으로 진군시킨다. 시리아군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닥치는 데로 주민들을 살해하고 추방했다. 그런 다음 병사들, 퇴역군인들 및 시리아인 식민지개척자들이 거주하는 도시로 재개발 한 후 아폴로니우스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총독 아폴로니오스는 예루살렘을 정치, 종교적으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그리스의 신 제우스와 그의 동료신들(아테나와 디오니소스)을 섬기는 신전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제우스신을 섬기며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하였으며, 거부하는 자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당했다. 이와같은 안티오코스 4세의 그리스화 정책과 종교탄압 정책에 강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하시딤 운동이다. 하시딤은 히브리어로 '경건'을 의미하는데, 이 운동은 한 마디로 말해서 '회개운동' 이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티오코스의 잔인한 종교탄압을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풀고 구원의 날을 내려주도록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율법의 주위에 울타리를 칠 것을 주장했다. 일몰에서 시작해서 일몰로 끝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일몰 몇 시간 전부터 안식에 들어가고 다음 일몰 몇시간 이후까지 안식을 취했다. 하시딤 운동에 참가한 자들은 안디오코스 4세의 칙령에 따라 무참하게 살해됨으로 수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했다. 견디다 못한 하시드들은 대다수가 유대 사막지대로 피신했다. 그러자 시리아 관리들은 하시드들의 은거 지를 색출하여 잠복해 있다가 안식일에 쳐들어가 학살을 단행 했다. 하시드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습격을 당해도 도망도 저항도 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앉아있었다. 따라서 공격자들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위반자들을 쉽게 처형할 수 있는 이점을 살리려고 안식일을 택해 공격을 가하곤 했다. 그래서 한 자리에서 1천여 명을 살해한 기록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하면 한 어머니의 일곱 아들이 모두 하시딤운동에 가담했다가 전원이 순교를 당한 사례도 발견된다.
5) 요나단(B.C. 160∼143)과 시몬(B.C. 143∼134)---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교 박해는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왕은 특별히 천성적으로 잔악한 바키데스에게 병력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고문했다. 박 해와 핍박에 대해 순교와 무저항으로 소극적이던 저항운동은 점차 적극적인 공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폭동의 불길은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는 하스몬가의 마타디아스라는 제사장이 다섯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시리아의 한 관리가 이 마을에 찾아와 이교의 제사를 강요했다. 마타디아스는 거절했으나 배교한 자들을 죽였다. 이것을 계기로 마타디아스는 그의 아들들과 산으로 도망쳐 많은 유대인 열심파들과 합류하게 된다. 저항운동은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 즉, 마카비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BC 166-16)와 요나단(BC 160-143) 그리고 시몬(B.C142-134)에 의하여 차례로 주도 되었다. 이들의 저항운동은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고 BC 165년 12월 25일 유다의 지휘 아래 성전이 청소되고, 재 봉헌되고,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의 뒤를 이어 당시 8살의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5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며 리시아스가 섭정을 하게 된다. 이 때 리시아스는 유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절기를 마음대로 지킬 수 있도록 완전한 종교적인 자유를 허락하게 된다.
6) 에세네파---⓵ 에세네(Essenes)란 원래 (호씨오스(헬), 거룩)이란 말에서 왔다고 필로는 말한다. 에세네파의 사상의 본질은 “거룩”이라는 배타적인 개념에 있었다.⓶ 에세네파는 율법 준행이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하고 다른 사회에서 들여온 음식은 먹지 않았다. ⓷. 재산의 공유권을 주장하는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상호간의 강한 책임의식과 성경연구를 중시하고 많은 성경을 필사하였다. ⓸ BC 2세기 초까지, 팔레스타인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며 사독 가문 출신의 대제사장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체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⓹ 시리아 왕인, 셀류시드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BC 175-164)가 권좌에 오르는 해인 BC 175년부터 강력한 헬라화 정책이 팔레스타인에 밀려오면서 율법서가 불태워지고, 반율법적인 이교의 의식이 강요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약탈되고,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대제사장권은 권력의 암투의 대상이 되었으며, 예루살렘 성전이 제우스 신전으로 바뀌는(BC 167년) 등 유대인의 전통 신앙이 참혹하게 훼손을 당하는 암울한 시대가 전개되었다. 이에 저항하기 위해서 모딘에 살았던, 유대인 하스몬(Hasmon) 가문에 속한 제사장 ‘맛다디아(Mattathias)’와 그의 다섯 아들(요한, 시몬, 유다 마카비(세번째), 엘리아살, 요나단)이 주동이 되어 시작되었으며,“하시딤”이 결성되고 마카비(쇠망치) 가문의 봉기가 일어난다.⓺. 안티오코스 4세는 헬레니즘을 전파하기 위해 유대종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폈는데 우선 레위기에 나오는 희생제사 대신,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돼지피로 제사토록 강요하였다. 또한 유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을 훼파하고 성전의 한복판에 주피터의 신상을 세웠다. 또한 이스라엘 지방 곳곳에 자신의 얼굴을 신상으로 세웠다. 한편 율법을 폐지하였고 성경 사본을 파괴하였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폐지했다. ⓻. 마카비에게는 요나단(BC 152-BC 142)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탁월한 외교 능력으로 유대 총독이 되었다. 총독이 된 요나단 마카비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대제사장에 임명하게 된다. 이에 대해 강력하게 항거하는 그룹이 형성되었으니 그 사람들이 곧 에세네파로, 지금도 사해 지역에 가면 이 에세네파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어쨌든 요나단 마카비는 유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가 결국 발라스라는 추종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는데, 그로부터 정통 대제사장이 아니라 불법 대제사장 Line이 시작되었다. 그가 대제사장에 스스로 임명될 당시 정통 대제사장의 계열인 사독 계열의 제사장 오니아스(Onias)가 존재해 있었다.⓼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이 BC 152년에 대제사장 자리를 불법으로 차지하면서 쫓겨난 적법한 대제사장 “의의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는 BC 150년경 에세네파 연합체를 만들었다. 그로인하여 에세네파는 정치권에서 멀어졌고 하스몬 왕가가 공적인 유대교를 대표하게 되었다.⓽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에세네파의 회원 수는 4,000명 이었으며, 에세네파의 본부(The headquarters)는 쿰란에 위치하였고, 팔레스타인의 여러 도시와 마을에 이 에세네파에 속한 지역모임들이 잘 조직되어 산재해 있었다.10. 에세네파는 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으나 종교적으로는 가장 영향력이 큰 그룹이었다. ⓾. 당시 유대교 내에는 에세네파 말고도 세 개의 또 다른 그룹이 있었다.
7) 바리새파의 등장과 발전---의의교사에 동조하기를 거부한 일부 하시딤 그룹이다.
8) 사두개파의 등장과 발전---요나단에게 동조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계급이다.
5. 하스몬 왕조 시대(B.C. 142∼63)
1) 하스몬 군주---요한 힐카누스는 자기의 뒤를 이어 아내가 여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장남 아리스토불루스 1세(헬라식 이름이며 본명은 유다)는 어머니와 세 동생을 감옥에 가두어버리고 자신이 왕좌를 차지합니다. 어머니와 두 명의 동생을 감옥에서 굶겨 죽여 버리고, 자신을 따르던 넷째 동생도 부하들이 의심쩍어하자 암살해버립니다.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통치체계를 왕정으로 바꾸고자 왕관을 쓰고 공식적으로 왕의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아리스토불루스 1세는 막내동생을 살해한 것을 몹시 후회하였고, 동생과 어머니를 죽인 죄책감에 병이 생겨,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 창자가 썩어 들어가 피를 토하다가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헬레니즘의 애호가라 할 만큼 헬라를 동경했습니다. 또한 그는 짧은 재위 기간이지만 부친의 영토 확장 정책을 지속하여 갈릴리 정복군을 조직해서 갈릴리 지방의 비유대인들을 율법에 복종하게 만들었고 이두레아를 공격하여 유대에 복속시켰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리스토불루스에게 필로헬레네(헬라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술과 질병 그리고 끊이지 않는 모반과 반란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고 말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를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1년간 유대의 왕이 되고자 아리스토불루스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굶겨 죽이고 만 것입니다. 아리스토불루스가 죽었을 때 감옥에 갇혀있던 아리스토불루스의 형제 중 생존자는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요나단이었으나 그 역시 알렉산더 야나이우스로 불렀습니다.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내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감옥에 있던 나머지 세 동생들을 풀어주었고, 그 동생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와 결혼했습니다. 왕이 된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도 유대를 통치하면서 대제사장직을 겸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영토를 다윗 시대만큼 확장하였습니다. 블레셋 연안과 애굽 국경 그리고 트랜스요르단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영토는 남쪽의 애굽 국경으로부터 북쪽의 훌레 호수까지 뻗었으며, 트랜스요르단의 베뢰아로부터 아스겔론을 제외한 모든 블레셋 도시들을 포함하여 해안지역까지 펼쳐졌습니다. 해양 강대국을 꿈꾸던 하스몬에게 있어서 이 해안지역의 획득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모데인 근처에서 발견된 가족묘실에서는 조각된 배가 나왔고, 후기 하스몬 왕들이 주조한 동전에도 배가 조각되었습니다. 하스몬 왕국에 뱡합된 영토들은 점차 유대 화되었습니다. 유대화정책이란 병합된 영토의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유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물론 사마리아와 같은 지역에서는 친화정책을 거부하고 비유대적 특징들을 고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는 비헬라화된 유대인들 대부분을 따돌리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절기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던 중 왕이며 제사장으로 역할을 감당하던 그가 제단용 물을 율법에 따라 제다에 붓는 대신 자신의 발에 부음으로써 바리새인들을 의도적으로 경멸했습니다. 이를 본 분노한 백성들이 왕에게 올리브나무 가지를 뽑아 퍼붓듯 던져버렸고, 왕은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목적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8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죽어가는 이들 앞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내전이 일어나 바리새인들이 수리아에게 호소하여 자신들을 마카비 가문으로부터 방어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수리아 군대가 들어오자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는 유대 산지로 퇴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대로 가면 유대가 다시 수리아에 종속될 것을 두려워하여 수 천명의 바리새인들이 유대의 편을 들며 싸웠고 수리아는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는 크게 뉘우치지 못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색출하여 잔치를 베풀고는 그들을 죽여버립니다. 사해사본에는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에게 ‘의의 교사’를 학대하는 사악한 제사장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스몬 왕조의 몰락이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한 형수와 결혼한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는 처녀와 결혼해야 한다는 법을 어겼기에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가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것이며 역사는 자신을 악한 사람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고, 회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 자신을 인정하지 않던 바리새파 사람들을 나라의 중요 요직에 앉히라는 유언을 남기고 31년간 통치의 족적에 끝을 맺습니다.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는 기원전 76년 요단강 건너편 얍복 바로 북쪽에 있는 한 요새를 공격 하던 중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49세였으며 요세푸스는 알렉산데스 야나이우스를 술꾼이며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후계자는 아내 살로메 알렉사드라였습니다.
2) 하스몬의 왕---마카베오가의 후손들이다.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따르면 이 이름은 그들의 조상 하스모네우스(하스몬) 또는 아사모나이오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BC 143(또는 BC 142)년 마타시아스의 아들이자 유다 마카베오의 형제인 시몬 마카베오가 대제사장이 되었고, 141(또는 BC 140)년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유대의 대제사장 겸 통치자가 되었다. 이 직위는 세습되었으므로 시몬은 하스몬 왕조의 첫번째 인물이 되었다. 그뒤를 요한네스 히르카누스 1세, 아리스토불루스 1세, 알렉산데르 야나이우스와 그의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 아리스토불루스 2세, 요한네스 히르카누스 2세가 계승했으며, 하스몬 왕조 마지막 인물인 안티고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폐위당한 뒤 처형당했다.
6. 외경과 위경
1) 외경---역사를 통해 이 용어가 사용된 예를 보면 그것이 일종의 비밀스런 작품을 가리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런 작품은 처음에는 칭송되다가 후에는 관용적으로 인정되며 결국에는 배제되었다.넓은 의미에서 아포크리파는 권위가 의심스런 작품을 뜻하게 되었다. 유대-그리스도교 성서 작품에서 외경의 일반적인 개념에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여러 차원이 있다. 외경은 신의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신자들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위경(僞經)은 표면상으로는 성서의 인물이 쓴 가짜 작품이다. 제2의 정경작품은 하나의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일부에서는 정경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스어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였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약성서〉(히브리어 성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유대교 학자들은 다양한 히브리어 본문의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부분적으로는 아람어도 사용함)로 번역한 70인역을 만들어냈는데 그 역본은 많은 작품을 혼합했다. 후에 얌니아 공의회(90)에서 비(非)헬레니즘 유대교 학자들은 그것을 진정한 히브리어 정경에서 제외시켰다. 〈탈무드〉는 이 작품들을 세파림 히조님('외래의 책들')으로 분류한다.
2) 구약의 외경 15권---외경은 헬라어로 '아포크뤼파‘라고 하는데, '감추인것', '숨긴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외경(外經)은 정경(正經)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구약의 헬라어 성경인 ‘70인역’에는 포함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은 책들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BC 2세기부터 AD 1세기 사이에 쓰인 14권 혹은 15권의 특별한 책들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에 속하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제1에스드라서》《제2에스드라서》《토비트》《유딧》《에스델》《지혜서》《집회서》《바룩서》《예레미야의 편지》《아자리야의 기도와 세 젊은이의 노래》《수산나》《벨과 뱀》《므낫세의 기도》《마카베오상(上)》《마카베오하(下)》 등이다. 영어로 편집된 대부분의 외경은《예레미야의 편지》를《바룩서》의 마지막 장으로 취급하여 두 권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이 경우 외경은 총 14권이 된다. 가톨릭 교회는 외경을 제2정경이라고 부르며 정경에 거의 준하는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3) 신약의 외경---구약에는 외경과 위경이 구분되어 있지만 신약에는 위경은 없고, 외경만 있습니다. 신약의 외경은 주로 영지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이 많은데 문서의 형식은 다양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상이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약의 외경에는 복음서가 40권, 사도행전이 7권, 서간이 6권, 묵시록이 10권, 그리고 시가 가 2권, 허마의 목양서 등 모두 67권이 있습니다. 먼저 복음서의 외경 40권을 보면 아그라파 (Agrapha), 옥시린크스 파피루스(Oxythynchus Papyrus)가 5권, '에게르톤 파피루스(Papyrus Egerton), 카이로 파피루스, 파이욤 단판, 프리오 로기온, 사도들의 서간, 스트라세 부르그 파피루스, 나사렛 사람 복음서, 에비온파 복음서, 히브리인 복음서, 애굽인 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진리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소피아, 피스티스 아, 예우의 두 책, 빌립의 복음서, 도마 복음서, 맛디아의 복음서, 유다의 복음서, 요한의 아포크리폰, 예수와 요한의 대화, 마리아의 질문, 마리아의 복음서, 마리아의 겐나, 케린토스의 복음서, 마르시온의 복음서, 아펠 레스의 복음서, 바르데나네스 복음서, 마니의 복음서, 야곱의 원복음서, 도마에 의한 예수의 유년 이야기, 아브가루스 전설, 콥트어 애굽인 의 복음서, 디다케 등 40권이 있고, 사도행전, 외경 7권은 베드로의 선교, 요한 행적, 베드로 행전, 바울 행전, 안드레 행전, 도마 행전, 위 (僞) 클레멘트 행전이며 또 서신은 6권인 바 라오디게아인에게 보낸 편지, 세네카와 바울의 왕복 서간, 위 디도의 편지, 곱트어 야곱의 편 지, 바나바서신, 클레멘트 1서, 등이며, 묵시록 외경은 9권이 있는 바, 이사야의 승천, 베드로의 묵시록, 신탁집(Sy-bylline Oracles) 엘케사이의 서(the Book of Elkesai), 바울의 묵시록, 도마의 묵시록, 곱트어 바울의 묵시록, 야곱의 묵시록 1, 2, 아담의 묵시록 등이며, 시가에는 2권이 있는 바, 나세네 시편, 솔로몬의 송가이고, 목회서로 허마의 목양서가 있습니다. 이렇게 67권이나 되는 신약성서의 외경들의 내 용은 주로 주후 3 세기에 유행하던 영지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며 예수와 대제사장의 대화, 예수의 말씀들, 예수의 11 제자가 기독교도들에게 보낸 서간,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 예수의 5 살에서 12살 까지의 행한 기적 이야기 들, 12사도의 교훈집, 베드로와 마술사 시몬의 논쟁, 베드로 요한, 안드레 도마의 전도 여행기, 부활한 그리스도가 승천을 앞두고 베드로에게 주는 신비한 교훈, 이사야의 순교와 환상, 천국 과 지옥의 묘사, 바울의 3층천에서 본 환상기록, 예수가 여리고에서 바울에게 준 계시, 예수가 야곱에게 준 계시, 영지주의 찬미집, 로마의 감 독 허마가 쓴 목회서 등의 내용이 신약 외경 67권에 들어 있습니다.
4) 위경---교회에서는 작품의 제목, 내용, 형태로 보아 신약성서와 관계가 있고 사도적 권위에 합당하나 경전에 속하지 않는 모든 작품을 “위경이라고 한다. 신약성서의 위경들은 교회사의 첫 몇 세기에 걸쳐 저술되었으며, 문학적 유형에 따라 복음서, 행전, 편지, 묵시서로 구분된다. 위경 복음서를 분류할 때에는 내용, 문학적 형태, 저자, 근원, 진술의도, 종속성, 전승사 등을 기준으로 삼는데, 그 중에 내용이 문헌의 신학적 특성 때문에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공관 복음서를 내용상 표절하였거나 개작한 복음서에는 베드로 복음서, 나자렛파 복음서, 에비온파 복음서가 속한다. 이단적 복음서는 정통 교회의 교리와는 다른 교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며, 경전 복음서들이 경건한 신자들의 지식욕과 상세한 신학적 명료함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여기에는 야고보의 원(原)-복음서, 아랍어로 쓰여진 유년기 복음서, 가(假)-마태오 복음서, 토마의 유년설화 등이 있다. 이 복음서들은 전례, 신자들의 경건성, 예술에 대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마리아의 부모의 이름인 요아킴과 안나, 예수의 구유 옆에 있는 황소와 나귀, 동방박사의 숫자와 이름 등은 이 복음서들에서 유래된 것이다. 야고보 원-복음서는 “유년기 복음서들”에 속하나 신학적, 그 설화적 관심사의 중점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하느님은 부유하고 경건하나 후손이 없어 괴로워하는 요아킴과 안나 부부에게 마침내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마리아가 태어날 것을 약속하셨다. 이 부부는 마리아를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여, 그녀는 세 살 때부터 예루살렘 성전에서 동정녀로 살았으며, 그곳에서 천사에게 양육되었다. 12년 뒤 마리아가 처녀로 성장하였을 때, 그녀는 하느님께서 기적의 표징을 통하여 선택한 홀아비 요셉의 보호를 받았다. 이 당시 요셉에게는 이미 성장한 아들들이 있었다. 복음서는 이후 몇 년간의 사건을 요약하여 마리아가 성전의 다른 동정녀들과 함께 성전의 장막을 짰다는 사실, 천사의 예고, 엘리사벳의 방문, 요셉이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진 토목공사에서 돌아왔을 때 마리아가 임신 6개월이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였다는 내용만 보고하고 있다. “이 모든 신비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마리아는 16살이었다.”
7. 로마와 예수 시대(B.C. 63∼A.D. 30)
1) 로마의 통치세력---B.C.63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의 폼페이에게 함락됨으로 유다는 독립을 잃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정신은 폭동을 불러 일으켰고, 이러한 폭동은 A.D.70년 예루살렘과 유다가 파멸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D.S.러셀, 신구약 중간사, 컨콜디아, P37). 그러나 당시 유대교는 로마제국 안에서 인정된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고, 또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사법과 입법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가졌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스스로 국내의 사소한 사건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이처럼 로마의 통치가 헬라의 통치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유다의 열심당(the Zealots)이란 극단주의자들은 로마에 대하여 수차례 반란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불안 상태에 몰아넣었다. B.C.63년부터 43년까지, 특히 53년부터 43년까지 사이에 근동 세계에 있어서는 힘든 나날이었다. 시저와 폼페이는 B.C.49년에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여 폼페이가 테살리의 파르살루스에서 패배할 때까지(B.C.48년) 로마는 내전 상태에 있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얼마 후 폼페이는 애굽에서 살해되었다. 로마의 패권을 위하여 두 사람이 싸울 때, 아리스토불루스2세와 그의 아들들은 시저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아리스토불루스2세는 시저가 제공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유대로 돌아가던 중 독살되었다. B.C.44년에 시저가 살해된 뒤에 브루투스와 캐시우스의 연합 세력과 마크 안토니와 시저의 조카이며 양자인 옥타비안의 세력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로마 치하의 유대교 역사는 다섯 부분, 즉 이두매 왕조, 첫 지방 총독(Proculator), 아그립바 1세의 통치, 두 번째 지방 총독, 유대인의 반란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2) 안티파터와 헤롯의 군림(B.C. 63∼4)---1. 헤롯대왕의 4 아들들 1.1 헤롯 안디바(통치기간 B.C.3년-A.D.39년)⓵ 헤롯 대왕의 둘째 아들로 헤롯 대왕이 죽운후 갈릴리와 배뢰아 지역의 분봉왕이 되었다(눅 3:1).⓶ 이복 형제인 헤롯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아내로 취하여 세례요한으로 부터 책망을 받았고, 이로
인해 세례요한은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헤롯 빌립과 헤로디아 사이에서 나은 살로메의 춤과 그녀가 요구한 요한의 머리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막 6:14-29)⓷ 헤롯 안디바는 빌라도에 의해 호송되어온 예수님을 재판하였는데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는데 서로 원수 지간이었던 빌라도와 헤롯 안디바는 이 일로 당일에 친구가 되었다.(눅 23:7-11). 예수님은 헤롯 안디바를 여우(눅 13:32)라고 하셨고 헤롯의 누룩을(막 8:15) 주의하라고 하셨다.⓸ 그는 갈릴리 해안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의 이름을 따라 디베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갈릴리 바다도 디베랴 바다라고 불렀다.
3) 열심당---기본 의미는 ‘열정적인’, ‘열심 있는’이며, ‘헌신한 신자’, ‘큰 뜻을 품은 자’, ‘지원자’, ‘열심당’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셀롯’(눅 6:15), 혹은 ‘셀롯인’(행 1:13)으로 표현했다. 원래는 ‘율법을 충실히 지키고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자’를 가리켰다(행 21:20).그러나 B.C. 63년부터 로마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시작되자 ‘셀롯’은 처음 지녔던 의미가 다소 변질되었고, 특히 A.D. 6년경 이방 민족(로마)을 하나님의 거룩한 땅(가나안)에서 몰아내기 위해 갈릴리 사람 유다의 지도하에(행 5:37) 무장 독립 투쟁을 벌이는 단체로 창설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셀롯’은 바리새파 내에서도 매우 극단적이고 호전적인 분파로서 그들의 정신적인 근원은, 여호와께 대한 열성으로 우상 숭배자들을 몰살시켰던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민 25:7-13; 시 106:28-31)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해 열심이 특심했던 엘리야(왕상 19:10)에게 두고 있다.
그들의 열심은, 여호와만 주권자로 삼는 신정정치(神政政治)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저항하고 필요하다면 폭력을 휘두르며 죽음까지도 불사하면서 싸웠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도 그 명맥을 유지했으나 A.D. 74년 5월에 있었던 마사다(Masada)에서의 최후 항전(抗戰)을 끝으로 그들의 세력은 마침내 소멸된다. 한편, ‘셀롯’을 ‘가나나인’이라고 했는데(마 10:4), 이는 열심당을 뜻하는 아람어 ‘칸나’를 음역한 것이다(막 3:18). → ‘
4) 예수님의 탄생 시기
5) 헤롯의 아들들
6) 로마의 총독들과 빌라도
7) 헤롯의 손자와 증손자(아그립바 Ⅰ세와 아그립바 Ⅱ세)
8) 유대전쟁
9) 유대교
10) 유대인의 성전
11) 이방인
12) 그리스도교의 확장과 핍박
제2부 예루살렘의 상업과 무역
1. 이스라엘의 농업, 수공업, 상업의 발전
1) 농업
2) 수공업
3) 상업
2. 예루살렘에 상업이 발달한 이유
3. 예루살렘 성전의 경제적인 기능
4.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1) 상인들의 위치
5. 예루살렘의 원거리 거래 지역과 물품 종류
1) 그리스
2) 로마
3) 바벨론
4) 인도
5) 레바논
6) 시돈
7) 띠로
8) 동방의 아라비아
9) 이집트
6. 예루살렘의 근거리 거래 지역과 물품 종류
1) 농산물
2) 과일과 채소
3) 가축
4) 석재와 목재
7.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