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5> 양승규 “수행은 공덕 쌓고 지혜를 체득해야 완성” <사진설명> 사진은 라닥 스피툭 사원의 주지스님이 경전을 읽고 있는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깨달음과 수행’은 서로 불가분의 상관관계가 있다. 깨달음없는 수행이나, 수행없는 깨달음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가지 명제가 어떤 상호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한 교리적 논리적 설명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대해 ‘티벳불교’를 전공한 양승규 박사는 〈보리도등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근기에 따른 체계적 수행론’을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을 보내왔다. 회를 거듭할 수록 뜨거워지고 있는 ‘깨달음과 수행’ 기획토론은 그 다섯번째로 양승규 박사의 주장을 싣는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모든 번뇌(煩惱)와 소지(所知)의 장애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대승불교의 전통에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않겠다거나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않는 불자(佛子)는 더 이상 불자가 아니다. ‘불자’는 ‘부처님의 아들’이고, 발심한 보살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의 길은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키는 발보리심(發菩提心)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깨달음을 추구하는 발보리심은 깨달음의 뿌리인 것이다.
보살은 바라밀행을 닦음으로써 자량도(資糧道)와 가행도(加行道)를 거쳐 성도(聖道)인 견도(見道)에 들어가고,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거쳐 원만한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 여소유지(如所有智)와 진소유지(盡所有智)를 성취한다. 이것이 〈이만오천송반야경〉 등 대승경전에서 설하는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일반적인 길이다.
그러나 교학과 수행이 조화보다는 대립의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불교의 흥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선불교에서는 ‘교(敎)’보다는 ‘선(禪)’의 실수가 중심이 되고, 교를 통한 선 또는 교를 배경으로 한 선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본성을 보는 선을 통해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도’가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으면 어떻게 준비하고, 수행하고, 나아가고, 또 얼마만큼 나아갔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원하는 과를 얻지 못한다. 따라서 각 종파는 각각의 종의를 갖추고 있었고, 이러한 종의는 교학과 수행의 토대에서 끊임없이 검정되고 수정되었다.
티벳불교의 치밀하고 ‘체계적 수행론’에 주목할 필요
이 승원은 인도 날란다대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티벳승원은 우리의 강원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교과목이 많이 다르다. 한국강원에서는 선수행에 필요한 선의 지침서와 〈금강경〉 등의 대승경전을 주로 배우지만 티벳승원에서는 불교논리학, 반야(般若), 중관(中觀), 아비달마, 계율 등 현교교학 전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과목을 수학한다.
불교논리학은 법칭(法稱)의 〈양평석(量評釋)〉, 반야부는 미륵(彌勒) 저작의 〈현관장엄론(現觀莊嚴論)〉, 중관은 월칭(月稱)의 〈입중론(入中論)〉, 아비달마는 세친의 〈구사론(俱舍論)〉, 계율은 구바쁘라바의 〈율경〉 등을 배운다.
다섯 가지 과목을 배우는 기본적인 텍스터는 사실 우리들에게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논서들이다. 대부분 한역으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전보다는 주로 논서를 읽는 것도 티벳승원의 하나의 특징이다. 논서를 통해 기본적인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경을 일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수학기간도 4~6년 정도 걸리는 우리의 강원교육기간보다 훨씬 긴 15~20년 정도 걸린다. 그만큼 현교교학에 대한 이해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관장엄론〉을 알지 못했던 한문불교권에서는 〈이만오천송반야경〉이 현관의 체계로 치밀하게 구성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와 같은 방식으로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길이 정립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중관학의 교과서인 〈입중론〉은 월칭의 주저다. 〈입중론〉을 중심으로 중관을 이해하려 한 것은 보살행 속에서 중관을 체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중생의 근기가 크고 작음에 따라 그 근기에 적당한 수행도를 시설한 것이 〈보리도등론〉이고, 이를 토대로 성립된 것이 〈보리도차제광론〉이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각기 다른 도를 시설하는 전통은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에 등장하고, 이것이 〈현관장엄론〉, 〈보리도차제광론〉으로 계승된 것이다.
지(止)는 산란한 마음을 그치는 것이다. 지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마음의 문제를 해명한 유식학과 아비달마의 가르침이 필요했다. 관(觀)은 그친 상태에서 일체법의 본성이 비었음[空]을 관찰하는 것이다. 비었음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비었음을 신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논리적인 오류가 없이 추리하여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근기가 하열한 이와 수승한 이 모두를 조화롭게 깨달음의 길로 이끌 수 있다. 또 이것은 대소승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미(一味)로 체계화하는 것에서, 이를 토대로 수행하는 것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양승규/ 동국대 강사 [출처 : 불교신문 2035호/ 5월28일자] |
첫댓글 감사합니다.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