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이 필요한 질문
(‘청구회 추억’을 읽고)
통영시 용남면 대곡길 12 청구아파트 101동 1202호
박미옥
이 시점에서 나에게 물어본다. 선생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그런 고민이나 생각 없이 교단에 선다면,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지 않겠냐고.
청구회 추억은 20대의 청년이었던 신영복선생에게 온 인연, 청구회용사인 소년에 대해 쓴 회한의 글이다.
신영복선생은 교도소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상황에서도 살아오면서 지키지 못한 약속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자신의 삶과 화해한다. 그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회상, ‘청구회 추억’은 항소 이유서를 작성하기 위해 빌린 볼펜으로, 하루 두 장씩 지급되는 재생종이로 된 휴지에 쓴 글로 모두 스물아홉 장이다. 이 글은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초판을 처음 읽었던 20대에는 보지 못했던 글이다. 그러나 2012년에 증보판에서 처음 읽게 되었다. 읽는 내내 너무 아름답고 슬퍼서 눈물을 훔치며 읽고 또 읽었다.
선생이 민들레 씨앗처럼 가볍게 청구회 용사들과 해후하던 장면에서는 나도 봄날의 노랑나비처럼 날개를 팔랑거리며 서오릉 언저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언젠가 먼 훗날 맑은 진달래 한 송이 가슴에 붙이고 서오릉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고 표현한 마지막 부분에서는 천천히 천천히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듯한 이미저리에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서 소리 죽여 울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리 동네 청구새마을문고에서 그림이 곁들여진 단행본을 발견하게 되어 두 번째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한 번 손에 들면 한 번으로 읽고 끝내지지가 않는다. 꼭 두 서너 번은 읽고 또 읽게 된다. 모든 문장들이 만남으로 이어지고, 의미를 묻기에 추억 속의 그 길을 따라 걷게 만든다. 아마 이것은 글쓴이가 이 글을 적고 있는 동안만은 옥방의 침통한 어둠으로부터 진달래꽃처럼 화사한 서오릉으로 걸어 나오게 되더라는 구원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똑똑치 못한 옷차림을 한 가난한 청구회 소년들에게 기울이는 청년의 따뜻한 관심과 진정성은 선생인 나를 깊은 성찰로 이끈다. 어린이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잘 아는 청년은 결코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먼저 묻지 않는다. 곤궁한 소년들이 알고 있는 것을 묻는다. 소년들에게 자선의 기회와 긍지를 심어주고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대등한 느낌이 들도록 수평의 관계를 만들어 준다. 특히 이 부분이 선생인 나를 몹시 부끄럽게 만든다. 그런 인간에 대한 세심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20대의 유능한 청년은 요구 받은 강의와 학문적 연구를 하기에도 벅찬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청년이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만나고, 정성을 들여 만남을 가꾸어 가는 노력은 조용하고 무한한 감동이다.
아이들의 가식 없는 진정과 정성을 알아보는 사람,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돌이켜 보는 사람,
뉘우침에 부끄러워하며 고뇌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자신은 무엇이었던가를 묻는 사람,
어느 곳에서나 선생으로서의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
선생은 출소 이후에 청년이 된 청구회 일원을 다시 만난다. 하지만 같은 추억이라도 당사자들의 마음에 남아있는 크기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힘겨운 삶을 이어왔을 그들에겐 청구회의 추억이 자신과 같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이해한다. 선생은 언제나 사람에게 그 마음을 탓하기에 앞서 그런 마음이 되기까지의 사연을 먼저 묻는 사람일 거 같다. 선생의 이런 시각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지를 다시 배우게 한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에게도 그렇게 너그러운 잣대를 대셨을까? 독방은 강한 개인이 창조되는 영토라고 말하는 선생님은 결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처지를 핑계 삼지 않으실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분이시기에 단단하고 냉철한 이성의 계발로 그 어떤 감정과 벽도 조용히 뚫으셨을 것 같다. 그랬기에 여름나무처럼 언제나 크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선생이야말로 표면에 천착하지 않기 위해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는 사람일 것 같다. 매일 가장 먼저 일어나 자기 거울을 닦고 또 닦는 사람!
장기수로 누구보다도 힘든 삶을 산 선생은 세상에 대한 울분과 원망 보다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선생의 글은 온통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아름답고 선한 이야기들이다.
오랜 세월의 부당한 탄압도 한 인간이 자신의 불씨를 끄지 않는 한 결코 영혼을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분을 통해서 본다. 선생은 조용히 변방으로 사셨지만 우리는 안다. 그건 결코 변방이 아니라는 것을.
선생은 18년의 유배생활동안 500여권의 책을 펴낸 연암의 기록에 대한 자유를 부러워 하셨지만 선생께서 옥중에서 엽서로 전해주신 정리된 경험과 실천도 결코 그에 비해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선생의 책은 언제나 돌베개출판사에서 나온다. 구양수의 돌베개는 부단히 갈고 닦는 선생님의 삶과 많이 닮았다.
나무와 흙을 닮은 책 표제지에는 언제나 선생님의 초상이 나온다. 단단한 이성처럼 느껴지는 선생의 검정안경테와 꼭 다문 입술은 우리가 올바른 일을 위해 조용히 일어날 것을 조용히 기다리시는 것 같다.
선생님이 쓰신 글씨도 그렇다.
“처음처럼”, “함께 맞는 비”, “여럿이 함께”, “함께 여는 새 날”, “아름다운 동행”, “빈틈”, “꿈을 담는 도서관”......
현재의 길목에서 만난 과거,‘청구회 추억’은 모든 이의 라브(위대한 사람)인 그를 만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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