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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피정 순례길 답사-5일째
인간은 맨 처음 두 발로 걸어서 땅 위에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삶의 영역을 넓혀 왔습니다. 인간은 길을 따라 농사를 짓고 역사를 남겼으며 믿음을 키워왔습니다. 순례 또한 우리에게 만남과 헤어짐, 성(聖)과 속(俗), 생과 사, 육체와 영혼의 경계를 넘나들며 순간에서 영원을 깨달으며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순례는 수행의 길, 희망의 길, 소통의 여정입니다.
제5일(2013. 3. 26)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7시 기상, 7시 30분부터 성주간 화요일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미사에서는 순례 이후 가장 긴 코스를 걸어야 하는 저희들의 각오를 말해주듯 영성체가 끝난 뒤의 묵상이 어느 날보다 무겁고 길었습니다. 8시에 아침을 먹고 8시 30분에 서둘러 숙소를 나섰습니다. 아침이면 30분 간격으로 말없이 이뤄지는 모든 일이 톱니바퀴처럼 돌았습니다. 중간 출발지 표선 성당에서는 먼저 사비나 사무장의 안내로 순례자들이 묵을 새로 지은 숙소를 둘러보았습니다. 바람이 불어 추웠던 어제 철물상에서 산 노란 장갑에 대한 고마움을 되새기기 위해서 성당 마당에서 유치원생들처럼 나란히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 안창호 신부님과 김성우 바오로 형제님이 먼저 떠나고 김진철 레오 형제님과 저는 고장 난 휴대폰를 점검과 자료수집을 위해 표선 시내를 뒤졌습니다. 휴대폰이 갑자기 말썽을 부려 중간 연락을 할 수 없게 되자 무인도에 홀로 남은듯 갑갑하고 답답했습니다. 오늘 순례 일정은 표선 성당으로부터 남원 성당(12.4km)과 효돈 성당(9.8km)을 거쳐 제주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서귀포 성당과 서귀복자 성당(6.4km)에 이르는 32km를 걸어야 합니다. 오늘 순례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제주교구 11개 본당과 3개 공소를 순례하고 제주도의 동쪽 절반을 답사하게 됩니다.
오늘 순례에서는 비가 올 때를 대비한 우의와 발이 부르틀 때를 대비한 응급처지, 신발 깔창 등 순례자의 준비물을 챙기기 위한 현장점검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걸어서 출발한 지 3시간 만에 남원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남원 지역은 동서지역과 다르게 화산에서 내뿜은 용암이 남북의 짧은 경사지를 따라 바다에 침몰하면서 만들어 놓은 해안절벽과 폭포가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었습니다. 큰 바위 덩어리가 자연을 집어삼킬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언덕을 이곳 남원에서는 ‘남원큰엉’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다로부터 밀려오는 파도가 부서지면서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이 한 폭 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태풍으로 십자가가 파손되어 보이지 않는 남원 성당을 거쳐 효돈 성당으로 가는 길에는 활짝 핀 벚꽃이 저희들을 환하게 반겼습니다. 더구나 효돈 성당에서는 순례성모님이신 파티마 성모님을 원하는 교우 가정마다 모시고가서 기도를 드린 다음 성당 제대에 모셔 공동체의 신심을 북돋우고 있었습니다. 효돈 성당에서 서귀포로 향하는 길섶에는 벌써 개나리는 지기 시작하고 벚꽃이 한창이었습니다. 가로수에 열린 금빛 과일도 마냥 풍요로웠습니다. 정방폭포를 지나면서 그리운 쪽빛 바다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섬들이 하나 둘 보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민둥섬인 문섬, 호랑이의 모습을 닮은 범섬, 나무가 우거진 섶섬에 서건도가 마치 자연방파제처럼 나란히 떠있는 서귀포는 태평양을 향해 가슴을 활짝 열었습니다. 서귀포 앞바다는 고려말 몽고족들이 일으킨 '목호의 난'을 최영 장군이 섬멸으로써 102년 동안 계속된 몽고 총관부 지배체제에 종지부를 찍었던 역사적 현장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인 1899년 하논 공소로 출발한 서귀포 성당은 제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성당입니다. 서귀포에는 서귀포 성당과 올해로 설립 51주년을 맞은 서귀복자 성당이 제주 남부의 중심 성당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서귀포에 도착한 저희들은 가난한 천재화가 대향 이중섭을 기리는 이중섭 거리를 걸으며 바다를 거슬러 오는 바다내음을 맡으며 그의 힘겨웠던 피난시절과 애닯은 사랑을 통해 인간적인 향기를 느꼈습니다. 이중섭은 오늘도 미술관 앞에 서서 자신이 직접 썼던 ‘소의 말’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고 나직이 속삭입니다.
제주에는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삼다(三多)의 섬이라 하고 도둑, 거지, 대믄이 없다고 삼무(三無)의 섬이라고 일컫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삼보(三寶)의 섬이라는 말을 새겨야 합니다. 그 세가지 보물은 자연, 민속, 언어를 듭니다. 삼보를 모르고는 제주를 안다고 할 수 없다는 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주의 으뜸은 바람이 아닐까 합니다. 그만큼 제주도에는 항상 바람이 세찹니다. 제주에 바람이 많은 이유는 북태평양 상에 떠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기압 배치 때문입니다. 제주의 역사를 만들어낸 에너지는 다름 아닌 바람입니다. 그래서 제주에 오는 사람에게는 스카프 한 장이면 멋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주를 걷다 자주 마주치는 새가 까마귑니다. 오름을 걷다 쉽게 만나는 새도 까마귀로 떼를 지어 날며 웁니다. 폭낭이 외롭게 서 있는 언덕에 떼까마귀가 날아올라 하늘을 휘저으면 그날은 어김없이 바람이 거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주에는 떼까마귀를 바람가마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제주도의 날씨는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제주에서는 오늘 같이 바람이 잦아든 날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바람아! 불어라.
제주에는 어디를 가나 남동 방향으로 줄기와 가지가 기운 나무, 폭낭(팽나무의 제주도 사투리)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해변이나 언덕에 폭낭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은 제주의 대표적 풍경입니다. 겨울철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해안에서 자라는 폭낭은 바람에 의해 한쪽으로 기운 모습이 제주의 거친 풍파에 시달려온 인간의 삶과 자연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주강현은 '제주기행'에서 "바람에 꿋꿋하게 맞선 대가로 폭낭은 폼 나는 모양새를 선물받았다,"고 썼습니다. 제주의 브랜드는 멋진 폭낭의 모습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주님! 끊임없는 바람 속에서도 쓸어지지 않고 올곧게 살아가는 폭낭같은 굳은 의지를 저희에게 내려주소서.
꽃샘 추위로부터 손을 지켜 준 고마운 노란장갑
제주 남원 성당 전경
제주 효돈 성당 전경
효돈성당 앞을 훤히 밝힌 벚꽃거리
효돈 성당 제대 옆에 모신 순례의 파티마 성모님
탐스런 황금 열매가 열린 제주의 가로수
제주 남부의 중심 서귀포 성당 전경 서귀포시가 전국 처음으로 조성한 이중섭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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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 일정이 많이 길고 힘이 드셨겠어요.. 제주의 풍광이 그대로 눈에 선하네요. 부디 건강한 답사여정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드리님! 온평리 해안도로에서 만나 주고 가신 마음이 영원히 저를 설레게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보고가 늦어서 미안합니다. 굿밤^*^
나도 70살 되기 전에 제주 피정 성지순례 해야지.
그래요, 참나리님! 늦으면 힘드실꺼에요. 충분히 서두세요.
네 분이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쓰시는 듯 합니다.
건강하시고 주님의 크신 뜻 이루시길 기도드려요.
매일 매일 전해주시는 글과 사진을 통해 저희는 또 하나의 기쁨을 맛보고 느끼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모두 모두 감사드리고 화이팅!!!
청초이님! 순례의 마음을 함께 나누려는 저희들의 속셈이 들키고 말았군요. 오직 주님이 보내시는 빛을 따라 걷고 또 걸어서 님의 곁으로 가겠습니다. 부디 행복하십시오.
삶의 큰 획을 그으신 신부님, 그리움님, 바오로님, 레오님 큰 박수를 보냅니다. 힘들고 어려움속에서도 순례자들을 위해
애쓰심에 가슴이 가슴이 찡함을 가집니다. 기도드리며 힘내세요.! 네 분 홧팅^*^
차사랑님! 박수소리 들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은총의 하루 되시길 두손 모아 기도합니다.
하늘인연님! 우리 기도 속에서 만나요.^*^
그리움님의 글이 저도 같이 제주도 순례을 하고 있는 착각을 주시네요
네분의 순례단님 건강지키시고 은총의 하루 하루 되시길기도합니다
아가다님! 그 맛있는 돼지 목살고기 덕에 잘 걷고 있답니다. 고맙습니다.
피정 순례길 답사하시느라 연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성주간이라 그의미가 더 특별할 것 같습니다. 여정 내내 주님이 함께 하시길 기도 합니다.
명금당님! 이번 성삼일은 순례 덕분에 시골 성당의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됐답니다. 감사합니다.
블랙점퍼와 노란 손수건 환상입니다^^*
주님의 축복과 자비를 빕니다.
마가렡님! 저희 단원의 팀웤도 환상 그 자체랍니다. 밥 짓고 운전하고 촬영하고 꾀부리고 말 많고 다 한답니다.
다행히 장갑 색깔이 같아서 엉뚱하게도 환상을 느끼셨나 봅니다. 아무쪼록 주님과 함께 걷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