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산책] 팔천송반야경 ⑤
먼저 뭇 생명의 행복을 일궈주라
보살은 결코 난행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일체유정을 행복한 붓다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고 한다. 그러한 위대한 유정인 보살마하살을 여래께서는 보호해 주시고 섭수해 주신다 하는데, 그 이유를 여쭙는 수부티에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실로 수부티여, 저들 보살마하살들은 많은 이들의 안녕을 위해,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해, 세간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들이 중생을 사랑하는 자이고, 중생을 연민하는 자이고, 세간을 어루만지는 자이기에 여래께서도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다는 것이다. 곧, 여래의 가피를 받는 가장 큰 조건이란 다름 아닌 남을 행복으로 이끌고 남을 어루만져 주는 일에 있다는 뜻이다. 소품반야에서 이같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 또한 반야를 일으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자비라는 말을 풀어보면 사랑과 연민이 된다. 하지만 이 두 단어 가운데 연민이야 말로 왠지 가장 불교다운 느낌이 든다. 사랑은 자칫 애착이 되고 말지만, 연민은 깊어질수록 성스러워지는 법이다.
다시 이러한 사랑과 연민은 이 우주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를 향해 베풀어져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많은 이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또한 신들과 인간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연민하는 마음으로 무상정등각을 깨닫고자 하는 것이며, 무상정등각을 깨달은 뒤 위 없는 가르침을 설하고자 하는 것이니라.”
붓다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물론이거니와 신들조차도 사랑하고 연민할 대상이 되고 만다. 숫타니파아타의 주석서인 파라마타조티카에서는 나무에 깃들이어 사는 신의 질투로 선정수행을 방해받고 있는 수행자의 얘기가 나온다. 붓다께서는 그에게 자비관을 닦으라고 권하신다. 자신을 질투하고 두려움을 주는 나무신을 향해 사랑과 연민의 정을 쏟아 부어 주라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나의 처지만 눈치 챈다면 이는 작은 탈 것이다. 반야의 가르침은 나보다 더 불편해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들을 눈치채라고 한다. 이 눈치채는 일이 바로 반야의 시작이다. 곧, 저들 중생들의 고통과 혼란을 어떻게 위로해 주고 어떻게 인도해야 할지 진지하게 헤아려 보는 일이 곧 반야인 것이다.
불도 수행의 최종목적지는 니르바나이다. 번뇌의 불꽃이 다 타버린 적멸의 경지. 대승 이전의 수행자들은 번뇌의 원인을 세간에서 구했다. 그래서 자신을 둘러싼 바깥경계를 철저히 차단하려 했다.
하지만, 대승의 보살이 되면 그는 더 이상 외경과의 단절을 통해 얻어지는 안정을 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뭇 존재에 대한 진지한 애착을 통해 생존의 환희를 일으키려 한다. 환희가 일어나는 그 순간이 곧 삼매이고 니르바나이니, 이를 현법열반이라 해야 하리라.
이렇듯 유정들의 마음을 통해 전해오는 가슴 뭉클한 행복감이 곧 니르바나이니, 니르바나는 지극히 정서적일 수밖에 없다.
반야 역시 다분히 정서적인 것으로, 반야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공유하는 일종의 마음의 끈이다. 내가 일으킨 반야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고개를 끄덕여 주고 환희해 주어야 한다. 반야라는 말을 단지 지혜라고만 번역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반야와 니르바나를 말하자면, 진정 측은해 할 줄 아는 자가 그 측은지심을 상대에게 전하려는 노력이 반야이고, 그 노력이 충만되는 순간이 바로 니르바나의 시작이리라.
그래서 팔천송반야는 말해주는 듯하다. 진정 붓다의 행복에 이르고자 하거든 먼저 중생의 행복을 일궈주는 자가 되라고. 그래서 환희해 보라고.
어쨌든 반야란 연민의 힘으로 일으키고 사랑의 힘으로 키워 나가는 마음의 빛이다. 또한 그러한 빛이기에 더 없이 청정하고 완전하다.
김형준 박사
경전연구소 상임연구원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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