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과 한국의 첫 관계는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이다.
베트남의 리 왕조가 트란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마지막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배를 타고 지금의 황해도 옹진으로 피난 온 이후 화산 이씨(花山李氏)로 개명하였다.
6•25전쟁 때 남하하여 1995년 현재 약 200여 가구가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은 미군을 지원하여 1964년 8월에는 1개 의무중대(醫務中隊) 파견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맹호(猛虎)•청룡(靑龍) 2개 전투사단, 이어 1966년 백마부대(白馬部隊)의 파견 등으로 한때 5만 명의 병력을 월남으로 파병한 바 있다.
이 참전으로 한국군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베트남 또한 피해가 컸다.
그런데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같은 벼농사를 골격으로 하는 수도작 문화을 가지고 있고, 중국의 영향도 강하게 받으면서도 자립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어서 유사한 면이 많다.
구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두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베트남 역시 구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자유화와 개방 및 개혁노 선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모든 국가들과의 교류의 길을 열어놓았다.
베트남의 국부로 숭배되는 호치민은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점을 보면 베트남 민족주의의 유연함을 알 수 있다.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모델을 배우고, 사회적으로는 한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배우려고 하면서, 2000년 이후에는 영화,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류열풍이 일어났다.
베트남인들은 적개심보다 화합을 좋아하여 베트남참전을 한국에 대해 복수보다는 상호이익을 위한 사업파트너로 받아들인다.
베트남은 1950년 북한과 단독 수교하였지만 개방 이후 한국과는 1992년 12월에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1993년 경제•기술협력협정, 무역협정, 항공협정, 투자보장협정, 1994년 이중과세방지협정, 문화협정, 1995년 세관협력협정, 해운협정, 1996년 체육교류협정, 1998년 외교관 및 관용여권 비자면제협정, 2000년 교육협력협정이 체결되었다.
2001년 국가주석 트란 덕 루옹이 방한하였다.
2004년 대(對)한국 수입은 33억 2840만 달러이고, 수출은 6억 35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비료, 섬유류, 전자제품, 종이류, 시멘트, 수출품은 무연탄, 원목, 고철 등이다.
2005년의 대 베트남 무역액은 42억달러로 베트남 교역국 중에서 6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