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경기, 충청, 전라 등지에서 조세로 바처 올라온 소금을 저장하여 필요할 때 공급하던 소금창고 터”
서울 한강변의 염창동(鹽倉洞)은 소금창고(염창)에서 유래됐다. 조선시대 서해안의 염전으로부터 채취해 온 소금을 서울로 운반하는 소금배의 뱃길 어귀인 이곳에 소금창고를 지어 보관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은 염창동 103번지 우성 1차 아파트부근으로 이 아파트 103동 후문 경비실 옆에는 ‘염창 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에는 “조선시대 경기, 충청, 전라 등지에서 조세로 바처 올라온 소금을 저장하여 필요할 때 공급하던 소금창고 터”라고 새겨져 있다.
서해안과 남해안의 염전에서 만든 소금은 서해의 뱃길을 이용해 들여왔는데 이 곳이 소금을 보관하기에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 곳에 소금을 부린 배는 다른 물품들을 강건너 마포까지 운반했다.
염창으로 운반된 소금은 국가용과 군사용, 그리고 일반 판매용으로 구분돼 각각 저장 보관 했는데 자염(煮鹽)으로만 제조되던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품으로서 전매품(專賣品)으로 지정, 취급됐다. 그 후에도 계속 전매품목으로 묶어있다 1962년 제외됐다. 염창에는 암거래와 투기, 운반 중 물에 녹아 염전에서 출반한 소금 양이 이곳에 도착하면 심한 경우 1/50도 남지않아 관리들의 애로가 많았다. 현의 관리들까지도 곤욕을 치루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현령이 나서 염창의 이전을 자주 요청했고 이것이 숙종 때 받아들어져 이곳의 염창이 폐지됐다.
이 곳에 운반된 소금이 많을 때에는 소금더미에서 ‘임금 용안을 볼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어 창고 한군데 만으로는 부족, 염창을 늘려 상염창ㆍ중염창ㆍ하염창 등 3군데로 나눠 보관하기도 했다. 이러한 명칭은 예전에 염창동의 웃마을과 아랫마을을 일컬었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염창동은 한강가에 솟은 염창산으로 홍수를 피해 이전한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면서부터 발달됐다. 소금배가 다닐 무렵의 염창동은 강물의 흐름이 급한데다가 물목이 좁아 모래가 자주 메워져 종종 여울목이 생겨났다. 이 때문에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조운선(국가 양곡을 운반하는 배)이 가금 침몰하는 경우가 자주 생겨났다. 현재는 염창산밑 한강변으로 6차선의 올림픽대로가 개설돼 있다.
미곡을 실은 배가 침몰하게되면 이 부근에 사는 사람들이 이를 건지기 위해 모여들어 이 여울목의 이름을 증미항(拯米項) 또는 염창항ㆍ염창여울목이라고도 불렀다. 쌀을 건진다는 뜻의 증미(拯米)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증미(增味)로 와전돼 부락의 이름이 됐다. 증미부락은 다시 윗증미, 아랫증미로 나눠졌다. 염창동 20번지일대의 증미부락은 아랫증미이고 103번지 근방은 윗증미로 판단된다.
염창동은 북쪽으로 한강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은 목동과 안양천을 경계로 영등포구와 서쪽은 등촌동·가양동, 남쪽은 목동·화곡동과 접한다. 면적 1.74㎢, 인구는 2008년 1월 현재 4만1,429명이고 세대는 14,023가구이다. 세대기준으로 주민의 75%가 아파트에 거주한다. 아파트는 한화꿈에그린, 롯데캐슬, 현대홈타운, 보람더하임 등 42개 단지가 조성돼 있다. 과거의 소금창고가 아파트촌이 된 것이다. 특히 1905년 창립된 염창교회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염창, 등촌, 증미산 등 9호선의 3개역이 접해 있다.
고려 말기에는 양천현(陽川縣)에 속했다. 양천은 허준으로 대변되는 양천허씨의 본향이다. 조선 말 1896년 자연마을이던 주막거리·장승배기·아랫염창 등의 마을이 합쳐 염창리가 되고 행정구역도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으로 바뀌었다. 1914년 다시 김포군 양동면으로 바뀌고 일부는 가양리로 편입됐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고 1977년 강서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됐다.
첫댓글 그렇게 깊은 뜻이? ^^ 동네 참 마음에 드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