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탁의 유래
세탁의 역사는 인간이 옷을 입기 시작한 선사시대 때부터 시작 하였고 의복의 귀중품화 하면서 본격적으로 세탁이 행해지게 되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BC 2800년경의 왕조(王朝)에 이미 세탁을 전담하는 관리를 두었으며, BC 1900년경의 벽화에서는 강가에서 빨래를 두들겨서 빨거나 긴 막대에 빨래를 꿰어 비틀어 짜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의류뿐만 아니라 침구까지도 세탁을 했는데, 청류가 흐르는 강가에서 발로 밟아서 빨았으며, 온종일을 소비 할 만큼 즐거운 레크레이션을 겸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 로마에서는 전문업자가 빨래를 맡아서 했으며, 귀족들은 세탁노예를 고용하여 옥내에서 발로 밟아 빨수 있도록 설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중국의 (사기(事記)) (소학(小學)) 등에서 보면 빨래는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한 윤리적 관념과 위생 및 경제적 관념에서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강가 나 호수, 냇가에서 손으로 흔들어 빨거나 주물러 빤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나무 조각 등을 이용하여 두들겨 빨았는데, 이것은 인도나 중국에서도 오늘날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 후 여럿이 냇가에 모여앉아 즐겁게 담소하면서 방망이질을 하며 빨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이용하면서부터는 우물가에서 빨기도 했다. 특히 무명천이나 무명옷은 냇가에서 빨아 짜지 않고 그대로 바위나 모래밭에 펴 널어 표백도하였다. 이것을 마전이라 한다. 세제로는 짚이나 뽕나무, 기타 초목을 태운 재를 걸러서 얻은 잿물을 썼으며, 명주와 같은 귀중한 직물을 빨 때는 콩. 팥. 녹두 등을 갈아 빨래에 비벼서 썼는데, 이것을 비루라하였다. 더러움을 날아가게 한다는 뜻이며. 오늘날 널리 쓰는 비누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밖에도 쌀뜨물과 두부순물(두부를 만들고 남은 물)을 썼으며, 면직물은 잿물이나 재와 함께 삶아서 빨았고, 마직물은 삶지 않고 물에 여러 번 헹구어 빨든가 쌀뜨물에 2에서3일 담가두었다가 냇가에서 두들겨 빠는 방법이 쓰였다. 유럽에서는 14세기 이후 견직물과 마직물이, 좀더 뒤에 무명이 보급되면서부터세탁량이 늘어났고 그 기술도 한층 진보하였다. 풀과 다림의 등장도 그 무렵이다. 17세기는 유럽 각지에공동세탁장이 설치되었는데, 가정의 세탁장에는 세탁통과 휘젓는 막대가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삶아 빨기가 자주 행하여지고 그 때까지 써오던 백토(白土) 대신에 비누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반경에 종래의 세탁통은 손으로 돌리는 세탁통으로 바뀌고, 이어서 20세기에 들어와 전동화 하여 전기세탁기시대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도 1960년대 말부터 전기세탁기를 생산 판매하였다.
3. 드라이크리닝의 역사 TOP
프랑스의 베링이라는 사람이 벤젠을 식탁에 엎질러 그 자리가 깨끗하게 지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면서부터 드라이 크리닝이라는 새로운 세탁방법을 찾게 된다.
이 때가 1807년경이다.
드라이 크리닝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1934년 새로운 세탁 기구를 개발하면서 본격적인 산업화 길을 걷게 된다.
우리나라는 1920년경에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드라이 크리닝이 시작되었다.
3. 우리나라의 시대별 세탁과 드라이 크리닝 역사 TOP
1900~1959년
근대화 과정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게 된다. 그 중에서도 많은 유학생의 서구적 문화를 경험하면서 드라이 크리닝이 소개 되었고, 한국에서도 1920년경 세탁업이 태동하게 되었다.
1900년대 이후 1950년대 이르기까지 세탁업은 원초적 기반을 제공하는 토대가 되었고 하나의 업종으로 전환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또한 이때 세탁업자 조합이 결성 되는데 주목해야 할 점이다.
-신문 기사를 통해 그 내용을 알아보자 -
세탁요금도 인상-반면에 세탁외교원의 수입은 대격감, 업자가 조합을 결성코 협정 경성부내에 산재해 있는 세탁업자들의 통제로 말미암아 일대 이변이 생겼다. 현재경성부내에는 150개의 세탁업자가 잇는바 4울 17일 업무통제룰 꾀하야 경성세 탁조합을 결성하고 업자들이 일정한 협정가격을 체결코 영업을 해오는 중에 잇는데 종래 조선인측업자는 주문 맡아온세탁물에 대하야 반은 점주가 반은 외교원이 절반씩 나누어 먹엇는데 이번 실시된 협정가격으로 일시에 만히 맞아 적은 이익으로 만히만 주문맡으려든 계획이 깨여지고 나누는 비율이 외교원 4부, 점주 6부로 개정되어 외교원측은 생활에 위협을 느끼게 되어 이로 말미암아 세탁비가 인상되엇고 종내에 써비스로 카라나 양말등을 무료로 봉사하든 것을 각각 5전씩 받기로 되어........중략
동아일보
외국의 드라이 크리닝은 1807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는 1920년경부터 세탁소에서 드라이 크리닝을 하 였다. 용제는 현재 사용하지 않는 휘발유나 벤젠이었고 모직물, 견직물, 스테이플 파이버와 양모를 혼방한 직물을 세탁하는 방법으로 소개하였다. 문제점으로는 수용성 오염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양모의 유분이 지나치게 제거되어 편물이 거칠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드라이 크리닝이 좋지 않다는 기사들이 소개되기까지 하였다.
드라이 크리닝
털실로 된 양복은 오래 이비어 더러워지면 크리닝을 해야만 때가
지는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리 겹으로 도닌 양복일지라도 사실 물에다 빨면 휘발유로 크리닝을하는 것 보다 때다 훨씬 잘빠지고 또 양복감도
덜상하는 편입니다. 휘발유로 크리닝을 하는 것은 기름때만 빼는 것이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저러워진 것은 그리 신통하게 빠지지 못합니다.
조선일보 1938.5.10
마직, 견직, 모직류 표백법과 크리닝
건조세탁이라는 것은 물을 사용하지 않고 휘발유나 벤젠이나 휘발성이 있는 약품을 가지고 세탁하는 것인데 여러 가지 약품과 만흔 경험과 기술이 필요하고 경제상으로 보아도 가정적은 못되고 전문가에게 맛기는 것이 제일 안전합니다마는 가정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때를 뺄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1931.7.15
봄철에 김한 세탁하는법
조선사람은 양복과 조선복 이중의 의복을 입게됨으로 자연히 불경제되는 점이 만습니다. 양복의 부속품, 넥타이, 와이샤츠 카라까지 일일이 세탁집에 맛겨서 빠는 사람이 만흔 즉 세탁비만 하여도 금전을 허비하게 됩니다, 할수 잇는대로 여간한 약품을 준비하여 두고 전부를 집에서 빨도록 하는 것이 조흘 줄압니다. ...중략
조선일보 1925.4.23
또한 1934년 기사에서도 세탁소라는 애기가 나와 주부들이 서양 양복을
세탁할때의 어려움으로 세탁소를 종종 이용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이 시기에는 가정에서 세탁을 주로 행하였기 때문에 세탁업이 그다지 활발하지는 않았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세탁요금에 대한 얘기가 등장하는데 세탁요금은 인상 되었지만 세탁외교원의 수입은 크게 격감 되었는데 이는 업자가조합을 결성하여 협정한 것으로 점주와 세탁외교원과의 이익배분이 5:5에서 6:4로 바뀌었고 이로 인해 세탁요금도 인상되었으며 서비스도 나빠졌으므로이는 매우 불합리한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기사를 보면 이 시기에는 세탁소를 운영하는 점주가 따로 있고 세탁물 주문을 맡아오는 외교원이 따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격적인 세탁업은 해방 후 해외에서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귀국하면서이루어졌다. 1950년대의 신문광고에 드라이크리닝을 하는 세탁소에 관한 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60~ 1979 TOP
아직 잠에서 덜 깬 아이처럼, 많은 시간이 흘렀는 데도 그리 큰 발전이나 도약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매김하는 시대가 아 닌가 싶다. 그렇다고 아무런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세탁소 내실을 탄탄히 구축한 시대로 이때 각종 오염, 얼룩, 알수 없는 때를 제 거하는 방법이 개발되었고 오늘날 오점제거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토양을 마련하게 된다.
드라이크리닝:석유냄새는 옷감이 상했다는 신호, 합성피혁 등은 다른 세탁법 써야 드라이크리닝점에서 찿아온 세탁물에서 당연히 솔벤트 냄새가 나야 세탁이 더 잘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이냄새는 불량용제를 사용 했다는 표시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옷감을 상하게 하고 있다는 신호 이기도하다. 세탁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보다 사용하는 솔벤트이다. 1920년 미국에서 스토다드가 발명되기 전 까지만 해도 개솔린, 납사를 많이 사용 하였으나 불이 잘나고 위험하였다, 따라서 개발된 용제가 석유계 솔벤트,퍼크로 에틸렌 이다. 동아일보 1970.12.14
세탁사고
한국부인회는 1967년 소비자보호를 위한 “불만의 창구”를 설치하고 상품 테스트와 소비자들의 의견을 들어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였다.
와이샤츠 등 품질저하
한국 부인회는....중략....소비자 품평회를 가졌다. 시대와이샤츠....
중략....세탁후의 모습이 66년도에 비해 나쁘다. 금년도의 제품은 한번만 빨아도 누렇게 변색, 66년것과 비교도 안될만큼 나빠졌다. 남영 나일곤의 스타킹은 색깔이 변하지 않고 광택이 좋으며 세탁하면 때가 잘 빠지지만...중략... 한국 부인회는 이러한 소비자 불평을 바탕으로 메이커에 시정을 건의할 예정이다. 소비자 품평회는1967 년 3월 한국 부인회가 소비자보호를 “불만의 창구”를 설치, 회원들의 테스트와 일반 소비자들의 의견을 한꺼번에 보아 총합 품평을 여는 것이다.
조선일보
1980 ~ 1989 TOP
세탁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워진 시대다. 각종 기계의 개발과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이전에 없던 호황을 누리게 된다.
또한 드라이크리닝 산업이 확실한 자리매김 하는 시대로 대변된다. 이 시대에 세탁업 중앙회의 전신인 “한국 크리닝 협회가 1984 년 창설 되면서 세탁업을 대표 하게된다. 세탁기 세탁시대에는 가정에서 행하는 드라이크리닝에 관한 기사가 거의사라졌다. 가정주부들이 산업사회로 많이 진출한 데다가 의류도 모피, 가죽코트, 실크블라우스, 순모 정장등 드라이크리닝용 섬유소재가 많이 이용되고 또한 세탁소에 맡기는 가정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드라이크리닝을 줄이기 위한 방법과 세탁소에 맡기는 요령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눈 맞은 모피의류 손질-습기제거가 기본
올 겨울에는 니트를 비롯해서 가죽과 모피등 고급소재로 만든 옷들이 인기를 모았다. 이들 고급의류는 세탁비용이 많이 들고 자칫 잘못하면 옷이 줄어들거나 변색하는 등 탈이나기 쉽다. 옷의 원형을 유지하고 비싼 세탁소 이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외출 직후.....중략..... 정식세탁은 색이 진한 것은 4-5년에 한 번 엷은 색은 2-3년에 한 번이 적당하다.
조선일보
또한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드라이크리닝 용제에 의한
환경오염에 초점이 모아졌다. 우리나라에서 5%정도 차지하는 염소게 용제는 오존층 파괴와 악취발생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염소계 용제의 사용을
억제하고 석유계 용제로 대체 할 것을 유도하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세탁소를 이용할 때의 주의사항 및 가격이 기사화 되고 있다.
세탁소에 맡기려면우선 믿을만한 자가시설을 갖춘 세탁소를 골라 맡기되
무리하게 촉박한 시일을 요구하지 말아야 하고 옷을 맞기기 전에 색깔, 부속품의 특징이나 파손상태를 미리점검 파악해 두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또한 세탁물이 너무 때에 찌들지 않도록하고 세탁물의 성질을 파악해서 맡겨야 하며 비용을 아끼기 위해 상의만 세탁소에 맡기고 하의는 집에서 물로 QKf 경우 상하의 색깔이 달라질수 있으므로 주의해야한다. 그러나 혼방제품은 제조회사가 (드라이크리낭 세탁)표지를 붙여놓고 있지만 모와의 비율이 60% 이하면 물에 빨아도 되고 순모나 실크제품은 집에서 물빨래를 할 경우 옷이 줄거나 늘어나고 색깔이 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세탁물 보상
1980녀대 초에는 뚜렷안 배상기준도 없고 세탁업소가 영세하여 그 배상에 있어 어려움이많았다. 이후 1984 년 한국클리닝 협회가 창설 되면서 소비자단체와 함께 세탁물 사고에 대한 배상기준을 마련하고 전문적인 기술자 양성을 담당하게 되어 세탁물에 관한 소비자불만의 해결에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90~ 2002년대 TOP
80년대 세탁업은 하나의 단일업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였고 지금까지 없었던 호황을누리게 된다.
그러나 1990 년대에 들어 서면서 새로운 사회상을 반영하듯 새로운 도전에 직면 하게된다. 세탁장비의 자동화로 저가공세가 시작되였고, 지구의 온난화에 따른 환경오염 문제의 인식은 환경규제로 이여지며 21C를 살아가는 속에서 세탁산업의 새로운 과제로 환경을 생각 하지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또한 급속히 발전하는 사회환경은 다양한 방법의 세탁소 운영을요구하고 있고, 선진국의 세탁 시장개방압력은 우리나라의 세탁시장 자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세탁소의 다양화 시대가 펼쳐지면서 세탁요금이 인상되였고 이제는 세탁업도 잔문가인 세탁사가 해야된다는 인식아래 세탁사 시험이 생겼는데 세탁사 시험문제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에 편의점이 많이 생기면서 세탁업 기존업소와 편의점간의 신경전이 사회문제화 되기도 하였다(1993년). 세탁비는 업소에 따라 최고 3배까지 차이가 나는 등 세탁비 정찰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1993). 세탁업 신고제를 계속 유지하고 위생법의 수정안이 통과되는 등 세탁업에 대한 규제가 본격화 되였다.(1993)
이러한 중에도 편의점이 서로 경쟁하면서 속성“빨래편의점”이 생기고(1992) “셀프 드라이크리닝방”(1995), 이나 “빨래방”이 성업하고 있다.(1997) 최근에는 빨래, 드라이크리닝, 다림질, 수선까지를 종합적으로 취급하는 “대형세탁공장”을 차려두고 아파트촌 등에서 세탁물을 수집했다가 되돌려주는 것을 전문적으로 하는 집하장 형태의 업소도 등장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1998년 이후에는 “세탁소 복합점포”가 등장 하였다.
국내 세탁시장의 규모는 약 7조원 정도이며 미래 세탁업의 전망은 고급옷감으로 만든 옷이 늘어나고기계세탁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세탁업체의 대형화로 세탁비는 내려가고, 독신시대 (고학력, 고령화, 여성취업에 따른 이혼, 만혼증가, 결혼 기피현상 등으로 인한)가 도래하여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세탁을 맡길 추세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세탁산업은 많은 물량을 낮은 비용에 처리하는 “대형화”, 개인의 생활 패턴에 맞게 의복의 세탁, 수선, 관리해주는 “정보화”“고급화”, 생필품 택배, 심부름 대행, 가정청소 대행을부업으로 병행하는 “다양화”의 길을 갈 것으로 예측된다.
국내에는 3만 4천여 개(1998년 말 현재 세탁중앙회 추산)의 개인 세탁소와 10~80명의 인력이 일하는 공장형 세탁소 100여 군데를 포함, 약 5만 명의 인력이 세탁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가정청소대행 업체의 다양화와 활발한 창업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세탁에 종사하는 인구는 더욱늘어날 전망이다.
세탁가사는 10년 내에 완전히 사라질(아웃소싱) 될 것으로 전망된다.
* 미래의 세탁산업은 기계를 이용한 생산성 향상 ! 세분화(분업화) ! 전문화 ! 고급화 ! 정보화 ! 다양한 마케팅 개발 ! 각 업소간의 제휴를 통해서 개개인의 세탁소 운영을 공개하고 일반화 시킬때 세탁업종이 발전 할 것이라 확신한다.
** 1920년 ~2002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한 세탁업종! TOP
근 80여년 이라는 짧지 않은 세탁역사를 가진 우리업계는 급변하는 사회 현상을 반영하듯 격동의 세월 을 살아왔습니다. 앞만 보고 돌진하듯 달려온 세탁의 역사 속에서 이제 우리는 지나온 시대를 되 돌아 보고 반성과 성찰로 미래를 설계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2000년대를 맞이한 지금 우리 업계의 현실은 인력난, 저가격, 고품질, 세탁업종의 난립, 시장개방 압력 등등 산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세탁에 종사하는 우리는 국민보건위생과 패션 보존기능, 재활용 측면에서의 경제 적인 측면에서 묵묵히 노력 하였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 우리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저 또한 세탁업에 근 8년여를 종사 하면서 많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탁현실은 매우 열악하기 이를 때가 없다는 것과 사회적 편견, 일반화 되지못한 세탁기술, 운영상의 문제점 등등....
“우리는 무엇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 하면서 여러 세탁인들과 대화를 통해 우리 스스로 가 우리를 낮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되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옮다고만 외치고 자 신의 정보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 인양하는 우물안 개구리식의 세탁인의 세탁현실을 돌이켜볼 때 우 리가 우리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미흡하나마 “세탁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의 뿌리인 세탁의 역사는 일반화되어 널리 알려줘야 하고 우리 스스로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서로를 인정해 줄 때 만이 우리 세탁인의 위상이 향상될거라 생각이 듭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세탁인의 업적을 세탁인들이 인정해주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 할때 비로써 세탁인 스스로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속에서의 세탁의 역사에 대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밝혀야 하고 각 자가 경험한 세탁을 이야기하고 일 반화 시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글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