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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수방정식의 역사
중국 고래의 수학책인 "구장산술(九章算術)" 중에서 방정(方程)이란 용어가 나타난다. 구장산술은 그 이름과
같이 아홉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제 8장 방정(方程)에는 오늘의 미지수가 3개인 연립일차방정식과 같은 것을 다루고 있으며, 오늘과 거의
같은 해법으로 풀고 있다.
수학사에 의하면 기원전 6 세기경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살던 바빌로니아 사람의 문화에서 볼 수 있었던
수학은 일차, 이차 및 삼차방정식에 해당하는 문제를 풀고 있었다. 또 고대 이집트 사람도 일차, 이차방정식에 상당하는 문제를 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더욱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디오판토스(Diophantod;246?-330?, 그리스)는 이미 이차방정식의 해법을 알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9세기 전반 알콰리즈미(Alkhwarizmi;780-850, 아라비아)의 대수학이 저서 "al-gebr
w'almuqubala"에는 일차, 이차방정식의 풀이법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오늘날의 '이항'을 al-gebr, '동류항을 정리한다'를
almuqubala라고 불렀다.
그래서 대수학을 뜻하는 algebra는 al-gebr에서 유해하고, 계산법을 뜻하는
algorithm은 Alkhwarizmi에서 유래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디오판토스, 알콰리즈미에서는 음수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음의 근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음의 근의 존재를 명확히 의식한 최초의 수학자는 16세기 카르다노(Cardano, G.;1501-1576, 이탈리아)라고
한다. 이 때까지는 이차, 삼차방정식의 계수는 모두 양의 근만을 다루었다. 즉, 카르다노 이전까지는 양의 근만을 근으로 인정하였을 뿐이다.
구장산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일찍이 음수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6세기경에 양수, 음수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S'ridhara(991-?,인도)는 디오판토스가 몇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푼 이차방정식을 1025년에 근의 공식을 얻어 통일적으로
푸는 방법을 밝혔다.
또한 바스카라(Bhaskara, A.;1114-1185,인도)는 1150년에 이차방정식에 두 근이 있고,
음의 근이 존재함을 인식한 최초의 수학자이었다. 또, 바스카라는 삼차, 사차방정식도 다루었다. 이를테면, 의 한 근은 라는 것과 같이 특수한
근을 구하였다.
간단한 모양의 삼차방정식은 메나이크모스(Menaechmos;375-325 B.C., 그리스)가 정육면체의 문제에
관련해서, 아르키메데스(Archimedes;287?-212 B.C.,그리스)가 구의 부피의 문제에 관련해서 다루었다. 또 카얌(Khayyam,
Omar; 1040-1123, 아라비아)은 삼차방정식을 원뿔곡선의 교점을 작도하여 풀었다. 그는 아라비아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였다.
삼차방정식의 해법에 처음으로 성공한 사람은 페로(Ferro; 1465?-1565, 이탈리아)라고 한다. 그는x3 + mx = m과
같은 모양의 삼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카르다노의 방법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삼차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이 발견된 후에
사차방정식의 해법이 카르다노의 제자인 페라리(Ferrari, L.;1522-1565, 이탈리아)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카르다노는 1545년에
삼차, 사차방정식의 해법을 그의 저서 'Ars Magna'에 발표하였다.
삼차, 사차방정식의 해법이 발견된 후에 약 300년간
많은 수학자들이 5차 이상의 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발견하려고 고심하였다. 그러나 해를 거듭해도 해법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계수에 가감승제와 근호의
유한회의 조작을 반복하는 대수적 해법은 불가능하다는 증명을 시도하게 되었다. 루피니(Ruffini, P.;1765-1822, 이탈리아)는 5차
이상의 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풀 수 없다는 증명을 발표하였으나, 그 증명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벨(Abel,
N.H.;1802-1829, 노르웨이)은 1826년에 "5차 이상의 방정식은 일반적으로 대수적으로 풀 수 없다."라는 정리를 증명하였다. 그 후
갈루아(Galois, E.;1811-1832,프랑스)에 의해서 대수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 수 있는지 어떤지는 근에 대한 치환군(아벨군)의 군론적
구조에 따라 명백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독창적인 갈루아의 생각은 오늘의 갈루아 이론의 바탕이 되었고, 현대 수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5차 이상의 대수방정식이라도 특별한 것은 물론 대수적으로 풀 수 있다. 또 타원함수와 같은 알맞은 함수를 활용하면 5차방정식의 근의
공식을 만들 수도 있다.
2. 나라별 대수방정식의 역사
(1) 수메르
지금부터 4000년 전,
수메르에서는 간단한 일차, 이차, 삼차방정식을 풀었다고 한다.
(2) 그리스
기하학의 왕국인 그리스에서는 많은
기하학자가 배출되었으나, 대수학자(방정식 연구가)는 희귀했다. 디오판토스는 희귀한 대수학자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산학' 13권을
저작했으며, 기호에 의한 방정식을 최초로 풀었다.
(3) 이집트
피라미드가 건설된 것은 기원전 2800년경이다.
피라미드의 건설에는 고도의 수학이 필요한데, 방정식을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실제로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수학서인
'아메스(Ahmes ; 1700년경 B.C)의 파피루스'가 있는데 B.C 1650년경 신관(神官) 아메스가 그 전부터 알려져 있던 수학에 관한
지식을 파피루스에 기록한 수학책으로 판독하였다.
파피루스란 나일강 습지에서 나는 갈대와 닮은 식물로, 얇게 썰어서 종횡으로 겹쳐서
압축한 거친 보드(board)지와 같은 종이이다. 파피루스는 18feet × 13inch의 두루마리로 되어 있는데 기록된 수학문제는 4부로
나누어 총 85문항이다. 여기에는 미지수를 hau로 한 방정식이 보이는데 그것이 일차방정식과 이차방정식이다.
(4) 아라비아
아라비아의 수학은 인도의 대수와 그리스의 기하 등을 받아들여 이것을 정리, 발전시켜 유럽에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라비아도
인도와 같이 수학자는 천문학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산술이나 방정식 분야에 치중하였다.
특기할 만한 것은 9세기의 저명한 수학자
알콰리즈미의 연구이다. 그는 '알제브로 발르 아카라바'라는 방정식에 관한 저작을 하였는데 이 책의 al-bebr 부분은 오늘날의 대수
algebra의 어원이 되었다.
12세기의 카얌(Khayyam, Omar ; 1040 - 1123)은 삼차방정식을 풀었다.
(5) 중국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옛날부터 방정식이 두루어졌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세기경에 쓰여졌다는 명저 '구장산술'이다. 이 책은 9개의 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8장 '방정'의 장에서 오늘날의 연립방정식이 나온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정식'이라는 어원도 여기에서 나왔다.
(6) 인도
고대 인도의 수학은 천문학자에
의해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그리스와는 반대로 기하학의 발달은 별로 없었고, 대수학(산술이나 방정식 등)이 왕성하게 발달했다.
6세기의 아리아바타(Aryabhata ; 476 - 550?)는 이차방정식을 풀었으며, 12세기의 바스카라(Bhaskara, A
; 1114 - 1185)는 처음으로 이차방정식에서 음의 근과 무리수의 근을 인정하였다.
인도 수학의 가장 큰 공적은 0과 음수의
발견, 자릿수 기수법에 의한 수의 사용이 그것인데, 이것은 현대 수학의 토대가 되었다.
(7) 유럽
이탈리아에서
이차방정식과 사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했는데, 오차방정식의 해법은 좀처럼 얻을 수가 없었다. 그 해법을 얻기 위해 약 300년간에 걸쳐 많은
수학자가 도전했으나 어느 누구도 풀 수가 없었다.
그 후 오차 이상의 방정식은 그 일반적인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프랑스의
갈루아와 노르웨이의 아벨이 증명하였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라에서는 학문연구의 세계에도 올림픽 정신을 도입해서, 수학계에서는
방정식 해법 경쟁이 생겼다. 이로 인해 삼차, 사차방정식도 풀 수 있게 되었다.
오차방정식의 일반해를 구할 수 없다는, 즉
대수적으로 풀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아벨과 갈루아는 그 증명과정에서 '군'의 개념을 생각해 내었다. 이리하여 방정식의 해법에 관련된 수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군(群)'이 탄생하였는데, 이 군의 이론은 20세기 수학의 추상주의의 계기기 되어 수학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아가 군의 이론은 고차방정식 외에도 삼각방정식, 대수방정식, 벡터방정식, 미분방정식, 적분방정식 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
관련되었다.
(8) 미국과 영국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과 영국에서 OR(Operations Research,
작전연구)가 탄생하였는데, OR에는 수학의 방정식과 부등식이 도입되었다.
처음 군사적 목적에서 발전한 선형계획법은 그 후 여러
방면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가까운 예로서, 햄이나 소시지나 화학비료 등을 만드는데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으로
이용되어 왔다.
5 + □ = 8, 3 × □ = 21 등과 같이 일상적인 필요에서 나타난 방정식은 오늘날의 고도의 방정식
이론으로 발전하기까지 5000년 이상을 인간사회아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16세기에는 일종의 놀이로서, 19세기에는
순수학문으로서, 그리고 20세기에는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과도 관련을 가지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 발전해 가고 있다.
현재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미지수가 수천 개나 되는 방정식, 부등식의 해도 구할 수 있다.
알콰리즈미(780~850)
알마문치세(813∼833)에 활약한 페르시아계 수학자·천문학자·지리학자인 당시의 최대 과학자. 이슬람교도로서, 아랍식
기수법(記數法)을 뜻하는 알고리즘(algorism)은 이 이름에서 전용된 것이다. 그리스와 인도의 지식을 종합하였으며, 그 산수는 아랍인과
유럽인에게 인도의 기수법을 소개하였다. 대수학 저서인 《복원(復元)과 대비의 계산》도 중요한 것으로, 거기에는 1차방정식과 2차방정식의 해석적
해법이 포함되어 있다. 또 2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해법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대수학을 뜻하는 영어의 algebra는 아랍어로 복원을 뜻하는
al-jabr에서 유래한다. 그의 천문표와 삼각법의 표에는 사인함수나 탄젠트함수도 포함되어 있다. 지구의 경·위도 측정에도 종사하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의 본문과 지도의 양쪽을 개정하여 《지구의 표면》이라고 개제하였다.
◆ 3차 및 4차 방정식
16세기의 가장 극적인 수학적 성취는 아마도 이탈리아 수학자들의 3차 및 4차 방정식 의 대수적 해법의 발견일 것이다. 이 발견과
관련된 이야기는 매우 다채로운데, 벤베누토 젤리니가 쓴 것이 제일 그럴 듯하다. 간단히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1515년 경에
볼로냐(Bologna)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페로(Ferro, 1465~1526)가 x3 + mx = m 방정식을 대수적으로는 풀었으나, 이는
아마도 그 이전의 아라비아 원전들 위에 기초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자신의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채 제자인 피어(Fior)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었다.
한편 1535년경에 타르탈리아(Tartaglia)가 x3 + px2 = n 꼴의 3차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피어는 그의 주장이 괜한 허풍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타르탈리아에게 3차방정식을 푸는 공개시합을 하고자 제안했다.
타르탈리아는 전력을 다하여 연구한 끝에 시합이 열리기 며칠 전에 2차항이 없는 3차 방정식의 대수적 해법도 발견하였다. 시합에서는 두 종류의
3차 방정식 문제가 출제 되었고 피어는 그 중 한 종류 만 풀었으나 타르탈리아는 문제를 모두 풀어 완전히 승리 하였다.
그 후에
카르다노(Cardano)가 타르탈리아에게 간언하여 비밀을 꼭 지키겠다는 엄숙한 맹세 아래 3차 방정식을 푸는 중요한 방법을 얻어 내었다. 그러나
1545년에 카르다노는 대수에 관한 탁월한 라틴어판 논문 <위대한 술법, Arsmagma> 을 뉴렘베르그에서 출간 하면서
타르탈리아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3차 방정식의 타르탈리아 해법을 실어 버렸다. 타르탈리아는 이에 격분하여 격렬한 항의를 하였지만 카르다노의 가장
유능한 제자였던 페라리(Ferari)는 카르다노가 제 3자를 통하여 페로의 해법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고 주장하면서 오히려 타르탈리아가 동일한
원전으로부터 해법을 표절했다고 비난했다.
3차방정식이 풀려진 후 오래지 않아 4차방정식의 대수적 해법도 발견되었다. 1540년에
이탈리아 수학자인 코이(Coi)가 카르다노에게 4차방정식을 초래하는 문제를 주었다. 그러나 카르다노는 그 방정식을 풀지 못했지만 제자인 페라리가
문제를 푸는데 성공하여 그의 <위대한 술법>에 이 해법을 싣는 기쁨을 누렸다.
16세기를 대표하는 수학, 즉 대수의
'원산지'는 비유럽 세계인 아라비아였지만 대수가 유럽에서 발전하게 된 이유는 '중세 후기에 있어서의 상업발달의 압도적인 영향 밑에서 계산술과의
쌍둥이로서' 이탈리아 상인이나 은행가들의 실제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천문학이 오랜 동안 수학의 발전에 기여해왔고, 한 때는 '수학자'라는 이름이
천문학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수학에 공헌한 천문학자 중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은 폴란드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Nicolas
Copernicus. 1473~1543) 였다. 우주에 관한 그의 이론은 삼각법의 개선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그 자신도 삼각법에 관한 논문을
썼다.
카르다노 (Cardano, Girolamo) [1501.9.24~1576.9.21]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의 수학자 ·의사 ·자연철학자.
국적 : 이탈리아
활동분야 : 수학, 의학, 자연철학
출생지
: 이탈리아 파비아
주요저서 : 《아르스 마그나》(1545)
파비아 출생. 파비아 및 파도바대학을 마치고 밀라노대학
·파비아대학 ·볼로냐대학에서 수학 ·의학을 강의하였다. 한때는 파비아 시장(市長)으로도 있었다. 점성술자(占星術者)로서 철학을 연구하였고,
도박꾼인 반면 대수학자(代數學者)였으며, 실험에 특기를 가진 물리학자인 동시에 전혀 신용할 수 없는 거짓말쟁이로 일컬어졌다. 또한,
산적(山賊)의 딸을 아내로 삼는 등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미치광이 천재라고 불렸다.
의사로서는 스코틀랜드의 어떤 추기경의 천식을
치료하는 데 침대에 깃털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알레르기 현상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학자로서는 당시의 제1인자였으며, 1545년 대수학의 저서 《아르스 마그나 Arsmagna seu de regulis
algebrae》를 출간하였는데, 그중 3차방정식의 대수적인 해법은 타르탈리아(본명 폰타나:1499∼1457)가 발견한 것인데도 마치 자기가
고안(考案)한 것처럼 무단 발표함으로써, 영구히 인격적 손상을 입게 되었다.
자연인식의 문제에 대해서는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같은
물활론적(物活論的)인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범신론적 ·반가톨릭적이라 하여, 1570년 이단(異端)으로 몰려 6개월간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그후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연금(年金)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페라리(Lodovico Ferrari;1522-1565)
이탈리아의 수학자.
파팔 볼로냐 출생. 4차 방정식의 일반 해를 최초로 구한 사람이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수학자
카르다노의 강의에 참석해 라틴어와 그리스 수학을 배웠다. 1540년에는 카르다노의 뒤를 이어 밀라노에서 유명한 수학 강사로 있으면서 4차방정식의
해를 구해, 나중에 카르다노의 저서인〈위대한 예술〉에 발표했다.
비에트(1540~1603.12.13)
프랑스의 수학자. 퐁트네르콩트 출생. 변호사로서 일하면서 수학을 연구하였다. 후일 앙리 3세와 4세를 섬겨 궁정 고문관이 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삼각법의 개선에 노력하였으나, 나중에 대수학의 계통화에 착수하여, 1591년부터 투르에서 간행하기 시작한 《해석학입문》에서 그
새로운 대수학을 전개하였다. 여기서 처음으로 대수가 기호적으로 다루어지고, 간약(簡約)의 원리가 사용되었으며, 3차방정식을 중심으로 한 방정식의
일반적 취급이 제시되었다. 대수학을 기하학과의 관련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가령 방정식의 근과 계수 사이의 관계를 통찰하면서도 양의 근[正根]
이외는 버리는 등, 문제의 전면해결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한편으로는 17세기 해석기하학 전개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가우스(1777 - 1855) : 도이칠란트의 수학자
19세기 전반 최대의 수학자로서, 순수 수학에는 물론,
응용 수학에도 눈부신 업적을 남겨 '수학의 왕자'로 불리고 있다. 그의 업적은 현대수학과 이론 물리학 외에, 오늘날의 과학 기술 분야의 발전에도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브란시마이크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10세때 등차 급수의 합을 구하는 공식을 알아내어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한다. 나중에 브린시바이크 공의 도움으로 괴팅겐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학생시절인 19세때 유클리드이래 2000년간
삼각자와 컴퍼스만으로는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해 왔던 정 17각형을 그릴 수 있음을 증명해, 대수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 최소 제곱수를
발견하여 복소수평면을 발표하였으며, 1799년에는 이른바 대수학의 기본 정리를 증명함으로써 학위를 받았다. 그는 정 14각형 그리는 방법을
정수론에서 얻었는데, '수학은 모든 과학의 여왕이며, 정수론은 수학의 여왕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정수론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1801년에는 <수론연구> 를 발표하여 정수론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리는 획기적인 업적을 쌓았다. 1801년 이후로는 괴팅겐 대학
교수로 평생을 보냈는데, 그는 정수론 이외에도 최소 제곱법을 비롯한 곡면론, 허수론, 방정식론 등을 깊이 연구해 수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타원함수의 발견과 최초로 완전한 정의를 내린 복소수 등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유고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의 증명은
이전의 뉴튼, 오일러 시대의 수학과 그 이후의 수학을 수학 사상적으로 구분하게 되었다. 복소수란 말도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자기 유도의
단위인 '가우스'란 말도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아벨 (1802.8.5~1829.4.6)
노르웨이의
수학자. 오슬로 근교 핀드 출생.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세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과 싸우면서도 수학공부에 뜻을 두었다. 다행히 뒷날
《아벨 전집》을 편집한 친구 B.M.홀름보에의 도움으로 크리스티아니아대학(지금의 오슬로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9세 때에는 그때까지 약
3세기 동안 수학상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던 5차방정식의 대수적 일반해법을 연구하여, 그 불가해성을 증명하였다. 아벨은 5차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자비로 인쇄하여, 그 일부를 당시 수학계의 제1인자였던 K.F.가우스에게 보냈으나, 가우스는 그것을 읽어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한다. 1822년 크리스티아니아대학을 졸업한 아벨은 홀름보에의 주선으로 정부 보조금을 얻어 수학연구를 계속하였으며, 25년에 독일·프랑스로
유학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괴팅겐에는 가우스가 있었기 때문에 아벨은 괴팅겐을 피하여 베를린으로 갔고 거기에서 A.L.크렐레와 만나게 되었다.
크렐레는 아벨의 협력을 얻어 26년에 수학연구의 전문지인 《순수수학 및 응용수학 잡지》를 창간하고, 여기에 아벨의 논문을 게재하여 그 업적을
세상에 소개하였다. 아벨은 이어 프라이부르크, 드레스덴, 빈 등을 거쳐 이탈리아, 스위스, 파리로 갔으며, 그 동안에 ‘아벨의 정리’를 포함한
타원함수론을 써서 파리에 있는 프랑스 학사원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이듬해 27년에 베를린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도 고생스러운 연구를 계속하여, 타원함수론에 관한 우수한 논문들을 발표하였다. 29년 1월 신병이 악화되어 건강이 극도로
나빴으나, 프랑스 학사원에 제출했던 당시 아직 발표하지 않은 논문의 사상을 발전시켜 대수함수에 관한 ‘아벨의 정리’를 증명한 유명한 논문을 써서
베를린의 크렐레에게 보였다. 이 무렵에야 그의 업적이 수학계에 알려져 높이 평가되었고, 베를린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초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초대장이 도착되기 이틀 전에 아벨은 26세의 불행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이름은 ‘아벨의 적분’ ‘아벨의 정리’ ‘아벨방정식’ ‘아벨군’ 등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많은 수학용어 속에 살아 있어, 수학계 불후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갈로아
프랑스의
천재적 수학자로 군(群)의 생각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소수차의 기약방정식이 가감승제와 거듭제곱근을 써서 대수적으로 풀리기 위한
조건을 찾아냈다.21세때 연애사건으로 인한 결투로 쓰러졌다.
그의 업적은 결투의 전야 친구 Auguste Chevalier에게
보내는 서신에 씌여 있다고 하는데 갈오아는 파리 교외 부르라렌 출생으로 군(群)의 개념을 처음으로 고안하였고, ‘갈루아의 이론’으로도 유명하다.
파리의 고등이공과학교에 입학하려다 실패하였으나, 182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30년 정치운동에 참가해서
퇴학당하였다. 또한 국왕을 탄핵하여 투옥되었는데, 가출옥 중에 경찰관이 도발한 것이라고도 하는 결투로 인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방정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도 프랑스 학사원에서 등한시되었으나, 그가 죽은 후, 결투 전날 밤에 친구인 A.슈발리에에게 보낸 유고(遺稿)에서
비로소 그 위대성이 알려졌다.
유고에는 타원적분(楕圓積分)과 대수함수(代數函數)의 적분에 관한 것, 방정식론에 관한 것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에는 군(群)의 개념 도입이나 갈루아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갈루아의 사상에 포함된 군의 개념은 기하학이나
결정학(結晶學)에도 응용되었고, 물리학에도 풍부한 연구수단을
제공하였다.
http://www.chgok.ms.kr/~kimdn/ez2000/ezboard.cgi?db=mboard5&action=read&dbf=11&page=0&depth=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