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발
5월 14일! 큰 마음먹고 장수산악회가 백두대간 추풍령에서 길마재까지 23km 코스를 종단한다는 엄청난 산행에 따라 가보기로 했다.
마산에서 4시 반에 출발한다니까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직 채 밝지 않은 길로 잠을 쫓으며 달려 그들과 합류할 수 있었다. 대원들이 나까지 합쳐 37명.
구마고속도로를 탄 버스는 기운 좋게 달렸다. 밝아오는 차창 밖으로 아카시아 꽃이 휘늘어지게 피어 그 짙은 향기가 차 속으로 들어와 코끝이 감미롭다.
6시 넘어 칠곡 휴게소에서 싸온 김밥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 7시25분쯤 목적지인 추풍령 출발점에 도착했다. 이 장수산악회 회장인 김창동씨는 나를 배려해서 버스 기사에게 부탁하여 3시간쯤 산행거리가 짧아지는 궤방령에 내려주라고 했다. 혹시 8시간의 대장정에 자신이 없는 대원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살폈지만 나만 빼놓고 나머지는 모두 씩씩하게 도전하러 출발했다. 단 혼자다. 김창동씨는 두 번 세 번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당부하고 일행을 따라 사라졌다.
혼자 타고 가는 버스 기사양반은 궤방령 위치에 확신이 없는지 차를 중간에 세워 지도를 꺼내놓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가 보니까 척 알겠는데 뭘 망설여! 샛길로 우회전 다시 직지사로 가지 말고 우회전! 내 지시에 따라 가니 나지막한 고개 마루가 있다. 다시 미심쩍은 기사 따라 내려보니 안내판이 우뚝 서 있다.
궤방령! 해발 300m 의 높지 않은 고개지만 임진란 때 박이룡 장군이 몰려오는 왜적을 용감하게 무찔렀다는 푯말이 있다. 험준한 백두대간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이라나? 바로 남으로 험준한 가파른 오솔길이 나 있다. 이곳에서 추풍령까지는 백두대간을 따라오면 3시간 거리란다. 즉 나는 대원들의 출발선에서 3시간 거리 앞에서 출발하는 부정행위를 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저들은 산사람들 마찬가지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참가하는 그것도 나이 먹은 사람이니까 어쩌겠니. 그래도 겁난다. 3시간을 빼어도 5시간의 산행이다. 과연 내가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고 길마재까지 갈 수 있을까?
2. 산을 오르다
7시 52분! 처음은 용감하게 출발했다. 길을 안내하는 나무에 매달아놓은 리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혼자라 외롭지만 오히려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어서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좋기도 하다.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발밑에는 둥글레가 지천으로 자라고 있다. 황학산은 둥글레 산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길마재 근처까지 둥글레를 보았으니까.
초록 물결 속으로 쉬엄쉬엄 올라갔다. 오를수록 둥글레만 아니라 잎이 둥글레 닮은 애기나리, 노란꽃 동의나물, 양지꽃, 이름 모를 꽃들이 섞여 피어 있다. 산림이 짙어 부스럭 소리가 들리면 산돼지가 같은 놈이 나타나 공격해오지 않을까 조바심도 인다. 주위에 나뭇가지를 하나 주어 지팡이를 삼았다. 벌써 숨이 차오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푸른 숲 속을 헤쳐 가니 눈앞이 밝아지는 것이 산등성이가 있다는 증거렷다. 앞산이 내다보이는 산등성이에서 기지개 한번 크게 켜고, 그 산등성이를 타고 나아갔다. 푸른 세상 속에서 간혹 연분홍꽃을 피운 산철쭉인지 화사한 꽃이 보인다. 눈요기하며 갔다. 산등성이라 한결 시원하다. 그때 마치 일부러 사람이 흉내내는 듯한 ‘박 박 박곡!’ 하는 새소리가 크게 들린다. 어디쯤에서 어떤 놈이 그런 소리를 낼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작전을 바꾸어 따라 소리내기! 녀석 갑자기 소리를 뚝 그쳤다. 움직임이 없다. 3차 시도! 돌멩이를 던지면 놀라서 날아가겠지. 그러면 모습을 나타내리라 돌만 떽떼굴 고요를 깨고 굴러가고, 녀석은 끔쩍도 하지 않는다.
3. 동지를 만나다
아홉 개의 중간 도달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여시골산이다. 봉우리에 오르니 어떤 먼저 온 일행이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머물 수 없어 그대로 통과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 퍼질러 앉아 나도 배낭에 든 물병을 꺼내어 마셨다. 이 큰 물병 때문에 어깨가 아프구나, 얼른 먹어치워 버려야지. 하며 그 뒤로 생각나면 꺼내어 마셨다.
두 번째 운수봉을 지나니 내리막길이다. 왼손 쪽으로 직지사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세거리에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잠깐 쉬어 가십시오.’ 라는 글귀가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나무로 만든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젊은 부부가 올라와 다른 벤치에 앉더니 말을 건다.
“어디서 오셨어요?”
나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어 일행이 있는데 나는 산행이 서툴러 미리 궤방령에서 여기까지 홀로 왔다는 등 자세히 설명했다. 그랬더니 내가 좀 측은하게 보였던지 부인이 고구마를 쪼개어 먹으라고 준다. 별 먹고 싶지 않지만, 주는 것이 고마워 먹었다. 그 사람들이 떠나고 나니 또 나보다 힘이 더 없어 보이는 사람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김천에서요.”
그래놓고 나에게는 어디서 왔냐고 묻지도 않고 바로 가려고 하기에
“쉬었다 가세요.”
하며 권했다. 마지못해 앉은 사람을 보고 나는 또 묻지도 않는 궤방령에서 출발한 사연을 설명했다. 그리고 진달래꽃인지 아닌지 비슷한 꽃이 등성이에 피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올라올 때 꽃이 피어 있었는데 무슨 꽃이에요?”
“저도 몰라요.”
내가 물은 게 잘못이지. 저런 사람 정도면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속으로 동지를 삼아버렸다. 조금 쉰 후에 다시 출발할 때는 그 사람을 앞세웠다. 그러면 부담이 되지 않기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힘없어 보이던 사람이 속력을 내는데 놀랍다.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마치 나를 떼어놓고 가려는 양 속력을 내었다. 곧 헉헉거리며 아까운 동지를 놓쳐서는 안 되지. 안간힘을 내어 따라갔다. 이마에 땀이 난다.
직지사를 지나서는 등산길이 잘 단장되어 있었다. 각목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는가 하면 위험한 곳에는 줄을 쳐놓고 ‘등산길이 아님’ 이란 글귀도 붙여 놓았다.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되었다.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내 동지는 그렇게 앞서가다가 전망이 좋은 바위가 있는 곳에 비켜 가더니 저쪽 산봉우리를 보고 혼자 캔을 꺼내어 먹고 있었다. 혼자 먹을 작정이었구나. 쳇 모를 줄 알고……, 툴툴거리며 지나쳐 올라갔다. 세 번 째 도달 지 백운봉에 자리 잡고 과일 주스를 맛나게 빨아먹었다. 그 사람 올라오기 전에 다 먹고 올라가려는데 어느 틈에 그 동지가 올라와 내 먹는 꼴을 보더니 비씩 웃고 지나친다. ‘뭐 웃을 것 뭐 있어? 너도 혼자 먹었잖아!’ 속으로 무안을 감추며 얼른 먹고 또 따라 붙었다.
4. 황학산 정상까지
산을 오를수록 잎들이 엷어지고 작아져 시야가 나타난다. 온 길을 돌아보니 이렇게 많이 걸어왔나 하는 자랑스러움이 일고, 앞을 보면 또 부연 산봉우리가 나타나 ‘언제 저기를 오를꼬’ 하는 고생할 걱정이 앞선다. 이제 거의 다 왔겠지 하고 산봉우리를 넘으면 ‘날 잡아봐라!’ 하는 듯 황학산 봉우리는 자꾸 뒤로 물러선다.
이제 내 동지는 보이지도 않는다. 방울토마토를 꺼내어 허기를 달랬다. 물병의 물은 아직 반도 굴지 않았다. 서너 걸음 가다가 쉬고, 나무를 잡고 쉬고, 오르고 또 올랐다. 꼭대기가 가까워지자 아예 떡갈나무, 참나무들은 새움을 틔우느라 한창이었다. 땅에는 풀들이 벌써 푸르게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들은 꿈꾸다가 늦잠을 잤나? 바람이 세차게 인다. 2월 칼바람 같다.
안간힘을 내어 한 봉우리에 올라서자 그렇게 갈망하던 봉우리가 우뚝 눈앞에 나타나는데 그 앞이 마치 화산 분화구처럼 널따란 터가 나타나고, 그 한쪽에 높은 언덕이 정상이다.
한달음에 정상에 올라섰다. 11시 33분! 높이 1111m 황학산은 언제부터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나를 반겨 맞아주었다. 정상에서 바라본 산줄기는 연두색 물결이다. 산봉우리가 발아래서 줄줄이 존경하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저 멀리 김천평야가 눈앞에 펼쳐지고, 경부고속국도가 시원스럽게 놓여 있다.
이 멋진 장면을 남겨 놓고 싶은데 카메라가 없다. 아쉬운 대로 휴대폰에 담아 보려고 애를 써도 혼자서는 안 된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고, 산새 소리만 들린다. 우리 일행을 기다리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리라. 그리고 여기서 만나게 되면 그 산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점심을 먹으려고 해도 마땅한 장소가 없다. 아까 물을 많이 먹은 관계로 아랫배가 꿀렁거리더니 오줌이 마렵다. 후미진 곳을 찾아 시원하게 일을 보고 돌아서다가 깜짝 놀랐다. 웬 사람이 혼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 쉬 하는 것을 보았을까 하며 눈여겨보니까 뜻밖에 반가운 내 동지였다. 모른 척하고 산봉우리에 쌓아 놓은 돌탑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점심을 혼자서 먹어 치운 내 동지가 어슬렁 나타났다. 이렇게 쓰임이 될 줄이야! 산에서는 사람을 사귀어 놓고 볼 일이다.
“ 한 커트 부탁해요.”
5. 독수리 나와라 오버
동지는 직지사를 향해 나는 남쪽을 향해 헤어졌다. 헤어진 후 줄곧 점심 먹을 곳을 찾다가 조용한 곳을 찾아 맛나게 싸온 김밥을 먹어치웠다. 양이 많았지만 앞으로 산행길이 많이 남았기에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배낭이 가벼워 진만큼 마음도 가벼워졌다.
여유가 있어 주위를 살피니 취나물이 자라고 있었다. 길가에 흙 묻은 채로 자라는 쪼그라진 취나물이 아니라 싱싱한 취나물이었다. 한 줌 꺾어 배낭에 넣고 출발했다.
그 등성이는 취나물 군락지인지 조금 가다가 보니 또 취나물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게 웬 떡이냐?”
나는 욕심쟁이가 되어 저 아래쪽까지 자라고 있는 큰 취나물을 손에 닿는 대로 다 뜯어 배낭에 넣었다. 고사리도 보였다. 이렇게 몇 번 취나물 채취를 하는 사이 배낭은 다시 불룩해지고, 그래도 욕심은 한이 없어 또 한 아름 꺾어 막 배낭 곁에 앉는데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는 무 빼 먹다 들킨 사람처럼 바쁘게 배낭 속에 밀어 넣었다. 발자국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 나는 모르는 척 지퍼를 닫는데 그 발자국 주인공이
“아, 여기 계셨군요.”
깜짝 놀라 바라보니 내가 취나물 꺾는다고 노닥거리는 사이 그 3시간 차이를 훌쩍 뛰어넘어 여기까지 도달한 선발대 세 사람이었다. 그 중 한사람이 마치 간첩을 잡았다는 듯 신호를 보내는데
“독수리 나와라 오버! 아, 그분을 바람재 조금 지난 곳에서 발견했습니다. 무사합니다.”
보고하는 곳이 아마 김창동씨인 모양이다. 또 식사여부를 묻는지
“식사를 하셨습니까?”
그래서 황학산 조금 지나서 먹었다고 하니까 그대로 앵무새처럼 보고한다.
“황학산 조금 지나서 혼자 점심식사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아직 6km 정도 더 남았으니까 조심해서 오라고 하며 씩씩하게 내려간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곧 본대가 들이닥치면 곤란하다. 한 걸음이라도 얼른 가야 한다. 잽싸게 배낭을 메고 그 사람들 뒤를 쫓았지만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다. 또 혼자서 외로운 산행이 시작되었다.
6. 장하다
다친 왼쪽 발목이 걱정되었는데 다행히 이상이 없다. 그 대신 이상하게 오른쪽 발목이 시큼거려 오래 걷지 못하겠다. 풀밭에 두 다리를 뻗고 주무르고 하였다. 그리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 산등성이를 다 타고 내려오니 큰 길이 나 있는 고개가 나타난다. 여기가 끝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도달하고 보니 앞서간 선발대는 보이지 않고 앞으로 높직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를 따라 리본이 매여 있다. 힘이 쏙 빠졌다. 이 산을 또 올라야 하나?
그래도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길 또한 어찌나 가파른지 가다가 돌아보고 하는데 우리 일행이 한 사람 고개를 지나서 나타난다. 그 뒤에 또 두 사람!
그 사람들을 기다릴겸 취나물을 꺾고 있을 때 한 사람은 저 밑에서 쉬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꺾고 있는 취나물을 보고 한 사람이 부러운 듯
“나도 취나물을 캐고 싶지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 못 캐.”
그러니까 또 한 사람
“취나물도 모르나? 저 분 가져 있는 것은 취나물이 아냐! 취나물은 앞뒤 잎이 모두 푸른데 저렇게 뒷면이 하얀 것은 변종이야. 삶아도 아무 맛이 없어.”
“저 아깝게 캔 걸 다 버려야겠네. 헛수고를 했네.”
하며 히득거리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배낭 가득 캔 취나물을 버려야 해? 헛수고라니! 저들이 뭘 안다고 그래. 이건 취나물 맞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또 넣었다.
힘을 내어 가까스로 그 봉우리를 올라서자 다시 밑으로 내리막길이 뻗어 있고, 다시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면 다시 다른 봉우리가 기다리고.
이곳에도 풀숲에는 둥글레가 자라나고, 뜻밖에 홀아비꽃대가 군락을 이루어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자란! 식물원에 가서 2000원이나 주고 두 포기 사온 그 자란이 진짜 허리가 아파 못 캘 정도로 많이 자라고 있었다. 괜히 샀다. 아까워라.
배낭이 불룩했지만 두 일행이 취나물을 꺾고 있어 또 취나물을 꺾었다. 드디어 본대가 나타났다. 여남은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렬로 지친 기색 없이 씩씩하게 걸어온다. 산호에서 같이 근무했던 김기수씨가 산행대장 즉 안내자로 맨 앞에 서서 오다가 나를 보며 반겼다.
“취나물 캐어가서 생채로 먹지 말고 삶아 먹어야 합니다.”
하며 주의를 주는 친절도 베풀었다. 누군가 생채로 먹고 탈이 나서 병원 신세까지 진 이야기를 하고 갔다. 이제 후미만 남았다. 힘을 내어 지친 다리를 스스로 위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끝이겠지 하고 다가가면 앞에 나타나는 길, 막다른 길이 더 힘이 빠졌다. 이제 내리막길로 이어졌다. 저 먼 곳에 차량이 보였다. 저 곳이 길마재인 모양이다. 다 갈 무렵 후미 김창동씨와 한 사람이 나타났다. 취나물을 꺾던 두 사람을 빼고는 내가 꼴찌로 도착했지만 대견했다. 4시 23분. 장장 거의 9시간의 산행을 이겨내었으니 스스로 생각해도 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