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도(회수) | 진학생수 | 비율(%) | 비진학생수 | 비율(%) |
1970 (55회) | 629 | 85.0 | 109 | 15.0 |
1971 (56회) | 566 | 85.8 | 93 | 14.2 |
1972 (57회) | 606 | 85.3 | 104 | 14.7 |
1974 (59회) | 608 | 87.9 | 83 | 12.1 |
1975 (60회) | 482 | 93.1 | 36 | 6.9 |
1976 (61회) | 504 | 94.4 | 30 | 5.6 |
1978 (63회) | 492 | 97.0 | 14 | 3.0 |
1980 (65회) | 590 | 98.8 | 7 | 1.2 |
1981 (66회) | 598 | 99.7 | 2 | 0.3 |
1982 (67회) | 602 | 99.8 | 1 | 0.2 |
1983 (68회) | 610 | 100 | 0 | 0 |
6. 학교신문 ‘정화요람’
본교의 학교신문 이름이 ‘정화요람’이다.
정화요람이란 단어는 우리 학교 교가의 후렴 끝부분에 ‘우리모교 이리국민 정화의요람’ 이란 말이 있는데, 그 ‘정화의요람’을 줄여
학교신문의 이름을 '정화요람’라고 하였다. 정화요람이란 말의 정화(精華)는 아주 순수하고 깨끗함의 뜻이고, 심성이 순수한 어린이를 연상시킨다.
또한 요람(搖籃)이란 어린아이를 태우고 흔들어 놀게 하거나 재우는 채롱이므로 ‘정화의 요람’의 뜻은 순수한 어린이들이 마음 편히 뛰어놀며 공부하는 곳, 즉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우리학교신문 ‘정화요람이’ 1987년 1월 17일 경향신문사 주관 제3회 전국 어린이신문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좋은 신문 이름을 두고 최근 학교신문 이름이 바뀌어 아쉽다.
7.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 변경
김영삼 정부 시대에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 지배할 때 사용된 명칭이라서 초등학교로 바뀐다.
실제로 일본이 식민지배를 최고조로 강화할 때인 1941년에 일본 천황칙령으로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개칭하게 하여 우리 학교도 일출공립국민학교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1946년 6월 1일 공립국민학교의 공립을 빼고 이리국민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렇게 내려오다가 1975년 12월 29일 초중등교육법의 개정으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뀌는 법안이 통과 되었고, 이듬해인 1996년 3월 1일부터 전국의 모든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학교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이로 인해 일본 식민지배의 잔재인 국민학교란 명칭은 영원히 사라졌다.
8. 개교70주년 기념행사
본교 연혁지를 보면 1975년 4월 10일에 개교60주년 기념행사를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해에 어떤 내용으로 기념행사를 했는지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5년 12월 7일에 개교70주년 기념행사를 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학교를 돌아보며 1985년도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그 당시는 20대 임철중 교장선생님이 재직하셨다.
1984년 11월 30일 증 이리문구사장 42회 오주봉
1984년 8월 1일 증 김충남
1984년 11월 30일 증 발전회장 이공희
상기 3작품이 모두 개교70주년 바로 직전의 해인 1984년도에 제작 설치된 것으로 보아 개교70주년 행사 준비의 산물로 추정된다.
이런 것으로 보아 당시 임철중 교장선생님이 학구내 유지, 본교를 졸업한 동문 등을 찾아다니며 본교 실외환경 조성을 위한 협조를 이끌어낸 것이 틀림없으며, 개교7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을 것으로 상상된다.
라. 중흥기(中興期 : 1998년~2014년)
본교는 1993학년도 졸업생수가 500여 명에서, 1994학년도에는 482명, 1995
학년도에는 407명, 1996학년도에는 341명, 1997학년도에는 263명으로 급격히 줄어들더니 1998학년에는 부터는 졸업생 수가 겨우 200여명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에 체념하지 않고, 연구·시범학교를 유치하여 교육 방법의 개선에 노력하였고, 육상부와 체조부가 전국소년체전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는 등 부흥의 노력이 있어서 1998학년도부터 중흥기로 획정하였다.
1. 교육과정의 변천
㈎ 제7차교육과정(1998~2012년)
제7차교육과정은 1998년 12월 30일 교육부 고시 제1997-15호로 고시
⑴ 추구하는 인간상
우리나라의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이 교육 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은 다음과 같다.
①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
② 기초 능력을 토대로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
③ 폭넓은 교양을 바탕으로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
④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토대 위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
⑤ 민주 시민 의식을 기초로 공동체의 발전에 공헌하는 사람
⑵ 교육 과정의 구성 방침
이 교육 과정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한 구성 방침은 다음과 같다.
① 사회적 변화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기본 능력을 길러 줄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을 구성한다.
②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과 선택 중심 교육 과정 체제를 도입한다.
③ 교육 내용의 양과 수준을 적정화하고, 심도 있는 학습이 이루어지도록 수준별 교육 과정을 도입한다.
④ 학생의 능력, 적성, 진로를 고려하여 교육 내용과 방법을 다양화한다.
⑤ 교육 과정 편성과 운영에 있어서 현장의 자율성을 확대한다.
⑤ 교육 과정 평가 체제를 확립하여 교육에 대한 질 관리를 강화한다.
⑶ 교육 과정 편성ㆍ운영 지침
①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의 시간 배당 기준에 배당된 각 학년별 교과, 재량 활동, 특별 활동의 수업 시간 수는 이 기간 동안에 모든 학생들이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할 연 간 기준 수업 시간 수이다.
② 국민 공통 기본 교과 중 다음의 교과는 수준별 교육 과정을 편성, 운영한다.
⊙ 수학 교과는 1 학년부터 10 학년까지 10 단계, 영어 교과는 7 학년부터 10 학년까지 4 단계를 두고, 각 단계별로 학기를 단위로 하는 2 개의 하위 단계를 설정하여 단계형 수준별 교육 과정을 운영한다.
⊙국어 교과는 1 학년부터 10 학년까지, 사회와 과학 교과는 3 학년부터 10 학년까지, 영어 교과는 3 학년부터 6 학년까지 심화ㆍ보충형 수준별 교육 과정을 운영한다.
③ 재량 활동에서 교과 재량 활동은 중등 학교의 선택 과목 학습과 국민 공통 기본 교과 의 심화ㆍ보충 학습을 위한 것이며, 창의적 재량 활동은 학교의 독특한 교육적 필요, 학생의 요구 등에 따른 범교과 학습과 자기 주도적 학습을 위한 것이다.
⊙ 초등 학교의 재량 활동은 학교의 실정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배정할 수 있으나, 교과 의 심화ㆍ보충 학습보다는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을 촉진시키기 위한 창의적 재량 활동에 중점을 둔다.
⊙ 중학교의 교과 재량 활동의 연간 수업 시간 수는 102 시간 이상이며, 한문, 컴퓨터 환경, 생활 외국어(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아랍어), 기 타의 선택 과목 학습 시간에 우선 배정하고, 나머지 시간은 국민 공통 기본 교과의 심화ㆍ보충 학습 시간으로 활용한다. 창의적 재량 활동에는 연간 35 시간 이상을 배 정한다.
⊙ 고등 학교 1 학년의 교과 재량 활동 연간 이수 단위 수는 10 단위이며, 국민 공통 기본 교과의 심화ㆍ보충 학습에 4~6 단위, 선택 중심 교육 과정의 선택 과목에 4~6 단위를 배정한다. 다만, 실업계 고등 학교의 교량 재량 활동은 전문 교과로 대체하여 이수할 수 있다. 창의적 재량 활동에는 2 단위를 배정한다.
④ 특별 활동은 다음과 같이 편성, 운영하다.
⊙ 특별 활동에 배당된 시간(단위) 수는 학생의 욕구와 지역 및 학교의 특성을 고려하여 학교 재량으로 배정하되, 영역 간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유의한다.
⊙ 시간(단위) 수가 배정되지 않은 활동에는 학교의 실정에 따라 별도의 시간을 확보한 다.
⊙ 특별 활동은 학교의 필요에 따라 시간(단위) 배당 기준보다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여 운영할 수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 운영을 통합하거나 분할하여 융통성 있게 할 수 있다.
⑷ 초등학교 교육 목표
초등학교의 교육은 학생의 학습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기초 능력 배양과 기본 생활 습관을 형성하는 데 중점을 둔다.
① 몸과 마음이 균형 있게 자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가진다.
② 일상생활의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기초 능력을 기르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경험을 가진다.
③ 다양한 일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학습 경험을 가진다.
④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이해하고 애호하는 태도를 가진다.
⑤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 생활 습관을 기르고,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씨를 가진다.
⑸ 제7차교육과정의 특징
① 기본학습과 심화학습 내용이 제시되어 있어서 기본학습이 끝나고 평가를 통과하면 심화학습으로, 그렇지 못한 학생은 기본학습을 다시 하는 수준별 교육을 하게 하였다.
② 국어 교과서를 영역별로 말하기·듣기, 읽기, 쓰기 등 3권으로 제작하였다.
③ ‘자연’이란 교과 명을 ‘과학’으로 바꾸었다.
④ 외국어(영어) 교과 신설하였다.
⑤ 사회과 중 ‘고장생활’을 지역교육청에서 개발하여 활용함
⑥ 교과 중에서 주당 평균 3시간 이상의 수업 시간 수가 배당된 교과는 주당 평균 1 시간 이내에서 시수를 감축하여 학생의 요구와 학교의 필요에 따른 창의적 재량 활동에 증배, 활용할 수 있다.
㈏ 제7차교육과정 개정교육과정 (2007~2012년)
교육인적자원부 고시 제2007-79(개정교육과정)
⑴ 초등학교 교육 목표
초등학교의 교육은 학생의 학습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초 능력 배양과 기본 생활 습관을 형성하는 데 중점을 둔다.
① 풍부한 학습 경험을 통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균형 있게 자랄 수 있도록 하며, 다양한 일의 세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한다.
② 학습과 생활에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기초 능력을 기르고, 이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상상력을 키운다.
③ 우리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 문화를 향유하는 올바른 태도를 기른다.
④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다양하게 표현하며 타인과 공감하고 협동하는 태도를 기른다.
⑵ 제7차교육과정의 개정교육과정의 특징
① 시간 배당은 1~2학년, 3~4학년, 5~6학년과 같이 학년군으로 묶었다.
② 교과는 사회/도덕, 과학/실과, 예술(음악/미술)과 같이 교과(군)으로 묶어 시간을 배당였다.
③ 교과별 시간 배당을 담임 재량에 맡겼다.
④ 창의적 체험활동은 자율 활동, 동아리 활동, 봉사 활동, 진로 활동으로 한다.
2. 교육 혁신을 위한 노력
㈎ 교육부 지정 인성교육 자율시범학교 운영
본교는 1999년에 교육부로부터 인성교육 자율시범학교로 지정받아 1998년 3월 1일부터 2000년 2월 28일까지 시범적 운영을 해왔다.
과거에는 학교교육이 교과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나 현대는 인성교육을 중요시 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말에 ‘공부만 잘하면 뭐야.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 말은 학업성취도와 같은 지적능력보다는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능력인 즉 인간의 품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다. 즉 공부보다는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다.
인성이란 사람의 성품이다. 즉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고와 태도 및 행동 특성의 특성을 말한다. 이것을 구체화 하면 곧 정직, 책임, 존중, 배려, 공감, 소통, 협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교육 현장의 문제해결 면에서 본다면 학교폭력의 예방 교육, 성 관련 문제 예방 교육, 남을 배려하는 인격 형성 등을 들 수 있다.
본교에서는 자치활동을 통해 학급에서 발생하는, 폭력, 폭언, 도난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토의함으로써 사전에 문제를 야기하지 않도록 인성교육을 강화 하였으며, 주변에서 남의 아픔을 감싸주려는 마음과 남을 먼저 배려하려는 마음을 기르는데 노력하였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기본생활 습관 지도를 하고 나의 생활 실천 학습장에 자기가 실천한 행동을 기록하게 하는 등 인성교육의 모델학습을 창안하여 실천하였다.
이러한 시범운영 결과를 1999년 7월 25일 발표하여 참석자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다.
㈏ 도지정 방과후학교 운영
본교는 전라북도교육청으로 부터 2009년 3월 1일부터 2010년 2월 28일까지 1년간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 연계활동을 통한 방과후학교 운영’이란 주제로 시범학교 운영을 하였으며 그 결과를 2009년 11월 12일에 발표하였다.
운영 내용은 ① 방과후학교 운영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②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 연계활동을 통한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③ 방과후학교 활동의 질 관리를 통해 수요자의 교육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첫째, 방과후학교 운영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방과후학교 운영을 위한 학교 시설 및 공간을 확충하고, 외부 강사 등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였으며, 둘째,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보유프로그램을 운영하고, 1인 1기를 가질 수 있도록 특기적성교육을 하였고, 셋째, 교육의 질 관리를 위해 방과후학교 평가단을 조직 운영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① 본 연구학교 운영으로 학생, 학부모의 다양한 교육 욕구를 충족시켰다.
② 맞벌이 가정 및 저소득층에 대한 보육활동으로 인해 학부모에게는 자녀의 보육에 대한 부담 경감을, 학생들에게는 교육적 보살핌을 제공하였다.
③ 다양한 방과후 프로그램을 개설․운영함으로써 학생들의 소질과 특기를 신장시켰고, 방과후 교육활동을 통해 학원 수강 및 과외로 인한 학부모의 과다한 사교육비 부담을 경감시켰다.
④ 기초 학력이 부진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과 지도를 하여 학생들의 학력 신장을 도모하였고 학부모들의 공교육에 대한 만족도 및 신뢰를 회복하였다.
⑤ 지역사회와의 연계로 학생들의 방과후 교육활동의 선택의 폭을 넓혔으며, 프로그램 운영을 더욱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
⑥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평생교육 및 휴일을 이용한 다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학교가 지역사회의 학교 역할을 담당하였고, 학생들의 다양한 교육적 경험의 기회가 증대되어 방과후 교육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켰다.
⑦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통해 수요자의 교육에 대한 만족도를 높였고, 학교가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을 계발하는 즐거운 배움의 장이 되도록 하였다.
이 결과는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방과후 시간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었으며, 개인별 맞춤형 지도를 통해 개인별 특기를 신장시킬 수 있어서 매우 보람있는 시범학교 운영이었다고 참관인들이 모두 공감하였다.
3. 우리 학교 다시 부활하다
우리 학교는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70년대 후반부터 약 20여 년간 전국에 이름을 떨치던 체조부문이 10여 년간 침체를 겪다가 2005년 제34회 전국소년체전에서 박윤희 양이 체조 2개 부문에서 금메달, 1개 부문에서 은메달을 따냈으며, 2011년에는 제40회 전국소년체전에서 이보라양이 평균대와 평행봉에서 금메달을 따고, 도마에서 동메달을 따 개인종합 1위를 하였다. 그 후 이보라 양은 SBS ‘스타킹’이란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렇게 체조가 날개를 달며 부활하자, 그 동안 시 규모 대회에서나 입상을 하던 육상부문에서 2012년에는 제41회전국소년체전에서 이예진이 여자 100m 부문 동메달을 획득하였고, 그 2년 후인 2014년 제43회전국소년체전에서는 김대현이 800m 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당시 참관한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결승전 가까이까지는 1위로 달리다가 2위가 어디 오나 뒤돌아보는 순간 추월당해 0.2초차로 우승을 놓쳤다고 아쉬워하였다.
또한 유도부를 창설하여 제36회전라북도회장기유도대회에서 단체 3위, 그 이듬해인 제37회 대회에서는 초등부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하며 체육 분야에서 다시 부활하였다.
※ 각종 대회 성적표
종목 | 대 회 일 | 주 최 | 등 위 | 비 고 |
체 조 | 2005. 5.28. | 제34회 전국소년체전 | 여자 체조부 개인 금 2, 은 1 | 박윤희 |
2011. 4. 2 | 제40회 전국소년체전 | 개인종합 1위 평균대 금, 평행봉 금, 도마 동 | 이보라 | |
육 상 | 2011.10.28 | 시 육상연맹 | 우승 | 초등 남자 |
2012. 5.19 | 제41회 전국소년체전 | 여자 100m 동 | 이예진 | |
2014. 5. 27 | 전국 제43회 전국소년체전 | 800m 2위 | 김대현 | |
유 도 | 2011. 6.24~25 | 제36회전라북도회장기유도대회 | 초등부 단체 3위 | 이유진, 이태양 유길한, 박정빈 한중호, 유상현 |
2012. 6.22~23 | 제37회전라북도회장기유도대회 | 초등부 준우승 | 전제용, 박정빈, 정한솔, 박윤수 한준호 |
4. 입학 연령의 변화
초등학교 입학은 초·중등 교육법에 만 6세가 되는 3월1일부터 이듬해 2월28일 까지 출생한 학생이 입학하였다. 그러나 한 때는 조기 교육 열풍이 불어 만 6세가 되지 못한 아동이 입학하기도 했다.
그런데 각급 교육청에서 만 6세가 되지 못 한 학생이 입학하는 것은 법률 위반이라고 하여 입학을 절대 금지 시켰다. 그래서 조기 입학을 원하는 학부모들로부터 많은 항의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6세가 되지 못했다고 하여도, 수업을 할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서가 있으면 입학을 허가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많은 학생이 만 5세에 조기입학을 하였다.
그러나 조기입학의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 했다.
조기 입학한 학생은 정식으로 입학한 학생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신체 발달도 부족하여 다른 학생들로부터 놀림을 받거나 힘으로 눌려 성장에 지장을 준다는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듬해 1월 1일부터 2월 28일에 출생한 학생들은 만 6세에 입학했다 하여도 다른 학생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려 항상 동생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학부모들은 병원에 가서 아직 학습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의사의 진단서를 받아와 취학 유예신청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취학연령을 ‘만 6세가 되는 다음해에 입학해야한다.’고 법률 제8577호(2007.8.3)로 조문을 개정하여 모든 학생은 6세가 되는 다음해에 1월 1일부터 12월 31일 사이에 출생한 학생만이 입학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기입학도 허용해야하며, 허약자는 1년 뒤에 입학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한다는 여론이 일게 되었다.
그래서 법률 제11384호(2012.3.21)로 제13조(취학 의무)를 다음과 같이 개정하였다.
① 모든 국민은 보호하는 자녀 또는 아동이 6세가 된 날이 속하는 해의 다음 해 3월 1일에 그 자녀 또는 아동을 초등학교에 입학시켜야 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니게 하여야 한다.
② 모든 국민은 제1항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호하는 자녀 또는 아동이 5세가 된 날이 속하는 해의 다음 해 또는 7세가 된 날이 속하는 해의 다음 해에 그 자녀 또는 아동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킬 수 있다. 이 경우에도 그 자녀 또는 아동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의 3월 1일부터 졸업할 때까지 초등학교에 다니게 하여야 한다.
로 개정하여 1년 조기입학과 1년 늦게 입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5. 교가의 일부 변경된 가사의 복원
㈎ 교가 가사의 배경과 의미
(57회 이화구 동문의 글에서 발췌)
우리 모교의 교가는 우리 학교를 대표하는 곡으로, 이리초등학교를 상징하는 노래로서 우리 모교의 교육정신과 이상을 담고 있다.
우리 교가는 6개 소절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와 둘째 소절에서는 우리 학교의 주변 배경을 노래하며 우리 모교를 상징하고 있으며. 셋째와 넷째 소절에서는 우리 모교의 역사와 전통을 노래하고 있고, 다섯째와 여섯째 소절에서는 우리 모교의 교육이념은 “정화의 요람”이라고 분명히 노래하고 있다.
먼저, 첫째와 둘째 소절인 “♪♪ 배산에 피는 구름 마동에 뜨는 해 ~, 앞으로 바라보면 푸른 산둘레 ~ ♪♬”을 보면 먼저 ‘배산’이란 산 이름 나온다. ‘배산’은 익산시 서쪽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 95m로 익산을 대표하는 산이다. 정상에 서면 사방이 탁 트여 동쪽과 남쪽으로는 익산 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배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으나 인근에 만경강과 서해바다가 있어 쉽게 구름을 모을 수 있는 산이다.
그런가하면 ‘마동’은 옛날에 전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며 말을 이용하는 행인들이 이곳에서 물을 먹이며 쉬어 갔다 해서 ‘마동’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익산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마동에 위치한 모교는 예전 이리농고 및 농과대학 캠퍼스와 실습지, 우리 모교 실습지, 농고방죽, 예전 희망원 인근의 푸른 동산 등 주변이 숲과 녹지로 둘러싸인 푸른 산둘레이었다.
그리고 셋째와 넷째 소절은 “♪♪잊었던 옛 모습을 도로 찾은 그 자랑~, 유구한 숨은 전통 더욱 빛난다.~ ♪♬”.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잠시 우리 모교의 역사를 뒤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15년 4월 10일 이리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우리 모교는 1938년 4월 1일 교명을 “이리일출공립심상소학교”라고 개칭을 하게 된다. 당시는 일본인만 다니는 학교를 ‘심상소학교’라고 했는데 "내선(內鮮)인이 다 같이 동일한 법규 밑에서 교육을 받는 길을 연 소이" 즉 일본 아동과 조선 아동이 똑같은 지위로서 교육을 받게 한다는 뜻에서 교명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조선말을 못 쓰게 하고 일본말을 써야 하며, 이름도 일본식으로 창씨개명까지 해야 했다. 다행이 우리 모교는 1938년 4월1일부터 1941년 4월1일까지만 ‘심상소학교’란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시 우리 모교는 분명히 조선인 학교이었다.
교가를 지을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광복의 감격과 기쁨을 생각하며 지은 가사가 “♪♪잊었던 옛 모습을 도로 찾은 그 자랑 ~ ♪♬” 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다섯째와 여섯째 소절인 “♪♪오오 이름도 의젓구나 정화의 요람 ~, 우리 모교 이리초등 정화의 요람~ ♪♬”은 우리 학교의 교육이념과 정신을 노래한 부분이다. 교가는 우리 모교가 추구하는 교육적 가치를 제시하고 후배들이 교가를 부름으로써 그 교육 목표를 달성하는데 이바지할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교의 교육이념은 분명히 ‘정화의 요람’이다.
‘정화의 요람’의 정화(精華)란 아주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뜻이고, 요람(搖籃)이란 어린아이를 태우고 흔들어 놀게 하거나 재우는 채롱이므로 ‘정화의 요람’의 뜻은 순수한 어린이들이 마음 편히 뛰어놀며 공부하는 곳, 즉 학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학교의 교육 이념은 순수한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며 즐겁게 배우는 학교라고 할 수 있다.
㈏ 작곡자와 작사자
(57회 이화구 동문의 글에서 발췌)
모교의 교가를 작곡하신 분은 최영환 선생이다.
이리초등학교 교가를 작곡한 최영환 선생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구할 수 없으나 전북대학교 음악대학 신상호 교수가 쓴 “전북 관악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글을 읽다보니 최영환 선생의 이름이 나왔다.
최영환 선생과 이득주 선생 두 분은 전주사범학교 4회 졸업 동기생으로 두 분 모두 음악을 하시는 친구 사이가 아니었나 싶다.
또한 해방이후 1953년 경(필자가 3학년 때 처음으로 교가를 부르고, 교가에 맞추어 무용 연습을 하여 운동회 때 전교생이 무용을 했음) 김해강 선생이 모교 교가를 작사하고 두 분이 노랫말에 맞춰 작곡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작사를 하신 김해강 선생의 본명은 김대준(海剛 金大駿, 1903~1987)으로 전북 전주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였다. 선생은 서울의 보성고보 시절 당시 기거하던 고모부 최린의 집에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사전 협의하던 광경을 목도하고,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일경의 검거를 피하여 귀향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상경하지 못한 선생은 전주의 신흥학교와 전주사범학교를 마치고, 1925년 진안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신문 지상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2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새날의 기원'이 당선되었고, 11월에는 「신문예」의 작품 공모에 시 '흰모래 위를 걷는 처녀의 마음'이 당선되었다.
선생은 단적으로 말하여 '태양의 시인'이셨다. 선생은 시단에 나온 후로 줄곧 식민지 상태의 해체를 노래하였다. 선생의 웅건한 음성은 1920년대 시단에 유행하던 장시 형식으로 각종 지면을 장식하였다.
예를 들어 선생의 시 '용광로'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을 녹여버리자는 무정부주의적 사상을 시화한 작품이었고, '물레방아'는 일제에게 농작물을 수탈당하는 농민들의 애환을 담은 작품이다. 또한 “오오 나의 옛 요람이어”는 전주의 화려한 과거를 회상한 작품이었고, 한때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유명한 “가던 길 멈추고”는 금강산 8경을 노래한 서정시였다. 이와 같이 선생의 시가 거느리는 영역은 광활하였다.
해방이 되자 모교인 전주사범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은 선생은 가람 이병기 선생을 도와 1947년 ‘전라북도문화인연맹’을 창설하는 등 도내의 문단을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선생은 교육자로서 한국전쟁 중에 전주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긴 후 정년퇴직할 때까지 재직하며 숱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이 밖에 선생께서는 '전북의 노래'를 비롯하여 “전주시민의 노래”와 “춘향의 노래” 등을 작사하였다.
또한 김해강 선생은 도내 여러 학교의 교가를 작사해 주었다. 이 점은 선생께서 도내에서 존경받는 대시인이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한편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현실에 맞서는 저항시를 쓰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태양' 등의 시는 친일 작품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얼마 전에는 전주 ‘덕진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김해강 선생의 시비 일부가 파손돼 경찰이 수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 개사된 가사 원상회복
필자가 2007년 3월 1일자로 모교에 부임해 보니 현관에 게시된 교가의 가사 중 필자가 다닐 때 부르던 가사인 ‘잊었던 옛 모습을 도로 찾은 그 자랑’이 ‘희망찬 푸른 꿈을 키워가는 우리들’로 바뀌어 있었다. 졸업앨범을 살펴보니 1983학년도 졸업앨범에 수록된 교가의 내용부터 위와 같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교가 작곡자도 제46회 졸업 학사보고서와 제49회 졸업 학사보고서에는 작곡자가 최영환인데 현관에는 이득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2013년 이리초등학교총동창회 결의로 학교에 ‘제46회 학사보고서’와 ‘제49회 학사보고서’에 수록된 교가 내용을 바탕으로 작곡자명과 가사를 원 작곡자 명과 원 가사 내용으로 환원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학교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학교운영위원회의 결의로 원래대로 환원시켰다.
6. 개교 100주년에 99회 졸업이 되는 이유
우리 학교는 1915년 4월 10일에 개교하여 1916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혹자는 1회 졸업생이 어떻게 1년만 공부하고 졸업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본교는 이미 있던 사립학교를 인수했기 때문에 1년만 학습하면 졸업하는 학생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즉 개교할 때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학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2015년에는 100회 졸업이어야 하는데 99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래서 동문들이 가끔 우리학교는 2015년 4월 10일이면 개교 100주년인데 졸업회수는 100회가 아니고 99회가 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필자가 여러 가지 자료를 면밀히 조사해 보니 연혁지에 1921년 4월 1일 수업연한을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 인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1920년 3월 23일 제5회 졸업생을 배출한 다음 1921년 3월에는 학년 연장으로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는 사유가 졸업대장에 적혀 있었으며, 1922년 3월 23일에 제6회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1회의 공백이 생겼다.
6. 개교 100주년에 99회 졸업이 되는 이유
우리 학교는 1915년 4월 10일에 개교하여 1916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혹자는 1회 졸업생이 어떻게 1년만 공부하고 졸업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본교는 이미 있던 사립학교를 인수했기 때문에 1년만 학습하면 졸업하는 학생들이 존재할 수 있었다. 즉 개교할 때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학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2015년에는 100회 졸업이어야 하는데 99회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래서 동문들이 가끔 우리학교는 2015년 4월 10일이면 개교 100주년인데 졸업회수는 100회가 아니고 99회가 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왔다.
필자가 여러 가지 자료를 면밀히 조사해 보니 연혁지에 1921년 4월 1일 수업연한을 4년제에서 6년제로 연장 인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1920년 3월 23일 제5회 졸업생을 배출한 다음 1921년 3월에는 학년 연장으로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했다는 사유가 졸업대장에 적혀 있었으며, 1922년 3월 23일에 제6회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1회의 공백이 생겼다.
7. 교훈의 변천
우리 학교의 교훈은 교장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바뀌어온 것 같다.
필자가 학교에 다닐 때의 교장선생님은 김인환 교장선생님이었는데, 월요일과 수요일은 운동장 조회를 하고 금요일에는 강당조회를 하였다. 조회 때는 맨 처음 교훈을 합창해야 했다. 전체조회가 없는 날은 반드시 담임선생님의 주재로 학급조회를 하였다. 학급조회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다음 반드시 ‘교훈’을 큰소리로 합창한 후 ‘급훈’을 합창하였다. 이와 같이 매일 교훈을 합창했기 때문에 지금도 교훈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금요일이면 4학년 이상의 학생은 강당에 모여 강당조회를 하였다.
날씨가 추운 날에는 난로도 없는 강당으로 가는 것이 지긋지긋하게도 싫었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였다.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것은 시종을 알리는 종은 진짜 종을 쳤다. 종도 종 안의 추에 매달린 줄을 잡아당겨 치는 것이 아니라, 사환 아저씨가 망치를 들고 와서 들보에 매달아 놓은 종을 그 망치로 쳤다. 종의 크기는 쌀을 되는 말의 2배 정도로 컸던 것 같다.
그 후 과학이 발전하여 스위치만 누르면 종이 울리는 전종을 사용하였고, 지금은 시간만 맞추어 놓으면 저절로 음악이 흘러나와 시종을 알린다.
역대의 교훈
교 훈 부지런히 배우고 씩씩하게 자라서 쓸모있는 사람되자 |
| 교 훈 귀엽게 놀고 부지런히 배우며 씩씩히 자라서 올바르고 쓸모있는 아들 딸 되세 |
~1956 |
| 1957~1959 |
교 훈 스스로 일하고 정답게 지내어서 미덥게 피어가자 |
| 교 훈 1. 책을 많이 읽고 2. 몸과 주변을 깨끗하게 하며 3. 건강하게 크렵니다. |
1960~1976 |
| 1977~1981 |
교 훈 슬기롭게 맵시 있게 씩씩하게 |
| 교 훈 슬기롭게 공부하고 정답게 지내며 씩씩하게 자라서 지식기반 사회에 앞장서는 큰 인물이 되자 |
1982~2000 |
| 2001~2006 |
교 훈 자율과 창의로 큰 꿈을 키워가는 밝고 건강한 어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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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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