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산/(사)효문화지원본부 본부장
“효”정신이 깃들 밥상머리
교육을 시킬 여유가 없고,
부모님의 존경이나 엄함이
몸에 와 닿는 것이 아니다
자연히 부모님 생각 보다
물질적 생각에만 치중한다
몇 일전 부산 덕천초등학교에서는 2학년 초등학생이 선생님께서 꾸중 했다고, 성질을 내면서 던진 책이 교실 컴퓨터의 모니터에 맞아서 손상을 입혀서, 한 번 더 선생님께 다시 야단을 맞고선,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서 집 아파트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했다
그리고 경남 양산에서는 어느 아파트 페인트 도색 작업을 하던 작업인부가 매단 생명줄인 로프를 아파트 주민이 작업자의 스마트폰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듣기 싫다고 홧김에 옥상에 올라가서 카트 칼로 로프를 잘라버린 엄청난 짓으로서, 작업 도중에 아파트에서 작업하는 인부가 추락하여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이고 사회병리적인 “효”의 개념이고, 불효의 개념이 단적으로 나타난 실례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수만 가지가 있는 것들 중에 유독 왜! “효”를 우선적으로 생각 할 수밖에 없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흔히 조물주가 만든 모든 피조물들은 각자가 가야할 길을 명시한다. 짐승은 짐승이 가야하는 짐승의 길인 수도를 갈 것이고, 자동차는 차가 가야할 길인 차도를 가야한다. 반면 사람은 사람이 가야 할 길인 인도를 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외면한 채로 수도나 차도를 향하는 사람들의 의식상태는 무엇이 결려된 것일까?
만약 사람이 가야 할 길을 향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효”정신이 깃들어져 있었다면 과연 이들이 선택한 수도나 차도가 아닌 사람의 길! 인도로 향하지 않았겠나, 하는 의구심 때문에 인간이라면 유독 “효”를 우선적으로 생각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baby boomer이상의 세대들이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 아닌지? 요즘 세대들에게 이런 인간의 바른 길을 이야기 하며 “효”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아마 첫 번째의 실례처럼 자살해 버릴 수도 있다. “효”정신을 가지고 사신 부모님을 지켜보면서 살아온 baby boomer들은 자연스럽게 부모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부모님의 고마움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로 살아왔고, 노후에도 그렇게 살아 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을 살고 있는 요즘 세대들의 모습은 전혀 “효”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만약 내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의 가슴속에 못을 박는 일이다. 내가 지금 성질이 나지만 참아야 한다. 내 머리 속에서 부모님을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참을성이라는 인내가 “효”정신이 없으니 자연스럽게 발휘될 수가 없다.
단지 간단한 생각뿐이다. 기분 나쁘다. 성질난다. 화난다. 내가 싫으면 그만이지 나 외에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요즘의 우리 사회요! 젊은 세대들의 머릿속 의식 구조다. 이들에게는 “효”정신이라는 절체절명의 필요성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그저 부모는 부모일 뿐! 부모의 존재가 나에게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생각 해본적도 누군가 알려 준적도 없이 오직 눈에 보이는 확실한 가치에만 매달려 왔다.
반에서 몇 등, 성적이 몇 점, 아파트가 몇 평, 자동차가 몇 cc인가 하는 눈에 보여야만 확실히 믿는 세상을 살다보니까? 정말 사람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가치들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부모님의 소중함, 부모님의 고마움, 감사함, 이런 것들은 수치로 정확히 나타낼 수가 없고 눈에는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물질보다도 훨씬 필요한 것인데도 요즘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예전과 많이 달라진 입장 때문이다. baby boomer의 입장은 일단 부모님하면 위엄 있고, 존경의 대상으로 여긴다. 같이 식사할 때도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함부로 먼저 먹지 않는다. 이렇게 밥상머리에서부터 “효”정신의 기초를 닦았다.
그렇지만 요즘 세대들의 입장은 다르다. 바쁜 일상 속에서 “효”정신이 깃들 밥상머리 교육을 시킬 여유가 없고, 주위의 입장도 부모님의 존경이나 엄함이 몸에 와 닿는 것이 아니다 보니 자연히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우선이 아니라 애인생각이나, 물질적인 외형적 생각에만 치중하는 현실이 된 입장이다.
이처럼 baby boomer가 부모님을 생각하는 예전의 입장과 요즘세대가 부모님을 생각하는 마음하고는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까? 마땅히 “효”정신을 심어 줘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다음은 오늘날 현실이 “효”를 생각할 수 없는 사회적 환경으로 너무 변해져 있다.
baby boomer들이 살아온 예전에는 산악회에서 매주 마다 가는 산행 코스가 없었다. 기껏해야 뒷동산에 올라가서 맨손 체조하고 약수물 받아 오는 것이 고작 산에 가는 것이었다. 거의 토요일도 없이 일요일까지도 baby boomer들이 일하고 집에 오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손주를 키운다고 놀라 다닐 시간도 환경도 아니었다.
오늘날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와 같이 있는 시간보다는 본인의 여가선용 즐기고 나들이 가기 바쁘다. 요즘은 주말이면 그것도 주5일 근무라 이번 주말에는 어디 갈까? 이것이 고민꺼리가 된 환경이다. 매주 무슨 산악회 하면서 전국에 있는 모든 산들을 산악회 버스를 타고선 샅샅이 다 가봐야 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는 현실이다 보니까, 언제 가족들과 조부모님 모시고 세대 간에 집에서 부모 자식이 “효”를 생각하고 “효”를 행할 시간과 환경을 만들 수 있겠는가?
특히나 정부에서 복지 정책으로 장기요양병원이나 노인요양원을 만들어 놓았으니 더더욱 모든 환경들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효”개념을 예전처럼 여기지 않는다.
모든 것들이 예전과는 뒤바뀐 현실 속에서 사는 요즘의 세대들이 “효”를 행하는 방법 또한 많이 변해져 가고 있다. 과거에는 배가 약간 나온 사장님이 멋지고 건강하다고 했는데 이제는 배불뚝이는 사람취급 못 받는 세상으로 바뀐 오늘날의 효행은 배를 채워주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는 물질적 양구체 “효”인 봉양이 “효행”의 으뜸이라 했을 때는 먼저 부모님이나, 시부모님을 집에서 잘 보살피며 물질적인 봉양만이 효행하는 것이라 여겼다. 똥, 오줌을 못 가리는 치매 부모님의 수발을 집에서 전부 다하고 있는 자식의 효행 방법을 으뜸으로 여겨 정부에서는 효행자 표창을 주었다.
하지만 과거의 효행방법만으로서 “효행”을 하는 것이 오늘날 현실에선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복지제도가 잘 되고 있는 요즘 장기요양병원이나 노인요양원에서 잘 보호해주는 정부 복지정책 혜택을 앞으로는 거의 대부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요양사가 똥, 오줌을 자식 대신에 해준다. 양구체의 “효”인 물질적으로 잘 먹는 봉양까지도 정부에서 알아서 다해주는 오늘날의 효행방법은 어떻게 변해가고 있나?
과거에는 봉양 위주의 양구체 “효”였다면, 현재는 부모님께 따뜻한 관심을 가져야하는 양지의 “효행”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당장 옆에서 모시는 것은 아니라도 늘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효”생각으로 자주 요양원이나 장기요양 병원을 찾아가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 나누어 줄 수 있는 자식이라면 오늘날의 “효”방법으로 효를 행하는 “효행자”다.
즉 과거에는 부모님을 모시는 상향식 일방적인 것만이 “효행”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곤 “효”를 행했지만, 오늘날의 “효”는 이것만이 진정한 “효”의 가치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이 상호간에 교호적인 입장에서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에게 서로가 상호 오고가는 교호적인 “효”방법으로 바뀌어 부모와 자식이 서로 친하게 지내고 따뜻한 관심으로 서로를 위하는 “효행”방법으로 변해가고 있다. 만약 오늘 날의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체 과거처럼 무조건 부모님을 모셔라, 봉양하고, 받들어 라고만 강요했을 때 사회적 병리현상으로서 “효”개념이 나타나게 되니까, 어린아이가 스스럼없이 자신의 기분만으로 참을성 없이 자살을 행하게 되고, 자신이 듣기 싫은 음악 소리가 들린다고 홧김에 밧줄을 끊어 남의 생명을 죽이기까지도 한다.
오늘날 이처럼 과거와는 다른 생각과 입장을 이해하고, 달라진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새롭게 변하고 있는 “효행”방법에 따라서 요즘 세대의 아이들에게도 적절한 “효”정신을 심어만 주었더라면 초등학교 2학년이 자살하는 대한민국, 세계 1위 자살공화국이 되지 않을 수가 있다. 분명 우리 사회가 사회 병리적 “효”개념을 이해하지 않는 한 “효”정신으로 치유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놓쳐 버릴 수 있다. 비록 “효”를 행하는 입장과 환경, 방법이 다 변해져 있어도 요즘세대들에게 현실에 맞는 “효”를 알려 줄 수 있을 때만이 사람이 가야 할 인도를 바로 알려준 당당한 기성세대가 될 수 있다.
과거 우린 한 가정의 지존이고, 무법자인 아버지, 남편을 무조건 따라야 하고 무서운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살았다. 아버지는 남편은 곧 하늘이다. 라고 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식 “효”를 강요당하면서 시어머니의 구박이나 심한 모멸감 역시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우리의 “효”는 실속 없는 겉치레식 “효”였다.
이런 외형적 권위주의식 겉치레 “효”가 우리사회에 병리적인 현상으로서 내면의 실속 보다는 겉을 먼저 내세우는 겉치레 의식으로 변하여 고급스럽고 좋은 차, 큰 평수의 집, 외모 지상주의로 10만 명당 898명이 성형을 한 성형 세계1위나라다. 상대에 대한 배려나 남을 위한 봉사 정신, 기부행위 등은 내면적 성찰이 된 사람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린 여태껏 내면의 성찰보다는 눈에 당장 보이는 외형에만 너무 치중한 “효”를 생활 해왔다.
남존여비사상이나 통치 이념의 방편으로서의 “효”를 강요한 현상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효”에서 남아 선호를 위해 아들한명을 가져야 하는 “효”를 실현키 위하여 딸 9명을 낳는 기현상이 벌어졌고, 아들이 먼저 밥을 먹고, 딸은 뒤에 밥을 먹는 것이 “효”라고 여기며 살았다. 제사를 지내도 제사상을 차린다고 가장 고생한 엄마는 조상에게 절도 할 수 없는 것이 “효”인지 알았다. 식사도 남편이 먼저하고 난 다음 하는 것이 “효”이고 “예의”라 여기는 잘못된 “효”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정이 화목하고 부모 자식 간에 “효”가 되지 않는데도 “충”과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나서 “효”와 가족을 생각하라고 “충효예”를 강조하며. 충을 위해 “효”를 이용물로 만들었다. 또한 “효”를 양반들이 하면 좋고 바른 것이고, 상놈이 행하는 “효”는 별것이 아닌 냥 신분적 위계질서를 내세우며 과거에는 “효”를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효”개념이 잘 못되어진 사회 병리적인 현상을 이해해야만 바른 “효”정신을 후세대들에게 올바르게 전해 줄 수가 있다. 아무리 오늘날 현실 사회가 바뀌고, 생활환경이 도시화되어 있어 아이들이 혼자서 자라고, 핵가족화 된 가족제도에서 이기적으로 후세대가 자라고 있고, 맞벌이 부부의 증가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효”교육을 못 받고 있다지만,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익명성의 사회 현상으로 모든 것들이 변하여 가고 있다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절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부모님의 고마움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원히 지속하다는 사실이다.
기성세대들은 후세대들에게 이것을 알려 줄 의무를 지고 살아야 한다. 그냥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지 하는 순간적인 쾌락주의에 빠져 살면 안 된다. 그 어떤 사회병리적인 현상으로서 “효”개념이 나타난다고 해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은 꼭 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후세대들에게 부모님의 고마움을 알리고, 그 고마움을 매일은 매주는 생각할 수 없어도 최소한 매월 시작하는 첫날 매월1일 만큼은 반드시 생각하며 한 달을 시작할 때 어린아이가 자살하고, 밧줄을 끊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