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히루에 한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이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손이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1993년 1월 20일, 그녀는 눈을 감았다. 향년 63세였다. 그날은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취임식을 하던 날이었지만 그녀의 사망 기사가 클린턴 대통령 취임 기사보다 먼저 다루어졌다. 그를 조문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 티파니 보석가게는 일간지에 광고를 싣고 전 세계의 매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붙였다. "오드리 헵번. 1929 ~ 1993. 우리의 영원한 친구. 티파니 사." 유엔과 민간단체 '세계평화를 향한 비전' 은 장기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인류애를 실천한 그녀를 기리기 위해 2004년 2월에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제정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루를 그냥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 오드리 헵번은 은막의 스타였을 때도 유독 빛나는 별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생각대로 남을 돕는 손이 되었을 때 더욱 커다란 별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았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그녀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 ~ 1993)
젊은 날의 Audrey Hepburn
최초 공개된 세기의 미녀 오드리 헵번의 미공개 희귀 사진
이 흑백사진들 속 귀엽고 발랄한 소녀가 누군지 못 알아 보실 분이 계실까요?
누군지 모르신다면 바로 이 분입니다.
흔히 세기의 미녀 세기의 요정 20세기 대표 패션아이콘이자
살아있는 천사로 불리우던 숱한 수식어를 지닌 오드리 헵번이 바로 그 주인공이죠.
위 쪽 사진들은 그간 거의 알려진 적이 없는 헵번 데뷔 전 유년시절과 소녀시절 사진들입니다.
원래 발레리나를 꿈꾸던 소녀, 귀족 남작 집안의 피가 흐르던 여인이자
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인물.
그간 영화나 선행 등을 통해서만 친숙했던 헵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같은 인생스토리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태어납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남작 출신으로 당연히 귀족가문이었고
여기서 헵번의 모친 엘라 반 헤임스트러가 태어납니다.
엘라는 초혼에 실패한 후 벨기에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스코틀랜드 출신 실업가인
죠셉 러스턴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와 재혼해 외동딸인 오드리를 낳게 됩니다.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그러다 죠셉이 당시 복잡한 유럽 정세로 인해 성과 이름을 자주 바꾸다가
먼 친척의 성인 헵번을 붙이고 나서 딸인 오드리도 자동으로 오드리 헵번 러스턴으로 개명.
오드리 하면 가는 곳마다 출생지는 벨기에고 성장한 곳은 네덜란드 초반 활동 지역은
영국에 이름도 여러 개 이런 식으로 성장기와 초반 이력이
늘 복잡하게 소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헵번의 부모는 사이가 원만하지 못 했던지 헵번이 6살이 되던 무렵 이별했고
그 결과 헵번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네덜란드로 건너가 유년 시절을 보냅니다.
명문 귀족 집안이었던 탓에 웅장한 남작의 저택에서 풍족하게 살았지만
곧바로 터진 2차 세계 대전은 헵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습니다.
사실 헵번 모친이 헵번 친부와 멀어지고 딸을 데려온 계기는
다름아닌 그가 열렬한 나치 추종자였기 때문인데 처음에는 모친도 이에 동조하다
나중에 마음을 바꾸는 바람에 이로 인한 갈등이 불거졌고
훗날 알려진 사실은 헵번 부친이 2차 대전 독일 패전 후
나치 신봉자였던 전력이 문제가 돼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고
헵번 모친은 딸의 배우 생활 내내 이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
아버지가 나치 협력자였던 전력이 딸의 배우 생활에 불이익을 미칠까봐
일부러 그가 헵번에게 보내온 연락을 모두 차단 시키기도 했다고..
나치를 반대했던 헵번의 외가 식구들은 일명 추축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나치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 도피생활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연합군을 지지하던 헵번의 외가친척 여럿이 희생 되었으며
당시 어린 소녀였던 헵번은 도피 생활로 인해 식량이 부족해지자
썩은 감자와 풀 꽃잎 등으로 힙겹게 생명을 유지했다고 한다.
헵번 특유의 그 깡마른 나이 들어도 절대 살이 찌지 않는 몸매는
바로 이 때 오랜 굶주림으로 인해 체질이 변하고 병을 얻어 그렇게 된 것이며
이 때 굶주림의 고통 경험과 함께 자신에게 극적으로 도움을 준 단체
유니세프에 감명을 받은 것이 계기가 돼 훗날 유니세프에서 일하며
아프리카 기아돕기에 나선 것이기도 하다.
또 이 과정에서 헵번은 신발에 지하 운동 조직의 편지를 숨겨 전해주기도 하는 등
나름 운동가들을 도왔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그렇게 숨 죽이며 살던 중 드디어 연합군이 네덜란드로 들어와
감격의 해방을 맞게 되었지만 삶은 더는 이전 같지 않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던 저택은 전소 되었고
재산은 대부분 남의 손에 넘어가 집안이 크게 몰락한 것.
그리고 전쟁 때문에 헵번이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기에
최종 학력은 전쟁 직전까지 다녔던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전부.
게다가 170을 넘어선 큰 키는 발레를 하기에도 어려운 여건.
당장의 생활고 때문에 고민하던 차에 홀로 영국으로 날아간 헵번은
발레를 배우는 틈틈이 생계비를 벌기 위해 생활 전선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초등학교 중퇴 이력의 어린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당연히 많지 않아 잡지 모델, 클럽 댄서 등 각종 직업을 전전했고
그 과정에서 단역배우 일까지 하게 된다.
말 그대로 단역배우로 헵번은 연기나 영화가 좋아서가 아닌 단지 생계 때문에 일을 한 것이며
그 때까지 헵번의 꿈은 여전히 발레리나였다.
이 때 그녀는 무려 6편이 되는 영국 영화에서 단역을 맡았는데
단역이 늘 그렇듯 지나가는 행인 1, 2, 3 아니면 길에서 음료나 껌 신문 파는
대사 한 마디 없고 타이틀에도 실리지 않는 역할들...
하지만 이게 그만 헵번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게 되니
그녀의 단역 생활 종지부를 찍게 된 <우리는 몬테카를로에서>라는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몬테카를로 로케작으로 극중 헵번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호텔 예식장을 탈출하는 신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무슨 천운이 그녀에게 닿으려고 했던지
이 모습을 때마침 이 호텔에 투숙 중이던 코레트 여사가 목격하게 된 것.
프랑스의 여류작가인 코레트 여사는 때마침 자신이 낸 작품 <지지>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지게 돼서 해당 작품의 여 주인공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이 <지지>는 천방지축 말괄량이 여 주인공 소녀 지지가 주변의 도움을 받아
성숙한 여인으로 차츰 성장 변신해가고 남자와의 풋풋한 애정에도 눈 떠가는 과정을
명랑 터치로 묘사한 일종의 프랑스판 '명랑소녀 성장기'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코레트 여사는 이 지지 역을 맡을 여배우를 구하던 찰나 헵번을 발견한 것이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발랄하고 풋풋한 헵번의 모습에 매료된 코레트 여사는
곧바로 적임자라고 판단, 그녀를 설득해 미국 브로드웨이로 함께 날아간다.
그 동안 생활고에 시달리던 20대 초반 헵번의 암울했던 1기 인생은 대반전을 맞게 되며
오늘날의 헵번을 존재하게 만든 밑거름이 된다.
윗 사진이 문제의 <지지> 공연 당시 헵번의 모습들,
아직은 유명해지기 직전 무명시절 헵번의 앳된 모습을 엿볼 수 있음.
그리고 이 <지지>는 이 때로부터 몇 해 뒤인 58년 레슬리 캐런 주연으로 영화화돼
이 역시 박스오피스 순위 역대 토탈 100위 안에 들만큼 흥행 면에서 대성공을 기록함.
헵번의 이미지에 여 주인공 지지는 너무도 잘 어울렸고 그 결과 작품은 이른바 대박을 맞는다.
애초 3, 4개월 공연예정이던 일정이 연일 매진 행렬이 이어지면서 어느 새 8개월 연장에 돌입했고
그 과정에서 이보다 더 거대한 매머드급 행운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미니버 부인>, <폭풍의 언덕> 등으로 당대 헐리우드에서 날리던
명장 중 명장 감독이자 그 유명한 <벤허>를 연출하기도 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윗 사진)은 당시 신작을 준비 중이었다
로마를 배경으로 유럽을 순방 중인 어느 가상 국가의 공주와 취재 기자의 로맨스를 다룬 작품을
준비 중이었는데 이게 기획초기부터 캐스팅 때문에 말썽이 일었다.
애초 제작사는 공주 역에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미녀로 부상하던
아역 배우 출신 리즈 테일러를 물망에 올려 두었고 상대 기자 역에는
당대 최고의 인기 남자 배우이던 캐리 그란트를 사실상 확정한 상태.
하지만 이 작품은 파라마운트 사가 제작하게 되었는데 영화사 전속제가 엄격하던 시절이라
MGM 사 전속으로 발이 묶여있던 리즈를 데려오긴 어려웠고
이 과정에서 상대역 내정자 캐리마저 캐스팅 문제가 지지부진해지자 어느 새 기권을 선언한다.
(전해지는 또다른 후문이 리즈는 당시 MGM 전속도 문제였지만
때마침 닉 힐튼과의 첫결혼이 파경을 맞은 것도 캐스팅 불발의 원인이 되었다고...
청순하고 순결한 여주인공 공주 역에 하필 그 때 이혼한 직후의 리즈는
무리라고 판단해 고사했다는 설도 있음)
그러다 이번에는 당시 청순하고 고전적인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에다가
당시 <햄릿>의 오필리아 역으로 역대최연소 베니스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영국 출신 여배우 진 시몬즈를 캐스팅 하려 했는데 하필 이 때 진 시몬즈가
당시 할리우드 막강 실력자로 날리던 하워드 휴즈의 스캔들에 연루되는 바람에 이 역시 불발.
잇다른 여주인공 캐스팅 난항으로 골치를 썩고 있던 와일러는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 <지지> 공연을 보러 왔다가 무대 위 헵번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내가 찾던 바로 그 공주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답을 알아챈 분들이 많을텐데 이 문제의 영화가 바로 <로마의 휴일>.
그야말로 헵번은 엄청난 행운을 거머쥔 그것도 무려 두 개나 연달아쥔 가히 실사판 신데렐라인 셈이다.
와일러는 지지 공연이 끝나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헵번을 데리고
로마로 날아가 영화를 찍었고 이 과정에서 상대 남자 배우로 그레고리 펙을 캐스팅.
이 모습은 로마의 휴일 촬영 당시 그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 극 중 초반 앤공주가
연회장에 들어서는 씬을 찍기 위해 분장을 하고 있는 모습.
이 장면이 초반 신임을 감안할 때 아마도 초반부 촬영 당시일 테고
이 때 헵번은 짐작이나 하고 있었을까?
이 영화로 인해 자신의 앞날에 얼마나 엄청난 순간이 다가오게 될지를
이 로마 로케 촬영 종료 직후 헵번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미국으로 곧장 날아가
<지지> 미국 전역 순회 공연에 돌입했고 이 지역 공연이
거의 끝나갈 무렵 <로마의 휴일>이 드디어 개봉됨.
'세기의 패션 아이콘'인 헵번 신화와 스타일 그리고 '헵번 헤어스타일'도 전 세계에 전파시킨
이 영화 한 편으로 무명의 단역배우이자 발레리나 지망생 그리고 갓 브로드웨이 신고식을 치룬 헵번은
일약 세기의 연인으로 혜성처럼 급부상했고 덤(?)으로 사실상 영화 데뷔작이나 마찬가지인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광까지 안게 된다.
사진은 수상 직후 오스카 트로피를 안은 채 감격스러워 하고 있는 모습으로
우측은 수상 당시 입은 의상.
사실 이 때 가장 유력한 후보는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열연했던 데보라 카인데
의외로 헵번이 영광을 차지.
이것도 희귀한 사진인데 이듬 해 헵번은 차기작으로 출연한 <사브리나>로
2년 연속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도전했고 같이 후보에 오른 <갈채>의 그레이스 켈리와
시상식장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
아래 사진에서는 동료이자 경쟁 후보인 켈리와 밝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윗 사진에서는 두 여배우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게 느껴짐.
결국 이 날 켈리가 트로피를 안음으로써 헵번의 2년 연속 수상 도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 날 오스카 시상식에서 영화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여우주연상은 많은 사연을 남긴다.
원래 이 때 가장 강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는 뮤지컬 영화 <스타탄생>에서
신기에 가까운 가창력과 연기를 선보인 주디 갈란드
(불멸의 걸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 역으로도 잘 알려진 아역 출신 여배우,
그녀의 딸은 바로 라이자 미넬리로 73년 <캬바레>라는 작품을 통해 오스카 트로피를 안음)였는데
예상을 깨고 당시 하마평에도 오르지 못 했던 켈리가 수상해서 논란이 일었으며
이 날 수상을 계기로 모나코 방문 특전이 주어진 켈리는
현지에서 레이니에 공을 만나 모나코 왕비가 되는 운명의 출발점을 맞게 됨.
비록 연속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사브리나 팬츠' 등 전설의 패션을 탄생시킨 <사브리나> 출연 당시
극 중 초반 선보인 일명 지방시 원피스를 입은 모습.
이 작품에서 헵번을 기용한 빌리 와일더 감독은 헵번에 대해
"뾰족한 가슴을 지닌 기존 여배우들의 틀을 바꿀 획기적인 존재"라고 평함.
당시 영화계는 <나이아가라>와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등을 통해
관능적이고 글래머러스한 이미지로 어필하던 마릴린 먼로나
세기의 미녀로 부상한 리즈 테일러처럼 육감적인 몸매와 매혹적인 분위기가
여배우 세계의 전반적 대세이던 시절인데 헵번이 이 판도를 최초로 개혁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님.
57년작 <퍼니 페이스>(한국 개봉 시 제목은 <파리의 연인>) 출연 당시
파리 로케 현장에서 촬영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
이건 사연이 좀 있는 모습인데 오드리 헵번이 동료 배우 멜 파라와 1954년 올린 첫 결혼 당시
둘은 헵번이 <사브리>나 차기작으로 선택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온디느>에 출연할 때 호흡을 맞춘 게 계기가 돼 사랑에 빠졌고 007 작전을 방불케하는 특급 비밀 작전을 통해 결혼식을 치룸.
기자들과 사람들의 극성맞은 관심에 이골이 난 두 사람은 일단 각각 영국과 이탈리아로 떠난다.
그렇게 헵번은 영국 영화 출연 계약을 핑계로 기자들을 따돌리고 영국으로 날아갔고,
파라는 이탈리아 여행을 핑계로 이탈리아로 일단 떠난 뒤
중간 지점에 해당되는 스위스에서 둘이 만나
현지 어느 소도시 한적하고 그림같은 교외에서
비밀리에 초대한 가까운 친지 몇 사람과 마을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명 속성 결혼식을 치룬다.
할리우드나 우리나라 스타들이 나라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화려하고 요란한 결혼식을 치루는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으로 헵번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극히 조촐한 예식.
그만큼 둘은 조용히 치루길 원했던 것.
이들은 부부의 연을 맺은 직후 영화 <전쟁과 평화>를 통해
<온디느>에 이어 두 번째 호흡을 맞췄고 몇 년 뒤 장남 숀을 낳았다.
그리고 10여년 뒤 결별했는데 이 첫 결혼식에서 헵번은 스위스 풍광이 마음에 들었는지
말년을 이 곳 스위스에 정착해 허브 키우기 등 전원적인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와 치룬 두 번째 결혼식 당시,
둘은 아들 루카를 낳고 살다 10여년만에 종지부를 찍음.
이혼 사유는 안드레아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기 때문...
설명이 별도로 필요없는 말년의 모습으로 그 유명한 광고 카피처럼
<로마의 휴일>에서의 모습보다 진정 더 아름다웠던 말년의 모습.
올해로 헵번의 타계 20주기가 되는데 이 분 더 오래오래 사셨어야 하는 건데 말이죠.
매력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라.
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라.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려면
하루에 한 번 아이로 하여금 그 머릿결을 어루만지게 하라.
균형잡힌 걸음걸이를 유지하려면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걸으라.
물건뿐 아니라 사람도
새로워져야 하고, 재발견해야 하며,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무시되어선 안 된다.
당신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당신 역시 팔 끝에 손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라.
나이를 먹으면서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두 개의 손을 갖고 있음을.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니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익히 잘 알려진 헵번의 유언 내용, 참으로 외모만큼이나 진정 아름다운 인생과 내면 철학 그리고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을 지니고 살다 가셨던 분이죠.
헵번이 영면을 취하고 있는 곳의 모습
헵번의 운명 직후 장례식장으로 달려온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던 리즈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늘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사를 너무나도 빨리 거두어갔다."
윗 사진들은 두 분이 생전 우정을 나누던 시절의 모습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몇 가지 있죠.
둘 다 2차 세계 대전이 탄생시킨 여배우이며
(만일 전쟁 때문에 헵번의 집안이 몰락해 헵번이 생계를 위해 영화계로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리고 전쟁을 피해 테일러의 가족이 영국 런던에서 미국 할리우드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둘 다 배우가 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세기의 대표 미녀였고 <로마의 휴일>과 인연이 깊으며 어머니들의 극성으로 배우 생활을 했다는 점 등...
제임스 딘과 오드리 헵번의 브로드웨이 활동 시절
배덕자(1954)
제임스 딘과 오드리 헵번은 헐리우드에서 영화 스타로 도약하기 전 이미 브로드웨이에서 주목 받는 스타였다. 비슷한 시기에 각 분야를 오가며 활발히 활동했고 둘 다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는 새로운 얼굴에 대한 반가움과 이들에게 잠재된 가능성을 보고 기꺼이 밀어주었다. 제임스 딘과 오드리 헵번의 배우경력은 영화 이전에 무대에서 시작됐다. 제임스 딘은 연극부터 시작했고 오드리 헵번은 발레를 하다가 한계를 느끼고 배우로 전향했다. 이들은 브로드웨이에서 무대극을 하면서 토니상도 거뭐진다. 제임스 딘은 [에덴의 동쪽]이 나오기 전, 오드리 헵번에겐 [로마의 휴일]이 나오기 전에 이미 브로드웨이에선 될 성 부른 나무의 떡잎이었다.
재규어를 보라(1952)
제임스 딘은 1954년 앙드레 지드의 자전적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한 연극 [배덕자]로 그 해 토니어워드에서 신인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제임스 딘이 극중 맡은 역할은 남을 유혹하고 유인하며 비겁하게 등쳐 먹는 아랍인 역할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성적 성향이 의심스러운 호모 섹슈얼리틱한 배역을 기묘한 분위기로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평단과 관객은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것 같은 제임스 딘을 열렬히 지지했다.
재규어를 보라(1952)
제임스 딘의 브로드웨이 진출작은 1952년에 출연한 [재규어를 보라]였다. 강압적인 어머니에 의해 얼음 창고에 갇혀 지냈던 16살 소년이 우연한 계기로 어떤 마을에 들어가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어리석고 불분명하며 지루한 연극이란 혹평 속에 5회 공연을 끝으로 막을 내려야 했지만 제임스 딘의 연기만은 호평을 받았다. 연극 [배덕자]는 [재규어를 보라]때와 달리 개막과 함께 극찬을 받았다. 연극의 사회적 주제도 시의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연극계는 제임스 딘이라는 새로운 수혈에 들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놀랍고 비상해 보이는 젊은 신인 배우를 잊지 않았고 공연계에서도 연극 스타로 부상 시키려고 공을 들였다.
재규어를 보라(1952)
그러나 제임스 딘은 [배덕자]연습 과정에서 제작진을 비롯해 연출가 다니엘 만과 내내 삐그덕거렸고 본 무대에서도 끊임없이 약속되지 않은 즉흥연기를 선보여 동료 배우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연출가와의 불화로 제임스 딘은 작품에서 중도 하차하였다. 그에겐 더 큰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딘은 [배덕자]의 성공적인 개막일 밤에 앞으로 공연을 2주 밖에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내렸다. 남들이 인정해주는것만큼이나 엄청난 잠재력과 재능이 있다는것을 제임스 딘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고 때론 이것이 교만해 보이기도 했다. 제임스 딘은 더 넓은 세계로 도약하기 위해 다시 영화계를 두드렸다.
배덕자(1954)
심한 근시지만 운동신경이 좋아 단신임에도 농구를 비롯하여 각종 운동 종목을 잘 소화했던 그는 아버지의 반대로 체육학을 전공하고 연기는 부전공이었다. 성인이 되자 직업 배우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지방 극단부터 밟아간 그는 고향인 인디애나 주 페어마운트를 벗어나 뉴욕으로 간다. UCLA는 다니다 말았다. 뉴욕에서 액터스 스튜디오의 최연소 단원으로 입단하여 메소드 연기법을 익히며 연극과 영화를 병행하였다. 여러 영화에서 단역을 했지만 영화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질 않자 우회하여 그 당시 막 출범하여 영화계를 위협했던 t.v로 진출한다. t.v에서 제임스 딘은 수십 편의 단막극에 출연하여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린다.
배덕자(1954)
제임스 딘은 t.v 초창기 시절에 t.v로 활동 영역을 넓힌 경우라 방송국도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 당시 제임스 딘이 출연한 방송 자료는 거의 다 관리 부실로 잃어버렸다. 남아 있는 자료도 거의 없고 겨우 찾아 낸 자료도 극히 일부의 영상만 부분부분 남아 있을 뿐이다. 요절했지만 부지런했던 배우라 출연작 자체는 꽤 된다. 남아 있는게 거의 없어서 문제다. 기록으로만 남고 없어진 출연작이 더 많은게 아쉽다. t.v에서 그를 널리 알리게 해준 작품들도 억눌린 폭력성을 분출하다 자멸하는 젊은이 역들이었다.
배덕자(1954)
제임스 딘은 본격적인 영화계 진출을 위해 토니상을 안겨준 [배덕자]에서 중도 하차하였고 엘리아 카잔의 [에덴의 동쪽] 오디션에서 최종 단계까지 갔던 폴 뉴먼을 누르고 발탁 된다. 제임스 딘은 액터스 스튜디오의 교육 과정을 성실히 수행하진 않았지만 그곳의 수장인 엘리아 카잔은 잠재력이 풍부한 제임스 딘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폴 뉴먼과 최종 단계까지 갔던 [에덴의 동쪽] 오디션 영상은 [에덴의 동쪽]dvd 서플먼트에도 실려있다. 이 당시 폴 뉴먼과 제임스 딘은 [에덴의 동쪽]외에도 t.v오디션에서도 자주 맞붙었다. 스티브 맥퀸도 제임스 딘이나 폴 뉴먼이 오디션 봤던 작품에 참여한적이 많았다.
배덕자 대본 연습 중
폴 뉴먼은 제임스 딘이 [자이언트]이후 출연하기로 약속돼 있었던 [상처뿐인 영광]을 제임스 딘 사후에 대타로 출연하여 이름을 알렸다. 이 작품에선 제임스 딘을 차버리고 딴 남자와 결혼하여 제임스 딘의 꼭지를 돌게 만든 피어 안젤리도 출연하였다. 제임스 딘은 미술, 작문, 연기 등 예술적으로 다재다능했고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했지만 노래 실력은 별볼일 없어서 프로 뮤지컬 무대까지 넘보진 못했다. 제임스 딘이 여러 사람과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뮤지컬 연기는 그가 출연한 광고에서 살짝 엿볼 수 있다.
지지 포스터
오드리 헵번의 본격적인 스타덤은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로부터 시작된다. 1952년 이 작품 초연에 출연한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보고 윌리엄 와일러는 [로마의 휴일]에 전격 캐스팅하였고 이후 오드리 헵번과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두편의 작품을 더 했다. [로마의 휴일]이 1953년에 나왔고 이후 1961년작 [아이들의 시간], 1967년작 [백만달러의 사랑]까지 총 세편의 작품을 함께 했다. 윌리엄 와일러와 오드리 헵번이 함께 한 세편의 영화 중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한건 [백만달러의 사랑]뿐이다. [로마의 휴일]같은 경우는 작품 자체로는 평가도 좋았고 특히 오드리 헵번이 돌풍을 일으켰지만 의외로 미국 내 흥행에선 실패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오드리 헵번 신드롬과 더블어 미국을 제외한 지역에선 전부 성공했기 때문이다.
지지(1952)
지지(1952)
[로마의 휴일]이전에 오드리 헵번은 [지지]로 호평을 받았지만 훗날 빈센트 미넬리가 감독한 영화판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출연 제의는 받았지만 오드리 헵번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성향이 있다. 그녀은 한번 마무리 한것은 뒤돌아 보지 않고 앞으로 돌진한다. 그래서 캐스팅 0순위였던 [안네 프랑크]의 전기물도 전쟁 때 기억을 떠올리기 싫고 비극적으로 끝난 안네 프랑크의 삶이 소비 형태로 변질되는것에 불만을 가져서 수차례 출연을 고사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한 자선 행사에서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낭독 형식으로 읽은 적은 있었다.
온디네(1954)
오드리 헵번이 거절한 1958년작 영화 [지지]에는 프랑스 출신의 레슬리 캐론이 나왔는데 당시 오드리 헵번과 레슬리 캐론의 이미지가 비슷했다. 그림으로 주인공의 얼굴을 그린 [지지]의 포스터만 보면 누가 레슬리 캐론이고 오드리 헵번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오드리 헵번과 레슬리 캐론의 인연이 재미있다. 오드리 헵번은 레슬리 캐론이 출연한 1953년작 [릴리]를 영화관에서 수차례 반복 관람하며 경탄했는데 그것은 자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레슬리 캐론 때문이 아니라 공동 주연으로 나온 남자 배우 멜 페러 때문이었다. [릴리]를 반복 관람하면서 레슬리 캐론을 칭찬하기는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람은 멜 페러였다. [릴리]에 출연한 멜 페러에 반한 오드리 헵번은 영화 밖에서도 멜 페러를 만나고 싶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멜 페러와 실제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 사이 [사브리나]로 알게 된 윌리엄 홀덴과의 열애설은 아직까지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는것만큼 이 둘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뜨거운것은 아니었다.
온디네(1954)
오드리 헵번은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다. 만약 윌리엄 홀덴이 자신의 바람끼를 못 믿고 정관 수술로 정자가 흩뿌려지는것을 원천 봉쇄만 하지 않았다면 오드리 헵번과 결혼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윌리엄 홀덴은 오드리 헵번과 만나기 이전에 정관 수술을 받았고 그 당시에 기혼이었다. 현실 세계에서 멜 페러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 오드리 헵번은 멜 페러와 공동 주연한 브로드웨이 연극 [온디네]에 출연한다. [온디네]는 오드리 헵번과 멜 페러의 스타성을 믿고 제작비를 많이 투자하여 화려한 무대 미술을 보여준 작품이었지만 작품 자체로는 저조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의 인기로 표는 불티나게 팔렸고 새로운 스타탄생에 들 뜬 토니어워드는 오드리 헵번에게 여우주연상을 수여했다.
온디네(1954)
오드리 헵번은 자신에게 토니상을 안겨준 [온디네]에 출연하던 중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토니상과 오스카를 모두 석권한 오드리 헵번은 지방시와 처음 인연을 맺게 해준 [사브리나]까지 정신없이 출연한 뒤 1954년 멜 페러와 결혼하고 잠시 숨고르기를 한다. 영화계 복귀작도 멜 페러와 함께 했다. 톨스토이 원작의 방대한 서사시 [전쟁과 평화]의 영화 각색물에 출연하였는데 이 작품에서 오드리 헵번이 선보인 이미지는 훗날 러시아에서 다시 만든 [전쟁과 평화]의 여주인공 캐스팅에 참고 대상이 되었다.
온디네(1954)
오드리 헵번과 멜 페러는 1968년 이혼까지 총 다섯편의 작품에서 함께 했다. 연극 [온디네]와 영화 [전쟁과 평화], t.v영화 [마이얼링]에서 공동 주연하였고, 오드리 헵번 전성기 시절 마지막 작품이자 멜 페러와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던 [어두워질 때까지]에선 멜 페러가 제작을, [녹색의 정원]에선 감독을 맡았다. 멜 페러는 오드리 헵번과 윌리엄 홀덴이 다시 호흡을 맞췄던 [뜨거운 포옹]에서도 단역으로 잠시 얼굴을 비췄다. 안타깝게도 이 둘이 함께 한 작품은 대부분 실패했다. 오드리 헵번에게 토니상을 안겨준 연극 [온디네]는 산만하고 정신없다는 평을 받았고 [전쟁과 평화]는 방대한 원작을 버거워 했으며 [녹색의 정원]은 실패작이다. 비극적인 연애 사건으로 기록에 남은 [마이얼링]도 부부가 출연한 바람에 설득력이 떨어졌다. 오드리 헵번이 다섯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어두워질 때까지]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구성 방식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을 받았다.
온디네(1954)
멜 페러는 일 중독자에 다재다능하긴 했지만 결과물들은 시시할 때가 더 많았다. 매사 주목 받고 싶어하며 넘치는 의욕으로 동료들이 부담스러워했다. 오드리 헵번과 결혼한 뒤에는 오드리 헵번의 그늘에 가려 2류 배우로 전락했고 거듭된 실패작으로 헐리우드를 떠나 유럽 무대에서 주로 활동할 수 밖에 없었다. 오드리 헵번은 남편의 성공을 빌며 굳이 출연 안 해도 됐을 뻔한 [녹색의 정원]같은 실패작을 남기기도 했다.
오드리 헵번(할리우드 영화배우 유니세프 친선대사)
1992.9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소말리아를 방문하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오드리 헵번의 이 말은 전 세계 신문에 헤드라인이 되었고 세계적인 기부문화를 불러 일으켰다.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굶주린 어린이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간 오드리 헵번은 배우로 살았던 때보다 더 많은 정렬을 짧은 시간 동안 세계 구호 운동에 쏟아 부었다.
1988년 유니세프 친선 대사가 된 후 그녀는 세계 곳곳의 구호지역을 다니며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녀가 구호활동을 위해 간 곳은 수단, 에디오피아,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었다. 1992년 9월 오드리 헵번은 소말리아에 있었다. 소말리아는 그녀가 방문했던 그 어떤 지역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이었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죽어가고 있었으며 죽은 어린이들은 쇼핑백만한 자루에 담겨 묻혔다. 오드리 헵번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충격을 받았으며 마음 깊이 함께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해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 더 많은 구호의 손길이 가도록 호소했다.
그녀는 자신이 평생 쌓은 명성과 인기를 아낌없이 구호활동을 위한 기금 모집에 이용했지만, 구호 현장에서는 절대 스타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아이를 둔 어머니로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인간 오드리 헵번으로서 어린이들을 대하고 사랑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기꺼이 어린아이들을 보듬어 안았으며 아픈 아이의 눈썹위로 기어가는 파리를 내쫓았다. 전쟁지역과 전염병 지역도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했으며 아이들 속에서 누구보다 밝고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보여준 헌신과 노력은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지 왕년의 스타로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진심 어린 구호활동에 감동했고 새로운 기부활동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작지만 큰 울림이 되었다. 그녀 이후 많은 명사들이 진심이든 혹은 가식이라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명성과 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기부와 자선 활동에 뛰어 들었다. 젊은 시절 은막의 스타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던 오드리 헵번은 그 사랑을 제대로 되돌려 줄줄 아는 진짜 스타였다.
오드리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영국계였으며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 가문의 딸이었다. 그녀의 본래 성은 러스턴으로 헵번가와는 먼 친척 뻘이긴 했으나 그다지 관련은 없다고 한다. 그녀가 헵번의 성을 가지게 된 것은 다소 사회적으로 불안정 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자주 이름과 성을 바꾸면서 먼 친척 뻘인 헵번을 러스턴 앞에 붙여 헵번-러스턴이라는 성을 쓰게 되면서 부터였다.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당시 유럽에 유행처럼 번지던 우익 파시즘의 신봉자들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곧 파시즘의 문제점을 깨닫고 빠져 나왔지만, 아버지는 깊이 관여 하고 있었으며 결국 오드리 헵번이 6살 나던 해 가출해 사라지고 말았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가출 후 나치에 적극 동조하다가 영국에서 수용소 생활을 하였고 이후는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과거와 가족을 숨기고 살았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존재는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녀가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이 후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력이 세상에 알려져 스캔들이 될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실제로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버지의 연락을 오드리 헵번에게 숨겼다고 한다.
오드리 헵번을 일약 스타로 뛰어 오르게 한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오드리 헵번은 6살 이후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네덜란드와 영국을 떠돌며 살았다. 어린 시절은 외가의 재력과 어머니의 능력으로 그다지 곤궁하지는 않았지만, 곧이어 유럽대륙이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으면서 가세가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가난은 2차 대전 중에 극에 달했으며 이 와중에 오드리 헵번은 거의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때 그녀를 구해 준 것이 유니세프의 전신인 국제 구호 기금이었다. 이때의 기억이 훗날 그녀가 유니세프 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이유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좋아했던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길 원했지만 170cm에 달하는 그녀의 큰 키는 발레리나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쟁 후에도 계속된 가난은 그녀가 헛된 꿈을 꿀 여유를 주지 않았다. 발레로 다져진 우아한 몸매와 귀엽고 발랄한 외모를 가졌던 오드리 헵번은 영국에서 연극과 영화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무명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소설가 콜레뜨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한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오드리 헵번을 전격 캐스팅했고 할리우드에서는 미국적이지 않은 유럽풍 숙녀의 이미지를 가진 여배우를 찾고 있었다.
1953년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한 영화 [로마의 휴일]에 공주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은 그야말로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해졌다’를 실감할 수 있는 전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 한편으로 그녀는 유행의 중심이 되었고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그녀는 전세계 여성들의 우상이었으며 남성들의 연인이었다. 이후 오드리 헵번은 승승장구 한다.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은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오드리 헵번 스타일’ 이라는 자신만의 패션세계도 구축해 나갔다.
어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충격 때문인지 오드리 헵번은 늘 안정적인 가정을 원했다. 그녀는 배우로서의 명성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희구했다. 그녀는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지 1년 만에, 세상의 스포트라이트가 온전히 그녀 혼자만의 것일 때 영화배우 멜 퍼러와 전격적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954년 결혼 당시 오드리 헵번은 25세였으며 배우자 멜 퍼러는 이 결혼이 세 번째였고 오드리 헵번보다 12살이 많았다. 결혼은 오드리 헵번의 영화배우 경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녀는 멜 퍼러의 충실한 배우자였지만 여전히 뛰어난 흥행 여배우였다. 남편 멜 퍼러는 배우이기도 했지만 제작자였고 프로듀서, 감독이기도 하였다. 오드리 헵번은 멜 퍼러와의 사이에 아들 숀을 얻었고 멜 퍼러가 제작하거나 연출하는 작품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14년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부부에게서 종종 발생하는 열등감이 오드리 헵번 부부를 힘들게 했다. 멜 퍼러 자신도 유명한 영화 배우였지만, 오드리 헵번의 눈부신 명성 앞에서는 늘 기가 죽었다. 여기에다 매력적인 남자였던 멜 퍼러가 외도의 유혹을 뿌리 칠 수 없었다는 점도 부부 생활에 문제가 되었다.
[전쟁과 평화] 출연 당시 남편 멜 퍼러와 오드리 헵번
어린 아들 숀을 위해서라도 이혼만은 피해보려 했던 오드리 헵번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1968년 이혼을 하였다. 평온하고 안정된 가정을 꿈꾸던 오드리 헵번의 가장 중요한 희망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혼의 충격을 달래 준 것은 우정 관계였던 이탈리아의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였다. 그녀보다 9살 연하였던 도티는 멜 퍼러와 이혼 후 혼란스러운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아들 숀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둘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머니와 단출하게 살아온 오드리 헵번에게 도티의 따뜻한 가족과 친척들은 새로운 세계였다. 이듬해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에서 안드레아 도티와 결혼식을 올리고 로마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배우로서의 삶을 접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돌아가려고 했다. 멜 퍼러와의 결혼 기간 동안 유명 여배우였기 때문에 발생한 가정생활의 갈등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드리 헵번의 오산이었다. 청소년 시절 [로마의 휴일]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오드리 헵번을 사랑했던 도티는 그녀가 그저 평범한 아내로 머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도티는 평범한 여인 오드리가 아니라 배우 오드리 헵번을 사랑했던 것이다. 도티와의 사이에 아들 루카가 태어났다. 그러나 이 결혼 역시 오드리 헵번에게는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안드레아 도티는 이탈리아 남자답게 외도에 거부감이 없었고 오드리 헵번의 남편으로 그의 외도는 번번히 가십기사로 다루어졌다. 결국 도티와의 결혼 생활도 1979년 이혼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안드레아 도티와 이혼 후 오드리 헵번은 진정한 소울 메이트인 로버트 월더스를 만나지만 다시는 결혼하지 않는다. 오드리 헵번은 월더스와의 사이를 ‘결혼이 서로에게 얻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추가하지 못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했다. 로버트 월더스는 오드리 헵번을 만난 이후 그녀의 구호 활동을 도왔으며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켰다.
오드리 헵번의 구호 활동은 의뢰가 아니라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결정되었다. 1988년 오드리 헵번은 특별 초대된 마카오의 음악 콘서트에서 자신의 명성이 자선기금 모집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 조용히 은둔하며 왕년의 스타로서 흠 없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던 그녀에게 이 경험은 매우 특별했다. 자신의 인기와 명성이 그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이, 그것도 매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오드리 헵번은 흥분했다. 유니세프 쪽이 아니라 오드리 헵번 측에서 먼저 의사를 타진해 왔다. 구호를 위한 기금 모집이 절실했던 유니세프는 오드리 헵번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녀는 즉시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유명인 친선 대사가 있었지만 오드리 헵번의 참가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게다가 오드리 헵번은 일선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았기에 소속사도 없었고 까다롭게 스케줄을 조정할 필요도 없었다. 오드리 헵번은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그곳이 오지든, 전장이든, 전염병 지역이든 어디든 갔다. 일 년에 보수가 단지 1달러이며 출장지로 가는 경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사무실조차 내주지 않는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에 오드리 헵번은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처음에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선기금을 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던 그녀의 구호 활동은 현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깊이를 더해갔다.
구호지역에서 어린이와 함께 웃고 있는 오드리 헵번
구호의 메시지를 알리기 위해 그녀는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 않던 인터뷰를 자청했다. 오드리 헵번의 노력으로 전 세계인들은 구호활동에 대해 새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명사들뿐 만 아니라, 누군가 훌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구호 운동에 일반인들도 작은 힘을 보탤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정열적인 유니세프 활동은 구호지역의 많은 생명들을 살리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나날이 쇠잔해지고 있었다. 60세가 넘은 나이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일정과 현장에서 받는 슬픔과 정신적 충격은 오드리 헵번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1992년 9월 소말리아를 방문하기 직전부터 오드리 헵번의 건강은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며 건강 때문에 소말리아 방문이 취소될까 봐 노심초사 했다. 그리고 무리해서 방문한 소말리아에서 아랫배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고 진통제로 고통을 참으며 일정을 소화해냈다.
스위스 톨로세나에 있는 오드리 헵번의 무덤(photo by Alexandra Spiirk)
소말리아에서 돌아 온 이후에도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인터뷰와 행사에 쫓기며 그녀는 진통제를 달고 지냈다. 마침내 어느 정도 일정이 마무리 된 1992년 11월, 오드리 헵번은 로스엔젤레스의 병원에서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했지만 경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시간은 단지 3달만이 허락되었다. 병원 치료가 무의미해진 오드리 헵번은 은퇴 후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생의 마지막을 고요하게 보냈다. 그녀가 죽기 직전 맞은 크리스마스에는 자식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유언처럼 읽어 주었다.
“...기억하라. 만약 네가 도움을 주는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네가 더 나이가 들면 두 번째 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사랑하는 가족과 소울 메이트 로버트 월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3년 1월 63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사랑했던 스위스의 집이 바라다 보이는 동산에 동료와 전세계인들의 애도 속에서 묻혔다. 오드리 헵번 생전의 정열적이고 진심 어린 구호활동은 이후 유니세프와 민간 구호 단체가 함께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게 되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1953년작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은 앤공주로 분해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다. 영화 속 그녀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이 작품으로 오드리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오드리 헵번의 또 다른 기념비적 작품이다. 고급 콜걸인 홀리로 분한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에서 [문리버]를 직접 불러 그 매력을 발산했으며 [문 리버]는 이후 그녀의 주제곡이 되었다. 보석상 [티파니] 앞에서 초라한 아침을 먹으며 화려한 보석을 감상하는 그녀의 모습은 또 하나의 세계적 연인을 탄생시켰다.
버나드쇼의 원작 [피그말리온]을 뮤지컬 영화로 만든 조지 큐커 감독의 1964년작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오드리 헵번은 무식한 거리의 꽃 파는 아가씨에서 우아한 숙녀로 변모하는 돌리틀로 분해 그녀의 매력을 다시 한번 확인 시켰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1989년작 [영혼은 그대 곁에(올웨이즈)]에서 오드리 헵번은 주인공을 돕는 천사 역할로 출연한다. 이 작품은 오드리 헵번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비록 조연이지만 말년의 오드리 헵번의 성숙하고 단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드리 헵번은 이 작품의 출연료 대부분을 유니세프의 기금으로 기부하였다고 한다.
오드리 햅번 명언
오드리 햅번 명언, 진정한 여신의 자취
세계 영화 사상 역대 최고의 미인을 꼽으면
언제나 빠지지 않는 미국 할리우드 배우 오드리 햅번.
그는 미모로서도 여신이지만
인생과 정신의 측면에서도 진정한 여신이라 생각되네요.
다음은 오드리 햅번의 명언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한 덕목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