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노트북’ 다시 보기
영화 ‘노트북을 다시 봤다. 처음처럼 봤다. 10여 년 전 비디오테이프로 봤었는데 졸멍 쉬멍 봐서 그런지 이미지만 남았고 스토리는 대충 까먹었다. 이번에는 스토리를 잊지 않으려 애쓰며 봤는데도 노아와 앨리라는 주인공의 이름과 몇몇 장면만 기억될 뿐 스토리는 가물가물했다. 내가 영화평을 쓰는 것은 최소한 스토리만큼은 잊지 않기 위해서다.
첫사랑은 풋사랑이라고들 한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 사랑의 기술도 어설펐던 시기에 바람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고전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사랑의 고전이다. 영화와 연극으로 수 천 번 공연되었다.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한 1968년도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은 줄리엣의 이미지를 ‘핫세 스타일’로 각인시켰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설 속의 두 사람은 만 14세 전후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가 달랐다고 해도 우리나이로 따지면 중학교 2, 3학년이었을 나이에 진정한 사랑 운운하는 것은 좀 우습다. 그런데도 지난 400년 동안 이 작품은 진실한 사랑의 대명사였다. 한 때의 바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섹스피어의 글재주가 만들어낸 위대한 사랑.
16, 17세 남녀가 사랑을 나눴던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도 로미오와 줄리엣에 버금가는 풋사랑이다. 나는 춘향전이 사랑의 대명사가 된 것은 여성의 정절이나 스토리의 애절함보다도 ‘계급적 한계를 뛰어 넘는 파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쯤 주인집 아씨를 넘봤을 피지배층의 열광적 지지가 오늘날의 춘향전을 만들었다. 근대소설인 황순원의 ‘소나기’는 진정한 풋사랑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어린 시절의 해프닝이다. 그런데도 공전의 히트를 한 것은 교과서에 실렸다는 점과 독자들에게 진한 그리움을 던지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풋풋한 사랑이라는 스토리가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처음’이라는 상징성이 있다. 이성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자르르 전기가 흐르는 청춘의 시기에 불덩이처럼 쿡 하고 박혔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강렬함이 있다. 사랑이라는 용광로는 계급적 차이와 빈부의 격차, 얼굴의 생김새를 모두 녹여버리는 무소불위의 힘이 있다. 그렇기에 첫사랑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두의 꿈과 이상이었다. 버릴 수 없는 가슴 한쪽의 비밀이었다. 처음이기에 풋풋했고, 아팠고, 아프기에 오래 기억되는 소중한 비밀.
내가 좋아하는 ‘냉정과 열정사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첫사랑의 서사시다. 강풀 원작의 영화 ‘연애소설’, 수지와 한가인이 더블 캐스팅되었던 ‘건축학 개론’도 그렇다. 비록 사랑의 결은 달랐지만 영화 ‘봄날은 간다’와 클린트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열연한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도 첫사랑 영화다.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는 스토리의 구조상 첫사랑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사진기자 킨케이드는 돌싱남이었고 프란체스카는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이 그 나이가 되도록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끝없이 암시한다. 연예경험이 있거나 결혼을 했다는 것이 반드시 ‘사랑경험’의 존재유무와 일치할 수 없음을 영화는 말해준다.
내가 처음 알게 된 이성(異性)은 초등학교 때 옆집으로 이사 온 송이다. 송이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같은 학년인데다 교회를 함께 다녀서 어울릴 기회가 잦았다. 하지만 연예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그 아이가 내가 진정 좋아하는 타입이어서 좋아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여자이기에 이성적으로 호기심을 보였는지 판단할 길이 없었다. 겨울철마다 우리 옆집에 내려왔던 서울 사는 정은이도 첫사랑의 대상이었다. 중학교시절 밖에서 일을 하면서 나는 그 아이가 들을 수 있도록 ‘산타루치아’나 ‘그 집 앞’을 목청껏 불러댔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들킬까봐 단 한 번도 표현을 못했다. 그렇게 스쳐 지났다.
‘노트북’은 첫사랑에 대한 서사다. 17세 청소년기에 만난 남녀가 평생 동안 온 몸과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열정적인 영화다. 하지만 과하지 않다. 사랑의 열정은 뜨거웠지만 시절의 벽 앞에 좌절하기도 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처럼, 사랑했고 또 지금까지 사랑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버리지 못해 고백을 유보하고 현실을 쫓아가기도 한다. 과거 뜨겁게 사랑했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오랜 공백기 새롭게 만난 남자도 또한 사랑하고 있음을 회피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의 심장만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의 심장이 뜨거워졌다 식으면 다른 심장으로 대체한다. 잊진 않았지만, 연민은 남아 있지만, 식은 사랑을 되살리려 굿이 현재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인생이다. 하지만 영화 ‘노트북’은 우리의 평범함을 뛰어 넘는다. 그것은 50%의 노력과 또 50%의 행운이 가져다 준 축복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사랑을 꿈꾼다. 이런 사랑을 하며 평생을 살고 싶고, 한 침대에서 손을 잡고 편히 생을 마감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상황이다. 불가능하지 않지만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영화를 본다. 꿈꾼다. (2018.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