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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 시즌 1. 2-2강
<청년 문화의 바람이 불어오다>
통기타 혁명과 그룹사운드
23. 아침 이슬
1971년 6월 30일, 발표된 1장의 앨범만큼 청년문화를 폭발시킨 것은 없다. 놀라운 사실은 71년 6월 30일 발표된 이 음반은 3,000장도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철저히 사망한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에 실린 노래는 그로부터 굉장히 오랫동안 생명을 가지게 되었고, 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이 된다. 바로 ‘아침 이슬’이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서울 미대 서양학과 재학생이었던 김민기가 만들고, 서강대 사학과 1학년이었던 새내기 양희은이 1학기도 마치기 전에 녹음해서 발표했던 곡이다.
사실 이 음반에 창작곡은 3곡인가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미국 포크음악의 번안곡이었다. 하지만 이 ‘아침 이슬’ 1곡은 단순히 청년문화의 한 방점을 찍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대중음악의 역사 자체를 바꾸게 되는 명곡이 된다.
이 곡은 오랫동안 금지가 되었다. 그런데 87년 시민항쟁 때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이 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딱 2곡밖에 없었다. 학생도 나오고,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도 나오고, 지나가던 아줌마도 나와 섰는데, 이들이 모여서 다같이 부를 수 있는 노래는 딱 2곡밖에 없었다. 하나는 애국가였고, 나머지 한 곡은 아침이슬이었다.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장례식에 백 만명의 시민이 신촌 로타리에서 시청앞 광장까지 꽉 채웠는데, 제일 감동적이었던 것은 신촌 로타리에서 시청앞까지를 시민들이 운구를 하고 천천히 걸어가는 데, 끝없이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간 것이었다. 서로 거리가 너무 머니깐,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 게 불가능했다. 육교에 올라가서 보니깐, ‘아침 이슬’이 돌림노래처럼 저 멀리에서부터 끊임없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그 거리를 가득 채운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곡을 만든 김민기는 그해 10월 21일, 자신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은 한국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싱어송 라이터의 앨범이 된다. 이 앨범에도 김민기의 목소리로 부른 '아침 이슬'이 담겨있다. 같은 곡을 똑같은 해에 각각 두 사람이 불렀던 것이다.
그 두 버전은 완전히 다르다. 편곡도 다르고, 물론 보컬은 남자 여자니깐 당연히 다르다. 만든 사람이 부른 곡은 본래 자신이 그 곡을 만들 때 가진 의도가 그대로 들어가 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김민기 버전의 ‘아침 이슬’은 결코 시위하면서 부르는 투쟁가가 될 수 없는 노래다. 김민기는 거의 조용히 속삭이면서 염불하듯이 부른다.
실제로 김민기와 인터뷰를 했는데, 이 곡을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었다.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당시 그냥 되는 일도 없고, 너무 가난해서 매일매일 먹고 살 것을 마련해야 하는데, 알바비도 너무 짜고 그래서 사는 게 괴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날 학교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그때는 통금이 있으니깐, 어딘가를 들어가야 하는데 우왕좌왕하다가 그냥 필름이 끊어져 버렸다고 한다.
눈을 떠 보니, 돈암동 뒤 어느 야산의 공동묘지에 자기가 혼자서 자고 있었다고 한다. 태양은 저 멀리 ‘묘지 위에서 붉게 타오르고’, 자기는 거기서 술에 취해 자다가 ‘한낮의 찌는 더위에’ 깼다고 한다. 깨어보니 너무 창피해서 어디론가 가야 했고, 그래서 그 힘든 ‘저 거친 황야’의 알바로 다시 갔다는 것이다.
그 노래는 가난한 70년대 청년 지식인의 내면적 고백이었다. 이 노래는 어떤 거대한 사회적 비판 의식을 가지고 만든 게 아니었다. 우리가 모여서 3선 개헌을 한 유신정권이 획책하는 음모를 깨뜨리기 위해서 교문 밖을 나가서, 싸우고, 이기자고 할 때, 필요한 노래를 만든 게 아니었다. 김민기 버전은 70년대 초반 청년 인텔리겐차의 정말 암울하고 허무한 내면을 표현한 노래였다.
그런데 양희은 버전의 ‘아침 이슬’은 다르다. 이 노래는 굉장히 선동적이다. 앨범 재킷의 비주얼만 다른 게 아니고, 이 당시 대학교 1학년 새내기였던 양희은의 보컬 발성에 주목하자.
지금은 목소리가 워낙 바뀌어서, 솔직히 그 당시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런데 이때 양희은의 목소리는 글자 그대로 불타오르는 혁명적 낭만주의의 목소리였다.
이전까지 트로트 계열의 이미자 목소리나 미8군 스탠다드 팝계열의 패티김이나 현미의 목소리들은 기본적으로 습기가 있었다. 한국의 여성 보컬리스트들의 노래라고 하면, 뭔가 이 여자는 불우한 과거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 청승의 습기가 있었다.
그런데 양희은은 그런 습기가 완벽하게 제거된 또렷하고 당당한 발성이었다. 어떤 타협도 없는 정말 단호한 발성이었다. 그래서 저는 김민기가 부른 것보다 양희은이 부른 것이 훨씬 더 역사적인 녹음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노래가 양희은의 버전으로 녹음되지 않고, 김민기의 버전으로만 녹음되었다면, 결코 7080세대들의 세대의 송가(頌歌)가 될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 노래는 딱 2개의 기타로만 반주가 된다. 잘 들어보면 6줄짜리 나이롱 클래식 기타가 멜로디 라인을 담당하고, 리듬은 12줄짜리 통기타가 담당하고 있다. 리드 기타는 김민기가 치고 있고, 12줄짜리 기타는 맹인 가수였던 이용복이 치고 있다. 기본적으로 양희은의 발성에는 여성 보컬리스트 특유의 비브라토가 없다. 그리고 한 음표에 한 가지 음만 낸다.
이 노래의 구조를 음악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 노래가 왜 7080 세대의 노래가 되었지만, 왜 시장에서는 3,000장도 안 팔렸는지 증명할 수 있다.
일단 이 노래의 가사에는 한자어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외래어는 하나도 없다.한자어는 묘지, 태양 정도이다. 거의 대부분이 한국어였다. 김민기 노래의 특징은 4.19세대가 그러하듯이 아름다운 한국어로부터 한국의 노래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민기가 장르를 넘어서서 유일하게 영향 받은 예술가는 시인 김지하였다. 물론 1989년 이전의 김지하이다. 이때 김지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신(神)이었다. ‘황톳길’이라는 위대한 시집이 있었고, ‘오적’이라는 위대한 담시(譚詩)가 있었다. 그 시집을 통해서 김지하는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건강한 다이내미즘(dynamism)을 표현했다.
김민기는 노래의 김지하가 되고 싶었다. 그는 비록 미대생으로 음악전문가가 아니었지만, 가장 아름다운 한국어의 울림에서 한국음악의 새로운 제3의 길을 찾으려고 했다.
한국음악의 한쪽은 일본의 유산인 트로트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은 새로운 한국의 지배자가 된 미국 문화의 영역에 구금되어 있을 때, 이들 음악적 아마추어들은 자기들만의 아마추어적인 방식으로, 가장 낭만주의적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일반 대중들에게 ‘뭔가 알기는 알겠는데, 왠지 껄끄러운’ 느낌이었다. TV나 라디오를 통해서 들어왔던 음악과 달랐기 때문에 결코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노래는 C장조의 노래다. 그런데 ‘파’음으로 시작한다. ‘도’도, ‘미’도, ‘솔’도 아닌 ‘파’음으로 시작한다. 굉장히 불안하게 시작한다.
그런데 첫 번째 주제인 A테마(긴 밤 지새우면~아침이슬처럼 고운)는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선율 자체가 굉장히 목가적이며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한번 더 반복된다. 그리고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뀐다. ‘태양은 묘지~’하고 확 바뀐다.
그 전의 A테마는 굉장히 매끄럽고 전원적인 울림이 있는 주제였는데, 갑자기 낭송조의 마치 연설하는 투로 바뀐다. 서양음악적으로 표현하면, A테마가 아리아적이었다면, B테마는 오페라에서 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레시터티브(Recitative)적이다.
그리고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E단조적인 울림이 화성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앞의 목가적이었던 느낌이 굉장히 불길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되면서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가사와 만나면서 시련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시련일지라~’라고 하면서 B테마가 끝나는데, 이 지점에서 기존의 대중음악 문법과 결별한다.
기존의 대중음악 문법은 ‘A-A-B’에서 다시 A로 돌아가야 한다. ‘긴 밤 지새우고~’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미소를 배운다.’로 끝나야 한다.
‘A-A-B-A’가 왜 최고의 상품의 문법이냐 하면, A테마는 아름다운 테마다. 그래서 기억하라고 반복을 한다. 그 다음에 굉장히 드라마틱한 B테마가 나온다. B테마는 보통 발라드에서는 ‘이래도 돈을 안 낼래?’ 그러면서 막 열창을 하는 부분이다. 아주 전형적인 패턴이다. 그리고 다시 A테마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 일종의 확인 사살을 하는 것이다.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이걸 꼭 기억해서 반드시 사달라고 확실하게 확인시키기 위해서 다시 A테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대중음악계의 이른바 환전 문법이다. 돈을 부르는 문법이다.
그런데 ‘나의 시련일지라~!’라고 클라이맥스로 갔는데, 다시 A테마로 안 돌아가고 느닷없이 C테마로 가버린다. 갑자기 4도가 도약하면서 ‘나 이제 가노라~!’하면서 마치 노름판에서 ‘300 받고 600 더!’라는 기분으로 확 올라가버린다. 그리고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하고 A로 안돌아가고 그냥 끝나버린다. 가사처럼 진짜로 확 가버린다.
그래서 그 아름다웠던 A테마가 다시 생각나지 않는다. 2번째 반복할 때도 A테마는 다시 나오지 않는다. 당시의 감각으로 이건 상품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현실과 끝없이 타협해야하는 선민 집단의 일원이면서도, 기득권 권력의 비민주적인 관행에 대해서는 새롭게 비판적인 대안의 길을 모색해야 했던, 이 혁명적 낭만주의의 자식들에게, 이 대책없는 C로의 도약은 이게 바로 낭만주의였다.
혁명은 낭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다시 A로 돌아와서 현금을 챙겨야 한다.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낭만적인 초원의 지평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것이 70년대 청년문화의 혁명적 낭만주의의 감수성과 그 구조에서 너무나도 딱 들어맞았다.
그래서 이 노래는 어떤 매체에서도 나오지 않고, 음반으로도 팔리지 않았지만, 대학가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자신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데모를 하러 학교 문밖을 나가는데, 자기도 모르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김민기는 아무 죄가 없다. 김민기는 그저 술을 먹고 동네 공동묘지에서 잤을 뿐이다. 그리고 일어나서 이 곡을 썼을 뿐이다. 그리고 김민기는 이 곡을 너무나 착하게 불렀다. 자기가 본래 이 노래를 만든 의도대로. 그런데 양희은은 이 노래를 다르게 불렀다. 양희은과 같은 시대의 젊은이들은 김민기의 의도와 다르게 이 노래를 자기 속에 내면화시켰다. 그리고 이 노래는 바로 이들 세대의 노래가 되었다.
이 노래가 처음부터 금지곡이었던 것은 아니다.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면, 이 노래는 처음 발표되었을 때 서울시문화상까지 받았다. 아름다운 노랫말 상을 받았다.
그런데 72년 한국 민주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유신 헌법이 발효되면서, 대학가의 시위가 격화되었을 때, 대학생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학교 문밖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금지곡 판정을 못했다. 상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방송에서는 알아서 안 틀었다. 75년 긴급조치 9호 시대가 되고, 막가파 시대에 갔을 때, 비로소 금지를 시키는데, 그 때 2천 몇 백곡을 동시에 금지시킨다.
무엇이든 금지를 시킬 때는 사유가 있어야 한다. 71년 최고의 히트곡이었던 ‘거짓말이야’는 4년 뒤에 ‘사회불신감 조장’으로 금지시킨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금지 사유는 어처구니 없다. 이 노래의 2절 가사에 ‘밤새워 하얀 길을 나혼자 걸었었다.’라는 게 나오는데, 당시 12시부터 4시까지는 통금이었다. ‘어떻게 밤새워 하얀 길을 걸을 수 있어? 그건 불가능해.’라면서 사회통념위반으로 금지한다.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 활짝 핀 웃음이 내 발걸음 가벼웁게, 온 종일 걸어 다녀도 즐겁기만 하네.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 보네.’ 이런 가사의 노래인데 금지된다. 이유는 ‘산업의욕저하’였다.
그런데 아침이슬은 금지 사유를 달 수가 없었다. 시위에서 쓰이는 건 금지사유가 안된다. 본인은 시위용으로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노래만 2천 몇 백곡의 금지곡 중에서 유일하게 금지사유가 없이 금지된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 아이들도 피곤했던지, 아니면 이 곡에 대한 예의인지, 이 곡에만 사유가 없다.
24. 캠퍼스 스타
이 때만 하더라도 젊은이들은 스타가 아니었다. 청년문화라고 하면 전부다 비판적인 노래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크리티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로맨티시즘이었다. 이들의 젊은 로맨티시즘은 캠퍼스를 넘어서 점점 젊은 대중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각 대학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서강대에서 양희은이 나왔다면, 성균관대에서는 서유석이 나온다. 연세대에서는 윤형주가 이미 있었고, 홍익대에서는 이장희가 나온다. 그리고 경희대에서는 김세환이 나오고, 서울농대에서 이수만이 나온다. 이렇게 각 캠퍼스의 동네스타들이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비록 대학 출신은 아니었으나, 이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었던 송창식과 더불어 나중에 국회의원도 하게 되는 MBC 변웅전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금주의 인기가요 차트를 장악하기 시작한다.
73년이 되면서, 김정호의 ‘하얀나비’,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한번쯤’이 차트 1위를 접수하면서, 젊은이들의 노래는 이제 더 이상 아마추어들의 대학가 노래가 아니라,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노래로 발전하게 된다.
캠퍼스의 스타들이 글자그대로 스타덤에 오르면서 ‘아침이슬’이 나온지 3년만인 74년이 되면, 청년 문화가 기존 어른들의 문화였던 트로트와 스탠더드 팝을 완전히 무찌르고 대중 문화의 주류를 장악한다. 무서운 기세였다. 이때는 3공화국도 아니고, 서슬퍼런 영구 집권의 시대가 열린 유신정권시대인 제4공화국이었다.
박정희를 지지했던 정당성은 ‘잘살아보세’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적어도 3차 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는 자기 손으로 경제적 성과를 이루어내려고 생각했다. 한대수가 등장할 때 경부고속도로를 깔기 시작했는데, 만 2년도 안되어서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한다. 이건 그야말로 글자그대로 철권통치의 위에서 아래로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73년 유신정권이 시작하자마자, 박정희 정권은 자기들의 유일한 정당성으로 가져왔던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때 1, 2차 중동전이 발발하면서 세계유가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제 간신히 중화학 시장의 막내로 세계시장에 간신히 들어가려고 하는데, 석유값이 오르면서, 지옥이 된다. 박정희가 유일하게 자신의 방어벽으로 삼았던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 석유파동이 얼마나 심각했냐 하면, 당시의 음반 LP의 재료는 염화비닐으로 석유에서 만드는 것이었다. 석유값이 오르자, 음반 시장도 얼어붙는다. 재료값이 상승하는 바람에 판을 찍을 수 없었다.
음반 시장이 흔들릴 정도로 모든 산업에 여파가 몰려갔다. 박정희 정권은 이미 74년부터 몰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일방 통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격화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국 박정희 정권은 빼서는 안될 칼을 빼어들게 된다. 바로 긴급조치 1호부터 9호까지를 발효하면서 사실상의 계엄령으로 간다. 그러면서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듯이 수많은 정치사범들이 양산되고, 사형시키고, 끔찍한 군부 통치의 반민주성을 노골적으로 들어내기 시작한다. 그게 74년 여름부터다.
이런 철권 통치가 시작되던 해에, 다시 말해서 기존의 권위적인 식민지 세대의 권력이 도전받던 바로 그 시점에, 한국의 청년 문화는 세상을 장악한다.
25. 별들의 고향, 청년 문화의 대두
그리고 청년 문화가 세상을 장악했다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74년에 일어난다. 그 사건의 이름은 '별들의 고향'이라는 영화의 개봉이다.
영화 ‘별들의 고향’을 보면 명 장면이 있다. 경아가 자기를 꼬시는 이상한 술집 남자한테 우물쭈물하다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19살이에요.’라는 노래다. 이 노래도 물론 금지곡이 된다. 그 술집에서 경아가 실제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하다가, 이게 서서히 뮤직비디오처럼 바뀌어 간다. 당시로선 놀라운 테크닉이었다.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의 데뷰작이었다. 이장호 역시 청년 문화 세대로, 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를 이끈 신상옥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다. 이 영화는 신상옥 시대의 모든 기록을 깨뜨리면서 흥행 기록을 새로 쓰는 최고의 작품이 된다.
그런데 이게 너무 상징적이다. 이 영화의 감독도 홍익대 출신의 청년문화 세대인 이장호였고, 이 영화의 원작도 청년문화 세대인 연세대 출신의 젊은 작가 최인호의 원작였으며, 이 영화의 OST를 만든 작곡가도 홍익대 출신의 청년문화 세대인 이장희였다.
특히 OST는 ‘나 그대에서 모두 드리리’, ‘휘파람을 부세요’. ‘한 잔의 추억’, ‘나는 19살이에요.’ 등 넘버원 히트곡이 5곡이나 나온다. 원작, 작곡가, 감독이 모두 청년세대인 이 영화는 한국영화산업의 모든 기록을 깨뜨린다.
갑자기 이 영화가 터지면서 기성세대들도 문화 권력이 자신들에게 정치적으로 가장 적대적인 세력에게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분서갱유의 시대가 되는 이듬해인 1975년에 고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나온다. 이건 아주 내놓고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은 전부 아마추어 대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완전 초대박 화제작이 된다.
이 영화는 도저히 영화 내용이 뭔지, 연결이 안될 정도로 살인적인 가위질을 해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행간의 의미를 다 읽고, 극장으로 몰려 갔다.
이 영화에서도 넘버원 히트곡이 3곡 나오는데, OST는 송창식이 맡았다. ‘왜 불러’라는 노래가 당시 변웅전의 ‘금주의 인기가요’에서 10주간 1위를 기록한다. ‘고래 사냥’과 맨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날이 갈수록’도 히트를 친다.
그렇게 해서 이 두 영화는 단순히 이미자의 시대, 남진의 시대가 끝냈을 뿐만 아니라, 신상옥의 시대도 끝내버린다. 그러면서 영화에서도 새로운 세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작가부터 음악까지 모두 기존 세대의 도움 없이 새로운 젊은 세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청년 문화 세대들은 주류를 장악했다.
당시 최고의 스타는 역시 김세환이었다. 지금은 잘 모르는 동안(童顔)의 아저씨 가수로 알고 있는데, 김세환은 74년에서 75년 사이에 무려 5곡의 연속 넘버원 히트곡을 연속적으로 터트릴 정도로, 당시에는 최고의 젊은 캠퍼스 스타였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솜사탕과 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 마디로 스위트했다.
이렇게 젊은 세대들이 차트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이들에게 새로운 암흑기가 오게 된다. 75년 4월, 드디어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다. 긴급조치는 사실상 계엄령이었다. 쉽게 말해서 정부에 대해서는 ‘입 다물고 있어!’ ‘까부는 놈은 다 죽여버린다!’라는 선언이었다.
26. 신중현의 미인
그런데 이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기 전인, 74년 10월에 여태까지 밴드로서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신중현이 다시 밴드 앨범을 발표한다.
그는 이미 36살이었다. 록커를 하기에는 이미 늦은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신중현은 최고의 프로듀서였기 때문에 당연히 당시 최고의 회사였던 지구 레코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건 돌아가신 지구 레코드의 임회장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다. ‘그때 어땠습니까?’ 하니깐, 자기가 아무리 신중현이라고 하지만, ‘하는 것마다 다 깨먹는 놈한테 누가 제작을 해줘?’ 그랬더니 신중현도 너무 미안하니깐, ‘이번 마지막으로 안되면 다시는 밴드 안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장만 하게 해주세요.’라고 해서, 나이를 봐서도 이제 더 이상은 저런 짓은 안하겠지 싶어서 만들어 주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반이 나왔는데, 밴드이름이 ‘엽전들’이었다. 아까 신중현의 밴드를 다 이야기했다. 에드 훠, 액션스, 덩키스, 퀘션스, 골든그레이프스, 더 맨, 엽전들..
뭐가 다른가? 드디어 한글이름이 되었다. 이전 밴드의 이름은 다 영어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한글 이름의 밴드가 등장했다. 문제는 이 말의 뜻이다.
제가 신중현 선생한테도 공식적으로만 4번 인터뷰를 했다. 신중현 선생은 인터뷰하기 안 좋은 분이다. 절대 속내를 들어내지 않고, 자꾸만 옛날을 미화하려고만 한다. 그리고 저하고 같은 또래가 아니니깐, ‘내가 다 아는 데 왜 그러셔? 사실대로 말해요.’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었다. 그냥 ‘아. 그러셨어요. 그런 뜻이었군요.’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엽전들이라는 이름은 솔직히 무슨 뜻으로 그렇게 짓었어요?’라고 물었다. 공식적으로 신중현 선생의 반응은 워낙 밴드를 해도 돈도 안되고 해서, 이번 밴드는 돈이라도 벌어보자는 생각에 엽전이라고 지었다고 했다. 순 다 뻥이다. 사실 이 엽전들이란 말은 굉장히 안 좋은 말이다. 나, 우리, 우리 민족을 굉장히 비하해서 부르는 말이다. 자기 파괴적인 말이다.
‘그래서 조선 엽전들은 안돼.’ ‘본래 엽전들이 그래.’ 등으로 한국 민족을 비하하는 말이다. 여러분 생각해보자. 자기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이름을 ‘개색히’라고 지은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 이름에는 ‘내가 여태까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진짜 안 들어줄거야?’하는 내놓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억울한 그런 분노가 숨어있다. 한국어로 된 이름을 지은 것까지는 좋은데, 그 말이 굉장히 자기 파괴적이었다.
그래서 지구레코트의 임회장도 밴드 이름을 듣고, ‘드디어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 앨범의 A면 첫 번째 곡에 ‘미인’이라는 노래가 실려있다. 이 ‘미인’의 러닝타임이 3분 1초다. 본래 첫 번째 판을 만들었을 때는 4분 56초였다. 4분 56초면 너무 길어서 PD가 안 틀어준다. 그래서 ‘이거 너무 길어. 3분으로 맞춰.’라고 했더니 다시 정확하게 3분 1초로 끊어온 것이다.
내가 4분 56초짜리 원곡도 들어봤다. 그대로 나갔으면 절대 성공 못했을 것이다. 때론 비지니스맨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3분 1초로 바꾸었는데, 이 곡은 신중현이 만든 어떤 곡보다도 가장 크게 폭발한다.
그리고 신중현은 여태까지 자기가 록밴드를 하면서도 직접 보컬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리더였고, 기타리스트였다. 언제나 당대 최고의 보컬을 뽑아서 썼다. 그런데 이젠 보컬을 뽑을 여력도 없고, 뽑아봐야 어차피 안될 거니깐 창피해서 싸게 가자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신중현은 단 한번도 3인조 밴드를 한적이 없다. 최소 4인조에서 7인조를 했다. 그런데 기타, 베이스, 드럼에 기타가 보컬을 겸하고 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공간이 없다는 절박함으로 만든 앨범이었다. 노래를 들어봐서 알겠지만, 노래는 솔직히 아니다.
그런데 이 곡은 3차 중동전으로 유가가 엄청나게 올라서 앨범 시장이 거의 괴멸상태에 이르렀는데도, 74년 겨울부터 75년 봄까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곡이 된다.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신중현의 어떤 곡보다 크게 성공한다. 그래서 이 곡에 대해 언론이 붙여준 이름이 ‘삼천만의 애창곡’이었다.
이 곡은 명백히 록음악이다. 그런데 미취학 아동부터 은퇴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곡을 자기 세대의 곡이라고 생각하고, 동네방네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신중현은 이렇게 해서 자기 생애, 최고의 저주였던 록밴드에 대한 저주를 풀 수가 있게 되었다. 이 앨범은 ‘미인’만 생각하면 안된다. ‘미인’을 포함해서, 총 10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는 몰라’, ‘나는 너를 사랑해’ 등 이 앨범은 굉장히 비상한 실험성으로 가득찬 앨범이다.
이건 정상적으로 만들어진 판이 아니었다. ‘미인’도 사실 자세히 들어보면, 굉장히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앨범을 발표하면서 신중현은 한국 록음악의 아버지가 된다. 신중현을 한국 록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단지 신대철의 아버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비밀이 이 앨범 안에, 작게는 ‘미인’이라는 이 노래에 담겨 있다. 이건 단순히 대중적으로 히트한 한국 최초의 록밴드 음악이 아니다.
이 노래 안에는 김민기가 갔던 길과는 다른 또 다른 독립의 길이 숨어있다. 우리를 지배했던 구 식민지 시대의 문법과, 그 이후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신 식민지인 미국의 문법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변방의 가난하고 남루한 뮤지션의 독립 선언이 숨어있다.
서울 대학을 다녔던 김민기는 굉장히 지적인 방법으로 그 길에 이르고자 했다. 하지만 중학교 중퇴자인 신중현은 아마추어 대학생들과는 다른 진정한 프로만이 갈 수 있는 길로 이 두 제국주의 문법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이 곡을 들어보는데 지침을 준다.
먼저, 이 곡에는 록음악에서 흔히 하는 2~4마디의 짧은 악구를 반복해서 연주하는 리프(riff), 즉 주요 선율 동기가 있다. 곡 전반부의 ‘땅따땅따, 띵띠디디디딩..’하는 기타 소리인데, 이 리프를 계속 따라가면서 그 소리가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지 정리해 보자.
두 번째로 이 노래는 4박자 8비트라는 전형적인 록밴드의 리듬패턴 위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록밴드의 리듬패턴하고 무언가가 다르다. 똑같은 4박자 8비트인데 미국의 4박자 8비트의 편성과 무언가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를 추적해 보기 바란다.
세 번째로 이 곡은 굉장히 짧지만 간주가 나온다. 그 간주에서 신중현의 기타 솔로를 유심히 들어보고,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한 번 정리해 보자.
첫 줄은 일렉트릭 기타 연주인데, 보통 듣는 것과 뭔가 음색이 다르다.
사실 가사는 정말 황폐하다. ‘한 번 보고 두 번보고 자꾸만 보고싶네.’ 이 노래의 구조는 아까 ‘아침 이슬’대로 보면, 전형적인 ‘A-A-B’라는 블루스의 패턴이다. 그런데 A로 안가고, C로도 안 간다. ‘모두 사랑하네. 나도 사랑하네’로 끝이난다. 굉장히 건성으로 끝난다. 그리고 계속 ‘띵까띵까 띵띠디디’하는 리프가 중간에 많이 들어가 있다. 이 노래를 끌고 가고 있는 멜로디 라인, 즉 리프의 라인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뭔가 떠들석한 장바닥에서 치는 꽹과리의 느낌이 난다. 꽹과리는 타악기인데도 선율 악기의 느낌이 든다.
그리고 선율적으로 이 노래의 주 음계는 7음계가 아니고 5음계이다. 그것도 단조 5음계이다.
시간은 늦었지만, 단 2분만에 여러분들을 뽕짝 작곡가로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린다. 트로트가 뭐냐하면 단조 5음계이다. 트로트에 쓰이는 음계는 요나누키(四七拔き) 음계라는 일본식 음계이다.
쉽게 말해서 라시도미파의 5개 음계만 쓰는 것이다. 여러분 집에 피아노가 있으면 레와 솔을 전부 빨간색으로 칠해 놓으세요. 레와 솔은 건드리면 안된다. 라시도미파만 가지고 4박자에 맞추어서 여러분 맘대로 쳐본다. 그러면 왠지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음악이 나온다. 그 순간 여러분은 뽕짝 작곡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미인’의 리프도 단조 5음계이다. 얼핏 들으면 이게 익숙하게 들리는 것은 그전에 우리가 단조 5음계를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곡은 트로트 세대들한테도 그리 거부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트로트의 요나누키 음계가 아니다. 살짝 틀어져 있다. 이건 라도레미솔 음계이다. 이 음계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음계에 해당하는 계면조는 아니고, 계면조적인, 계면조를 현대평균률로 옮겼을 때 나는 음이다. 이런 단조 5음계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민요의 전통을 가로지르고 있는 음계를 가져온 것이다.
똑같은 단조음계인데, 이 중졸의 음악가는 미국의 도구를 가지고, 한국의 전통적 음계를 사용하였다. 사람들에게는 잊혀졌으나 한국인의 DNA속에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는 우리 전통의 계면조를 호출한 것이다.
여러분은 평소 우리 전통 음악을 듣나? 솔직히 안 듣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FM에서도 편성은 되어 있지만 새벽 4시에 하는 것을 누가 듣겠는가?
제가 지금은 안하지만, 옛날에는 공연기획을 많이 했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록밴드 사이에 집어넣으면, 젊은 아이들이 미친다. 사실 사물놀이를 음반으로 들으면 정말 재미가 없다. 평소에는 안 듣지만, 현장에서 들으면 미친다. 그건 자기 몸이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게 이런 상태로 2, 3대 가면, 아마 사라질 것이다. 지금 세대까지는 이게 간신히 먹힌다. 하지만 내가 볼 때 다음 세대부터는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이 음계는 이 음계 속에 첫 번째 비밀이 있다. 이건 다시 전통의 우리 문법을 갖고 와서 새로운 독립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미국의 악기로 일본의 문법을 몰아냈다. 그리고 아까 누가 가야금이라고 말씀했는데, 제가 중간 간주부분을 열심히 들어보라고 했다. 비록 3인조 밴드지만 기타는 더빙을 했다. 즉 2번 녹음했다. 따라서 2개의 기타가 나온다. 하나는 이른바 디스토션(distortion)이 조금 걸린 전형적인 록큰롤 기타로 나오지만, 갑자기 가녀린 기타 소리가 하나 튀어나온다. (디스토션은 지금까지 잡음의 일종으로 취급되어 왔지만, 일렉트릭 기타에서 발생하는 묵직하고 일그러진 소리 등 록 음악을 중심으로 표현 방식의 일부로 이용된다.)
이건 신중현이 악기의 엠프를 개조해서 일렉트릭 기타로 가야금 소리가 나게 튜닝을 한 것이다. 그건 주파수를 변조해서 버터가 흐르는 느끼한 미국적인 일렉트릭 기타음이 아닌, 기름기를 쏙 뺀, 굉장히 한국적인 일렉트릭 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3분 1초안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숨어있다.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비트인데, 비트는 드럼파트가 결정한다. 자세히 들어보면 4박자 8비트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짝수번째 박자에 강세가 들어가는 록비트하고 조금 틀리다. 이 곡은 강세가 없다. 4박자 8비트를 계속 ‘당당당당당당당.’ 강세없이 친다. 그리고 록비트는 킥 드럼하고 스네어를 중심으로 하는데, 킥 드럼과 스네어는 별로 안 쓰고 금속적인 소리가 많이 난다. 즉 심벌하고 하이햇을 계속 친다. 이 이야기는 꽹과리의 느낌이 나게, 드럼 세트 중에서도 금속 세트들을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세를 없애버림으로 해서 4박자 8비트가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라는 각설이 타령를 부르면 딱 들어맞는다. 4박자 8비트를 지키면서도 그 안에서 뭔가 다른 한국적인 느낌을 가져오려고 했던 것이다.
이 곡 안에는 굉장히 많은 비밀이 숨어 있으며, 이 짧은 곡 하나 안에는 무시무시한 훅이 숨어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대중들이 이렇게 곡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 곡에 숨어 있는 거대한 문제 의식을 파악하고 지지를 보낸 건 아니다. 그런데 그냥 땡겼다. 록인데도 미취학 아동도 땡기고, 할아버지도 땡겼다. 가사는 미취학 아동도 충분히 이해할만한 수준이었다.
그 노래 안에는 뭔가 이 노래의 자장 안으로 끌어 당기는 것들이 숨어 있다. 이 노래는 우리의 무의식을 정확하게 격발했다. 이 순간 신중현은 한국 록음악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는 더이상 비틀즈를 모방하고 아레사 프랭클린을 모방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23. 박정희와 신중현
그러나 이 극점의 순간에 신중현은 몰락한다. 음악으로서 최고의 완성에 도달한 그 순간, 신중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게 되고, 음악적 생명이 끝나게 된다.
음악가로 신중현의 최고 경쟁자는 박춘석도 아니고, 길옥윤도 아니고, 김민기도 아니었다. 그의 최고 경쟁자는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70년대 최고의 프로듀셔였다. 70년대, 음반시장에서의 최대 히트곡은 미인이었지만, 70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최대 히트곡의 프로듀서는 박정희였다.
여러분 새마을 노래를 기억하는가? ‘나의 조국’을 기억하십니까? ‘잘 살아보세’를 기억하십니까? 이 노래들은 박정희 작사 작곡의 노래들이다.
사람들은 박정희가 무슨 작사를 하고, 작곡을 했겠어? 분명히 서울대 김희주 교수 같은 사람이 썼는데, 박정희 이름으로 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제 생각엔 박정희가 직접 작사 작곡을 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는 간단하게 치부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박정희는 제가 볼 때 정말 연구할 만한 인물이다. 박정희가 가난한 빈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대구사범에 들어간다. 식민시대 대구사범이라고 하는 곳은 가난한 최고의 수재와 천재들이 가는 곳이었다.
대구사범을 나와서 문경에서 교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곧 교사생활을 그만 두고, 만주로 가서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와서 일본군 장교가 된다. 그런데 영원할 줄 알았던 일본제국이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끝나버린다.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대구 인민 항쟁의 지도자였고, 결국 인민 항쟁 중에 전사한다. 위대한 혁명가였다.그래서 그는 조국에 다시 돌아와서 개과천선을 하고, 대한민국 국군의 남로당 총책이 된다. 좌익의 길로 들어간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좌익이 지게되고, 여순 반란 사건도 실패한다.
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기 위해서 모든 동료를 다 밀고해서 자기의 모든 혁명 동료들을 처형장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한직을 돌게 되고, 맨 마지막에는 부산에 있는 군수기지 사령관을 한다.
박정희의 이상은 메이지 유신이었다. 위로부터 아래로 꽂히는 개혁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혁명가였다. 그는 자신의 쿠데타를 5.16군사혁명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메이지 혁명을 모델로 그대로 따라 했다. 어짜피 대중들은 게으르고 무식하고, 이런 자들에 의해 세상은 진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쿠데타를 일으키고, 성공한다. 그래서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여기서 잊어서 안되는 것은, 그가 대구사범과 일본육사 출신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군국주의자였고, 한편으로는 이른바 문화통치 시대의 사이토 총독과 같은 부류였다. 그는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던 첫 번째 한국 정치가였다.
그가 막 대통령이 되었을 때 한일회담을 했다. 굴욕적으로 일본과의 외교적 문호를 다시 열고, 겨우 3억 달러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자 반일의 물결이 굉장히 크게 일어난다. 그래서 자기의 살과 같은 트로트를 왜색으로 몰아서 학살한다. 그는 ‘동백 아가씨’의 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백 아가씨’는 일본 트로트를 표절한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색이라고 몰아서 영구금지시켰다.
왜냐?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였다. 문화적인 반동으로 인한, 그 물결이 정치쪽으로 넘어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바로 조치를 내렸다.
그는 청년 문화가 문화적인 권력을 잡아갈 때, 그것이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문화의 방파제를 구축한다. 곡을 만들고, 강제적으로 곡을 보급한다. 모든 학교와 공공기관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이 노래를 틀어댔다. 정말 IQ 50이라도 다 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박정희가 70년대 최고의 프로듀서가 아니고 뭔가? 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 3곡의 노래를 3절까지 다 외우고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하루에 3번은 들어야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프로듀서한 음반을 보면, A면 첫 곡은 ‘나의 조국’이고, B면 첫 곡은 ‘새마을 노래’이다. 그 앨범의 재킷을 보면, '나의 조국' 박정희 대통령 각하 작사, 박정희 대통령 각하 작곡, 노래 육군합창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앨범 표지에 ‘국민건전가요곡집’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의 첫 번째 버전은 ‘국민가요곡집’이었다. 저는 이 말이 중요하다는 생각한다. 박정희의 무의식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건드린 것이다.
1936년 육군 출신의 미나미 총독이 조선에 부임해서 트로트 음악을 금지시킨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의 트로트계는 트로트는 일본 것이 아니라 일본 총독부에 탄압받았던 민족음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나미가 트로트를 금지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군인 출신인 미나미 총독은 당시 대동아전쟁이라는 성전을 치루고 있는데, 처연한 사랑 타령이나 하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되고, 천황에 충성하고, 황군을 숭상하는 미래지향적인 노래를 만들어서 보급하라는 칭령을 1937년에 발표한다.
그럼 천황에 충성하고, 황군을 숭상하는 미래지향적인 노래는 뭐냐? 장조로 이루어진 일본풍의 군가였다. 요나누키 장음계에 의한 군가였다. 그리고 이 군가의 다른 이름이 바로 ‘국민가요’였다. 황국신민의 노래라는 뜻이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노래들 중에도 일본군가인 국민가요가 있다. ‘감격시대’같은 노래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춤추는 거리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행진하면, 발이 딱딱 맞는다. 사람들이 이 노래를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큰일 날 소리다. 이 노래가 발표된 건 1939년이다. 남경이 함락된 바로 그 해다. 이 노래의 2절 3절 가사를 보면 살벌하다.
‘희망봉은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로 끝나는데, 희망봉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이다. 이 노래는 진군가였다. 전 세계를 향한 황군의 진군가였다.
그런데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정부 때, 식민지 시대를 청산한답시고 총독부 건물 폭파시킨다. 그 때 8.15 기념식장에서 ‘감격시대’를 KBS교향악단이 연주했다. 저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아니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고, 총독부를 허무는데, 황군의 노래가 나왔다.
어떻게 해서 그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안봐도 비디오고, 안들어도 오디오다.
청와대에서 문화부에 전화해서 이번에 각하께서 8.15 기념식에 신경을 쓰시는데, 각하가 좋아하시는 선구자 같은 것만 하지말고, 대중들도 잘 하는 대중 가요 속에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것을 찾아서 연주하라고 했을 것이다. 문화부에서 말단 관리가 노래책을 하나 갖고 와서, 아무 생각없이 가나다 순에서 3번째 노래인 ‘감격시대’를 정하고, KBS교향악단에 통보했을 것이다. KBS교향악단은 ‘뭐 이런 뽕짝을 연주하라는 거야.’ 하고 투덜투덜거리면서 오케스트레이션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날 연주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념식은 NHK에서 일본에 생중계하고 있었다. 만약 프랑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대통령이 하야했을 것이다. 프랑스 독립기념일에 나치의 노래를 연주한 것과 같다. 국가공식행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그 후에 저는 문화부 8급 공무원 한 명이라도, 이 일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여러분이 왜 ‘가요’라는 말을 쓰면 안되는가? 그 ‘가요’라는 말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 말이 아니다. 이 ‘국민 가요’라는 말이 나오기 전까지 트로트를 이야기하던 한국어는 ‘유행가’였다. 여러분 할머니들이 ‘요새 나오는 유행가 한자락 해봐라.’ 이렇게 말하셨지, ‘요새 나오는 가요 한 곡 해봐라.’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국민 가요’가 등장하면서, 이것이 전국에 강제적으로 뿌려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국민 가요’라는 말이 너무 길어서, ‘국민’이 빠지고 ‘가요’가 된 것이다. 즉 ‘가요’는 ‘국민 가요’에서 온 말이다. ‘고려 가요’라는 말도 쓰니깐 그냥 ‘가요’라는 말을 쓰면 안 되냐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박정희는 메이지 유신, 미나미 총독과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연장선상에 자신의 철학적 노선이 있던 사람이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1집에서는 ‘국민가요집’이라고 한 것이다. 자기가 써놓고도 그게 섬찟했던지 2집에서는 ‘건전’이라는 말을 가운데 붙여놓고, 3집에서는 ‘국민’도 빠지고 ‘건전가요’가 된다.
그런데 사실 자기가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 맞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정말 ‘국민가요’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새마을 노래’는 전형적인 일본 군가, 요나누끼 장음계에 의한 일본식 선률이다. 가사만 한국어였다. 왜냐하면 자기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배운 일본 음악의 문법, 자기가 관동군 장교로서 활동했을 때 수없이 불렀던 군가들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출신이니깐 기본적으로 풍금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의 둘째 딸은 서울 음대 피아노과 출신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무슨 곡을 만들 때, 박근영이 피아노로 도움을 주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일본 군가적인 선률로 국민계몽의 노래를 기획하고, 만들고, 보급해서 신중현의 아성에 도전한 것이다.
그래서 신중현의 진정한 음악적 라이벌은 그 누구도 아니고 박정희였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신중현을 예술가로서 시기했다. 100% 확신한다. 마치 살리에르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24. 신중현의 비극
그런데 이 국민가요 프로젝트는 박정희 혼자만 한 게 아니라, 수많은 클래식하는 사람들, 음대교수들, 대중 음악하는 사람들을 동원한다. 다 동원했다. 당연히 ‘미인’의 히트가 극에 달했을 때, 청와대에서 최고의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인 신중현에게 국민가요를 의뢰했다.
그런데 신중현의 비극은 거기서 시작한다. 그는 거절했다. 나는 그것이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고, 명확한 정치적 철학이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생각없이 그랬을 것이다. ‘왜 전화질이야. 전화오면 없다고 그래.’ 괜한 음악적 자존심 때문에 거절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피맛을 본 박정희 정권이 그것에 대해서 ‘아, 우리가 뭘 잘못했나? 다시 예의를 갖추어서 의뢰를 해볼까?’ 이렇게 생각했을까? 아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보내버려!’ 그리고 신중현의 음악 생활은 끝나게 된다.
신중현은 확신범이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가 거절을 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무런 연락이 없었지만 불길했다.
그래서 부랴부랴 75년 1월에 ‘엽전들’의 2집을 낸다. 제가 아까 한국의 명 앨범 재킷을 2번째까지 이야기했다. 3번째로 최고의 명 앨범 재킷은 신중현의 2집 앨범이다.
내가 만일 미셸 푸코라면 이걸 가지고 책 한 권을 쓸 거 같다. 3명이 서 있다. 경복궁 근정전 계단 앞에 서 있다. ‘엽전들’이 양복에 넥타이를 메고 서 있다. 옆의 빨간 것은 사진관 사진기다. 이 뒤에 왕이 앉는 옥좌가 있다. 그 앞에서 3명은 꼼짝 못하고 서 있다. 권력을 상징하는 근정전의 계단 앞에서, 락커들이 차렷자세를 하고 ‘잘못했어요. 시키는대로 다할게요.’라는 느낌으로 서 있다.
이 사진 한 장은 제가 볼 때, 간절한 청원의 사진이다.
이 안에 있는 노래들도 1집하고 완전히 다르다. 사실 1집은 ‘미인’만이 문제작이 아니었다. ‘나는 몰라’는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다가 ‘야! 그러면 안되지.’라면서 갑자기 스튜디오의 벽을 깨고 나간다. 이건 전형적인 탈춤 마당의 형태를 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해’는 노래 가사가 2줄 밖에 없다. ‘해랑사 를너 는나. 해아좋 를너 는나.’뿐이다. 이건 ‘나를 너를 사랑해’를 거꾸로 적은 것이다. ‘나는 너를 좋아해’를 거꾸로 적은 것이다. 그런데 멜로디는 하나 없고, 카우벨(cowbell) 소리만 나온다. 이건 상여가 나갈 때의 만가(輓歌) 같다. 신중현은 사랑 타령뿐인 대중음악의 질서를 이런 식으로 비웃은 것이다.
그리고 노래 가사를 뒤집어서, 그 말이 가지고 있는 통속성에 대해서 미학적으로 거절한 것이다. 아방가르드적으로 거절한 것이다. 이런 혁신적인 음악을 해냈던 사람이 신중현이었다.
그런데 2집의 노래는, ‘뭉치자.’ ‘승리의 휘파람’ 같은 군가들로 채우고 있다. ‘그냥 하라고 할 때 하지. 하라고 할 때 한 곡만 하지.’ 이런 말도 안되는 군가들을 만들어서 2집 앨범을 꽉 채웠다.
2집에는 ‘아름다운 강산’의 엽전들 버전도 포함되어 있다. 이른 바 착한 버전이 들어 있다. 원래 ‘아름다운 강산’의 오리지널 버전은 우리가 아는 건전가요가 아니다. 사이키델릭으로 도취해 들어가는 음악이었다. 그걸 착한 건전가요 버전으로 바꾸어 집어넣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건전가요를 가득 담았다.
이건 록커의 앨범이 아니다. 이건 마치 잡혀들어가기 직전에 ‘한 번만 살려주세요.’라고 엎드려 비는 비명의 음반이었다.
그런데 이 간절한 청원을 제4공화국 정부는 거절한다. 그리고 이 앨범이 나오고 3개월 뒤인 1975년 4월에 드디어 가요규제조치를 꺼낸다. 그래서 신중현의 모든 작품을 금지시킨다. 이런 청원과 상관없이 모든 작품을 금지시킨다. 앞으로 할 거까지 금지시킨다.
어느 정도로 잔인했냐 하면, 금지는 시켜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할 거 아니겠는가? 방송도 안되고, 음반도 안되니깐, 신중현은 그때 밤무대에 서서 먹고 살았다. 당시 최고의 나이트클럽은 명동 로얄호텔 나이트였다. 그때까지 거기가 물이 제일 좋았다. 그런데 신중현이 출연하는 날이 되면, 중부경찰서에서 그 앞에서 불심검문을 했다. 호텔에 들어가는 손님들을 잡아서, 신분증 검사를 하고, 후레쉬로 얼굴 비추었다. 당연히 손님들이 끊어졌다. 언니랑 들어가는데 누가 가겠는가? 이건 업소 주인한테 신중현을 출연시키지 말라는 압박이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밥그릇을 빼앗아 버렸다.
신대철의 증언에 따르면 국민학교 때, 집안에 아들만 3명인데, 끼니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었다고 한다.
25. 한대수의 비극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한국 음악사상 최고의 재킷 1위는 75년 2월에 나온 한대수의 2집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혁명적인 곡인 ‘고무신’이 실려있는 판인데, 이 앨범 재킷을 보면, 철조망 위에 걸린 흰 고무신 2개가 보인다. 멋지지 않은가? 마치 분단해서 쪼개진 두 국가의 민족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너무나 한국적이다. 이 사람이 사진 작가니깐 직접 찍은 사진이다. 최고의 재킷 사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판은 별 문제가 없었다. 단지 한 곡이 딱 걸린다. 정확히 말하면 ‘자유의 길’이라는 노래가 문제였다. A면 4번째에 이 노래가 나오는데, 후렴구에 ‘쓰라린 자유의 길에 나는 지쳤다.’라는 가사가 3번 나온다. 1절, 2절, 3절에 각각 나온다. 당연히 그 당시의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선 ‘‘자유의 길’ 같은 소리하고 있네. 가사 바꿔!‘라는 가사 수정 지시가 내려온다.
그래서 제목도 ‘자유의 길’에서 ‘나그네 길’로 바꾸고, ‘쓰라린 나그네 길에 나는 지쳤다’로 가사도 바꾸었다. 그리고 바꾼 가사로 녹음을 했다. 납본까지 통과해서 판을 찍었다. 찍고 나서 보니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쓰라린 나그네 길에 나는 지쳤다.’를 1, 2절은 제대로 바꾸어 불렀는데, 3절은 그냥 ‘쓰라린 자유의 길에 나는 지쳤다.’로 나간 것이다. 그러니깐 납본 검사하는 사람이 1, 2절까지만 듣고, ‘다 바꾸었네.’하고 도장을 찍고 준 거였다.
아직도 어떤 사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끝까지 3절은 ‘자유의 길’을 고수하려고 한대수가 그랬던 것인지? 자기도 그냥 바꾸어 부르다가, 얼결에 그렇게 불렀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 판이 다 나가고 난 뒤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판을 낸 곳은 신세기 음향이라는 곳이었는데 난리가 났다. 풀려나간 판을 중앙정보부가 나서서 전부 수거하고, 마스터 테이프 압수하고, 남산 대공 분실에서 다 때려부셨다. 그래서 이 판은 지금 1장에 100만원이 넘는다. 왜냐하면 그 살륙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판이기 때문이다. 그 ‘자유의 길’이라는 말 한 마디 때문에 이 판은 영구히 전곡 금지가 되고, 마스터 테이프는 소각되었다.
한대수는 더 이상 이런 나라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미국으로 가버렸다. 이런 폭행이, 이런 분서갱유가 일어났다.
26. 대마초 파동과 비극의 연속
1975년 12월 박정희 정권은 마지막 기획을 한다. 대마초 파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신중현을 대마초 왕초로 만들어서 완전히 끝까지 보내버린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까 내가 신중현이 대마초 피고 쓴 글이 선데이 서울에 실렸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뭐냐면 당시에는 대마초를 피는 것이 법적으로 불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마관리법은 76년 4월에야 국회에서 발의된다. 향정신성의약품에 관한 법률은 79년도에야 법률화된다. 그전에는 1957년에 제정되었던 마약법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마약법에서 마약으로 분류된 것은 양귀비, 아편, 코카열매, 이 3가지였다. 그러니깐 당시에 대마초를 핀다는 것은 법적으로 불법이 아니었다.
여러분 민주주의가 뭡니까? 제일 중요한 게, 제형법정주의다. 그리고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말해야 한다. 일단 잡아놓고 법을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마치 페이올라(payola) 스캔들처럼 모든 가수들이 대마초를 다 피웠다. 그런데 청년문화 쪽 가수들인 포크, 록큰놀 하는 아이들만 불러서, 자백하게 하고, 모두 출연 금지를 시키고, 활동금지 시켰다. 이게 바로 1975년 12월 30일 일어났던 대마초 파동이다.
이들을 약쟁이로 매도해서 사회적으로 매장시켜버렸다. 물론 77년에 가면, 다 풀어준다. 말도 안되니깐 다 풀어주고 다시 활동을 한다.
그런데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을 때까지 끝까지 안 풀어준 사람이 2명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신중현이고, 또 한 명이 조용필이다.
사실 조용필은 처음에는 안 잡혔다. 사실 청년문화가 학살 당하면서 덕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이 조용필이었다. 조용필의 뽕짝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76년 봄부터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트로트가 다시 복귀한다. 그리고 록밴드 출신의 트로트 가수들이 70년대 후반기를 휩쓴다. 윤수일의 '사랑만은 않겠어요', 검은 나비와 히씩스 출신의 최헌이 부른 '오동잎', 그리고 지금은 조승우의 아버지로 유명한 메신저스의 베이스를 쳤던 조경수의 '아니야' 등이 모두 트로트 곡이다.
이른바 청년문화 출신의 사상 전향자들인 록밴드 출신의 가수들이 트로트 곡으로 메이저 스타가 되는데, 이때 최고의 조명을 받은 사람이 조용필이었다. 그런데 조용필은 77년도 대마초 2차 파동에 걸린다.
‘아니, 다른 아이들을 다 보내고, 너를 키워주었는데, 너까지 폈니?’라는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그래서 끝까지 안 풀어주었다.
그런데 조용필은 79년도에 다시 복권이 되었을 때, 나이가 갓 서른이었다. 얼마든지 재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신중현은 이미 40살이 넘어가 있었다. 게다가 음악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 박살났기 때문에 다시는 재기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박정희가 그를 영원히 보내버린 것이다. 유신정권이 완전히 보내버린 것이다. 가장 절정의 순간에, 문제의식이 정말 비상하게 빛났던, 예술가로서 최고의 절정에서, 그는 강제적으로 무장을 해제당한 것이었다.
27. 대학 가요제
이 유신이라는 어둠의 시대에 유일하게 숨통을 터주었던 것은 77년부터 시작된 대학가요제였다. 젊음의 에너지는 이 관제(官制) 주도형 행사를 통해서 제한적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젊은 대중들은 이 대학가요제에 몰표를 던져서, 정작 그것을 기획한 MBC마저도 놀랄정도의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웠다.
이렇게 해서 제1회 대학가요제부터 다시 캠퍼스 출신의 록밴드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김수철, 구창모, 배철수 같은 사람들이 모두 이때의 대학가요제나 해변가요제를 통해서 아마추어 대학교의 록밴드에서 프로페셔널 세계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28. 산울림
신중현이 프로페셔널 출신으로 한국 록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면, 그 바톤을 받아서 70년대 후반의 암흑기를 관통한 단 하나의 밴드가 있다면, 바로 77년에 등장한 산울림이다.
산울림은 알다시피 3형제 밴드다. 산울림의 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바로 대학가요제때문이었다. 이들은 대학가요제 예선에 출전했다. 예선에 출전할 때는 제일 큰 형인 김창완이 대학생이었다. 그런데 본선을 하는 11월에는 이미 졸업을 했다. 그래서 예선에서 1위로 통과했지만 자격박탈이 되어서 출전할 수 없었다.
그때 김창완은 가요제 출전을 대학생 때의 마지막 추억으로 하고, 국민은행에 취직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둘째인 서울농대 출신의 김창훈이 작곡한 곡이 그랑프리를 땄다. 자기들은 출전도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서, 자신들의 청춘을 기념하면서 판 1장만 내기로 마음 먹었다.
김창완은 ‘판을 1장 내고, 나는 취직할 게.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해.’ 이런 마음으로 친척들에게 돈을 걷었다. 왜냐하면 판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드는 줄 알았다. 그리고 자기들 방안에서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들고, 서라벌 레코드사를 찾아 갔다. 그 회사를 간 이유는 단지 집에서 제일 가까운 레코드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테이프와 돈다발을 들고 가서, ‘저희들 형제들인데요. 판을 내려면, 돈이 이정도면 될까요?’ 그랬더니, 서라벌 레코드에서 사장이 딱 들어보더니 노래가 너무 좋았다. ‘돈을 필요없어. 내가 판은 내줄 게.’ 그렇게 해서 77년에 데뷰한 앨범은 무려 40만장이 팔려나가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었다.
산울림의 이 앨범은 신중현의 뒤를 이어서 처음으로 모든 곡이 자작곡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형제들이고, 이미 만들어놓은 곡이 100곡도 넘었다. 그래서 다음해인 78년 말까지, 만 1년사이에 3장의 정규앨범과 2장의 동료앨범을 발표한다. 이 5장의 앨범은 한 곡도 겹치지 않는 전부 오리지날 신곡들이었다. 이건 다시는 세울 수 없는 기록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그야말로 유신시대의 어둠 속에 억눌려있는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탈출 통로가 된다.
29. 밀리언셀러 시대
이렇게 해서 70년대는 끝났다. 그리고 한국의 10대가 주체로 등장한 것은 제5공화국의 80년대였다.
그런데 한국의 10대 문화는 미국과는 달리 하이틴 여고생들에 의해서 시작된다. 이 하이틴 여고생들의 10대 문화가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에 우리가 처음으로 3저 호황에 의한 중산층의 출현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문화적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는 용돈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만 해도 용돈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TV는 자기들한테 채널권이 없으니깐, 워크맨이라는 자기들만의문화를 소비할 수 있는 문화적인 하드웨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비록 시장을 장악하게 했지만, 이들의 사고방식은 불행하게도 여전히 유교적 가부장주의에 구금되어 있었다.
80년대 초반, 한국 10대 여고생들의 유일한 통로는 순정만화적인 상상력이었다. 어디서 백마를 타고 온 왕자가 자기를 이 지옥에서 구출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것이었다. 캔디, 오르페우스의 창, 황미나의 수많은 만화들과 같은 순정만화적 상상력이 이들 10대들의 상상력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음악적 언어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사랑의 문법인 발라드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이 10대 한국의 하이틴 여고생 세대는 한국역사상 최초로 밀리언셀러의 역사를 열어간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조용필이다. 그리고 80년대 중반에 또 다른 발라드 밀리언 셀러가 나오는데 이문세였다. 그리고 80년대 말에 세 번째 밀리언 셀러가 나온다. 변진섭이었다. 지금은 우습게 보지만, 변진섭은 한국에서 깨어지지 않는 기록을 가진 사람이다. 데뷔 앨범과 2번째 앨범이 연속으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최초의 가수이다.
이들이 80년대 밀리언셀러의 문화를 만들게 되는데, 이 3명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남자라는 것, 발라드 가수라는 것이다. 물론 조용필은 발라드 말고도 록커로서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셋 다 비주얼이 영 아니었다. 이게 제일 중요한 점이다. 조용필이 오빠 소리를 들었을 때, 이미 32살이었다. 오빠가 되기에는 너무 올드한 나이였다. 게다가 키도 작고, 비주얼은 전혀 아니었다. 이문세는 방송으로 친해지긴 했지만, 얼굴을 보면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다. 변진섭은 그나마 제일 어리니깐, 앞의 두 명에 비해 조금 낫지만, 그렇다고 꽃미남이라고 볼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이게 한국 80년대 10대 문화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80년대의 10대 여고생들은 자신의 문화적 수용행위가 결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폭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스타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내가 남자를 밝히는 음란한 여자여서가 아니라, 진짜 노래만을 좋아해서 이 오빠를 좋아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스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빠 사진을 방 벽에 붙여놓았을 때, 엄마가 들어와서 보고, ‘어. 괜찮다. 우리 딸년이 미친 년은 아니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는 스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80년대도 젊은 아이돌 스타가 있었다. 박혜성, 김승진 같은 가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왜냐? 이들을 좋아했다간, 가족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불순하다는 낙인이 찍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벌써부터 잘 생긴 남자나 밝히는 여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순수성을 증명시켜줄 스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발라드 스타의 밀리언 셀링은 80년대 10대 여성 수용자들의 굉장히 외곡된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사실 80년대의 10대들도 잘 생긴 남자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은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30. X세대의 등장
이런 허위의식을 88년 올림픽 이후에 등장한 포스트 88세대가 폐기한다. 나중에 X세대라고 부르게 되는 새로운 10대 세대가 선배 10대 세대의 기만을 폐기한다.
‘그냥 좋으면 좋다고 하자!’
이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을 형성하는 노래가, 바로 변진섭의 2집에 실린 ‘희망사항’이다. 이것이 89년 최고로 많이 팔린 노래가 된다. ‘희망사항’은 노영심의 데뷰작이었다.
80년대 초반의 조용필의 ‘비련’을 보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른다.
‘기도하는 사랑의 손길로 떨리는 그대를 안고
포옹하는 가슴과 가슴이 전하는 사랑의 손길‘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돌고 도는 계절의 바람속에서 이별하는 시련의 돌을 던지네
아 눈물은 두 뺨에 흐르고 그대의 입술을 깨무네
용서하오 밀리는 파도를 물새에게 물어보리라 물어보리라
몰아치는 비바람을 철새에게 물어보리라‘
이게 말이 되는가? 전체적으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구체적으로 보면 말이 하나도 안된다. 왜 밀리는 파도를 용서해달라는 건지? 그걸 또 왜 물새한테 물어봐야 하는지? 하나도 말이 안된다. 그래도 제목이 비련이니깐, 왠지 슬픈 거 같다. 사랑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관념적이다. 굉장히 허위의식적이다.
‘얼굴이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예뻐야 정말 여자지.’ 이 가사가 수십년동안 한국을 지배해왔던 여자에 대한 희망 사항이었다. 아마도 속 마음은 보이지도 않는 마음보다, 얼굴이 예쁜 여자를 모두 좋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허위적인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희망사항’이라는 노래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제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그리고 김치 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희망사항이 된다. 바라는 게 굉장히 구체적이다. 그리고 비주얼적이다. 눈에 보여야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운문의 시대에서 산문의 시대로 넘어온다. 그리고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메시지의 시대에서 이미지의 시대로 넘어온다. 그리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가득한 가사들은 사라진다. 구체적인 일상 속으로 간다.
이들 포스트 88세대가 랩을 수용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짦은 운문의 시적인 표현으로는 자신의 복잡다단하고 다양한 욕망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드디어 산문의 시대가 펼쳐진다.
이렇게 해서 포스트 88세대, 다시 말해서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컬러TV를 보고 자란 새로운 세대에 의한 한국대중 문화의 주류는 K-Pop 한류라는 새로운 웨이브를 만들어내게 된다.
한국의 세대혁명은 미국과 근원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이런 독자적인 경로를 가지고 진행되었다. 굉장히 정치적이며,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수많은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리는 이런 바탕 위에서 21세기 문화의 질서와 규범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엔 제 시간에 끝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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