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병란은 이미 경고되고 있다
1918년 인류를 휩쓴 스페인독감은 단순한 계절성 독감이 아니었다. 조류 기원의 유전자를 지닌 새로운 H1N1 바이러스가 세계로 퍼졌고, 평소 건강하던 젊은 사람들까지 심각한 폐렴과 합병증으로 쓰러졌다. 당시 사람과 돼지에게서 서로 가까운 H1N1 바이러스가 확인되면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로부터 약 90년이 지난 2009년, 이전에 확인되지 않았던 유전자 조합을 지닌 신종 H1N1 바이러스가 다시 출현했다. 스페인독감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짧은 시간 안에 세계적 대유행으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주었다. 당시 사람에게서 유행하던 바이러스가 돼지에게 전파된 뒤 기존 돼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와 유전자를 교환한 사례도 확인되었다. 그리고 2019년 말, 코로나19가 출현했다. 몇 달도 지나지 않아 감염병은 세계인의 이동을 멈추게 했고, 병원과 학교, 직장과 시장, 국가의 경제와 일상을 뒤흔들었다. 현대 의학이 크게 발전했어도 새로운 병원체가 출현하면 인간 사회 전체가 순식간에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지나갔다고 해서 감염병의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2026년 현재도 엠폭스는 여러 나라에서 계속 발생하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가금류와 야생조류, 포유류 사이에서 순환하며 간헐적으로 사람을 감염시키고 있다. 백신으로 예방할 수 있는 홍역도 예방접종의 빈틈을 타고 여러 지역에서 다시 확산하고 있다. 감염병의 불씨는 꺼진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형태를 바꾸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아직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지지 않은 병원체가 미래에 심각한 국제적 유행을 일으킬 가능성을 ‘질병 X’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질병 X는 특정한 바이러스의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병원체가 다음 대유행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바이러스는 증식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한다. 사람과 동물 사이를 오가며 유전적 변화를 일으키고, 일부는 기존 면역을 피하거나 치료제의 효과를 떨어뜨릴 수 있다. 인류가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해도 병원체의 모든 변화와 출현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앞으로의 안전을 저절로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현대사회 자체가 감염병의 확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도시와 국가는 항공망으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지역에서 시작된 감염병이 국경을 넘어 세계로 퍼지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기후변화와 산림 파괴, 인간과 야생동물의 접촉 확대도 새로운 감염병이 출현할 가능성을 높인다.
다음 대유행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병원체로 시작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음 감염병이 코로나19보다 약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더 빠르게 퍼지고, 더 심각한 증상을 일으키며, 기존의 백신과 치료법으로는 즉시 대응하기 어려운 병원체가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질병대란은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고 찾아오지 않는다. 거센 파도가 닥친 뒤에는 개인의 꿈과 계획, 가족의 평범한 일상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의료체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환자가 폭증하면 치료제가 있어도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분명한 각성이다. 새로운 감염병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고,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며, 개인과 가정이 기본적인 대비책을 갖추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도 의료체계와 감염병 감시망, 백신과 치료제 개발 능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다가올 병란은 먼 나라의 이야기도, 미래 세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바로 나와 내 가족, 이웃과 공동체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다.
대유행은 끝난 것이 아니다. 스페인독감과 신종플루, 코로나19는 모두 더 큰 위기에 대비하라는 경고였다. 질병이 닥친 뒤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닥치기 전에 깨닫고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