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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0일 한길교회(http://cafe.daum.net/hgpch) 주일오전예배>
(마가복음 강해 84)
온 창조세계에 미치는 복음 (마가복음 16장 15-16절)
Ⅰ.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할 복음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제한속죄에 대하여
우리교회가 믿는 신학을 가리켜서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 혹은 ‘칼빈주의’(Calvinism Theology) 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라는 말은 단어 자체에서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용상 가장 성경에 충실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칼빈주의)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가장 충실할 바 아니라 역사적으로 건전한 교회가 계속해서 이어온 신학적 입장입니다. 우리교회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에 철저하고자 하여 설립한 교회입니다.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이 무엇이냐? 라고 물을 때에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고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데요, 그 중에서 특별히 구원에 관한 교리에 있어서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칼빈주의 신학이 따르는 구원에 관한 교리를 요약한 것을 칼빈주의 5대 교리(Five Points of Calvinism) 라고 부르는데요, 우리교회가 고백하는 신조인 ‘도르트 신조’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5가지 교리는,
1. 인간의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2.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4.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논란이 많으면서도 오늘 설교 주제와 관련해서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입니다.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라는 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할 의도로 죽으셨던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확실히,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신의 속죄 사역의 혜택을 실제로 누리게 될 사람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죄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구원을 얻지만, 어떤 사람은 믿지 않아 정죄를 받게 됩니다. 이 사실이 오늘 본문 16절에도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를 믿습니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굳이 ‘제한 속죄’를 믿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제한 속죄를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한속죄로 인해 편협해 지는 경우가 있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이런 ‘제한 속죄’라는 개혁주의 구원론을 따를 때에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편협해 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대상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하니 복음 자체마저도 좁혀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마저도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이 믿는 자들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는 복음을 전하는 대상을 우리 스스로 제한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하니, 우리가 스스로 누가 선택되었는지를 나름대로 판단하고 그래서 그러한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이 그런 경향을 띨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개혁주의(칼빈주의) 구원론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편협함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5절의 가르침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마가복음 16:15을 보십시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분명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구원하기 위해 죽은 사람들을 찾아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말 그대로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온 천하의 만민’이 복음 전파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16절에서는 어떤 사람은 믿게 되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으나 분명 예수님은 복음 전파의 결과와 상관없이 “온 천하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한속죄는 복음의 충분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님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할 정도로 충분합니다. 복음 그 자체가 사람의 구원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갖고 있는 능력 자체가 제한적인 것은 아닙니다. 복음이 어떤 사람은 구원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온 세상의 죄를 구원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합니다.
도르트 신조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우리교회가 믿는 ‘도르트 신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도르트 신조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칼빈주의 5대 교리’(Five Points of Calvinism)를 정리해 놓은 신앙고백입니다. 도르트 신조를 한 번 보십시다.
도르트 신조 CANONS OF DORT 둘째교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이를 통한 인간의 구속
3항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
하나님의 아들의 이 죽으심은 죄에 대한 유일하며 지극히 완전한 희생제사이자 만족이며 그 값을 헤아릴 수 없이 귀하여,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하다.
5항 복음의 보편적 선포
더욱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더불어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에게,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하신 기쁘심을 따라 복음을 보내시는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차별 없이 전파되고 선포되어야 한다.
6항 어떤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
하지만 복음으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 중 많은 이가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 믿지 않음 가운데 멸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희생제사에 흠이 있거나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며,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이다.
셋째 넷째 교리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께로 회심과 그 회심이 일어나는 방식
9항 부르심 받은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나오지 않는 이유
복음 사역을 통해 부르심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회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복음이나, 복음이 제안하는 그리스도나, 사람들을 복음으로 부르시고 다양한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그 사람들에게 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 중 어떤 이들은, 자신의 위험은 생각하지 않고, 생명의 말씀을 거부한다. 어떤 이들은 비록 생명의 말씀을 받되, 그 말씀이 마음에 지속적으로 심기지 못하게 하기에, 오직 일시적 믿음에서 나오는 그들의 기쁨은 곧 사라지고 그들은 배반한다. 어떤 이들은 세상의 염려와 즐거움의 가시떨기가 그 씨앗의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우리 구원자께서 씨 뿌리는 비유로 가르치신다(마 13장).
도르트 신조에 암시된 복음의 충분성
도르트 신조의 둘째 교리는 앞서 말씀드린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는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둘째교리는 이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본격적인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앞부분에 해당하는 제3항에서 먼저 이런 단서를 붙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은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하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설명함에 앞서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하다고 표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제한속죄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5항도 동일한 내용을 말합니다. “복음의 약속은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차별 없이 전파되고 선포되어야 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제3항과 제5항의 가르침은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6:15이 말하는 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제6항에서는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가복음 16:16의 가르침을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언급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믿지 않을 때에 그 책임은 복음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믿지 않는 그 사람의 책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를 다루고 있는 도르트 신조는 복음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대상을 축소시키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함을 고백하고 있고, 복음은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차별없이 전파되고 선포되어야 할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도르트 총회 당시 칼빈주의 신학과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이 비판한 내용은 “칼빈주의자 당신들은 복음을 모든 이에게 전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이 믿는 제한 속죄 교리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선배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이 비판한 내용과 달랐습니다. 칼빈주의자가 제한 속죄 교리를 믿는다고 해서 복음이 제한적으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믿은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복음은 모두에게 증거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마가복음 16:15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온 천하의 만민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복음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은 복음을 폭넓게 전파하였고,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복음의 능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 16절의 가르침을 따라 제한 속죄를 믿습니다. 16절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구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으나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 때 어떤 사람이 믿지 않음은 복음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5절의 가르침을 따라 온 천하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제한속죄’라는 표현 때문에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듯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마십시오. 복음은 세상의 모든 죄를 속하기에 충분한 무한함이 있습니다. 죄인 중 괴수라도 구원할 만큼 충분한 것이 복음입니다.
칼빈주의는 편협하고 속좁은 신학이 아닙니다. 칼빈주의는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신학입니다. 칼빈주의는 마가복음 16:16의 가르침을 따라 제한 속죄를 믿으며, 또한 동시에 마가복음 16:15의 가르침을 따라 복음의 충분성을 믿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모든 죄인에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자격에 있어서는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남녀노소, 흑인황인백인, 빈부귀천, 살인자에서부터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까지 모든 죄인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전파의 사명이 교회에 있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중요한 목적은 바로 복음 전파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랜 역사 동안 복음 증거에 힘써왔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까지 이 땅에 복음이 증거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는 무엇보다도 영혼 구원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역사상 존재해 온 교회는 영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부단하게 애를 써 왔습니다. 지옥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영혼, 참된 생명 없이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는 영혼을 향한 간절함을 가지고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 온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 혹은 칼빈주의 신학을 따르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혁교회의 존재 이유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은 제한적이지만, 우리 교회에서 복음을 듣는 일에는 그 어떤 사람도 제한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와서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Ⅱ. 온 창조세계에 미치는 복음
온 창조세계에 미치는 복음
여기에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요, 여러분들께서 갖고 계신 성경에서 마가복음 16:15에 나오는 “만민”이라는 단어 앞에 있는 난외주 2번을 보십시오.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헬, 온 창조세계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 상으로 “만민”이라고 번역된 말이 “온 창조세계에”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에도 보면 이 ‘만민’이라고 된 부분에 대해서 “to all creation”이라고 해서 “모든 피조물에게”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고 마가복음 16:15을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여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은 1차적으로 복음의 영향력이 단순히 사람에게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미치는 복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죄에서 구원얻는 복음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온 창조세계에 미치는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19-23이 말하는 피조물의 탄식
이 사실은 로마서 8:19-23의 말씀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19절에 보면 “피조물이 고대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고대합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은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전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날 그 영광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피조물이 그것을 고대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첫 사람의 타락이 모든 피조물에게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물들도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고대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3:18을 보시면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사람과 함께 모든 피조물이 타락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죄의 비참함은 사람에게만 미친 것이 아닙니다. 온 창조세계에게도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 죄의 비참함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죄의 영향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cf. 창 3:18). 피조물들도 인간과 동일하게 죄로 인하여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니,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시는 그 때에 모든 피조물들도 역시 구원에 이를 것이기에 피조물들이 그 날을 고대하면서 기다리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능력은 사람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만물까지도 변화시킵니다(cf. 골 1:20). 복음은 온 세상의 회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복음은 온 창조세계에 미치는 능력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15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암시됨
이미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이와 관련된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11:6-9를 찾아봅시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독사와 사람이 함께 장난을 치고 그 어떤 것의 해됨도 없는 세상이 바로 복음을 통해서 성취되게 되고,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교회를 통해서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모든 피조물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복음의 광범위한 능력
그러므로 여러분~! 복음이란 단순히 사람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온 세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것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고 하는 것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넓은 개념을 담고 있음을 말합니다. 복음이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모든 것들의 회복”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은 온 인류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상태에서 완전히 왜곡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은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신 것과 다릅니다. 죄와 타락은 1차적으로 인간에게 미쳤지만 보다 넓게는 모든 피조세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피조물까지도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은 기본적으로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된 사람에 대한 것이지만, 더 나아가 죄로 인하여 왜곡된 이 세상에 대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전우주적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교회가 물려받은 사명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교회의 기초가 될 제자들에게 복음을 온 창조세계에 증거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명을 교회가 물려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영혼구원이 아니라 온 세상을 회복하시는 복음의 큰 능력을 증거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게 맡겨진 복음은 온 세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구속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의 복음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복음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이 세상은 여전히 어둠과 고통 속에 파 묻혀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여 선포되는 복음의 능력은 온 창조세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온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복음 밖에는 없습니다.
피조물의 탄식을 그치게 할 복음
이제 이 피조세계의 탄식이 그쳐야 합니다. 피조물에 미친 죄악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온 창조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하심으로서 온 세상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복음 밖에는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감당해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가 다 일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온 세상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성취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난 번에 보았던 마가복음 16:17-18에 나오는 표적을 허락하신 것은 어쩌면 복음이 온 피조물을 향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온 피조세계의 타락을 회복시킬 복음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의 영적인 부분을 지배하려고 하는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뱀도 감히 사람을 해하지 못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독을 마셔도 해를 받지 못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육체를 방해하는 병의 역사가 해결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
교회는 바로 이러한 복음을 위해서 부름받았습니다. 단순히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온 창조세계에까지 미치는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그러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교회는 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참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영혼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게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개혁주의자들은 편협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런 잘못된 개혁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개혁주의는 절대로 편협하지 않습니다. 개혁주의만큼 복음의 능력을 믿는 신학이 없습니다. 개혁주의만큼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신학이 없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바 복음은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것입니다(도르트 신조 둘째교리 제3항).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바 복음은 온 창조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 복음을 저와 여러분이 믿습니다. 우리 한길교회가 믿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복음을 위하여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일의 1차적인 완성으로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니 온 천지 만물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일의 궁극적인 완성으로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니, 그 때에는 복음이 온 세상을 완전히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복음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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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설교는 마가복음 강해 중에 행한 것인데, 특별히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제한 속죄'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곳에 올려둡니다.
위 설교는 특히 우리교회가 고백하는 '도르트 신경'(http://cafe.daum.net/hgpch/L8PY/41)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기에 여기에 올려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