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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종말의 계시 종말론 심층연구 6장 (6) 계시의 총론. 계6:1-17
1. 흰 말의 등장과 활동(1절~2절)
2. 붉은 말의 등장과 활동(3절~4절)
3. 검은 말의 등장과 활동(5절~6절)
4. 청황색 말의 등장과 활동(7절~8절)
5. 순교자들의 등장과 간구(9절~11절)
6. 인류의 마지막 심판(12절~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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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계시의 총론
6장의 개요 = 우리는 5장에서 어린양 되신 주님께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를 인수 받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았다. 이 두루마리에는 종말에 관한 모든 비밀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으며 심판주로 등장하신 어린양이 그 인을 하나씩 떼는 일로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모든 비밀이 그 말씀대로 성취된다.
그런데 6장에서는 그 일곱 인을 떼는 것으로 나타나는 사건의 총론적인 계시를 보여 준다. 8장에서부터 인의 개봉에서 나타난 계시를 다시 나팔로 재전개시켜 나가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인과 나팔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종말적 계시지만, 인은 이 계시를 총론적으로 간략하게 다루었고, 나팔은 전체 내용을 7년 환난의 측면에서 서술적으로 다루었다는 면에서 다르다. 그러므로 계시록 6장은 요한계시록의 총론이 되는 장이다. 요한계시록에 수록된 전체 계시는 6장에서 개봉되는 일곱 인에 나타난 사건 해석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여섯째 인’의 개봉으로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종말적인 모든 사건은 완전히 끝맺게 되며 ‘일곱째 인’의 개봉으로, 여섯째 인까지의 계시를 일곱 나팔사건으로 다시 전개 시켜 나가는 것이다.
6장부터 ‘장차 될 일’의 시작이기 때문에 우리는 6장의 해석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6장 서두에 나오는 ‘네 말’은 어려운 난해 계시이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1. 흰 말의 등장과 활동(1절~2절)
6:1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일곱 인의 언급은 6장에만 나온다. 일곱 인은 실인즉 여섯째 인까지의 사건을 말하며, 일곱째 인은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를 일곱 나팔로 새롭게 출발하는 신호로 작용한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봉인된 책을 취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인을 떼기 시작하신다. 순서상 첫째 인을 떼시게 된다.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 소리같이 말하되.” 6장에서는 하나님 보좌 가까이서 하나님과 함께 활동하는 이 네 생물들의 활동상에 대하여 언급해 준다. 마지막 심판에서 담당한 그들의 역할이 대단히 놀랍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7년 환난을 집행하고, 심판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며 그 뜻을 이루는 위치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양이 인을 떼는 그 자리에서, 인을 떼시면 즉시 인에 나타난 계시를 집행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드디어 인을 떼시는 그 때에 요한은 네 생물 중에 하나가 계시의 무대 위에 흰 말을 부르는 우렛소리 같은 음성을 듣게 되었다.
6:2 “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6장에는 네 말이 등장한다. 이 네 말은 종말에 인류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활동할 실세들이다. 이 네 말에 대한 해석은 요한계시록 해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선입견이나 편견에 사로잡힘이 없이 올바른 성경적 해석을 내려야 한다.
(1) 먼저 우리는 흰 말에 대한 학계의 견해를 보도록 한다.
㉮ 흰 말을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같은 견해는 개혁주의 신학의 일반적인 학설로 1900년도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에서 수용해 온 견해다. 그런데 흰 말을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로 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복음 운동,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싸우시는 종말적인 복음적 사역으로 해석한다.
㉯ 흰 말을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는 일반적으로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절대시하는 견해다. 그러면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왜 이 흰 말을 적그리스도로 단정 짓고 있는 것인가? 그 이유를 보면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7년 대 환난에 들어간 후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적그리스도로 본다. 적그리스도가 7년간 인간 사회를 지배하면서 짐승의 표를 주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진행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이미 교회가 휴거된 이후이다. 그들이 흰 말을 그리스도나 복음 운동으로 연결시킬 수 없는 이유가 7년 대환난 기간에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며, 더욱이 그리스도가 등장하여 복음을 전한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로 단정 짓는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영향을 받아 이 흰 말을 적그리스도로 규정 짓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여러 가지 증거를 열거한다.
첫째로, 쓴 면류관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면류관은 ‘디아데마타’로, 왕관으로 나와 있는데(계19:12) 흰 말을 탄자의 면류관은 승리의 화관을 의미하는 ‘스테파노스’로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면류관은 많은 면류관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흰 말을 탄자가 쓴 면류관은 단수인 하나로 나와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흰 말을 탄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는 “충신과 진실”이라는 이름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 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의 경우는 “피 뿌린 옷을 입었다”(계19:13)고 말한다. 그러나 흰 말 탄자는 아무 옷도 입지 않고 있다고 한다.
다음에 흰 말은 네 생물 중 하나에 의해 명을 받아 나왔는데 예수님은 창조주가 되시며 지금 인을 떼시고 계속해서 인을 떼실 것이기 때문에 흰 말을 그리스도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흰 말이 그리스도가 아닌 증거는 계6:8절에 나오는 사건으로 증명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고 했는데 이것을 역순으로 해석하면 네 말의 순서가 되며 아울러 땅의 짐승으로 등장한 자가 적그리스도로 이 자가 흰 말이라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구실로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횐 말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란 사실을 강변한다.
그런데 이들(흰 말을 적그리스도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의 해석에 있어서 스스로 결정적인 함정에 빠져 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이들이 흰 말 탄 자의 정체에 대하여 ‘그리스도냐? 아니면 적그리스도냐?’ 하는 흑백론을 가지고 횐 말 탄 자가 결코 그리스도가 아니란 점만을 강조하려는 데서 억지 해석이 나오게 되었으며 그 결과 흰 말 탄자가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로 둔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의 흰 말 탄자의 해석이 바로 의도적으로 그 같은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흰 말은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라는 극단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식의 성경 해석은 수사관들이 복잡한 사건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사건을 짜깁기로 그럴듯하게 조작하는 형식의 위험한 발상에서 나온 해석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 이 흰 말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전에 먼저이 흰 말이 그리스도가 아니란 사실부터 밝히려고 한다.
흰 말이 그리스도가 아닌 증거는 그의 면류관에서 보여 준다. 성경에 나오는 면류관이 한 가지 뜻을 나타내는 하나의 면류관이 아니란 사실부터 알아야 한다. 주님이 쓰시는 면류관은 왕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천년왕국에서도 왕으로 계시며, 하늘에서도 우리의 영원한 왕으로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이 쓰는 관은 ‘디아데마타’이다(계19:12). 계6장에서 흰 말을 탄 자 가 쓴 면류관은 왕관이 아니라 ‘스테파노스’란 면류관이다. 이 면류관은 왕관으로서의 면류관이 아니라,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한 성도들이 쓰는 상급의 면류관으로 나와 있다 이 부문에 대해서는 흰 말을 탄 자의 정체를 밝히는 부분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다음에 흰 말이 그리스도가 아닌 이유는 예수님은 친히 복음을 전하시는 위치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성령의 권능’을 받은 그의 제자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행 1:8). 그리고 예수님은 심판권자로 지금 7인을 떼시는 중에 계시는데 둘째 인도 떼시기 전에 친히 흰 말을 타시고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여 복음을 전파하실 수는 없을 것이란 견해도 설득력이 있다.
또한 이 흰 말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도 볼 수 없는 이유는 주님의 재림은 여섯째 인을 떼실 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여섯째 인은 일곱 대접 심판에 속한 재앙으로, 7년 환난 마지막 시기에 있을 사건에 속한다.
㉱ 흰 말 탄 자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란 사실을 증거 하려고 한다.
첫째로 흰 말 탄자가 쓴 면류관에서 알 수 있다. 흰 말을 적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왕관에 대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디아데마타’와 ‘스테파노스’를 혼돈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왕관인 ‘디아데마타’를 쓰셔야 한다. 그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면 성경에서 적그리스도가 쓰는 면류관이 무엇으로 나와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들은 ‘스테파노스’란 면류관이 적그리스도가 쓰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성경에 적그리스도가 ‘스테파노스’를 썼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기절초풍 할 일이겠지만 사실인즉 적그리스도가 쓴 면류관이야말로 ‘스테파노스’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동일한 왕관을 의미하는 ‘디아데마타’란 사실임을 알아야 한다(계12:3;13:1). 그러므로 흰 말 탄자가 쓴 면류관이 ‘디아데마타’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란 주장은 흰 말이 그들의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적그리스도일 수가 없다는 자가당착이 된다. 그러면 왜 적그리스도의 머리에 쓰는 면류관을 왕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적그리스도가 인류의 종말에 가서 실제적으로 왕권을 가지고 인류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계13:5).
흰 말이 적그리스도의 위장이 아니란 것은 위장이 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 흰 말의 이기고 이기려는 싸움은 적그리스도의 승리를 의미해 주는 표현이 아니다. “이기고 또 이기려”는 싸움은 계속적인 승리를 의미해 주고 있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말씀이 새 번역 성경에서는 “이기면서 나아갔고또 이기려고 나아갔습니다”로 나와 있다.
그뿐 아니라 계6:8절에 나오는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인다”는 말을 역逆으로 해석하여 ‘땅의 짐승’을 흰 말로 보는 견해는 어불성설이다. 이곳에서 언급해 주고 있는 계시는 청황색 말의 등장으로 인한 피해를 말해 주고 있는 것으로, 네 말의 활동을 동시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2) 그러면 흰 말은 무엇을 상징해 주는 계시인가? 본문에 나온 말씀 을 중심으로 밝혀 보도록 한다.
㉮ 먼저 ‘흰 말’의 정체를 찾아보도록 한다. 요한계시록에는 ‘흰 말’이란 낱말이 세 번 나오고 있다.
계6:2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고······.”
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
계19: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흰 말은 결코 예수님만이 타시는 말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예수님이 아닌데도 흰 말을 타고 있다. 성경에서 짝을 맞추기 위해 맥을 찾으려면 광범위하게 그 해석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그러면 백마를 타고 주님과 함께 하늘 군대로 내려오는 이들 백마 탄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천사들이 아니다. 천사들은 종말적인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영적 피조물들인 천사들은 아마겟돈에서 육체를 가진 적그리스도나 그의 군사들과 싸울 대상자들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백마를 타고 오실 것이며 하늘 군대 역시 예수님과 동일한 몸으로 아마겟돈에 내려 올 것이다.
이들이 아마겟돈에서 적그리스도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는 모습이 계17:14절에 약간 비추고 있다.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들이란 대상은 그 이전에 나오는 것처럼, 열 뿔로 열 왕과 그들의 지배자로 나오는 적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들이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는 일은 계19:11-21절까지 나오는 아마겟돈 전쟁을 의미한다. 이 전쟁에서 이들과 대항해 싸울 일에 대하여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란 그 말미에서 설명해 주기를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그 대상이 천사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 선발된 하나님의 종들임을 의미한다. 이들의 자격과 비슷한 자격자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는 말씀의 대상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땅에서 속량함을 얻은 14만 4천명”의 “우리 하나님의 종들”임을 알 수 있다(계14:4,5;7:3). 이들의 자격과, 하늘 군대로 주님과 함께 아마겟돈에 내려오는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과는 한 맥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해석은 7장과 19장에 가서 거론하기로 한다).
㉯ 6장에 나오는 네 말은 7년 환난 중에 등장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성취할 존재들이다. 이 네 말은 슥1장과 6장에 나오는 네 말과 얼핏 보기에 비슷한 것 같으나 전혀 다르다. 슥1:8-10절 이하에 나오는 네 말은 10절에서 설명해 주기를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땅의 사정을 살피도록 보낸 여호와의 사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계 6장에 나오는 네 말은 7년 환난 중에 나타나 하나님의 뜻을 이룰 세력들로 나오고 있다. 말의 색깔이 같고 수가 같다고 모두 같은 사명을 띠고 등장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전후좌우의 문맥을 살펴보고 그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네 말은 제각기 맡은 사명과 등장할 시기가 주어져 있다. 첫째 인을 떼실 때 등장하는 흰 말을 제외하고는 모두 재앙을 상징하는 색깔의 말로 나오고 있다. 붉은 말은 전쟁으로, 검은 말은 기근으로, 청황색 말은 사망으로 나오는데 흰 말이 이들 세 말 보다 먼저 나오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 재앙이 임할 때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사전에 경종해 주셨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암3:7), 이 땅위에 전대미문의 놀라운 재앙과 심판이 임할 때, 우리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로 그 가운데서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 먼저 선지자를 보내시어 회개 운동부터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같은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홍수 심판시 노아가 전한 회개 운동,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 받을 때 전한 롯의 회개 운동,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 성에 보내시어 회개케 하신 일, 종말에 멸망받지 말고 바벨론에서 나오라고 외쳐 대는 회개의 소리 등이 그것이다(계18:4-6). 영적 흑암 중에 교회에 나타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부르짖는 한 밤중의 소리 등은 심판 중에 멸망 받지 않고 구원해 주시려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시다(마25:1-13,벧후3:8).
종말에는 역사 이래 없었던 무서운 전쟁과 고통과 재앙과 환난의 시기가 온다. 이 시기에는 이 같은 대 환난에서 건지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뒤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아무런 예고도 주시지 않고 이 땅에 심판을 내리신다면 7년 환난 중에서 건짐을 받을 자 몇 명이나 되며 최종적으로 구원 얻을 하나님의 백성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7년 환난에 들어가면서부터 하나님께서 선발하신 종들로 1260일간 ‘두 증인’의 사역으로 ‘영원한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두 증인의 예언의 사명을 다 이루시기까지 기다리셨다가 회개한 그의 백성들로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흰 옷 입은 큰 무리가 되어 나온 이후에 재앙과 죽음의 사자들인 붉은 말과 검은 말과 청황색 말의 본격적인 활동을 허락하시는 것이다(계14:6-7;11:1-6). 그러므로 첫째 인을 떼실 때에 등장하는 흰 말은 계11장의 두 증인의 사역을 보여 주시는 계시가 되며, 횐 말을 타고 면류관을 쓰고 이기고 또 이기려는 싸움을 전개하는 자는 바로 ‘두 증인’이 된다.
㉰ 흰 말 탄 자가 쓰고 있는 면류관을 볼 때, 흰 말 탄 자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적그리스도도 아니며 주를 위해 죽도록 충성한 하나님의 종들임을 알 수 있다. 흰 말 탄자가 쓴 면류관은 ‘스테파노스’이다. 이 면류관은 요한계시록에서 그리스도나 적그리스도가 쓰고 있는 왕관이 아니다. 성경에서 이 면류관은 반드시 충성하는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다(딤후4:8,약1:12,벧전5:4,계2:10,12:2).
(3) 계6장에 나오는 흰 말 탄 자의 정체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인에 나오는 흰 말은 대 환난이 임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 환난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복음의 추수 운동이다. 이 같은회개의 사역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종들은 종말에 사도 요한에게 받아먹으라고 명한 펴 놓인 책을 받아 먹고 “다시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아 계11장의 예언의 사역을 이루게 되는데(1260일간), 흰 말의 “이기고 또 이기려는 싸움”이 바로 두 증인의 다시 예언하는 모습이다(계11:1-12).
㉯ 이들이 받은 면류관이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들에게 상급으로 약속된 ‘스테파노스’로 나와 있는 것은 이들이 “이기고 또 이기려는 싸움”에서 죽도록 충성함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계11:11-12).
2. 붉은 말의 등장과 활동(3절~4절)
6: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대 환난 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한 예언의 사역을 “첫째 인”으로 다 이루시고 이제 둘째 인을 떼실 차례가 된 것이다. 이 둘째 인은 두렵고 무자비한 전쟁에 관한 계시이다. 이 둘째 인에 나오는 사건은 7년 환난 중, 후반부인 후 3년 반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다.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그의 백성들을 회개케 하여 하나님의 예비처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땅위에 정말로 놀라운 심판의 역사를 이루는데 그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 붉은 말이다.
이제 이 세상에는, 고센 땅으로 비유할 수 있는 예비처로 옮겨진 교회는 사라져 버렸고, 이 세계의 왕으로 통치할 적그리스도와 그의 부하들, 세상의 모든 불신자들, 진리를 떠나고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음녀 교회들, 그리고 전 3년 반의 회개 기간에 회개치 못하고 예비처로 옮겨지지 못한 “여자의 남은 자손”인 ‘미련한 처녀’들만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심판의 역사가 나타나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6: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다른 말이란 흰 말이 아닌 다른 말, 곧 붉은 말을 의미한다. 첫째 인의 사역을 마친 후 이번에는 다른 말이 나오게 되는데 주님이 그 인을 떼실 때에 네 생물 중 하나인 둘째 생물의 명령에 의해, 인류 역사의 무대 위에 다른 말로서의 “붉은 말”이 등장하게 된다.
(1) 이 붉은 말의 모습과 그 하는 일이 몇 가지로 나타나 있다. 첫째로 그 탄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린다고 했다. 화평을 제하는 일은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역사상 존재했던 그런 지역적인 전쟁이거나 전면전이 아니다. 온 세상을 불도가니로 집어넣는 인류 파멸의 전쟁이다. 이 같은 전쟁은 핵전쟁이 될 것인데 이 전쟁은 유브라데 지역에서 일어나는 핵전쟁이며, 이 전쟁으로 죽는 인명은 무려 인류의 ⅓에 이른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9:13-18). 이 전쟁으로 “서로 죽이게”하는 이같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이 붉은 말이 하는 일이란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는 일”이며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이 자는 손에 큰 칼을 가지고 있다. 이 큰 칼은 이 전쟁의 규모나 그 결과의 두려움을 의미한다.
(2) 붉은 말은 어떤 개인이나 어느 한 국가를 가리키지 않는다. 종말에 유브라데 지역에서 일어날 전쟁은 ‘네 바람’의 충돌로 일어난다. 이 전쟁은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는 명령과 함께 그 년, 월, 일, 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계시되고 있다(계9:14-15). 그러므로 이 전쟁은 온 세계가 피해자가 되며 모든 지역이 전쟁터가 된다. 참가 병력이 2억이 되는 전쟁이기 때문에 세계의 병력이 총동원되는 전쟁이며 이 전쟁을 일으킨 네 바람이 이 붉은 말의 주범이 될 것이다. 이 전쟁은 전 세계를 초토화시킬 것이며 대기근과 전염병을 동반 할 것이다.
3. 검은 말의 등장과 활동(5절~6절)
6:5-6“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 주님께서 셋째 인을 떼실 때, 셋째 생물의 명령과 함께 “검은말”이 등장한다. 이 자의 특색은 그 탄자가 가지고 있는 저울에 있다. 저울은 물건 매매의 필수적 요건으로 경제생활에 필수품이다.
그런데 요한이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한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의 내용이 두 가지로 나와 있다. 하나는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고 하는 음성이요, 다른 하나는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7년 환난 중에 있을 인류의 극심한 기근을 의미한다. ‘한 데나리온’이란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계산된다. 그런데 그것으로 매입할 수 있는 양식은, 겨우 밀로는 한 되, 보리로는 석 되라고 했다. 사람이 이 같은 하루의 임금으로 양식만이 아니라 다른 일상생활의 필수품까지 구입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처지에서는 누구든지 정상적인 생활은 어렵다.
그러면 이 같은 기근이 어떻게 온 것일까? 요한계시록에는 그 원인을 두 가지로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두 증인의 기도에 의해 하늘 문이 닫혀져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혹독한 기근의 시대가 오게 되는 것이다.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오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11:6). 이것은 분명히 엘리야와 같은 역사이다(약5:17-18). 인간의 죄악이 하늘에까지 사무쳐 하나님께서는 가뭄으로 이 세상에 기근을 내리시는 것이다(계18:5).
다른 한 가지 원인은 인간이 이 땅을 스스로 폐허화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브라데 지역에서 일어나는 세계적 전쟁으로 말미암은 전후의 피해로 인한 것이다. 핵전쟁으로 세계가 초토화 상태에 들어갔으며 땅은 저주받은바 되어 무엇을 심어도 생산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기근과 전쟁의 와중에서, 온 인류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전쟁으로 인한 폐허의 바탕에서 새로운 삶의 소망을 줄, 위대한 세계적 지도자를 갈망하게 될 것이다. 이 때 혜성처럼 온 세계의 시선을 끌며 세계무대 위에 등장할 능력 있는, 한 세계적 지도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자가 바로 짐승, 곧 적그리스도이다(계13:1-5).
적그리스도가 짐승의 표(적그리스도의 표)를 받게 하는 일에 식량난을 이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고 했다(계13:16-17).
애굽에 가뭄이 들었을 당시, 애굽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요셉을 찾아 갔을 때 요셉은 그들의 짐승과 전지를 양식과 바꾸는 정책을 썼다. 이 일로 애굽의 모든 돈, 짐승, 전지 등을 거두어 ‘바로’의 소유로 만들어 주었는데, 적그리스도는 이 같은 방법을 모방하여 짐승의 표를 받는 자 외에는 물건의 매매를 금지시키므로 모든 인류는 결과적으로 짐승의 표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창47:19-20). 그러므로 후3년 반에 떨어진 성도들은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서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피나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고 했다. 온 인류가 말할 수 없는 기근 중에 어려움을 당할 때, 이 기근을 이용하여 적그리스도는 통제 정책을 써서 ‘짐승의 표’를 받는 자 외에는 물건의 매매를 금지시키는 법령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이 법령을 위반하여 짐승의 표를 거부하는 자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다(계13:15).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같은 극심한 가뭄 가운데서도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해 주는 것인가?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할 문제인 줄로 안다. 왜냐하면 기근이나 가뭄 시에 감람유나 포도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기름만 먹고 살 수는 없으며 포도주로 배 불릴 수도 없다. 감람유는 구약 시대에 왕의 머리에 이 기름을 부었으며, 성전에 켜 놓는 등잔에도 이 기름을 부어 등불을 켰는데 이것은 성령을 상징한다. 주님의 비유에서도 슬기 있는 처녀들은 등과 기름을 준비했는데 이 기름은 감람유를 말한다(출27:20,마25:3,4,8).
포도주는 순수한 말씀을 상징한다. ‘음행의 포도주’가 변질된 거짓 복음이라면 이곳에 나오는 ‘포도주’는 진리의 복음을 의미해 준다(계17:2). 그러므로 여기서 “감람유와 포도주”란 성령이 임재하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신앙을 단장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졸고 있다가 ‘밤중에 소리’에 정신을 차려 등과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처녀들이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성도들을 의미한다(마25:6-9,계7:13-14). 주님께서 이들을 대 환난에서 건져내심으로 세상에 임하는 기근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언약이시다.
이들에 대하여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이 계시는 신부로서의 준비를 마친 성도들을 후3년 반의 대 환난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예비처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계7:15-17, 12:6).
이처럼 환난 날에 심한 기근이 와서 세상 사람들이 다 양식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짐승의 표’의 피해를 당하는 그 때에도 ‘감람유와 포도주’ 되는 성도들에게는 이 같은 화가 미치게 아니하실 것이란 분명한 약속인 것이다.
4. 청황색 말의 등장과 활동(7절~8절)
6: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가 7년 환난 중에 있을 모든 사건의 전체적인 개요들이다. 이제 그 넷째 인을 떼실 차례가 되었다. 이 때 넷째 생물이 청황색 말을 역사의 무대 위로 불러들인다.
6: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네 말의 정체를 알려면 그 말을 탄자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 도대체 이 넷째 말의 정체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그냥 ‘사망’이라고만 해석한다. 환난 중에 사람이 죽는 사망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자는 그렇지가 않다. 이 자는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세상에 나오지만 이 자의 모습을 나타내는 문맥 속에 이 자의 정체가 나타나 있다.
(1) 이 청황색 말을 탄자의 이름이 사망이라고 했다. 사망이란 말은 음부와 직결되는 말인데 이 자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이름처럼 사망에 들어갈 자이며 많은 사람들을 사망으로 이끌어 갈 자이다.
(2) 그리고 음부가 이 자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했다. 음부란 ‘스올’로, 성경에는 이 단어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죽음의 상태로 보았다(시6:5). 무덤으로도 보았다(창37:35,전9:10). 사후에 그 영혼이 들어가는 곳으로 보았다(시9:17, 86:13). 악인이 사후에 들어가 고통을 당하는 곳으로도 나와 있다(욥10:21-22). 계시는 처음부터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발전적으로 나타났는데 이 음부에 대한 계시도 여러 선지자들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주님께서는 음부는 악인이 고통을 받는 곳임을 말씀하시므로 음부가 단순히 무덤이나 죽음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님을 시사해 주셨다(눅16:23-25). 여기서 이 단어를 정리한다면 음부란 악인들이 죽어서 부활의 날까지 그 영이 머무르며 고통을 당하는 장소라고 정의할 수 있다. 물론 구원 받은 신자들은 그 반대의 위치에 있는 낙원에서 부활의 날까지 영적인 안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계시록에서 사망이란 이름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이처럼 지옥으로 끌고 갈 자가 존재하느냐? 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아마겟돈에 재림하실 때 지상에서 주님을 대적하여 싸운 적그리스도의 운명에 대하여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란 말씀에서 적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들어갈 곳으로 둘째 사망, 곧 “유황불 붙는 못”에 들어가는 것으로 나와 있다(계19:20). 그리고 이 자를 따르던 자들의 운명도 이처럼 나와 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14:9-11).
이 자의 뒤에 음부가 따르는 이유는 이 자는 종말에 나타나 많은 사람들을 이적으로 미혹하여 죽이며(계13:13), 칼의 권세로 죽이며(계13:15), 우상을 경배시키는 일로 죽이기 때문이다(계13:15). 그리고 모든 인류에게 그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일로 죽인다(계13:16-18). 그러므로 이 청황색 말을 탄자나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은 이 자와 함께 사망에 들어가게 된다. 이 같은 성경적 근거에 의해 청황색 말이 단순한 죽음을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라 이 자의 정체는 바로 ‘적그리스도’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 써 죽이더라.”여기서 청황색 말 탄 자에 대하여 “그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이라고 말한 대상을, 위에 이미 나온 셋째 인까지의 다른 말까지 포함시킨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다른 세 말은 이미 그들의 사역을 다 마쳤다. 그들에 관하여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그들”이라고 지칭한 대상은 “청황색 말”이다. 그러면 왜 ‘그’라는 단수로 표현하지 않고 “그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한 것일까? 그 이유는 적그리스도는 자기 단독의 힘으로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열 뿔이 그를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이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계17:12).
청황색 말은 땅 4분 1의 권세를 얻었다고 했다. 땅 4분 1의 권세란 땅의 4대 열강 중 하나라는 뜻이다. 종말에 이르면 이 세상은 4등분 된 네 판도로 나뉘게 되며 세계를 지배하려는 4대 열강의 각축전장이 될 것이다. 단7장이나 계9장의 네 바람이 바로 이들 세력이다. 적그리스도는 열 뿔을 거느리고 이 네 바람 중에 하나가 된다. 이처럼 적그리스도는 땅 4분 1의 권세를 가지고 출발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42개월간,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계13:5).
이제 이 자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야 한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는 다니엘서에 더욱 분명하고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1) 이 자는 넷째 짐승이다(단7:7).
(2) 이 자는 열 뿔의 지배자다(단7:7).
(3) 이 자는 열 뿔 중에 새로 돋아난 작은 뿔로, 이 자의 이름은 짐승이며 우리는 이 자를 적그리스도라고도 부른다(단7:8).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고 했다. 사망이란 이름을 가지고 또 음부가 그 뒤를 따르는 이 자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권세로써 많은 사람을 죽이는 자신의 사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자가 가지고 많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끄는 그의 권세란 무엇인가?
(1) 첫째로 “검”이라고 했다. 이 검이란 그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의미한다. 청황색 말에 탄 사망이란 이름의 이 자는 용으로부터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받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13:4). 검은 칼을 말하는데 이 자는 자신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그의 권세로 죽인다고 했다(계13:15).
(2) 둘째로 “흉년”이라고 했다. 이 흉년은 두 증인들의 예언 사역으로 하늘 문이 닫히는 일로 오게 되고, 또한 유브라데에서 일어나는 세계 대전에서 사용된 무기(핵전쟁)로 말미암아 온 세상이 폐허화된 가운데 대환난 기간 중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을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이 흉년을 이용하여 ‘경제 통제 정책’을 사용하여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등 자신의 통치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 흉년은 짐승의 통치 아래서 일어나는 재앙이기 때문에 이처럼 표현하고 있다.
(3) “사망”이라고 했다. 이 사망이란, 사망의 표를 의미하는 말인데 곧 ‘짐승의 표’를 가리킨다. 이 표를 받지 않으면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을 수 없으며 이 표를 받는 일은 곧 사망에 이르는 길이 된다.
(4) “땅의 짐승”이라고 했다. 땅의 짐승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표현이 아니며 그렇다고 동물원에 있는 짐승 같은 실제적인 짐승을 가리킨 것도 아니다. “땅의 짐승”은 거짓 선지자를 의미한다. 종말에는 사탄의 대리인으로 두 명의 하수인이 등장하는데 그 하나가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으로 적그리스도를 의미하고, 다음에 그 자를 도와주고 그 자에게 신적인 경배를 강요하기 위해 등장한 인물이 있는데 이 자가 “땅에서올라온 짐승”이라고 부르는 거짓 선지자이다(계13:11, 19:20). 거짓 선지자는 그 머리에 두 뿔이 있는 것처럼 사탄과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받아 짐승의 표를 거절하는 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이 거짓 선지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에 이 자에 대하여 짐승들이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
5. 순교자들의 등장과 간구(9절~11절)
6:9“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다섯째 인과 여섯째 인의 역사는 생물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생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요한이 계시의 장소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순교자들이 하나님 보좌의 제단 아래에서 큰 소리로 자신들의 피값의 신원을 위해 간구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1) 이들의 신분이 순교자란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지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증거란 예수의 속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하심의 증거이며 이 증거는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한 중생의 증거가 된다. 순교에는 세 가지 조건이 따라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따라야 하고,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하며, 셋째로 이 같은 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2) 이들 순교자들의 영혼은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다. 그들은 첫째 부활자로서의 영광으로 살아나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기 까지는 천국에서 영적인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제단 아래에서 간구하는 모습이 나온다.
6:10-11“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이들 순교자들의 간구는 그들의 피값에 대한 신원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일을 언제까지 미루시겠느냐? 는 내용이다.
(1)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적그리스도의 무리들과 이에 동조하는 음녀 교회에 속한 무리들과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황충이 떼들의 무리들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처럼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호소하고 있는 것은 “우리 피 값을 갚아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바로 이 같은 순교성도들의 피값에 대한 갚음의 의미도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계16:6).
(2) 이 같은 순교 성도의 호소의 시기는 아마도 전3년 반 종반에 이르러 황충이 떼들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가 큰 고난을 당하고 있을 그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저희 동무 종들”로 나올, 환난 중 순교 성도들의 순교가 곧 있을 그런 시기가 되기 때문이다(계11:7).
(3) 하나님은 이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잠시 쉬라”는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흰 두루마기는 순교 성도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상급의 표시가 되며 그들이 잠시 쉬어야 할 것은 아직 심판의 시기가 이르지 아니했음을 의미한다.
(4) 하나님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들이 잠시 동안 쉬어야 할 일에 대하여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는 말씀을 들려 주셨다.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말씀을 보면 순교하는 방법은 같지만 순교자의 부류는 둘로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에서 호소하는 이들 순교자들 외에 다른 또 한 무리의 종들과 형제들의 순교가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셨다. 물론 지금 제단 아래서 부르짖는 순교자들은 7년 환난 이전의 순교자들로 보아야 한다. 이들의 수효는 이미 채워졌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또 다른 순교자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들은 7년 환난 중에 순교할 순교 성도들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들 7년 환난 중에 순교할 순교 성도는 누구인가? 이 해답은 요한계시록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 종말에 추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적그리스도와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끝내 순교를 당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형제들이 있는데 이들이 전3년 반 기간 ‘다시 예언’하는 사명을 가지고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두 증인’들이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인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계11:7).
이들 두 증인들은 전3년 반 기간인 1260일간 예언의 사역을 마친 후에는 적그리스도의 무리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게 되며 삼일 반 만에 부활 승천하게 된다(계11:11-12). 그리고 이들이 부활 승천하는 일이 일어남과 함께 세상은 곧 후3년 반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신호로 둘째 화가 일어나게 된다(계11:13-14). 이 둘째 화는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주라는 명령과 함께 일어나는 세계 대전으로 이 시기부터 하나님께서 이들 순교자들의 피값에 대한 신원을 내리시는 것이다.
(5) 우리가 여기서 순교자들이 이처럼 ‘7년 환난 전 순교자’와 ‘7년 환난 중 순교자’로 구분된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은 계20장에 가서 첫째 부활자로 부활하는 순교자를 다시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6장에 나오는 두 종류의 순교 성도를 모르면 계20장에 가서 엉뚱한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언함과 하 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계20:4 전반)란 말씀에 나오는 순교자들은,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그들의 피값에 대한 신원을 호소하고 있는 ‘7년 환난 전 순교자들’이다(계6:9-10). 그런데 또 하나의 다른 순교자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란 말씀에 나타난 순교자들이 그들이다(계20:4 후반). 여기서 말씀해 주는 “살아서”란 말은 ‘에제산’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로, 이 역시 순교성도들의 부활을 의미해 주고 있는 것이다(롬14:9;계2:8). 계6:11절에서 새로운 순교자들로 등장하는 무리들이 바로 이들이며, 이들의 순교로 하나님이 예정하신 순교성도의 수효가 채워지게 된다. 이때부터 순교자들의 피값을 신원 하시는 종말적인 심판이 내려지게 되는 것이다.
6. 인류의 마지막 심판(12절~17절)
6:12“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검은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은 온통 피같이 되며.” 여섯째 인은 실질적으로 심판의마지막 인이 된다. 왜냐하면 일곱째 인은 8장에 가서 일곱 나팔로 연계시키는 신호로 작용되며, 이 일곱 나팔은 새로운 사건의 계시가 아니라 첫째부터 여섯째 인까지 보여 주신, 계시의 재전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6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여섯째 인”은 인류의 마지막 심판으로 계시되는 ‘일곱째 대접 심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계16:17-21절에서 언급해 주고 있는 일곱째 대접 심판을 이곳에서 여섯째 인으로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또한 인류의 마지막 심판을 서정시적으로 다루고 있는 계18장과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벧후3:10-13절에 이르는 말씀도 이 부분과 연결된다.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것인가?
(1) “큰 지진이 나며”라고 했다. 이 지진은 계16:18절의 “큰 지진”과 동일한 사건이다. 이 지진에 대하여 설명해 주기를 “또 큰 지진이 있어 어찌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16:18). 이 지진의 양상에 대해서도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며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없어지는 전대미문의 지진”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계16:19-20).
일곱째 대접 심판은 지구의 폭발이다. 큰 성으로 비유된 바벨론이란, 종말에 음행의 포도주로 큰 바벨론 사회를 이룰 이 지구를 의미한다. 이 지구가 하나님에 의해 폭발되는 사건이 지구의 최후가 되며, 이 같은 사건으로 기존의 지구의 형태는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역사에 의해 새로운 지구가 형성되는데 이 지구가 곧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컬어지는 ‘천년왕국’이다(사65:17-25,벧후3:10-13).
(2)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은 온통 피 같이 되며”라고 했다. 검은 털로 짠 상복이란, 산양이나 약대 털로 짠 검은 직물(천)을 말하는데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 같이 되고 달이 피 같이 되는 이유는 이 지구의 지각을 이루고 있는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일 때문이다(벧후3:10). 이 같은 일에 대하여 베드로는 요엘 선지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행2:20).
6: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이 표현 역시 지구의 폭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이다. 여기 나오는 하늘의 별들이란 지금도 태양계를 맴돌고 있는 수없이 많은 우주물체의 조각난 크고 작은 행성行星들을 가리킬 것이다. 지구폭발의 천재지변으로 행성들이 궤도를 이탈하고 유성처럼 지구로 떨어지는 모습일 것이다.
6:14“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이 말씀은 지표의 대변동을 의미하는데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없더라”는 말씀과 같은 사건이다(계16:20). 이 지구는 원래가 에덴동산과 같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나 아담의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후, 오늘날과 같은 저주 받은 형질을 이루게 되었다(창3:17). 이 같은 세상은 결코 ‘천년왕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땅도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다시 창조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사65:17).
6:15-17“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계시의 이 부분은, 이 지구의 폭발로 인하여 받게 되는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들의 아비규환의 부르짖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여기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류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는 것은 이 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인류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도 이 같은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될 대상자가 없다는 사실을 명시하신 것이다(계18:8-20). 이 같은 여섯째 인을 떼실 시기는 주 재림 직후에,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하늘의 군대들이 아마겟돈에서 개선 한 후, 다시 공중으로 올리우심을 받을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교회, 곧 ‘생명책에 기록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세계에서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 이 지상의 파멸에서 건지심을 받게 될 것이며 그 방법으로 공중으로 휴거 될 것이다(살전4:17).
굴과 바위틈에 숨는 일은 그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 할 곳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역하여 그리스도를 끝까지 배척했던 자들이며 짐승인 적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결과적으로 사단의 표인 ‘짐승의 표’ 곧 ‘6. 6. 6. 표’를 받은 자들이다. 이들은 주님이 재림하시고 그들이 기대했던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생포되어 둘째 사망에 던져지게 될 때, 그 때에야 후회하면서 애통할 것이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못하고 멸망을 받게 된다. 회개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구원을 주시기 위해 베푸시는 놀라우신 은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자들은 멸망을 받는 그 순간까지도 회개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계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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