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에세이 이론 연구
똥고개, 황금고개 되다
김은형
치워도, 치워도
‘분뇨 수거료, 영수증 받고 지불하시오.’
청소 사무소장은 분뇨 수거 수수료를 지불하면 반드시 영수증을 받아 달라고 일반 시민에 요청하였다. 소장은 분뇨 한 지게(한 목도)당 60환씩인 수수료를 지불한 후 영수증을 주지 않은 경우에는 발부해 줄 것을 요구하여 꼭 받도록 할 것이며,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수증을 발부하지 않는 수거원이 있으면 수수료를 지불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부탁하였다. 그리고 소장은 한 지게당 60환을 초과해서 수수료를 요구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 마차의 번호와 일자 및 장소를 적어서 청소 사무소에 연락하여 주면 엄중한 조처를 하겠다고 부언하였다. 한편 수거를 필요로 할 때는 관할 동사무소나 청소 사무소에 연락하여 주면 즉시 수거에 응하겠다고 말하였다.
1955년 7월 11일 자 ≪인천공보≫에 실린 기사이다. ≪인천공보≫는 인천시에서 시민들에게 시 정책과 지역 소식을 전하기 위해 1953년부터 1961년까지 발행했던 주간신문이다. 분뇨 처리를 두고 주민들과 처리업자 간에 싸움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시에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인천에는 똥이 많았다. 똥이 많아서 만석동에는 ‘똥마당’이 생기고 송림동에는 ‘똥고개’가 생겨났다. 갑작스럽게 인구가 과밀해지는데 그를 감당할 만한 하수도 시설은 전무하다면 똥구덩이나 똥마당이 생기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밥은 굶어도 똥은 나오는 게 오묘한 자연의 섭리 아닌가. 한국전쟁 직후 피난민들이 모여 순식간에 다닥다닥 늘어선 달동네 ‘하꼬방’들에는 화장실이 없었고, 구덩이를 얕게 파서 공동변소랍시고 만든 허술한 화장실은 언제나 똥이 넘쳤다. 가끔씩 똥을 퍼내도 하수도 시설이 없었으므로 오물은 근처의 하천으로 고스란히 흘러갔다. 비가 오는 날이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똥 냄새로 주민들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생을 했다. 전쟁 직후 부산에서의 피난 생활을 그린 손창섭의 소설 「생활적(生活的)」(1953)에는 열악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길 언저리에는 맨 똥이다. 거기뿐 아니라 이 부근 일대는 도대체가 똥오줌 천지였다. 공기마저 구린내가 쩔어 있는 것이었다. 이곳 판자집들에는 변소가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 주민들을 대소변에 있어서 아주 개방적이었다.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누구나 빈터를 찾아 나와 아무 데고 웅크리고 앉아 용변을 하는 것이다.
실은 똥마당, 똥고개라는 지저분한 별명이 인천의 달동네에만 붙은 것도 아니었다. 서울 흑성동 똥고개, 경북 상주 똥고개길 등, 전국 어디나 서민들이 비좁은 땅에서 북적거리며 살던 동네에는 똥과 관련된 별명이 붙었다. 달동네뿐인가. 알려져 있다시피 화려함의 상징과도 같은 베르사유 궁전의 웅장한 정원도 모두 똥 밭이었다고 하지 않나. 높은 굽의 하이힐도 귀족들이 발에 똥을 묻히지 않기 위해서 발명한 것이라니 똥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북성포구 옆 만석고가교 근방이었던 똥마당은 배를 타고 들어온 피난민들이 이곳에 판자촌을 지으며 생겨났다. 몸을 누일 집조차 바닷바람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게 짓고 살았으니 공동 화장실의 위생적 관리 따위는 기대조차 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또 사람들은 넘치거나 기다란 줄을 서야 하는 공동 화장실 대신 철로 변 구석구석을 화장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기저기 똥들이 굴러다니면서 ‘똥마당’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다. 1954년 3월 24일자 ≪인천공보≫에는 ‘시민 위생의 서광, 공동변호 15개소 설치’라는 제목의 시사도 실렸다. “참담한 전쟁 피해로 말미암아 도시 환경위생상 중요 시설인 공동변소의 파괴가 우심한 반면에 도시의 인구밀도는 날로 그 도를 가하여 거리에는 무질서한 용변으로 도처마다 불결한 상태를 나타내게 됨은 도시 미관상 방치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이에 대한 대책으로서” 시내 15개 중요 장소에 공동변소를 만든다는 소식이었다. 그중 세 곳이 만석동이었다. 만석동 판자촌에는 지금도 공동 화장실이 존재하지만, 똥마당은 이곳에 시영 아파트가 생기면서 사라졌다.
옆집 아저씨 방귀 뀌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바짝 붙어살던 달동네 이웃들은 가까운 만큼 다툼도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했던 싸움이 ‘똥 싸움’이었다.
그간 똥차가 왔다갔는데도 퍼 주지 않아 똥이 차서 오늘은 똥차를 보고 단단히 항의하고 청소조합까지 전화를 걸어 항의하며 결국은 시비 끝에 푸기는 하였지만 똥 때문에 싸우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었다.(<이광환 일기> 1967년 3월 22일)
앞의 일기로 유추하건대,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달동네에서도 여유가 있던 집은 개인 화장실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제대로 분뇨처리가 안 되어서 계속 실랑이가 벌어졌던 것을 보면 ≪인천공보≫에 기사가 났던 십여 년 전과 비교해 상황이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전쟁이 끝나고도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까지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도시로 몰려든 이들이 계속해서 달동네의 이미 비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치워도, 치워도 늘어만 가는 수도국산 사람들의 분뇨를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터이다.
똥고개의 신분 상승?
송림동 사람들이 수도국산을 넘어 화수동, 만석동의 공장으로 출근하던 길, 서흥초교 옆쪽으로 난 가파른 고갯길 별명이 ‘똥고개’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구덩이에 아이들이 빠지는 난감한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하였다. 달동네가 왜 달동네인지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이 고개가 왜 ‘똥고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설이 존재한다. 우선, 이 고개에 배추나 호박, 복숭아를 키우는 밭이 널려 있었는데 그 밭들에 준 똥거름 냄새가 지독해 똥개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농부들이 똥거름을 지고 이 고갯길을 오르다 흘린 인분 때문이라는 것이다.
송림동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금은 수도국산박물관에서 문화해설사로 소일하고 있는 남기영 할아버지의 말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이 똥을 퍼서 여기다 많이 갖다 버렸어요. 똥지게꾼을 부르려면 돈도 들고 그러니까 밤에 몰래몰래 많이 갖다 버렸지. 그래서 여름이나 낮이 되면 똥 냄새가 진동했지.”
똥 냄새가 진동한 게 똥고개 탓만은 아니었다. 하수처리장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시절,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다에 똥차들이 똥을 쏟아 버렸다. 그 근처에서는 아이들이 멱을 감았고 그 옆에서는 낚시꾼들이 고기를 잡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남기영 할아버지도 똥지게꾼과 벌인 ‘치열한’ 싸움을 기억하고 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때 똥 푸는 것 때문에 지게꾼하고 참 많이 싸웠어.”
수도국산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에는 분뇨 수거차가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일일이 사람이 똥을 퍼 날라야 했다. 양쪽 지게는 골목 양 끝에 걸려서 한쪽으로 지는 지게로 똥을 퍼 날랐다. 연탄 배달 요금처럼,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일수록 똥지게 하나에도 돈을 추가로 내야했다. 꼭대기로 갈수록 더 열악한 주거 환경 탓에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돈은 아랫동네보다 더 내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한 지게에 가급적 더 많은 똥을 퍼 가기를 바랐다. 반면, 지게꾼은 집주인이 안 보는 틈을 타서 종종 정량보다 가볍게 똥을 담아 날랐다. 세 지게를 나르고 다섯 지게를 날랐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니 똥 푸는 날이면 화장실 주인은 초긴장 상태가 되어 눈을 부릅뜨고 똥지게를 감시했으며 양이 많다 적다, 지게 수가 많다 적다며 서로 삿대질을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똥고개가 사라진 뒤에는 ‘똥공장’으로 그 인연이 이어졌다. 1977년 똥고개 옆 풍림 아파트 뒤쪽, 지금의 백병원 부근에 송림위생처리장이 만들어졌다. 이전에는 숭의동과 연희동에서 처리되던 인천 전역의 분뇨가 이곳에서 처리되었다. 처리장은 1996년 폐쇄되었고, 그 부지에 2014년 열린 인천아시안게임의 배구장이 지어졌다. 더운 여름날이면 밥을 먹기 힘들 정도로 바람을 타고 몰려왔던 똥 냄새도 잦아들었다.
똥이 가진 지저분하고 부정적인 이미지 탓인지 동구청은 이 길의 이름을 ‘황금고개’로 바꾸었다. 똥에서 황금이라니, 신분이 수직 상승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금고개’라는 말을 들으면 이전에 ‘황금 똥’이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요구르트 광고가 떠오른다. 똥의 이미지를 지우려고 바꾼 말일 텐데 오히려 똥 생각이 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황금고개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맞아, 여기가 옛날에 똥고개였지’라고 되새길 것 같다. 본래의 취지와는 반대되는 결과겠지만, 잊혀 가는 옛날의 기억과 추억의 달동네 문화를 새삼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황금고개로의 개명은 나쁘지 않은 작명 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김은형 <끈질긴 삶터 달동네>)
|작법공부|
똥도 시詩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고 ‘똥도 시였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달 편집은 ‘난해시 양심고백’ 깃발을 달고 출발하였다. 여기 또 하나 양심고백을 하거니와 필자는 참으로 ‘똥도 시’라는 사실을 나이 80 다 되도록 깨닫지 못하였다. 이런 내가 자신의 경력에 ‘시인’ 꼬리표를 다는 일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똥이 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시인행세를 하다니!
‘똥도 시’라는 사실을 깨닫고 보니 금방 아기들의 노란 똥이 생각난다. 아하! 엄마들이 아기똥을 환하게 웃으며 치우는 까닭이 시였기 때문이구나!
이 작품은 우리들의 맨얼굴이다. 꾸미지 않고 가리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화상이며 역사다. ‘똥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진리다.
<끈질긴 삶터 달동네>는 ‘문학에세이 작법’을 가르쳐 준다. 문학에세이의 현실적 필수조건은 ‘사실성’과 ‘문학성’의 결합이라는 점을 직접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작품의 소재가 된 인천 송림동 수도국산 아랫동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위에 사실을 취재하는 일이 본업인 신문기자 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니 에세이가 갖춰야 할 사실성과 문장력을 삶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며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에세이의 사회적 가치는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다. 각 방면 모두에 가치 있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 이 작품이 보여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를 빼어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작품이 가르쳐 주는 에세이 문학의 본질은 현대의 서정시 같은 ‘알아들을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정서 피력이 아니라는 점이다. ‘붓 가는 대로 신변잡기 수필’의 가장 비문학적인 점은 시도 아니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정서를 혼자 중얼거리듯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무대인 ‘달동네’에 살지 않은 사람이라도 당시의 화장실 사정은 개인집 화장실이었느냐 공동화장실이었느냐 차이만 있을 뿐 수세식이 아닌 똥구덩이 화장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6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필자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꾸는 꿈이 엉덩이까지 똥이 차올라서 발 디딜 곳이 없는 ‘똥투간’ 꿈이다. 그런데 그것이 ‘똥詩 꿈’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비로소 깨달았다.
‘밥은 굶어도 똥은 나오는 게 오묘한 자연의 섭리’ - 이것이 시가 아니면 무엇인 시인가?
‘똥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 이것이야말로 시(진리)가 아닌가!
‘비가 오는 날이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똥 냄새로 주민들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고생을 했다.’ - 이토록 절망적으로 절박했던 삶의 역사가 시가 아니면 무엇이 시란 말이냐.
‘옆집 아저씨 방귀 뀌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바짝 붙어살던 달동네 이웃들’ - 그 시대, 저토록 절박했던 삶이 시가 아니면 무엇이 시란 말인가.
‘꼭대기로 갈수록 더 열악한 주거 환경 탓에 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돈은 아랫동네보다 더 내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한 지게에 가급적 더 많은 똥을 퍼 가기를 바랐다.’ - 세상에 이보다 더 절박한 삶의 시가 무엇이 있을까. 똥이야말로 가장 절박한 삶의 시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황금고개 사거리를 지날 때마다 ‘맞아, 여기가 옛날에 똥고개였지’라고 되새길 것 같다. -그렇다! 우리는 ‘똥詩’를 짓고 살던 시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수세식 화장실, 얼핏 화장실이 아닌 고급 응접실같이 꾸며 놓은 현대의 화장실 시대에 태어나 자신이 누운 똥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성장하고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똥도 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작법공부 :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