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극단 동 대표 레퍼토리展> 포스터 [사진 제공=극단 동]
극단 동의 대표 레퍼토리 3작품을 한 자리에...
지난 18일부터 오는 6월 12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지동 소재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두산아트센터와 극단 동이 공동 기획한 <극단 동 대표 레퍼토리展>에서,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18-23일) <비밀경찰>(28일-6.2), <테레즈 라캥>(6.7-6.12) 세 작품이 연이어 소개된다.
극단 동만의 형식,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대표작으로, 극단 동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작품이다. 극단 동은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15명의 인물이 59개의 독백으로 진행되는 원작을, 1930년 대 일제강점기 간도 시절로 옮겨 유랑민의 생활 모습과 복식을 복원하는 한편, 한국방언학회와 협력을 통해 함경북도 방언을 쓰는 극 중 11명의 배우들의 독특한 언어로 새롭게 무대화한다.
죽음의 생생한 대기
▲ 극단 동의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사진 제공=극단 동] (이하 상동)
어머니는 처음부터 누워 있고 그녀의 시선은 무대 상수에 위치한 자신의 관에 고정되어 있다.
그녀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입은 침묵의 대기에 굳게 점착되어 있고 이 죽음이 당도해 있는 현장에서 죽음이 부재의 그림자로 그 어둠의 스밈을 가져갈 때 말은 드러나기보다 꺼져 버리는 어떤 그런 상태에서 삶을 주재하는 것을 알기에, 푹 파인 관을 묻는 땅 자체에 이미 영면에 들어선 어머니는 일견 삶에서 소외되어 있으면서 가장 삶의 극명한 입김을 몰아쉰다.
이 죽음의 미적지근하고 적잖은 열화가 돋을 정도의 대기는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반면 삶은 이 죽음 앞에서 무기력하다. 오히려 비겁함으로서 삶은 죽음 곁을 떠도는 삶과 죽음의 가치가 전도되는 현상이 빚어지는데, 이는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죽음 이후 죽음을 준비하는 대신 삶의 공고한 자리를 만듦이 가능한 사람들의 무모한 생기로 나타난다.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는 어머니의 시선은 무기력하지만 명확하고 그 시선에서 대상으로 향하는 거리의 명확함 너머에 무력한 산 사람들의 항거가 틈을 비집고 나오고자 꿈틀대고 있는 형국이다.
어머니의 죽음의 순간은 침묵과 침묵 속의 정지된 슬로모션의 흐름이 갖는 이미지로 주어지는데, 이는 땅으로 꺼져 버릴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그 땅을 헤집으려는 단 하나의 폭발적인 에너지의 잠재성을 확인하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죽음의 손짓을 보지 않고 명확하게 인식한다.
곧 죽음의 목전만을 확인하면서 이 죽음이라는 사태를 늘 뒤늦게 확인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순간의 연장’은 대사라기보다는 목소리와 몸짓이라기보다는 움직임으로 드러나는 독특함의 극대치를 실재로 번역한 것이기도 하다.
몸의 비가시적 현존으로서 언어
강량원 연출과 극단 동이 만드는 극에서 말은 순간을 영원으로 벌리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원을 순간으로 증발시키며 남는 철저히 물질적인 어떤 것이 된다. 신체가 되는 언어 장치는 그 무표정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말을 하는 늘어뜨림의 표시로 그 언어 자체가 되며 ‘언어 외에는 어떤 것도 허락 않는, 정동이 곁들어지지 않는, 어떤 대사의 기능 자체를 의심케 하는, 엿가락 같은 신음의 말들’이 인물들을 지배한다.
이 너무나도 명확해서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발성의 언어들은 지루함의 알레고리를 낳는데 시간은 흘러가는 게 아니라 마치 멈춘 채 조각들로 분절되며 시간에 접착되는, 곧 ‘이 몸 하나가 무대를 이루는, 이 몸 자체에서 지금 여기가 형성되는’ 어떤 그런 순간들에 대한 집착이 부가된다.
언어는 곧 몸 안에 부착되어 이 자리를 매우 물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음의 사실만을 남긴다. 이는 역할이나 부분 차원의 중요성만을 취하는 것에 머물지 않음을 의미한다. 오직 한 덩어리 시간 고리로 기능하는 몸의 비가시적 현존에 가깝다.
넷째 딸의 치마를 붙잡고 그녀 오빠가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순간, 매우 긴 분절로 순간을 자르는 장면은 목소리는 신음으로, 시간은 순간과 영원의 변증법의 고리에서 이 순간을 영원으로 벌리는 순간이다. 앞선 팽팽한 장력은 이제 형제들의 의견 불일치로 드러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각각의 삶의 평면
말에 부가되는 움직임들은 작은 하나의 덩어리들을 구성한다. 이 연극 자체가 평면성의 미학을 펼치고 있는데, 각 역할들은 공간의 부분을 차지하고 등퇴장을 거의 두지 않고(말을 탄 셋째만이 바깥과 달릴 수 있는 땅을 상정하기 위해 그 등퇴장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평면에서 중첩 레이어들을 형성하며 병치된다. 이 중첩은 깊이의 측면과 삶이 지속되고 있고 그 안에 그들이 일상의 수행들을 실천하는 부분들로 삶을 연행하고 있음을 가리키게 된다.
갑작스러운 등장은 무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무대 안에서 레이어들의 깊이의 차원의 차로 옮겨 가는 것에 가깝다.
영원의 이미지
또한 어머니의 시선과 이들의 삶에의 시선 내지는 욕망의 비가시적 시선이 팽팽하게 장력을 형성했던 처음처럼 삶과 죽음의 긴장 관계가 깨지자마자 어떤 중심도 없고 하나의 여러 다른 이미지들로 소급되는 장면들로 순간과 멈춤, 영원의 한 이미지를 얻는 것으로 나아간다.
어둠이 꺼지며 또 다른 장의 전환을 예고할 때 어둠 속 사물들과 존재는 분주한 연행함을 드러내며 하나의 고정된 삶, 과거로서의 삶을 예비하는 현재의 준비 태세를 오히려 전제하는 이 순간의 마법(이 연극 자체의 마법이기도 한)을 깨뜨리는 일상의 시간 속성을 드러낸다.
죽음이 부재하는 공간
‘내가 누워 죽어있을 때’는 매우 역설적인 말인데 이 죽음이 이미 지나갔음을 의미하며 죽었지만 죽지 않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삶은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나는 타자로서 외부성을 이 구조에 흩뿌리며 굳건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쩌면 이 타자성으로서의 나는 죽음 이후에 성립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한 무대는 우리가 보는 하나의 죽음(환영)이라는 점에서, 이 나는 관객인 나로 치환된다.
관은 닫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이 시선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작동하며 삶이 어떤 의지의 순간들로 연장할 수 없음이 분명해질 때, 지속이 아닌 순간으로 멈추고 중첩된 해석의 층위로 지배받음을 허락할 때 이 시선은 여전히 이 자리를 맴돌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존에 대처하기'
어쩌면 멈춤과 순간의 영원으로의 벌림을 실현하고자 하는, 시간의 늘어뜨림으로 분절된 감각들이 밀려오는, 여기 이 몸을 떠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말들이 갖는 실재성‧물질성을 확인하는 길은 관객들로서는 꽤 긴 시간의 무미건조한 감각들에 맞서 싸우는 행위이기도 할 것 같다.
이러한 시간과 감각, 몸의 경계들에서 사유하는 극단 동의 연극은 이러한 메타적인 작품에 대한 고찰을 넘어 매우 다른 세계에 대한 사유를 제공한다는 점이 분명하며 이에 대한 경험의 판독 역시 관객들의 많은 개방적 참여가 요구되고 또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