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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혼에 대한 규제와 그 실상 ③
(②편에 이어서)
5) 피로여성(被擄女性)의 이혼
임진․병자 양난은 국가의 입장에서도 엄청난 피해와 고난을 겪었던 사건이었지만, 당 시 여성들에게는 이중의 질곡을 안겨 준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군이나 청군에 의해 강제로 납치되어 적지 않은 여성들이 성적 만행을 당했을 뿐 아니라, 종전 후에도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 온 것을 이유로 사회로부터 백안시되고 남편으로부터 이혼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가 적군에게 납치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남편이 처와 이혼할 것을 국가에 요청할 때, 국가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 이를 허락하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인정상 가혹하게 여겨질 뿐 아니라, 이들 여성들이 납치되어 오욕을 당하게 만든 궁극적인 책임이 어디까지나 국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 “실절한 자로써 배필을 삼는 것도 이미 실절이다”125)라는 논리를 받아들였던 사대부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피로여성들과 혼인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조선사회에서 피로여성의 이혼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임진왜란부터 검토해 보도록 한다.
121)《숙종실록》권 23, 숙종 17년 8월 병신.
122)《영조실록》권 88, 영조 32년 윤 9월 기해.
123)《영조실록》권 91, 영조 34년 2월 병술.
124)《星湖僿說》권 14, 人事門, 絶婚.
125)《효종실록》권 2, 효종 즉위년 11월 병자.
임진왜란은 무려 7년이나 계속된 전쟁으로, 당시 절개를 지켜 죽은 부녀자가 효자․충 신보다 그 수가 많았다고 한다.126) 그러나 목숨을 버린 열녀 못지 않게 살아남은 사족녀들도 적지 않았던 듯, 변고를 당한 집안과 혼인하지 않으려는 풍조에 대해 선조가 “이 풍습이 만약 오래 간다면 나라 안의 큰 가문이 거의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통탄하며 왕가의 친인척들에게 이들과 혼인하도록 권하였다는 기록도 있다.127) 이처럼 많은 사족녀들이 연루되었고 국난이라는 불가피한 사정에서 빚어진 변고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이들 피해여성들에 대한 이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기란 곤란한 일이었다. 선조 39년에 왜적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것을 이유로 선처를 버리고 종실녀를 후처로 맞았던 차천낙(車天駱)에 대해 “먼저 들인 사람을 적(嫡)으로 삼는다”는《경국대전》의 규정을 근거로 선처를 ‘적(嫡)’으로 삼도록 조치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128)
임진왜란시 피해를 입은 여성의 이혼 문제에 대해서는 위의 차천로의 사례 외에는 실록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선조가 여타 피해여성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언급도 당시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고 후일의 기록을 통해서만 전해지고 있다. 후일 병자호란을 당해 납치되었던 여성과의 이혼을 허락할 것인가의 여부가 언급될 때마다 이혼을 허락하지 말자는 입장을 취했던 관료들이 항상 그 전거로 삼았던 것이 선조년간의 이혼불허정책이었던 것이다.129) 그러나 효종조에 인조실록의 편찬을 담당했던 사신이 논평을 통해 “당시의 전교(傳敎)가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근거할 만한 것이 없다”130)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가에서 적극적이고 단호한 조처를 취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결국 국가에서는 공식적으로 이혼을 허락할 수 없는 입장이었으나, 사대부가에서는 피해여성을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차천로의 경우에도 실록의 기록에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중 차천로의 장인 기재란에 종친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131)으로 미루어 선조의 이혼불허 조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혼하고 종실녀를 후처로 맞아들였다고 보인다.
126) 李崇寧이 광해군 9년에 간행된《東國新續三綱行實》에 의거해 임진․병자왜란시의 순절로 旌門된 숫자를 통계 낸 것에 의하면 효자 67건, 충신 11건, 열녀 356건으로 열녀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1962,〈임진왜란과 민간인피해에 대하여〉,《역사학보》17․18).
127) 李肯翊,《燃藜室記述》권 17, 宣祖朝故事本末〈亂中時事摠錄〉.
128)《선조실록》권 195, 선조 39년 정월 신묘.
129)《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3월 갑술;《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6월 갑진.
130)《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3월 갑술.
131) 謁聖榜 丙科 합격자인 차천로의 인적사항에 처부가 錦川正 (李)俌로 기재되어 있다(1988, 태학사 영인본 제 1권, 534쪽).
임진왜란과 달리 병자호란시 피로여성의 이혼 여부에 대한 논란은 적지 않게 기록이 남아 있다. 청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납치된 여성에 대한 대규모 속환이 이루어진 때문에 국가에서 임진왜란 때와 같이 이 문제를 외면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 직후 문제로 제기된 효종비의 오빠 장선징(張善澂) 처의 사례132), 전 승지(前承旨) 한이겸(韓履謙) 딸의 사례133), 속환 직후에는 이혼이 제기되지 않았으나 후일 자손의 금고 여부가 문제된 최선(崔宣)의 어머니 권씨(權氏)의 사례134) 등이 그것이다. 위의 사례 중 유일하게 이혼이 허락된 경우가 장선징 처의 경우인데, 이 경우도 피로여성이라는 것을 이유로 장선징의 아버지 장유(張維)가 이혼을 요청하였을 때는 허락되지 않다가, 후일 어머니가 불효를 이유로 다시 이혼을 요청하여 허락된 사례135)이다. 이때 이혼을 허락하면서 인조가 “이미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 하였으니, 지금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훈신(勳臣)의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특별히 그의 요청을 윤허하니, 후일 이 일로 관례를 삼지 말라”고 하였던 것은 일단 공식적으로는 피로여성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비록 포로로 잡혀갔던 사족녀라도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이혼을 허락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 국가에서 전후 포로의 속환을 추진하고 있었고 속환 대상으로 부녀자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던 탓으로136),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속환 부녀자들의 이혼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며 호란 후 전후수습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이혼불허 입장이 적지 않게 반영되었다.
“오욕을 입은 부인은 역적 집안의 자손보다 더 심하다”며 피로여성의 이혼을 강력히 주장한 영돈령부사 이성구(李聖求)를 제외하면137) 당시 대다수 관료들의 입장은 이혼의 허락 여부를 국가에서 간여하지 말고 개개 사대부 가문에 일임하자는 타협론이었다.138) 그럼에도 최명길은 첫째, 임진왜란 후 선조가 이혼을 불허하였다는 것, 둘째, 이혼을 허락하게 된다면 속환하려는 사람이 없게 될 것, 셋째, 포로로 잡힌 부녀들을 모두 실행했다 논할 수 없다는 것, 넷째, 사대부 개개 가문에 일임하자는 것은 한 나라의 법을 둘로 만들어 왕자의 정치로서 구차하다는 것 등의 이유를 들며 이혼불허의 입장을 강력히 표명하여 인조의 허락을 받게 되었다.139)
132)《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3월 갑술.
133) 위와 같음.
134)《현종실록》권 14, 현종 8년 9월 신유.
135)《인조실록》권 41, 인조 18년 9월 경자.
136) 朴容玉, 1964,〈丙子亂被擄人贖還考〉,《史叢》9.
137)《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6월 갑진.
138)《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5월 계해;《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6월 갑진.
이렇게 인조 대에는 대규모 속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전후의 상황과 최명길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이혼불허 방침이 공식적으로 표명되었지만140), 피로여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던 당시의 사류들이141) 이들을 그대로 집안의 며느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조 16년에 장선징의 이혼요청을 불허하였다는 기사 말미에 “이후로 사대부 집안의 자제는 모두 다시 혼인하고, 도로 합하는 자가 없었다”는 내용의 기사142)가 실리고 있는 것을 보면, 국가의 공식적인 조처와 달리 실제로는 피로여성들이 대부분 이혼을 당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인조가 죽은 후, 북벌을 강력히 추진하던 효종이 즉위하자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청서파(淸西派) 사류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면서 피로여성들과의 이혼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게 되었으니143), 최명길의 현실론적 견해보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이 발언권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3. 협의이혼
《대명률》에는 협의이혼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명실상부한 협의이혼의 실제 사례는 기록상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가 흔하지는 않았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협의이혼에 관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부부가 합의를 보아 아무런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형식은 협의이혼이라도 내용은 일방성을 띠는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통상 남편의 강박에 의해 이혼이 이루어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컸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때로는 처가 남편을 핍박하여 억지로 이혼 합의문서를 받아내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139)《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3월 갑술;《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6월 갑진.
140) 森岡康은 인조 대에 피로여성에 대한 이혼 여부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났으나 애매한 타협론으로 결말이 났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으나(1963,〈贖還披擄婦人の離異問題에 ついて〉,《조선학보》 26집),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에서는 이혼불허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였으니 이는 사실과 다르다.
141)《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5월 계해.
142)《인조실록》권 36, 인조 16년 3월 갑술.
143)《효종실록》권 2, 효종 즉위년 11월 병자;《숙종실록》권 40, 숙종 30년 9월 임술.
남편을 혐오하여 강제로 ‘기별문자(棄別文字)’를 받아내었던 환관(宦官) 한세보(韓世甫)의 처 박씨(朴氏)의 경우144)나, 다른 남자와 재혼하기 위하여 남편 최희(崔希)로부터 ‘기별명문(棄別明文)’을 강제로 받아내어 재혼한 양녀(良女) 분경(分京)145)과, 핍박을 가하여 남편으로부터 ‘기별지문(棄別之文)’을 받아낸 후 재혼한 강복(姜輻)의 처 고씨(高氏)의 경우146) 등이 그것이다.
비록 처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남편이 처에게 이혼문서를 써주었다는 것은 부부 합의에 의한 협의이혼이라고 분류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처가 강요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는 국가에서 이를 불법적 이혼으로 간주하여 장 80의 형벌을 부과하였으니, 이는 협의이혼의 규정이 현실적으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였던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렇게 처가 남편에게 강압적으로 이혼문서를 작성케 하여 협의이혼을 위장했던 것은 조선시대에 처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공식적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종 대에 남편의 늙고 추한 얼굴에 불만을 품어 혼인한 후 6~7년 동안 동거를 거부했던 판관 홍태손(洪泰孫)의 처가, 직접 이혼을 요청하지 못하고 남편을 모욕하고 멸시하여 남편 스스로 이혼을 요청하게 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보인다.147) 이 경우도 비록 형식상으로는 남편의 요청에 의한 일방적 이혼이었으나 내용상으로는 처의 요구에 남편이 동의하였다는 의미에서 협의이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중기까지는 위장된 형태로나마 협의이혼의 사례가 간혹 나타나지만, 조선후기에는 위장 여부를 떠나 협의이혼의 사례조차 찾기 어렵다. 이는 부부간의 합의로 원만히 이혼이 이루어진 경우 별다른 논란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족층에서 이혼이 극히 금기시되었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가에서 깊이 간여하지 않았던 일반민들의 경우에는 협의이혼이 적지 않게 이루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이제까지 살펴본 이혼 사례를 종합하여 보면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는 국가 또는 남편에게만 허용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규정상으로만 본다면 처가 남편으로부터 구타 당했을 때나 부부가 합의하여 이혼할 경우에는 부인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기능하기 어려운 조항이었던 것이다.
144)《세종실록》권 33, 세종 8년 9월 신축.
145)《세조실록》권 3, 세조 2년 정월 신사.
146)《세조실록》권 30, 세조 9년 4월 무자.
147)《중종실록》권 31, 중종 12년 윤12월 신묘.
Ⅳ. 불법적 이혼의 처벌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이혼에 대한 제한을 강하게 하여, 처가 간통죄를 범하거나 치유 가 불가능한 병을 앓고 있거나 반역죄에 연루된 경우 외에는 가급적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당한 이유 없이 남편이 처를 내쫓거나 처가 남편에게 강제하여 이혼문서를 받아내는 등 사사롭게 이혼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러한 행위가 알려질 경우에 국가에서는 이를 강력히 처벌하였는데, 이때 남편과 처에게 적용되는 형벌은 그 내용을 달리하였다.
우선 남편이 처를 합당한 이유 없이 내쫓는 경우는, 주로 첩을 두고 처를 내쫓아 소박하는 경우와 재혼하기 위하여 처를 내쫓는 경우의 두 가지가 있었다. 이때 국가에서는 각각 《대명률》호율(戶律) 혼인조(婚姻條)의 ‘처첩실서(妻妾失序)’ 율과 ‘출처(出妻)’율에 적용시켜 장형의 형벌을 부과하고 혼인관계를 회복하도록 강제하였다. 혼인관계를 본래대로 회복하는 행위에 대하여《대명률》에서는 ‘병개정(竝改正)’, ‘추환완취(追還完聚)’ 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조선시대에는 다시 합하게 한다 는 의미에서 주로 ‘복합(復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148)
반면 처가 남편에게 강제하여 불법적으로 이혼문서를 받아내는 경우에는 이에 해당하는 율이 없다 하여《대명률》의 ‘잡범부응위(雜犯不應爲)’ 율에 적용시켜 장형의 형벌만을 부과하였으나149), 이때는 남편 측의 불법적 이혼과 달리 부합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동일한 불법적 이혼인데도 남편과 처에 대한 처벌내용을 달리한 것은 처의 정조를 중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일단 남편을 버리고 떠난 처의 행위를 실절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148) 첩을 두고 이유 없이 처를 내쫓아 형벌의 부과와 함께 부합명령을 받은 예로는 司直 李中位(《세종실록》권 23, 세종 6년 2월 기미), 副司正 洪綬(《세종실록》권 20, 세종 5년 6월 을축), 別侍衛 鄭大 禧(《세조실록》권 38, 세조 12년 4월 경술) 등의 사례를 들 수 있고, 처를 버리고 재혼하여 부합명령을 받은 예로는 護軍 金士信(《세종실록》권 19, 세종 5년 정월 병오), 前判官 全義(《세종실록》 권 19, 세종 5년 3월 정유), 成均司成 李敉(《세종실록》권 29, 세종 7년 7월 갑술) 등의 사례를 들 수 있다.
149) “雜犯不應爲”율의 내용은 “凡不應得爲而爲之者笞四十 謂律令無條理不可爲者 事理重者杖八十”(《大明 律》刑律 雜犯 不應爲)인데, 이중 “事理重者”에 해당시켜 장 80의 형을 부과하였다(《세종실록》권 33, 세종 8년 9월 신축).
앞장에서 살펴본 한세보의 처, 최희의 처, 강복의 처 등과 같이 협의이혼을 위장하기 위하여 강제로 남편에게 이혼문서를 받아낸 행위에 대해 불법적 이혼으로 취급하였으나, 부합 여부에 대한 언급 없이 장형의 형벌만을 부과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다만 장인이 사위에게 강요하여 이혼문서를 쓰게 한 참봉 김자균(金自均) 처의 경우만이 예외적으로 형벌 없이 부합의 조처만을 취하고 있다. 이는 이혼문서를 강제한 것이 처가 아닌 장인이었을 뿐 아니라, 장인이 이혼문서를 강제한 것도 자신의 딸과 반목하는 사위에 대한 시위행위로서의 성격을 짙게 띠었기 때문이었다.150)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의 부합명령은 과연 어느 정도 실효성이 있었을까. 국가의 부합명령을 따르지 않아 장죄(杖罪)가 추가로 부과된 성균사성(成均司成) 이미(李敉)의 사례가 한 건 나타나기는 하지 만,151) 여타의 경우에는 부합 여부에 대한 기사가 나타나지 않아 부합명령의 이행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종 25년, 우의정 신개(申槪)가 “지금 기처한 사람을 논죄하는 것을 보면 강제로 부합시키는 경우가 심히 많지만 어느 한 사람도 부합하여 동거하는 자가 없습니다”152)라고 하며 부합명령이 전혀 실효성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합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부합명령을 철저히 관철한 의사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예종 원년에 자식이 있는 처를 이유 없이 내쫓은 김중륜(金仲倫)의 사안을 검토하면서 조석문(曹錫文)이 “전일에 기처한 자가 있으면 그로 하여금 부합하게 하였으나 부합한 자는 적었습니다. 지금 중륜(仲倫)이 이미 기별(棄別)하였는데 비록 부합하게 한다 하더라도 필시 처음과 같지는 못할 것이니, 비록 (죄지은 것이) 사면 이전이기는 하나 죄를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며 지켜지지 않는 부합명령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사유 이전의 일이라도 형을 집행할 것을 청하고 있는 것153)은 그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부합명령은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지 않았고, 부합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에 국가 에서도 이를 철저히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는 혼인관계가 사실상 파탄된 부부를 국가에서 강제로 부합시킨다고 하여도 원만한 부부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종 원년,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자옹(金自雍)이 기첩 옥생향(玉生香)을 속신(贖身)시키고 적처를 내쫓자 사헌부에서 정처와 부합시키고 옥생향은 본역으로 돌려보내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집의(執義) 신숙주(申叔舟)가 “비록 본처와 부합하게 한다 하더라도 필시 화호(和好)하지 못할 것이니 옥생향을 이이(離異)시켜 본역으로 돌려보내기를 청합니다”154)라 하며 기첩 옥생향을 본역으로 돌려보낼 것만 건의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150)《성종실록》권 1, 성종 즉위년 12월 경신.
151)《세종실록》권 29, 세종 7년 11월 신해.
152)《세종실록》권 100, 세종 25년 4월 갑인.
153)《예종실록》권 6, 예종 원년 6월 계해.
154)《문종실록》권 6, 문종 원년 2월 경인.
이렇게 불법적 이혼에 대한 국가의 부합명령이 전혀 기능하지 못하게 되자, 성종대에 국가의 묵인 하에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던 불법적 이혼을 차라리 양성화시키자는 건의가 나오기도 하였다. 즉, 꼭 처를 버릴 마음이 없는데도 처를 소박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이혼을 가장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본처와 영영 헤어지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이혼절차를 마련하여 불가피하게 처를 버려야 할 경우에는 그 절차를 밟아 정식으로 이혼하게 하자는 대사간 安瑚의 건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금슬이 나쁜 부부를 강제로 화합시킬 수 없고, 처를 소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처를 소박한 죄로 징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영사(領事) 윤필상(尹弼商)의 반론에 의해 이러한 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155)
위의 조처에서, 이제까지 국가에서 취했던 부합명령의 타당성 자체를 부인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는 사사로운 부부관계에 국가가 간여하려는 정책자체가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건국 초에 불법적으로 처를 유기할 경우에 국가에서 강제로 이들을 부합시키려는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지만, 성종조 이후에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형벌을 부과하거나 관직만을 삭탈할 뿐 부합시키려는 노력조차 포기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 보인다.156)
결국 이혼을 극도로 제한하려 했던 조선시대의 이혼제한정책은 처가 부당하게 이혼 당 하는 피해를 줄여 처로서의 지위를 안정되게 유지하도록 하는데 공헌하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 불법적 이혼행위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버림받은 여성들의 처지를 개선시키는 데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선시대 이혼제한 정책의 목표가 여성의 열악한 지위를 개선시키려는데 있었다기보다 형식적인 혼인관계의 유지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 인조년간 피로여성과의 이혼을 강력하게 금지하려는 국가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이혼요청이 허락되지 않았던 장선징에 관한 기사가 실린 말미에 “이후로 사대부 집안의 자제는 모두 다시 혼인하고, 도로 합하는 자가 없었다”는 내용의 사관의 평이 실렸던 것도, 국가의 이혼제한정책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55)《성종실록》권 225, 성종 20년 2월 신해.
156) 부합명령 없이 처벌만한 대표적인 사례를 보이면 다음과 같다.《중종실록》권 73, 28년 2월 신묘; 《인종실록》권 1, 인종 원년 3월 무진;《선조실록》권 17, 선조 16년 4월 병인;《영조실록》권 6, 영조 원년 6월 무인.
공식적인 이혼절차를 마련하자는 건의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체적으로 모순을 가지고 있는 이혼제한 정책을 고수하였던 것은, 재가규제규정을 설치하고 있는 조선사회에서 이혼녀가 양산될 경우 야기될 사회문제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자유로운 이혼이란 가문의 존립자체를 위협할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조선사회가 추구하는 성리학적 의리의 구현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중의식과 성리학적 의리관이 강고해지는 중기 이후에 이혼의 제한이 더욱 철저해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