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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사도들이 세운 장로들
장로라는 이 명칭은 구약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구약 때에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있었고 각 성에 장로들이 있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서도 장로를 자주 언급하였는데 이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다. 사도행전 전반부에서도 장로를 언급한 적이 있지만(4:5, 8, 23, 6:12) 그들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다.
교회의 장로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성경은 예루살렘에 장로들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이 장로들이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언급하지 않았다. 성경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어떻게 건축되고 성공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예루살렘교회를 지방 교회의 본으로 삼을 계획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그리스도인라고 칭한 것은 안디옥에서 시작되었으므로 교회의 정식 출발은 안디옥에서 시작된 것이다. 예루살렘에 장로들이 있었지만 성경은 예루살렘의 장로들이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기록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은 장로들이 있다는 것만을 기록했다. 사도행전 11장 30절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부조를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것이 신약에서 첫 번째로 교회 안의 장로를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장로들이 누구이며 누가 세웠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후에 사도행전 15장에서도 예루살렘에 있는 장로들을 몇 번 언급했지만 역시 그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오직 사도행전 14장 23절에서 사도들의 제 1차 전도여행을 언급할 때 두 사람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는바 주께 부탁하고]라고 했다. 여기에서 장로들의 설립을 처음 언급하였다. 두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생겼고 또한 그들은 교회를 세우고 장로들을 세웠다. 그러므로 성경은 장로를 세운 본이 안디옥에서 사도들이 나가 사역할 때부터 시작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장로의 설립
사도가 한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므로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게 되고 교회가 세워졌다. 교회가 세워질 때 교회 안에는 형제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들은 사람들을 다스리고 건축하며 목양하는 일을 해야 한다. 성경 안의 믿는 이들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처럼 수동적이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 교회의 책임을 짊어졌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주님 안에서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관심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믿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하겠지만 그들에게도 앞장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누가 교회를 다스리고 건축하는 책임을 짊어지는가? 사도가 세운 장로들은 그들이 세운 교회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것이다. 성경을 볼 때 한 교회를 다스리고 건축하는 것은 장로의 책임이다. 교회의 일은 장로들의 손에 있지 사도들의 손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한 지방에 있는 교회를 다스리거나 키우는 책임을 짊어지도록 어떤 사도를 부르지 않으셨다. 바울이 고린도에 일 년 이상 머물렀고 로마에 이 년 동아 있었고 에베소에 삼 년 동안 있었지만 그가 책임진 일은 지방 교회의 일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사역의 일이었다. 지방 교회의 책임을 짊어지는 사람은 사도가 아니라 장로들이다. 성경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은 있어도 에베소의 사도는 없다. 성경에는 빌립보의 감독들만 있을 뿐 빌립보의 사도는 없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아서 시켜 하는 일의 책임을 짊어지고 지방 교회의 책임을 짊어지지 않는다. 사도의 사역으로 얻은 사람들은 다 지방 교회의 장로들이 책임지도록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목자] 없는 것이 아니고 지방에 있는 교회를 돌아보고 건축하기 위한 사람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와 장로가 일을 나누어서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사도는 전문적으로 각지를 다니는 사람이고 장로는 한 지방에서 책임을 짊어지는 사람이다. 사도의 특징은 가는 것이고 장로의 특징은 머무는 것이다. 사도는 어떤 지방에 머물면서 한 교회만을 목양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장로들의 일이다. 현재 [목사]제도 안에서 [목사]가 하는 일은 사실 장로들이 해야 할 일이다. 주님이 보내신 사역자들-사도들-은 한 지방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장로들은 꼭 일을 직업으로 삼지 않아도 된다. 반대로 직장을 갖고 있는 그 지방의 형제로서 동시에 교회의 책임을 짊어질 수도 있다. 물론 때로는 지방의 일이 많으므로 전 시간으로 교회에 드릴 수 있지만 그들의 특징은 지방에서 형제의 자격으로 지방 교회의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도를 한 지방 교회를 다스리도록 세우지 않으시고 각지의 일을 위해 세우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성경 안의 교회는 지방을 한계로 삼고 지방으로 나누어진다. 지방에 있는 교회의 행정의 독립과 영적인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지방으로 구분하는 것 외에 하나님은 다른 구분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를 감독하는 장로들은 그 지방의 장성한 형제들이지 다른 곳에서 파견된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하여야 교회의 지방적인 성질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몇몇 지방 교회들은 특별히 어떤 사역자의 지배를 받으므로 즉시 종파가 생겨난다.
장로는 어떻게 산출되는가? 사도가 각지에서 사람을 구원하여 지방교회들을 세웠다. 이교회들 중에서 자연히 비교적 자란 형제들이 있으므로 사도는 이런 사람들을 장로로 세웠다. 전에 우리는 교회에 장로가 있으려면 그곳에서 칠팔 년 동안 사역해야 산출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또 그렇게 장성한 자가 없으면 어떻게 장로들이 산출 될 수 있느냐고 말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4장에서 사도가 언제 장로들을 세웠는지를 기억해야한다. 물론 처음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 세운 것이 아니라 두 번 째로 돌아올 때 세운 것이었다. 그들은 나갈 때 복음을 전했고 돌아올 때 장로들을 세웠다. 매우 빨랐다. 아마 어떤 지방은 몇 개월 밖에 안 되고 어떤 지방은 몇 주밖에 안되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기간을 기다린 후 장로를 세운 것이 아니다(사도들이 처음 나갈 때부터 돌아올 때가지는 2년이 채 못 된다).
또한 그들은 [모든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다. 바꾸어 말한다면 사도가 돌아올 때 다만 한 두 교회 서너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는 별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지 않고 어떤 교회는 조금 낫기 때문에 장로들을 세운 것이 아니다. 사도들은 모든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어떤 교회가 형편없고 자매들도 적으며 형제들도 아주 얕은데 어떻게 장로들을 세울 수 있느냐고 물어 볼 것이다. 한 가지 여러분이 주의하기 바라는 것은 성경 안의 장로들은 다 한 지방에 국한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경에서 장로가 될 수 있더라도 상해에 와서는 장로가 되지 못 할 수 있다. 한 지방에 대여섯 형제나 예닐곱 형제들이 다 어리겠지만 그들 중에 비교적 어리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장로는 절대적인 자격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지방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진보한 사람이 곧 장로이다.
물론 그 사람을 다른 지방으로 옮길 때 그는 장로가 아니겠지만 그 지방에서는 장로인 것이다. 가정도 이와 같다. 칠팔십 명중에는 숙부님과 백부님들이 많기 때문에 당신이 거기서 큰 자가 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가정은 서너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이 이십 여세 밖에 안 되어도 큰 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다른 집에 가서도 큰 자 라는 것이 아니다. 아주 적은 서너 사람 중에서 당신이 큰 자인 것이다. 어느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상태가 다 좋고 자란 지방교회 안에서는 특별히 잘 자란 몇몇 사람이 장로가 되고 당신은 장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간 지방의 형제들이 아주 어리다면 당신은 거기서 장로가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지방적인 문제가 있다. 사도는 이와 다르다. 사도는 주님으로 부터 받은 각종 은사로 각지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에 지방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사도는 어디로 가든지 그의 직분 외에 모든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 장로는 지방에 속하기 때문에 지방의 사역만을 책임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본은 사도가 한동안이 자나 형제들을 보러 온 때 장로들을 택하여 세운 것이다. 어떻게 택하고 세웠는가? 바로 구원받은 형제들 중 사도가 있지 않았을 때 비교적 더 자란 자, 특별히 기꺼이 짊어지고, 가볍지 않고, 안정된 몇 형제를 장로로 세운 것이다. 사도는 교회가 어떤 단계와 수준에 이른 후에야 장로들을 택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사도 자신이 세울 수 없을 때에는 최소한 이런 일을 하도록 디도를 남아 있게 해야 한다. 이 일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디도서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었다. 또한 거기서도 똑같이 그레데의 [각성에 장로들을 세웠다](딛1:5). 사도들이 우리에게 준 본은 그들이 돌아오자마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다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 비교적 자라고 성숙하며 영적이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을 장로들로 택한 것이다. 사도들이 떠난 후에 당신은 지방의 책임을 짊어지는 몇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그들이 곧 장로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 할 것은 사도들은 사도들이 좋아한 사람을 장로들로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세우신 자들을 장로들로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들로 삼았다](행 20:28)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는 성령께서 이미 세우신 자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직분 안에서 누가 어떤 사람을 세웠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런 직분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은 영에 속한 것이다. 성령께서 먼저 세운 다음 사도가 성령의 뜻을 알고 다시 세우는 것이다. 만일 성령이 세우지 않았다면 사도가 그들을 세웠을지라도 성령은 그들이 장로가 될 수 없게 할 것이다. 교회 안의 모든 것은 성령이 주관해야한다. 사람은 아무것도할 수 없다.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교회 안에 남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조금도 가치가 없다. 그러므로 장로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가 세웠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성령이 세웠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면에서 자라야하고 장로로 세워지기 전에 성령이 주신 상당한 은사로 겸손하게 형제들을 인도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도가 아직 그를 장로로 세우지 않았어도 그의 영적인 방면의 위치로 인하여 이미 교회 안에서 자신이 장성한 자로 나타난 것이다. 사도는 돌연히 [뒷줄]에 앉은 어떤 사람에게 앞으로 나와서 장로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성령께서 그의 영적인 방면에서의 위치를 드러나게 했을 뿐이다.
이런 장로들은 그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장로 된 것은 지방 교회의 일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지방의 제한을 받는다. 서머나에서 장로 된 사람이 에베소에 갈 때는 장로가 아니고, 에베소에서 장로 된 사람이 서머나에 갈 때에도 장로가 아니다 . 성경 안에 지방의 사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을 초월한 장로도 없다. 모든 장로는 다 지방적인 것이고 모든 사도는 다 지방을 초월한다. 한 지방 교회를 다스리는 사도가 없고, 몇 지방 교회를 다스리는 장로도 없다. 모든 사도는 각지의 일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사도의 책임은 모든 교회를 세우는데 있다. 한 교회가 세워질 때 사도는 교회를 다스리는 책임을 그 지방에 있는 장로들에게 맡기고 즉시 손을 놓아야 한다. 사도에게는 지방교회에 대한 절대적인 책임이 없고, 지방교회의 책임을 다 장로들에게 있다.
만일 사도가 어떤 지방을 두 차례 방문할 때 그 지방 장로들이 원하면 받을 수 있고 원치 않으면 거절할 수 있다. 만일 사도가 어떤 지방 교회의 장도들에게 거절당했다면 사도는 할 수 없이 그 지방을 떠나야 한다. 지방의 권한이 사도의 손에 있지 않고 장로들의 손에 있기 때문에 사도는 장로들을 강요할 권한이 없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음란의 죄를 행한 믿는 이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만일 우리가 바울이었다면 고린도 교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을 추방한 것을 특별히 여러분께 통보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바울이 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게 그들을 쫓아내라고 권한 것이었다. 만일 고린도의 믿는 이들이 영에 속했다면 바울의 권면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듣지 않아도 바울에게는 도리가 없다. 그들이 바울의 권면을 받지 않는다면 그들이 영적인 생명에 있어서 틀렸지만 수속에 있어서는 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방 교회이기 때문이다. 매우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바울은 단지 영적인 권위로, 곧 주예수의 이름 및 주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런 사람을 사탄에게 맡겨 그의 몸을 멸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그 사람을 쫓아낼 권한이 없고 다만 기도하고 주님께서 처리하시도록 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지방 교회의 일은 완전히 독립된 것으로서 누구도 그 행전을 간섭할 수 없다. 성경에서 한 지방의 책임은 다 지방에 있는 장로들에게 맡겨졌다.
아마 어떤 사람은 왜 베드로나 요한은 사도이면서 또한 예루살렘의 장로들이냐고 물을 것이다(벧전 5:1, 요이 2:1, 요삼 1절). 이것은 그들이 각지 사역의 책임을 짊어질 뿐 아니라 지방 교회의 책임을 짊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갈 대에는 사역의 책임을 짊어지고 밖에서 사도된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올 때에는 교회의 책임을 짊어지고 그 지방의 장로들인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자기가 본래 있는 교회에서 밖으로 적게 나가는 사도는 그 지방의 장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이 나갈 때에는 사도들이었고 돌아와서는 장로들인 것이다. 그들은 사도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의 장로가 된 것이 아니라 형제의 자격으로 예루살렘에서 장로가 된 것이다. 가령 어떤 교회가 외지에서 온 사도에 의해 세워졌다 하자.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한 면으로 사도가 되고 또 한 면으로 자기가 세운 교회 안에서 장로가 될 수 있다는 선례(先例)가 없다. 그 사람은 사도가 될 수 있을 뿐 장로는 될 수 없다. 그가 본래 있었던 교회에서는 그가 형제이고 또한 장로도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세운 교회에서는 그 지방 교회의 성질과 지방을 초월한 사도의 성질을 지키기 위하여 그로 하여금 장로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다소에서 나와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다. 바울이 에베소서에 삼 년 동안 거했지만 그는 에베소에서 장로의 책임을 맡지 않고 사도의 일만을 했다. 바울은 사도의 자격으로 에베소에서 사역하여 에베소 교회를 세웠기 때에 에베소에서 장로가 될 수 없다. 바울이 에베소에 몇 년 더 거할지라도 장로의 책임을 맡을 수 없고 오직 사도의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베드로와 요한도 사도이며 장로들이지만 바울은 계속 사도였고 한 지방의 장로가 된 적이 없다. 한 가지 특별히 주의 할 것은 하나님의 보편적 교회 안에 장로가 있은 적이 없듯이 하나님의 지방 교회에도 사도가 있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장로의 책임
성경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은 후에는 그 사람 자신에게 할 일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고 장로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일하는 것도 아니다. 장로는 감독자(행 2:28, 딛 1:5-7)로서 형제들로 하여금 일하도록 감독한다. 여러분은 공사를 감독하는 사람을 알 것이다. 공사를 감독하는 사람은 일꾼들을 대신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꾼들이 일하도록 감독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형제들이 일을 하고 장로들은 다만 감독할 따름이다. 성경에는 일하지 않는 형제가 없다. 모든 형제가 다 일해야 한다. 장로는 바로 형제들이 일하고 있을 때 감독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장로가 교회 일을 혼자 다 하거나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일하는 것을 감독하는 자임을 안다. 장로는 제창(提唱)하는 사람이요 감독자에 불과하다. 일과 사역은 절대적으로 형제들이 하는 것이고 장로는 다만 지휘하는 책임만을 지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담력이 작아서 감히 일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럴 때 장로는 그를 밀어줘야 한다. 또는 형제들이 어떤 방면의 필요를 모른다면 장로는 그들에게 말해줘야 한다. 혹 어떤 형제가 무엇을 너무 빨리 할 경우 장로는 그를 약간 저지해야 한다. 장로는 대신 일하거나 모든 것을 일괄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그들이 하는 것을 감시하는 것이다. 성경 안의 장로는 대신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일괄하는 것도 아니고 감독하는 것이다.
성경은 장로에게 두 방면 곧 사무적인 면과 영적인 면의 책임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자면 돌보고 목양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는 것](딤전 3:5)이 장로의 첫째 책임이다. 교회안의 모든 행정과 사무와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주장하고 진행하며 주의 하는 가를 마땅히 다 장로가 책임지며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는 수동적인 형제들이 한사람(혹은 몇 사람)의 지휘를 받거나 그 한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하게하고 자기들은 다만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안의 모든 것은 [서로]와 [피차]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돌아보는 일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그것이 일괄하여 하거나 대신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함께 하는 것임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쉽게 주장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교회의 성질은 누가 머리 되는 것이 없고(오직 그리스도만이 머리이심) [서로 연합하여 지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 안에 장로의 돌봄은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본]인 것이다(벧전 5:31). 주장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이는 곧 자신만 일하고 다른 사람은 일하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은 수동적으로 일하고 자신은 일하지 않고 명령만 내리는 것이다. 본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곧 다른 사람이 함께 하도록 친히 본을 세우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데리고 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하고 자신도 하며 다른 사람보다 더 일하고 잘하여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교회를 돌아보는 원칙과 방법이다. 자신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계속 하라고 명령하는 것도[본]의 가르침이 아니다.[본]은 스스로 행하고 다른 사람도 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행하고 자신도 하는 것이 본이다.
그러나 장로의 책임을 다만 교회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다. 만일 장로에게 은사가 있다면 응당 영적인 면의 책임을 짊어져야한다.[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장로의 일반적인 책임은 교회를 돌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부류(모든 사람이 아님)의 장로들은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고, 선지자이며 교사이기도 하므로 그들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에게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함이라].(딛 1:9)고 말했다. 그러므로 지방교회의 가르침과 말씀 전함은 사도의 일이 아니라 직분이 있는 그 지방의 형제, 특히 직분이 있는 장로의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다스리는 것이 지방적인 것처럼 전도와 가르치는 것도 지방적이다. 사도의 기능은 완전히 한 지방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방의 사역에 대해 특히 사역이 있는 장로는 응당 책임을 많이 짊어져야한다.
목양도 특히 장로의 일이다.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에게[너희는···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하나님이 교회를 치라](행 20:28)고 말했을 뿐 아니라, 베드로도 각처로 분산된 유대 신자들 중 장로 된 자들에게,[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벧전 5:20)고 말했다. 하나님은 목양하는 일을 주의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양자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목양자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방법은 복음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밖에서 온 사람 중 몇몇을 남겨 돌보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지방에서 비교적 더 자란 사람들 중에서 목양의 일을 하도록 사람을 택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목자는 지방적인 것으로서 다른 곳에서 파견되거나 옮겨 온 사람 중에서 남은 자가 아니라 그 지방의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역이 실패하는 한 가지 원인은 우리가 사도와 장로의 책임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데 있다.
장로들
그러나 이러한 돌봄과 목양의 일을 하는 자는 오늘날 [목사]와 같이 한 지방에 오직 한 사람 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제도는 성경에 없다. 오늘날과 같이 한 지방 교회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일괄하고 한 사람이 모든 영적인 책임을 지는 것은 성경에서 선례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목자는 성경적인 것이지만 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제도인 목사 제도는 사람의 육체의 발명이다.
성경 안에서 한 지방 교회의 장로나 감독은 단수로 쓰인 적이 없고 다 복수로 되어있다. 하나님은 어떤 형제가 특별한 지위에 서서 다른 형제들로 하여금 그에게 순복하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몇 형제들이 한 교회를 돌아봄으로서 서로 복종하고 서로 기다리며 피차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를 배우는 것을 기뻐하신다. 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은 얼마나 쉽게 사람을 교만케 하고 자신을 매우 중요하게 보며 다른 형제들을 억누르는가(요삼). 하나님의 방법은 지방 교회가 어떤 강한 인격에 의해 지배받거나 교회가 한사람의 소유물이 되거나 한사람의 색깔을 지니지 않도록 교회를 보호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마음대로 행하고 단독으로 행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자신의 산업으로 삼는 것을 피하려면 여러 장로들이 한 교회를 책임지고 돌보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다른 형제들의 의견을 주의 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모든 사람은 양무리가 어떤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무리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모두가 지체이므로 누구도 다른 사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회는 다 서로와 피차의 것이다. 피차와 서로의 것이 아닌 것은 교회가 아니다.
장로가 교회를 돌봄의 유익
지방 교회가 세워질 때 지방 교회의 모든 권위와 모든 일을 다 즉시 지방 교회에게 맡겨져야 하고 사도에게는 권위가 없다. 사도가 돌아가서 다시 사역할지라도 열매는 여전히 지방교회에 맡겨져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사도도 어떤 형제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사도의 첫 번째 사역으로 사람을 얻고 교회를 세운 후 지방에 있는 모든 권위와 일은 다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사도가 두 번째로 돌아와서 사역하더라고 얻은 모든 열매를 그들에게 맡기고 사도의 손은 항상 비어 있어야 한다. 사도 개인은 사람들의 주인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종이다. 사도의 손은 항상 비어 있어야한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법을 쓰시는가? 그것은 밖에서 온 사역자가 한 지방 교회를 돌아보는 것은 이상적(理想的)인 것이고 그 지방의 여러 장로들이 한 집아 교회를 돌아보는 것은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역자(지방 교회 안의 집사와는 다름)가 지방 교회를 돌볼 때의 목표는 지나치게 높을 수 있고 장로가 지방교회를 돌볼 때의 목표는 비교적 실제적일 것이다. 사역자의 일하는 방법은 전문적인 것이므로 장로들이 한 지방에 있는 것은 그 지방에게 더욱 유익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는 지방 교회의 일에 대해 묻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지방 교회의 장로들에게 지방 교회를 어떻게 돌보는가를 알려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사람을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불어와 그들에게 어떻게 다스려야 에베소 교회가 자라는 가를 알려주며 도움을 주었다. 교회를 직접적으로 돌보는 자는 장로들이고 사도는 장로들의 손을 통하여 형제들을 돌보는 것이다.
만일 사도들이지방 교회의 틀린 것을 보았다면 편지를 써서 그들을 권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에 대해 영적인 권위가 있을 뿐 정식 권위는 없다. 사도들은 여전히 각지 교회의 일을 돌보지만 그들의 권위는 영에 속한 것이다. 정식 권위는 장로들의 손에 있다. 우리는 이 두 종류의 권위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만일 장로들이 영적이고 겸손하며 온유하다면 사도의 권면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스스로 옳다 하고 강퍅하고 교만하다면 권면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영적인 면에서 틀린 것일 뿐 정식 권위 면에서는 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회를 정식으로 돌보는 자는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영적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지방에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형제들이 생기고 한 단체가 있다면 그들은 그들이 지방 교회인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교회는 한 무리의 형제들이다. 이 단체에 비교적 영적인 형제들이 있을 때 그들은 장로들이다. 장로는 여러 형제들 중에서 비교적 나은 형제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은 교회 안의 돌봄이 피차의 일이며 건축도 피차의 일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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