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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고헌> |
<횡계서당> |
숙종 때의 성리학자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선생이 숙종 27년(1701)에 영천시의 대전(大田)에서 횡계(橫溪)로 이거(移居)하여 집을 지어 태고와(太古窩)라고 하였으나, 영조 6년(1730) 문인들이 개축하여 모고헌(慕古軒)이라 하였다.
횡계서당은 숙종 27년(1701)에 건축하여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선생과 지수(篪叟) 규양(葵陽)선생 형제께서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書堂)이다.
•소재 :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457-3
o 영천 매산고택(永川 梅山古宅) 및 산수정(山水亭) (중요민속자료 제24호)
매산(梅山) 정중기(鄭重器)선생이 거처하던 집을 그의 둘째 아들 일찬(一鑽)이 규모를 크게 확장하여 건립한 종택으로 당호를 간소(艮巢)라 하였다. 본채는 전형적인 'ㅁ'자형 집이다. 측면 5칸의 건물 오른쪽 앞으로 사랑채와 누마루를 사랑방과 직각을 이루어 덧붙인 형식이 특이하다.
•소재 :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1020
<산수정>
매산고택(梅山古宅)의 서북쪽 골짜기 암벽 위에 매산 정중기 선생이 만년(67세)에 지은 정자로 벼슬을 그만두고 강학하던 곳이다. 매산공은 주자의 뜻을 취하여 산수정이라 불렀다.
•소재 : 영천시 임고면 삼매리 1097
o 연정고택(蓮亭古宅)과 연정(蓮亭) (중요민속자료 제107호)
영조 원년(1725)에 함계(涵溪) 정석달(鄭碩達)의 손자인 정일릉(鄭一錂)이 건축한 가옥으로 넓은 대지에 연당(蓮塘)이 있어 연정고택(蓮亭古宅)이라 불리기도 한다. 일심당(一心堂)이라 불리는 정침과 동서협실, 사랑채, 행랑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정>
연정은 일릉(一錂)이 지은 정자로 연정고택(蓮亭古宅)과 50여m 떨어진 곳에 있는 정자(亭子)이다. 건축 직후 연못에서 저절로 연꽃이 피어나서 연정(蓮亭)이라고 편액(扁額) 하였다 한다.
•소재 :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131
o 충효재(忠孝齋)와 고종황제밀조비(高宗皇帝密詔碑) (기념물 제81호)
<충효재>
구한말(舊韓末) 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 순국(殉國)한 산남의진(山南義陣) 대장(大將) 정환직(鄭煥直) 선생과 그 장남인 단오(丹吾) 용기(鏞基) 양세의 저택과 서당이었으나, 1907년 왜적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1927년 양세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복원하였다.
<고종황제밀조비>
•소재 :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626
Ⅵ. 世 系 圖
1. 迎日鄭氏原派圖
1世 2世 3世
襲明 - 燮均 - 謙牧 -
4世 5世 6世 7世 8世 9世 10世 11世
- 麟信 - 之泰 - 宗興 - 林 - 仁壽 - 裕 - 云瓘 - 夢周 : 1파
次延 - 師保 - 化龍 - 琦 - 淑瞻 - 谷 - 喬 - 希孫 : 8파
2. 宣務郞公派 世系圖
11世 12世 13世 14世 15世 16世 17世
文裔 - 從韶 - 以揮 - 次諄 ………………………………… : 沙皐公派(沙川. 大川)
次謹 - 允良 - 世雅 - 宜藩 … : 柏巖公門中(大田. 仙源. 梅谷. 慈川. 大環.
愚巷. 碧溪)
維藩 … : 處士公門中(長鬐. 浦項. 博沙. 古坪. 舍谷)
守藩 … : 護軍公門中(石洞. 漆谷. 龜尾. 仁邱. 忠孝.
月淵. 魯巷)
以僑 …………………………………………… : 校理公派(金泉鳳溪)
以諶 …………………………………………… : 持平公派(永川. 慶山. 古道. 漆谷. 迎日. 金泉)
歸韶 ……………………………………………………… : 判官公派(富溪(諸富))
致韶 ……………………………………………………… : 佐郞公派(仙花. 元堂. 道川. 庫旨. 明珠)
依韶 ……………………………………………………… : 訓導公派(錄田)
Ⅶ. 현조(顯祖)
1. 본 묘역 상계(上系)의 현조
1世 습명(襲明, ?∼1151)
∙호(號) : 동하(東河), 형양(滎陽).
∙관직(官職) : 고려(高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3대 간신(諫臣). 의종의 사부(師傅), 한림학사(翰林學士),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행적(行蹟) :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삼국사기편찬(三國史記編纂), 인종의 명으로 충남 태안반도 굴포(堀浦)에 운하개착(運河開鑿).
∙최자(崔梓),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敱), 이중(李仲), 최주(崔奏) 등과 함께 '시폐 10조(時弊十條)'를 상주(上奏).
∙실기(實紀)와 단비(壇碑, 영의정 유척기 찬), 신도비(神道碑), 남성재(南城齋)가 있음.
∙향(享) : 오천서원(烏川書院), 하동옥산서원(河東玉山書院).
8世 인언(仁彦)
∙호 : 송간(松磵).
∙관직 : 봉익대부전공판서(奉翊大夫典工判書).
∙포은선생(圃隱先生)의 종증조부(從曾祖父)로서 처음 영천 전촌(永川 錢村)에 은입(隱入)하신 입향조(入鄕祖).
9世 광후(光厚) - 판서공(判書公)
∙관직 : 문과급제, 고려조 상주목사, 조선조(朝鮮朝) 공조판서.
∙가문의 안녕(安寧)을 위해 공조판서를 승낙하여 향화(香火)를 천추(千秋)에 잇게 하였다.
∙묘(墓) :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원당재(元堂齋)가 있음.
∙만사(輓詞) : 영의정 성주 이 직(李稷).
∙묘지명(墓誌銘) : 12대손 참의 중기(重器)가 찬하고, 갈명(碣銘)은 8대손 사물(四勿)이 찬.
∙배 : 익양군부인이씨(益陽郡夫人李氏), 전리판서 후룡(典理判書 厚龍)의 여(女).
11世 문예(文裔) - 생원공(生員公)
∙조선 태종(太宗)2年 생원,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
∙전촌(錢村)에서 대전동(大田洞)으로 옮긴 이파(二派) 파조.
∙자, 손(子, 孫) 양대(兩代)에 8급제(及第)가 났다.
∙묘 : 영천시 오미동 삼귀, 삼귀재(三歸齋)가 있음.
∙묘표(墓表) : 9대손 석주 기(九代孫 碩冑 記)
∙배 : 영양이씨(永陽李氏<永川李氏>), 부사직(副司直) 현실(玄實)의 여로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의 누님.
12世 종소(從韶)
∙자(字) : 가정(可貞). ∙호(號) : 정헌(靖軒).
∙세종조(世宗朝) 문과중시(文科重試),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류성원(柳誠源) 등과 동방급제.
∙관직 :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의성(義城), 영천(榮川, 현 영주), 예천(醴泉), 함양(咸陽) 군수(郡守), 통훈대부 성균관사성(通訓大夫 成均館司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이 항상(恒常) 오천정선생(烏川鄭先生)이라 추존(追尊)하였으며 단종(端宗)을 도운 유신(遺臣)으로 계룡산 숙모전(鷄龍山 肅慕殿)에 배향(配享)<西廡 30>.
∙묘 :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지문(誌文) : 9대손 참의 중기(重器) 찬.
∙배 : 숙인 평산윤씨(淑人 平山尹氏), 참판 통(統)의 여.
13世 이휘(以揮)
∙자(字) : 자건(子健).
∙문과중시에 급제.
∙관직 :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 현 新寧), 별제(別提), 용안현감(龍安縣監, 현 전북 익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직제학(直提學), 통정대부양주목사(楊州牧使).
∙지문(誌文) : 9대손 일찬(一鑽) 찬.
∙묘 : 조부 생원공(生員公)의 묘 계하.
∙배 : 숙인 춘천박씨 (淑人 春川朴氏), 효전(孝佃)의 여.
2. 본 묘역 내의 현조
14世 차근(次謹) - 선무랑(宣務郞)
∙자(字) : 신보(愼甫).
∙무오사화(戊午史禍)를 피하여 대전(大田)에서 자양 노항(紫陽 魯巷)으로 은입(隱入)하신 자양 입향조(入鄕祖).
∙배 : 벽진이씨(碧珍李氏)로 배원(培源)의 여. <생육신(生六臣) 이맹전(李孟專)의 증손녀(曾孫女)>.
15世 윤량(允良, 1515-1580)
∙자 : 원좌(元佐). ∙호 : 노촌(魯村).
∙관직 : 장사랑(將仕郞), 숙릉참봉(淑陵參奉), 창릉참봉(昌陵參奉).
∙갈명(碣銘) : 세마(洗馬) 이광정(李光庭) 찬.
∙행적 : 퇴계(退溪)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후 후진양성을 위하여 자양서당(紫陽書堂)을 설립하였으며 진사 노수(盧遂), 생원 김응생(金應生), 생원 정거(鄭琚)와 함께 임고서원(臨皐書院) 창건.
∙배 : 의인(宜人) 영천최씨(永川崔氏), 봉사(奉事) 덕금(德嶔)의 여, 계배(繼配) 영천최씨(永川崔氏).
15世 윤공(允恭) - 봉사(奉事)
∙배 : 영천최씨(永川崔氏), 계배 영천이씨(永川李氏).
∙갈명 : 정홍식(鄭泓植) 찬.
∙아들 귀아(貴雅)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사위는 순흥인(順興人) 군수 안제(安霽).
16世 세아(世雅, 1535-1612)
∙자 : 화숙(和叔). ∙호 : 호수(湖叟).
∙시호(諡號) : 강의(剛義).
∙24세에 진사(進士)에 합격.
∙1565년 31세 때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처단(處斷)하도록 상소(上疏).
∙1592년 5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지방(永川地方)에서 가장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켜 의병장(義兵將)에 추대되어 빼앗겼던 영천성(永川城)을 찾고, 경주성(慶州城) 싸움에서 적군에 포위되자 장자(長子) 의번(宜藩)이 부공(父公)을 구출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영천성, 경주성을 찾은 공(功)은 다른 장수(將帥)에게 양보하고 자양(紫陽) 옛 고장의 자호정사(紫湖精舍)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공의 추천으로 잠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 현 경남 양산)을 지낸 후 귀향하여 전란으로 불탄 임고서원을 중건하여 후진양성에 전념.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창석(蒼石) 이준(李埈),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선생 등 여러 선비들이 때때로 찾아와서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수려한 산수를 벗 삼아 천수(天壽)를 누리시어 향년(享年) 78세로 돌아가셨다.
∙1732년에 영천, 경주를 복성(復城)한 공(功)으로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증직.
∙1788년에 강의(剛義)란 시호(諡號)가 내려짐.
∙호수선생실기(湖叟先生實記)가 있으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은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찬하고 묘지명은 좌의정 송인명(宋寅命) 찬.
∙향(享) :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임란호국 영남충의단(壬亂護國 嶺南忠義壇),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慶州壬亂義士倡義壇碑)<경주황성공원>.
∙배 : 증 정부인(贈貞夫人) 일직손씨(一直孫氏)로 현감 치운(致雲)의 여<모당의 고모>.
17世 의번(宜藩, 1560-1592)
∙호수공(湖叟公)의 장자(長子).
∙자 : 위보(衛甫). ∙호 : 백암(柏巖).
∙행적 : 26세에 진사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공(父公)이신 호수공(湖叟公)을 따라 의병에 참가하여 영천성(永川城)을 복성(復城)하고, 경주성(慶州城) 싸움에서 적에게 포위되신 부공을 구출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순국하였으나 시신(屍身)을 찾지 못 하였다.
∙부공께서 그가 남긴 시(詩)와 친구들의 만․제문(輓․祭文)를 모아 장사하니 사람들이 시총(詩塚)이라 부른다.
∙그 후 조정에서 <충신효자좌승지정의번지문(忠臣孝子左承旨鄭宜藩之門)>이란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충효각(忠孝閣)을 세웠다.
∙충효정려(忠孝旌閭)는 영의정 채제공(領議政 蔡濟恭) 기(記).
∙그 후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의 증직이 내려졌다.
∙갈명은 부제학 오광운(吳光運)이 찬하고 묘지명은 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 류명천(柳命天)이 찬함. 충이당(忠怡堂)이 있음.
∙향 :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祀), 임란호국 영남충의단(壬亂護國 嶺南忠義壇).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慶州壬亂義士倡義壇碑)<경주황성공원>.
∙배 : 증 정부인(贈 貞夫人) 영월신씨(寧越辛氏), 참봉 덕린(德麟)의 여.
17世 수번(守藩, 1580-1621)
∙호수공의 4子.
∙자 : 정보(貞甫).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호수공, 숙형(叔兄) 안번(安藩)과 더불어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에 참가.
∙관직 : 무과급제,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내금위장(內禁衛將). 형난원종일등공신(亨難原從一等功臣).
∙호군공사적지(護軍公事蹟誌), 위사재(衛社齋)가 있으며,
∙갈명 : 참의 정중기(鄭重器)가 찬하고, 지명은 서강(西岡) 전삼성(全三省)이 찬.
∙향 : 임란호국 영남충의단(壬亂護國 嶺南忠義壇).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慶州壬亂義士倡義壇碑)<경주황성공원>.
∙배 :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생원 희익(希益)의 여.
18世 호례(好禮, 1604-1672)
∙백암공(柏巖公) 의번(宜藩)의 사자(嗣子)<생부(生父) 수번(守藩)>.
∙자 : 지립(子立). ∙호 : 요산(樂山).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창의(倡義).
∙1636년 무과급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위(護衛).
∙관직 : 해남현감(海南縣監).
∙갈명 : 대사헌 권해(權瑎)가 찬하고 충이당(忠怡堂)이 있음.
∙배 : 숙인(淑人) 순천박씨(順天朴氏)로 사과(司果) 종우(宗祐)의 여 <사육신 박팽년(死六臣 朴彭年)의 7세손녀>, 계배(繼配) 경주최씨(慶州崔氏) 통정대부 산룡(山龍)의 여.
18世 호의(好義)(1602-1655)
∙호군공(護軍公) 수번(守藩)의 장자(長子).
∙자 : 자방(子方). ∙호 : 명계(明溪).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문인(門人).
∙정묘·병자호란 때 창의, 승의랑(承議郞).
∙상화집(常華集), 정정정(亭亭亭)이 있음.
∙갈명은 부윤(府尹) 정간(鄭榦)이 찬.
∙배 : 의인(宜人) 용궁전씨(龍宮全氏), 삼성(三省)의 여.
3. 본 묘역 외의 현조
17世 안번(安藩, 1574-1630)
∙호수공(湖叟公)의 3자.
∙자 : 영보(寧甫). ∙정유재란 때 화왕산(火旺山) 회맹 참가.
∙관직 : 무과급제, 어모장군 용양위부사과(禦侮將軍龍驤衛副司果), 포이포만호(包伊浦萬戶).
∙묘 : 울산 청양면 정자방(蔚山 淸凉面 亭子坊) 합폄(合窆). 덕하재(德下齋)가 있음.
∙갈명 :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 찬.
∙향 : 임란호국 영남충의단(壬亂護國 嶺南忠義壇).
∙배 : 숙인(淑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증 공조참의 극립(克立<號 동봉(東峯) 享 입암서원(立巖書院)>)의 여.
18世 호인(好仁, 1597-1655)
∙만호공(萬戶公) 안번(安藩)의 장자.
∙자 : 자견(子見). ∙호 : 양계(暘溪).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門人).
∙관직 : 진사, 문과급제. 통정대부 진주목사(通政大夫 晉州牧使),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
∙행적 : 진주관아(官衙)에서 녹봉(綠俸)으로 영일정씨의 인조기축보(仁祖己丑譜) 간행.
∙정묘·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창의.
∙향 : 대구 청호서원(大邱 靑湖書院).
∙문집과 양계정사(暘溪精舍)가 있음.
∙묘 : 영천시 화룡동(永川市 化龍洞).
∙갈명 : 부제학 장응일(張應一) 찬.
∙배 : 숙인(淑人) 월성손씨(月城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소(昭)의 5세손 충의위(忠義衛) 노(魯)의 여<경주 부윤 무안 박의장(府尹 務安 朴毅長)의 외손녀>.
18世 호신(好信, 1605-1649)
∙호군공(護軍公) 수번(守藩)의 차자(次子).
∙자 : 덕기(德基). ∙호 : 삼휴정(三休亭).
∙모당 손처눌, 여헌 장현광의 문인.
∙정묘·병자호란 창의. 승훈랑(承訓郞).
∙상화집(常華集), 삼휴정(三休亭), 초곡재(楚谷齋), 유적비(遺蹟碑)가 있음.
∙묘 : 영천시 고경면 초일리 (永川市 古境面 草日里).
∙갈명 : 야성 송이석(冶城 宋履錫) 찬.
∙배 : 창녕성씨(昌寧成氏), 찰방 이직(察訪 以直)의 여.
18世 호문(好問, 1605-1650)
∙만호공(萬戶公) 안번(安藩)의 차자(次子).
∙자 : 자유(子裕). ∙호 : 어봉(魚峯).
∙모당 손처눌, 여헌 장현광의 문인.
∙정묘호란 창의. 종사랑(從仕郞).
∙어봉정(魚峯亭)이 있고,
∙묘 : 영천시 청통면 계포리 포통산(永川市 淸通面 桂浦里 包通山).
∙갈명 : 채산 권상규(蔡山 權相圭) 찬.
∙배 : 의인(宜人) 영천윤씨(永川尹氏)로 주부(主簿) 승선(承善)의 여.
19世 시연(時衍, 1632-1687)
∙양계공(暘溪公) 호인(好仁)의 차자(次子).
∙자 : 달중(達仲). ∙호 : 학암(鶴巖) ∙통덕랑(通德郞).
∙문집과 붕래정(朋來亭)이 있음.
∙묘 : 고 목사공묘 좌하(考 牧使公墓 左下).
∙묘표(墓表)는 갈암 이현일이 술(述)하고, 갈명은 참판 권 해(權 瑎) 찬.
∙배 : 창녕조씨(昌寧曺氏), 윤효(胤孝)의 여, 계배(繼配)는 대구서씨(大丘徐氏) 행근(行謹)의 여.
19世 시간(時衎, 1635-1690)
∙양계공(暘溪公) 호인(好仁)의 3자(三子).
∙자 : 열지(悅之). ∙호 : 취성당(醉醒堂).
∙관직 : 성균생원(成均生員).
∙취성당 일고와 문집이 있고 취성당, 인동재(仁洞齋)가 있음.
∙묘 : 경주시 강동면 인동리.
∙갈명은 좌랑 김몽화(金夢華)가 찬하고 誌文은 三從孫 중기(重器)찬.
∙배 : 밀양박(朴)씨로 표(慓)의 여.
19世 시심(時諶, 1641-1690)
∙해남현감 요산공 호례(好禮)의 3자.
∙자 : 노경(老卿).
∙관직 : 무과급제, 용양위부사과, 훈련원 판관, 용양위부호군전주영장, 내금위장 겸 사복장(司僕將), 충무위대호군.
∙묘 : 영천시 자양면 운주산(雲住山) 정상.
∙갈명 : 갈암 이현일.
∙배 : 숙부인(淑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로 처사 시철(時哲)의 여(사간원 헌납 원기(遠器)의 손녀).
20世 석달(碩達, 1660-1720)
∙대호군 시심(時諶)의 장자.
∙자 : 가행(可行). ∙호 : 함계(涵溪).
∙갈암 이현일 문인. 세칭 涵溪 처사라 함.
∙관직 : 통덕랑(通德郞), 예학에 통달.
∙향 : 매오정사(梅塢精舍).
∙문집과 함계정사(涵溪精舍), 하신재(下新齋)가 있음.
∙저서 : 가례혹문(家禮或問), 영락풍아(永洛風雅).
∙묘 : 영천시 자양면 신방.
∙묘갈명은 정범조(丁範祖)가 찬함.
∙배 : 공인(恭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숙(塾)의 여.
21世 만양(萬陽, 1664-1730)
∙양계공(暘溪公) 호인(好仁)의 증손(曾孫).
∙자 : 경순(景醇). ∙호 : 훈수(塤叟).
∙갈암 이현일, 명재(明齋) 윤증(尹拯) 문인.
∙관직 : 장사랑(將仕郞), 순릉참봉(順陵參奉) 증 사헌부지평(贈 司憲府持平).
∙아우 규양(葵陽)과 함께 많은 후진을 배출하였으며,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밀암(密庵) 이재(李栽), 병애(屛厓) 조선장(曺善長),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서계(西溪) 박태무(朴泰茂)<남명 후학(南冥 後學)> 등 당대 명유(名儒)와 교유(交遊).
∙저서 : 훈지록(塤篪錄)을 비롯하여 아우 규양(葵陽)과 함께 많은 저술을 하였으며 곤지록(困知錄), 이기집설(理氣輯說), 가례차의(家禮箚疑), 의례통고(疑禮通攷) 등.
∙문집 62권과 모고헌(慕古軒), 옥간정(玉磵亭)이 있음.
∙향 : 횡계서당(橫溪書堂).
∙묘 : 원당(元堂) 사성공묘 좌하(司成公墓 左下).
∙갈명 : 정언 광릉 이만운(廣陵 李萬運) 찬.
∙배 : 공인(恭人) 재령이씨(載寧李氏), 생원 지욱(之煜)의 여, 계배는 창녕조씨(昌寧曺氏), 문하(門夏)의 여.
21세 규양(葵陽, 1667-1732)
∙훈수(塤叟) 만양(萬陽)의 아우.
∙자 : 숙향(叔向). ∙호 : 지수(篪叟).
∙갈암 이현일, 명재 윤증 문인.
∙관직 : 장사랑(將仕郞), 현릉참봉(顯陵參奉).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 예학, 천문, 지리, 역학, 정치, 경제, 율려(律呂), 과제(科制) 등에 두루 정통. 당시 사림들이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와 비유하였으며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무신년(戊申年)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때 창의하여 수장(首將)에 추대됨.
∙저서 : 훈지록(塤篪錄), 심경질의(心經質疑), 치도의설(治道擬說), 대학차록(大學箚錄) 등
∙문집 62권과 모고헌(慕古軒), 옥간정(玉磵亭)이 있음.
∙향 : 횡계서당(橫溪書堂).
∙묘 : 영천시 화북면 죽전리(永川市 華北面 竹田里).
∙갈명 : 지평(持平)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 찬.
∙배 : 공인(恭人) 인천이씨(仁川李氏), 교관 석복(碩馥)의 여.
21世 중기(重器, 1685-1757)
∙함계공(涵溪公) 석달(碩達)의 장자.
∙자 : 도옹(道翁). ∙호 : 간소(艮巢), 매산(梅山).
∙훈수 정만양, 지수 정규양, 갈암 이현일 문인.
∙관직 : 문과(文科), 통정대부형조참의(通政大夫刑曹參議).
∙향 : 매오정사(梅塢精舍).
∙문하(門下)에 130여 문생(門生)을 배출. ∙무신란 창의(영조 때 이인좌의 난).
∙저서 : 가례집요(家禮輯要) 7권, 주서절요집해(朱書節要集解) 8권, 포은속집(圃隱續集).
∙문집(文集) 12권.
∙묘 : 영천시 자양면 하신방(永川市 紫陽面 下新坊).
∙갈명 : 정재 류치명(定齋 柳致明) 찬.
∙배 : 숙부인(淑夫人) 의성김씨(義城金氏), 방겸(邦謙)의 여.
25세 유곤(裕昆, 1782-1865)
∙함계공(涵溪公) 석달(碩達)의 5세손(世孫).
∙자 : 덕부(德夫). ∙호 : 만오(晩悟).
∙철종 때 성리학자(性理學者).
∙남와(南窩) 정동필(鄭東弼), 창헌(蒼軒) 조우각(趙友慤),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인.
∙향 : 만오정(晩悟亭).
∙만오문집(晩悟文集) 12권 7책과 보본당(報本堂)이 있음.
∙묘 : 영천시 매산리 월계(永川市 梅山里 月溪).
∙갈명 : 진성 이중철(眞城 李中轍) 찬.
∙배 : 안동권씨(安東權氏), 동기(東箕)의 여.
25세 유준(裕俊, 1787-1852)
∙함계공(涵溪公) 석달(碩達)의 5세손(世孫).
∙자 : 경부(慶夫).
∙관직 : 무과급제, 절충장군겸부호군(折衝將軍兼副護軍), 내금의장겸사복장(內禁衛將兼司僕將), 횡성현감겸원주도위(橫城縣監兼原州都尉), 통정대부행삼수도호부사겸병마첨절제사(通政大夫行三水都護府使兼兵馬僉節制使).
∙묘 : 영천시 화남면 죽곡 2리.
∙갈명 : 종 5세손 제헌국회의원 도영(島榮) 찬
∙배 : 숙부인(淑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로 복인(復仁)의 여. 계배는 신광진씨(神光陳氏) 동발(東發)의 여.
26세 환직(煥直, 1844-1907)
∙초휘(初諱) 치우(致右). 삼휴공(三休公)의 8세손(世孫).
∙자 : 백온(伯溫). ∙호 : 동엄(東广), 우석(禹石), 열남(烈南).
∙관직 : 가선대부 행도찰사(嘉善大夫 行都察使), 시찰사겸토포사(視察使兼討捕使),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시종신(侍從臣).
∙행적 :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후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밀지(密旨)를 받아, 장자(長子) 용기(鏞基)에게 영남(嶺南)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여 활동케 하였다.
∙1907년 10月 7日 용기(鏞基)가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순절하자, 산남의진의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되어 포항, 신녕, 청송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守備隊)에 큰 피해를 입혔다.
∙흥해에서 일군(日軍)에게 체포되어 영천 조양각(朝陽閣) 아래서 순국하였다.
∙포장(褒章) : 건국공로훈장대통령장.
∙산남의진비(山南義陣碑), 산남의진항쟁혈전비(山南義陣抗爭血戰碑), 고종황제밀조비(高宗皇帝密詔碑), 양세대장유허비(兩世大將遺墟碑), 충효동사적비(忠孝洞史蹟碑), 충효재(忠孝齋) 등이 있다.
∙묘 :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유허후원(永川市 紫陽面 忠孝里 遺墟後園).
∙갈명 : 중재 이호대(中齋 李好大) 찬.
∙배 : 정부인(貞夫人) 여강이씨(驪江李氏)로 재석(在奭)의 여.
26세 환덕(煥悳, 1857-1944)
∙호수공의 10세손(世孫).
∙자 : 응현(應賢). ∙호 : 퇴산(退山).
∙관직 :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역학(易學)에 능통하여 광무(光武) 원년(1897)부터 강희(康熙) 4년 한일합방까지 14년간 고종, 순종 양 황제(皇帝)의 최측근에서 총애를 받으며 보좌.
∙묘 : 김천시 대항면 묘내리(金泉市 代項面 猫乃里).
∙한말궁중비사(韓末宮中秘史)인 남가록(南柯錄)이 있음.
∙배 : 정부인(貞夫人) 연안이씨(延安李氏)로 인우(寅愚)의 여, 계배(繼配)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
27세 용기(鏞基, 1862-1907)
∙동엄(東广) 환직(煥直)의 장자(長子).
∙자 : 관여(寬汝). ∙호 : 단오(丹吾).
∙관직 : 혜민원총무(惠民院總務).
∙행적 :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각지에 통문(通文)을 보내어 일제의 침략상을 규탄.
∙동포들에게 애국심을 각성(覺醒)토록 혈죽가(血竹歌)와 단연가(斷煙歌)를 지어 세상에 반포.
∙부공(父公)의 명에 따라 영남(嶺南)에서 의병을 모아 산남의진(山南 義陣)을 조직하여 의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순국하였다.
∙포장(褒章) : 건국공로훈장독립장.
∙산남의진발상비(山南義陣發祥碑), 산남의진비(山南義陣碑), 산남의진항쟁혈전비(山南義陣抗爭血戰碑), 양세대장유허비(兩世大將遺墟碑), 충효재(忠孝齋)가 있음.
∙묘 :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유허 고묘 하(考墓 下).
∙지명 : 여강 이채원(驪江 李綵源) 찬.
∙배 : 숙부인(淑夫人) 경주최씨(慶州崔氏)로 재위(在暐)의 여.
Ⅷ. 부 록
1. 선외조모(先外祖母) 이씨부인(李氏夫人) 묘소의 외손봉사(奉祀).
사성(司成) 정종소(鄭從韶, 12世)공이 어린 시절에 외숙(外叔)인 대전 이보흠(大田 李甫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문예(文藝)가 뛰어났으며 은해사(銀海寺)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그곳에 들린 이웃 군(郡)의 윤통(尹統)태수가 재능이 뛰어남을 보고, 사위로 삼았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사성공(司成公)은 세종 때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자원하여 여러 고을을 살았으며 전랑(詮郞)을 거쳐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으로 재직타가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영천대전(永川大田)으로 돌아와 은거(隱居)하였다.
사성공의 장모(丈母)이신 이씨부인(李氏夫人)이 돌아가시자 영천시 북안면(北安面)의 반정(半亭)의 뒷산에 묘소를 쓰고 외손(外孫)인 목사공(牧使公)께서 외가(外家)에 후손(後孫)이 없으므로 묘소(墓所)를 수호하기 시작하였으나, 1987년에 군용지(軍用地)로 군사도로(軍事道路)에 편입됨으로 하천종약회(夏泉宗約會)에서 1987년 7월 29일에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작은 하천(夏泉)에 이장하여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묘사봉사(墓祀奉祀)를 하고 있다.
또한 노촌공의 장인이시고 호수공의 외조부이신 봉사(奉事) 최덕금(崔德嶔)공도 후손이 없어 400여 년 동안 외손들이 영천시 오미동 삼귀의 묘소 수호와 묘사봉사를 하고 있다.
2. 봉사공(奉事公) 따님의 묘
봉사공 정윤공(鄭允恭)의 따님이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安東市 臥龍面 嘉邱里) 순흥인(順興人) 안제(安霽)<호 동고(東皐). 관(官) 군수(郡守). 퇴계문인(退溪門人)>와 성혼하였으나 신행 전에 별세를 하니, 이곳 하천(夏泉)의 친정 선영하에 유택(幽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계비(繼妣) 출생(出生)인 승지(承旨) 경암(景菴)의 후손들이 450 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년 4월 셋째 일요일에 세향(世鄕)인 안동에서 이곳에 와서 묘사를 지내고 있다. 봉사공은 따님이 돌아가자 따님 몫으로 재산을 안씨(安氏) 문중에 보냈으나 안씨 문중에서는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돌려 보내온 것을 호수공(湖叟公)께서,
“누이를 잃은 것도 가슴 아픈데 어찌 그 재산을 차지할 수 있겠느냐.”
하며 다시 돌려보냈다는 사실이 호수공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3. 충노(忠奴) 억수(億壽)의 묘
<백암공 묘소 계하의 충노 억수 묘>
임진왜란 때 경주성 복성(復城) 전투에서 부공(父公)이신 호수공(湖叟公)께서 적진에 포위되어 위급함을 알고 아드님이신 백암공(柏巖公)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세 번째 적진으로 들어 갈 때에 그 종 억수(億壽)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를 위하여 사생(死生)을 결단(決斷)하지만 너는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하니 억수(億壽)가 말하기를,
“제가 듣건 데 종과 주인의 의리(義理)가 부자(父子)와 같다 하옵니다. 이제 상전이 죽기를 결심(決心) 하옵는데 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말을 잡고 앞장서서 싸우다 백암공과 같이 목숨을 버리니 충의(忠義)가 사람을 감동시킴이 이와 같았다.
그래서 백암공 묘 계하(階下)에 무덤을 만들고 매년 묘사 때 주과포(酒果脯)로 의리(義理)를 기리고 있다.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柳命天이 찬한 백암공 묘지명 중에서
<하천묘역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