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7
1. 한국은 k방역은 타국에 비해 선전을 하고 있지만 타국처럼 펜데믹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재난은 쉽게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이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우리 사회와 구성원 각자의 아비투스를 드러내고 있다.
그렇기에 사회의 단점을 보다 정확히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2. 마찬가지로 교회도, 성도들도 재난을 맞이하여 신앙인들이 외면하고 있었던 인간의 내면을 직시하게 되었다. 한국은 유학의 영향으로 일방적 가르침에 익숙한 경직된 사회였기에 “유교가 죽어야 사는 나라”이다. 시편 77편, 아삽의 시를 보면 환란을 만나서 자책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고심하는 시간을 통해(1-9절) 스스로 성장하는 것을(10-20절) 알 수 있다. 욥기서를 보면 아예 친구들과의 격론, 하나님과의 다툼을 통해 시야가 넓어지며 지경이 넓어지는 경험을 한다. 전형적인 하브루타형 신앙교육이다. 환란의 시간을 맞이하여 고민과 궁구를 통해 신앙의 성장을 이루었다.
3. 창조론과 진화론을 떠나서 모두가 인정하는 인간과 유인원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모방과 교육이다. 인간은 지식의 유무를 떠나서 아이에게조차 배울 것이 있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집단 교육과 동료 학습, 그리고 지적, 사회적 갑이 을에게 배우는 리버스 멘토링 등의 모방과 티칭을 통해서 발전을 이루었고, 그것은 문명을 이루었고, 전통을 이루었다. 문명과 축적된 거인 위에서 세기의 발견을 한 아이작 뉴턴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총, 균, 쇠」의 저자 재래드 다이아몬드는 전쟁이 인류사를 발전시켰고, 여러 이유로 전쟁을 겪지 않고 발전이 없었던 국가는 결국 사회의 발전과 변혁에 따라 타대륙의 침략과 정복을 당한다고 하였다. 아즈텍 문명이, 폴리네시아 제국이, 경쟁 상대가 없어서 전쟁이 없었던 청나라가 타대륙의 침략과 정복, 심지어는 멸망까지 당했다. 과거 국가에게는 전쟁이, 인류에게는 재난이 필요악이었다. 국가는 전쟁을 통해, 인류는 재난을 통해 퇴보하지 않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명을 통해 발전하고, 고난을 통해 성숙해진다.
5. 한국교회의 밑바탕에는 무속신앙에서 비롯된 기복신앙이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폐단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유교주의적 신앙이다. 토론과 의문을 허용되지 않고 일방적인 지식의 수여는 비상정의 사태에 대해 유연하지 대처하지 못하게 하며 특히 지금과 같은 재난에서는 거의 그 기능을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은 큰 것이 아름답다는 메가 컬쳐의 영향을 받은 메가처치들이 등장하고 메가처치와 메가처치를 뒤쫓는 클론처치가 주류가 되었기에 경직된 사회가 되었다. 메가처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메가처치가 한국에서 큰 역할을 감당한 것도 사실이고 순기능도 매우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메가처치와 작은 교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한국교회는 메가처치의 가치관이 클론 처치를 통해서 작은 교회들로 부흥의 메커니즘 전달은 가능해도 리버스 멘토링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구조이고, 교회 간의 동료 학습이나 집단 학습이 형성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6. 이 시간이 교회를 무너뜨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이 사건을 디딤돌 삼아 일어나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위대한 발견과 발전을 이루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복을 받고 부유함을 얻었다고 자랑하였다면 욥처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만의 공작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멸족의 위험이 닥쳐올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말한다. “네가 황비가 된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어찌 알겠느냐?”
7. 코로나로 인해 정부에서 특정 업체의 휴업을 명령할 때마다 즉각적인 반발과 데모들이 발생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이고, 스스로의 삶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고, 주신 이도, 거두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자발적으로 먼저 죽고, 망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망하기 전에 믿는 사람이 먼저 깡통 차고, 교회가 먼저 깡통교회가 될 때 과연 세상은 교회를 무시할까, 존중할까? 나 자신도 이렇게 살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흉내라도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이미 많은 교회가 이렇게 헌신하고 희생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8. 베드로전서는 성도를 권면하고 고난을 이겨낼 것을 권면하는 편지이다. 왜냐하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한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으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함으로 고난을 극복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세상을 긍휼히(compassion) 여긴다면, 뜨겁게 사랑한다면 이 시대의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을 결단하지 않을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지형과 여러 이유로 항상 오른쪽으로 이동을 했다. 그래야 고지대인 예루살렘에서 저지대인 여리고를 편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거꾸로 낮은 저지대에서 높은 고지대로 거슬러 오르셨던 와디 켈트의 길을 가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살아있는 연어처럼 이 시대의 가치관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향해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9. 좁은 캠퍼스가 아닌 세상이 학교이며 세상이 교육이라는 미네르바 스쿨처럼 교회도 강제적으로 교회를 벗어나 세상과 어울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이 강제적으로 예루살렘을 벗어나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며, 복음을 위하여 순교하였듯이 이제는 교회는 건물의 한계를 벗어나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는 존 웨슬리의 외침이 우리의 외침이 되어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한국은 재난은 비교적 잘 선전하고 있지만 재난에 대한 교육은 외면하고 있다. 반면 타국들은 방역은 부족하지만 캐나다, 노르웨이, 프랑스 등의 국가들은 아이들에게 공교육 시간에 펜데믹과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교육을 하는 것에 비하면 아직 교과과정에 파묻혀 시대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진주조개처럼 이 고난을 진주로 바꾸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
10.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는 거짓과 사기를 통해서 번영과 문명을 이루었다고 말하면서 「호모 데우스」를 통해 데이터가 종교의 역할을 대신하고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말한다. ‘문명을 읽는 공학자’ 최재붕 교수는 「포노 사피엔스-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의 책에서 최첨단 기술의 부작용을 넘어 빅 데이터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선도하는 ‘축’이 될 것을 제언한다.
11. 이미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90년생이 온다」의 저자는 21세기 세대를 Z세대라 명명하며 기존의 X, Y세대와는 전혀 다른 세대임을 말하며 그들은 거침이 없으며 강제로 리버스 멘토링을 하며 유교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세대이며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인 그들과 어떻게 융화를 할 것인지 고민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Z세대뿐일까? 이미 교회는 사회와 너무 멀어졌다. 386세대와 Z세대보다 큰 차이점으로 인해 아예 다른 민족, 다른 종류의 사피엔스가 되었다. 중동을 21세기로 변화시키려 했던 “아랍의 봄”이 중동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아갔던 역사가 있다. “어게인 1907”은 사회와 교회의 벌어진 사이만 확인하고 끝이 났다. 이제는 포노 사피엔스를, 데이터교의 교인들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오직 십자가만 해답이다.
12. “복 있는 사람은 낮은 자리로”
시편 1편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라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한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다. 복음은 사랑이다. 그렇기에 복 있는 사람은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 세상이 정상을 향해, 높은 자리를 향해 달려갈 때, 복 있는 사람은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세상은 성공을 위한 그 미묘한 앵프라맹스(inframince)를 찾을 때, 교회는 고난을 통해 말씀 속에 숨겨진 그 미세한 앵프라맹스를 발견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세상은 문명과 전쟁을 통해 성장할 때, 교회는 말씀과 고난을 통해 성숙한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같은 복음 안에 숨겨진 앵프라맹스를 발견하여 신학과 신앙의 성숙을 완성해나간다.
재난을 가르치는 교회, 재난을 십자가로 이기는 교회, 하나님과 예배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교회, 그렇기에 이웃을 위해서 죽어줄 수 있는 교회,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오랜 시간 동안의 풍랑으로 인해 구원의 여망마저 사라진 아드라뭇데노 배의 사람들을 위로한 바울처럼 이 시대를 위로하고 이 시대의 소망을 위하여 쇠사슬에 매인 바(행 28:20) 된 우리의 삶이되기를 고대한다.
(추신 : 저도 개척교회 목사 자녀로 그 어려움을 알고 절대 교회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측면에서, 순교적인 측면에서 이런 각오를 한다면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기보다는 지금 천주교, 불교를 인정한 것처럼 교회를 인정하고 십자가를 이해하지 않을까라는 측면에서 쓴 글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가르칠 깜냥도 안 되고, 가르칠 생각도 없지만 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