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막속의 정열 (중) / 김시화
석주는 고시 공부를 하다가 대학을 졸업했고, 졸업후 고시의 메카라는 서울 신림동으로 가서 계속 공부를 하였다. 그는 고시 1차에는 합격하였으나 2차에서 떨어져 또다시 1년을 더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더이상 집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을뿐 아니라 맏아들인 그가 집 식구들을 돌봐야할 처지가 되었다. 집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과 병든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하는 수없이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남의 농사일에 일당을 받으면서 일을 하여 가족을 부양했다. 그러다보니 고시공부를 할 수없게 되어 합격은 물건너가고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 공무원 시험에 나이 제한이 있어서 9급 시험은 볼 수 없었고 지금은 없어진 10급 기능직 시험을 보게 되었다. 기능 사무직으로 응시하려 하였으나 시험은 코앞인데 응시조건인 컴퓨터 자격증이 없었고, 그걸 취득할 시간도 없었다. 대학때 전기공학과를 다녀 전기기사 자격증을 딴 석주는 마침 10급 시설직 시험이 요구하는 자격증에 전기기사 자격증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선택의 여지없이 사설직 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낮에 일을 하면서 밤에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기능직 시험에 강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강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지만 기능직은 기능직이었다. 일반직으로 들어간 직원들에게 차별을 받았고 선생님들에게도 차별을 받았다. 호칭부터 기사였다. 기사라는 호칭은 공무원중에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관습적으로 기사라 불렀다. 하는 일도 순 힘들고 몸을 써야하는 것들이었다. 시설 고치는 것, 쓰레기 처리하는 것, 학교 유리창 깨지면 치우고 수리하고 다시 끼우는 것, 학교 밭일, 제초제 뿌리고, 농약치고, 전담해서 농협과 우체국일 보는 것, 급식소 관리와 수리, 문실린더 교체하기, 화장실 청소, 배수구 치우기, 개똥 치우기, 거기다 재산, 물품, 시설등의 행정일도 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석주는 눈코틀새 없이 바빴고 행정일 때문에 야근도 자주 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데도 돌아오는 건 보이지 않는 차별과 멸시 같은 것이었다. 선생님들은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일종의 '선민의식'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자신들을 최고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직 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도 선생님들에게 무시당하면서 같은 협력자이기도 한 기능직을 이유없이 무시했다. 궂이 이유를 찾자면 자신들은 시험을 보고 들어왔다는 것인데 기능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옛날의 기능직 공무원들은 비정규직으로 시험없이 교장이 뽑거나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 뒷문으로 들어온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 왔더라도 가장 그러지 말아야 할 학교에서 오히려 다른 공무원 직종보다 더 심하게 차별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절대로 차별을 가르치고 무시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본인들은 차별과 무시를 일상적으로 하면서 산다는 것은 이중인격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심한 일이었다.
석주는 시험을 봤고 그것도 강원도 수석이었다. 게다가 여러가지 면으로 봤을때 선생님들이나 일반직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인생을 보면 오히려 그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혼도 선생님들은 선생님 끼리 일반직은 일반직 끼리 기능직은 여자들이 일반직을 선호해, 기능직 남자들은 기능직 끼리 결혼도 어려웠다. 가끔 선생님과 일반직이 결혼하는 경우는 있었다. 일반직과 기능직은 월급차이도 거의 없고 같은 공무원인데 그 대우는 엄청나게 틀렸다. 정말 뭣같은 현실이었고, 참기 힘든 모순이었다. 이런 상황속에 아프고 슬픈 속을 삭이느라 석주는 술을 마셨다. 술이라도 마셔야 이런 상황을 잠시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저녁 석주는 차에 임선생을 태우고 근처에 '개미들 마을' 이란 곳으로 갔다. 이 마을은 몇년전부터 관광지로도 유명하고 2년 연속 '전국마을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해 정부지원을 무척이나 많이 받고 있었다.
최근엔 이마을로 귀촌하는 사람들도 많아 주민들과 같이 팬션을 하고 민박을 하며 농사까지 짓고 있었다.
석주의 차는 경차였다. 체격이 있는 석주가 타기에는 좀 작아보였지만 아담한 임선생한테는 딱 맞는 차였다.
"미선씨. 이 개미들 마을은 주민들이 개미들처럼 부지런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래요."
"정말요? 진짜 주민들이 개미처럼 부지런 해요?"
임선생이 미소지며 물었다.
"그것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어머! 그래요? 호호!"
ㅈ군 낙동리 개미들 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유기농법을 이용한 농산물을 생산하여 고추와 더덕은 품질인증을 받아 판매되고 있었다. 그리고 낙동은 여민동락(輿民同樂) 의 뜻으로 주민 서로가 돕고 살았음을 뜻했고 낙동리는 ㅈ군 남면소재지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동북쪽에 초당봉(草堂峰) 서운산이 서있으며, 북서쪽에 쇄운치, 무두치로 정선읍과 접하고 있어 자연경관 또한 매우 뛰어났다. 남에서 북으로 흘러온 동남천이 동에서 서로 꺾여 흐르면서 굽이굽이 휘돌아 흐르는 곳으로, 물길 양쪽으로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고 양전옥토(良田沃土)가 많아 농산물의 질은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광해군 말기에 한림학자 신일민(辛逸民)공이 관직을 사임하고 이 마을에 은거하던 중 여름날 나무 그늘에 개미가 모여들어 이곳저곳 어디에도 앉아있을 수 없게되자 개미들이라 한 것이 지금의 ‘개미들’로 변했다고 하는 유래가 전해 내려오고 약 62년 전에 남창, 음촌(선평), 거칠현, 의평 맷둔, 둔내곡 등 자연마을을 합쳐 낙동리라 하였다.
석주는 맑은 냇가가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장소를 골라 원터치로 설치하는 간편한 텐트를 쳤다. 텐트안에 미트를 깔고 담요를 폈다. 그리고 임선생을 텐트안에서
쉬게 하고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후라이팬을 버너에 올려 놓고 불을 켠 다음 수입소고기를 구웠다.
"다 됐습니다. 미선씨. 이리와서 같이 먹어요."
"벌써요? 석주씨. 요리 잘하네요. 호호!."
임선생은 석주 옆에 앉아서 석주가 준비해온 상추와 깻잎에다 수입 소고기를 싸서 먹었다.
"맛있게 잘 구워졌네요."
"다행이네요. 미선씨. 전 미선씨가 맛없다하면 어떡하나 걱정했어요."
석주는 미소를 지으며 차에 가서 소주 두병과 종이컵을 꺼내왔다. 한잔을 미선에게 따라주고 한잔은 자신의 잔에 따랐다.
"우리 건배해요! 별들이 아름다운 밤을 위하여."
"멋진말이네요. 석주씨! 자, 건배!"
그들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상추와 깻잎 쌈에다가 고기를 싸주면서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석주씨! 지금 기능직이신데 한번 일반직 시험을 보시면 어떨까요? 이제 나이제한도 없잖아요. 사실 석주씨가 공부 잘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느정도 취한 임선생은 갑자기 시험 얘기를 꺼냈다.
석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대답을 하였다.
"저도 생각을 해보았는데, 제가 지금 7급이라 9급 시험을 본다는 것도 우습고, 또 기능직으로 계속 있는것도 그렇고... 앞으로 전환 시험도 있을 것 같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렇겠네요. 급수에 따라 차이가 크죠."
석주는 임선생이 자신을 사귀면서 기능직이라는 것이 마음에 좀 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이 좀 슬퍼졌다.
"기능직이면 미선씨한테 너무 초라하죠?"
"아니요. 전 괜찮아요. 석주씨가 단지 기능직이라는 이유로 주위의 편견과 무시같은 것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요."
미선의 말에 석주는 가슴이 뭉클했다. 정말 임선생은 괜찮은 여자였다.
"제가 9급 교육행정직 시험을 준비해 볼게요. 전환 시험이 정말 있다면 좋겠는데 그건 아직 모르니까요."
"어머! 감사해요! 석주씨. 전 석주씨가 기분나빠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그러면서 임선생은 옆에 앉은 석주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덮었다. 잠시후 다시 입술을 떼려할때 석주가 그녀를 꽉안고 더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석주와 임선생의 밤은 그들의 낮보다 더 뜨겁고 아름답게 흘러갔다.
석주와 임선생의 밤은 그들의 낮보다 더 뜨겁고 아름답게 흘러갔다. 석주가 마음속으로만 좋아했지, 생각도 못한 임선생과의 사랑은 마치 오랫동안 먹구름속에서 산성비만 내리던 대지에 나쁜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뜬 것과 같았다.
석주의 생활은 바뀌어 밤에는 남몰래 임선생 관사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새벽에 자기 관사로 돌아갔다. 황홀한 밤이 지속되었다. 임선생도 성에 눈을 떠 점점 적극적으로 되었고 그들의 밤은 뜨거웠다. 임선생은 석주가 9급 일반직 시험을 보기를 바랬다. 하지만 이미 기능 7급인 석주에게 그것은 사실 큰 손해였다. 급여면에서 행정 9급과 기능 7급을 비교하면 차이가 상당히 컸다. 그래도 사랑하는 여자가 원하는 거라 마음을 비우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퇴근후에 임선생과 사랑하는 시간만 빼고는 심기일전의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 그런데 그즈음 기능직의 일반직 전환 시험이 곧 있을거란 소문이 나돌았다. 거기에는 조건이 컴퓨터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ㅈ 기능직 지회 부회장이었던 석주는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곧 알았고 즉시 컴퓨터학원에 등록을 하여 컴퓨터 활용능력 2급을 취득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기능직 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을 권했다. 그러나 나이가 있는 옛날에 들어온 분들은 관심도 없었고, 아무래도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거의 대부분은 공개 경쟁 시험울 보고 들어온 사람들이 컴퓨터 자격증을 취득하러 학원을 다녔다.
석주는 또한 아예 차별의 대상인 기능직 자체를 없애고 모든 기능직이 일반직으로 전환되는 운동을 기능직 부회장으로서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투쟁을 했다. 그는 대학 다닐때 데모를 이끈 전력이 여러번 있어 그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80년대 당시 대학의 가투투쟁에서 데모를 이끌다 경찰 카메라에 복면 벗은 모습이 찍혀버려 졸지에 군대에 잡혀가서 군복무를 2년 6개월을 하고 제대했었다.
5개월 정도 지나서 교육청에서 일반직 전환시험 공문이 내려왔고 석주는 시험에 응시해 어렵지 않게 합격하였다. 시험자체가 일부러 행정직으로 덜 전환 시키려고 어렵게 나왔다.하지만 석주는 미리 준비를 치밀하게 한덕에 시험에 붙었지만, 대부분의 응시자들은 시험에 고배를 마셨다. 석주는 일반직 7급이 되었고 앉아서 행정업무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일반직으로 전환되면서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게 되었다. 다행히 ㅈ군내로 발령이 나서 임선생과 떨어져 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아예 출퇴근을 임선생 관사에서 하였다. 자신의 차를 멀리 주차해 두고 깜쪽같이 사람이 없을때 드나들어서 아직 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은 없는 듯 하였다. 그는 일반직이 된후에 참으로 묘한것을 느꼈다. 기능직일때나 전환이 된 후나 하는 업무만 틀려졌을 뿐 사람은 그대로인데, 뭐 하나 바뀐것도 없는데, 기능직이라고 차별을 하고 무시를 하는 사람들의 어이없는 행태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또 석주가 일반직이 되었다고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진 것에 대해서도 좋은 기분도 존재했지만 역겨운 느낌이 더 많이 들었고 그런 사람들이 참으로 한심했다. 그는 행정업무를 보면서 틈나는데로 시설직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쓰레기도 분리수거 하고,
예초기도 시설직 직원과 같이 돌렸으며, 학교에 이름 모를 개가 싸지르고 간 개똥도 치웠다. 개똥을 치우는 것은 그걸 본 사람이 치우면 되는 것이지, 시설직이 치워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시설직 업무에 개똥 치우기에 대한 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었다. 둘다 시설직 업무가 아니었던 것이다.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은 공동으로 돌아가며 청소를 하던가, 사람을 써야 하는 것이었다. 행정직들이 규정을 어겨가며 그런 일들을 시설직이 하게 만든 것이었다.
석주는 임선생에게 자신의 과거 얘기를 가끔씩 해주었는데 그때마다 임선생은 위로를 하면서 석주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임선생에게 가장 하기 힘든 얘기는 제일 나중에 했다. 그것은 석주의 불행한 가족사였다. 가족 세명이 같은 차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해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 법학과를 다니던 동생과 한창나이 오십대 중반에 생을 떠나신 아버지 얘기를 하다 임선생도 울고 석주도 울었다. 임선생은 유일한 생존자인 석주의 몸에 남아있는 교통사고의 생채기를 어루만져주면서 눈물을 흘렸다.
석주는 사실 비극적인 요소가 많은 사람이었다. 대학때 합격한 9급 공무원을 포기하고 행정고시 공부를 하다가 일차 시험은 합격 했는데도 불구하고 고향집에 잠깐 내려와서 집의 목장일을 도와주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하여 아버지와 동생이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봤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신도 다쳐서 평생 사고의 흔적과 심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야 했다. 또한 그 상태에서 절치부심했던 고시를 포기하고 힘든 일로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으며, 다시 공무원 시험을 보려 했을때 나이제한에 걸려 9급 시험은 응시못하고 10급 기능직에 응시해 수석합격 하였으나, 근무지에서 온갖 차별과 멸시, 따돌림에 시달려야 했다.
임선생은 석주의 아픔과 고통에 너무 가슴이 아팠고 상처받은 야수와 같은 그의 내면을 위로하는 어여쁜 꽃이 되어 주었다.
이제 학교에서는 더이상 석주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로 등단하여 정식 작가가 된것을 알고 그에게 어떤 존경심을 품는 선생님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석주는 그런것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가 기능직이었을때 차별했던 그들은 계속 다른 기능직들을 차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잘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인간적으로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석주의 몸에 배인 생각이었다.
석주의 트라우마와 우울증도 임선생을 통하여 호전되어 갔다. 그렇게 많이 마시던 술도 끊고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소설쓰기에 몰두했다. 그리고 틈나는데로 운동을 하여 몸도 좋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임선생과의 성생활도 더욱더 뜨거워지고 황홀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임선생이 약국에서 파는 일회용 임신 테스트 막대로 자신이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