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뜰
최 방식
화창한 10월, 주말 어느 날 아내가 꽃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왔다. 지인의 아들 결혼식에 갔다가 식이 끝나고 난 뒤 꽃을 한 아름 얻어 가지고 왔는데 모두가 하얀 꽃이다. “모두 하얀 꽃이네!” 하니 순결을 상징하여 흰 꽃이란다.
아내는 꽃들을 꽃병과 집안의 크고 작은 병에 심지어 유리컵에도 꽃을 꽂아 식탁위에, 책상위에, 콘솔위에, 거실의 탁자위에, TV옆에도 꽃병을 놓아 온 집안을 꽃으로 장식 했다. 집안의 분위기는 금방 바뀌어 버렸고 화사한 분위기의 꽃 중에서 내 눈에는 하얀 장미, 백장미가 단연 돋보였다. 오랜만에 하얀 장미를 보면서 세상에 이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이 있을까?, 순백의 부드러운 하얀 꽃잎은 수줍은 듯 자신의 몸을 겹겹이 감싸며 세상을 향해 예쁘게 피었다. 그윽한 향기를 가진 흰 백합꽃도 꽃봉오리를 세우고 부끄러운 듯 하얀 안개꽃 뒤에 숨어있다. 안개꽃은 앙증맞게 조그만 예쁜 꽃들이 밤하늘의 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열대 난초과인 하얀 덴피레 꽃도 세련된 몸매로 우뚝 솟아 자태를 뽐내고 있다. 검지의 손톱만한 초록색 잎을 가지런히 달린 이름 모를 작은 잎도 우아한 분위를 일조하고, 갑자기 온 집안이 꽃향기와 때 아닌 꽃들로 봄의 풍경이 만들어지고, 발코니의 꽃나무와 꽃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과하게 표현 하면 꽃의 궁전이 되었다.
아내는 꽃가꾸기를 좋아하여 아파트 발코니는 여러 가지 나무들과 꽃들이 계절에 따라 꽃을 피우는 아내의 작은 뜰이다. 때때로 따뜻한 햇살이 창가로 비칠 때 모든 것을 잊고 정성스럽게 나무를 손질하며, 물을 주고 바닥을 닦으며, 꽃을 가꾸는 생활에서 즐거움과 행복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앞집이 이사를 가면서 잎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를 버리려고 밀쳐놓은 벤자민과 드라세나 마지나타 나무를 얻어 와 큰 화분에 다시 심어 온실처럼 비닐을 씌워 물을 주고 정성스럽게 돌보자, 한 달쯤 지나자 놀랍게도 나무는 주인의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죽어가던 나무에 새싹처럼 움을 티웠다. 버림받아 죽음 직전까지 갔던 나무는 건강하게 잘 자랐고, 이제 두 나무는 아내의 키 보다 크게 자랐다. 벤자민은 올해 노란 열매를 많이 맺어 아내의 뜰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뜰에 있는 나무들과 꽃들, 그리고 다육이를 보면서 아내가 꽃가게에서 구입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파트에 버려진 꽃나무를 가져와 큰 대야에서 화분 갈이를 하고, 흙들을 채우며 몇 시간 동안 정성을 드리는걸 보면서 고생하지 말고 하나 사라고 말 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땀 흘리고 수고하며 생명을 살리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고, 그것들이 살아서 꽃을 피울 때는 기쁨과 행복이 배가 되는 모양이다.
산스베리아, 행운목과 인도고무나무, 바키라도 아내의 손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 잘 키운 산스베리아는 다섯 번이나 분가하여 이웃집에 시집을 보냈다고 아내는 은근히 자랑을 한다.
행운목은 10여 년 전, 정초에 바깥의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찬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에 하얀 은색을 띤 자그마한 꽃들을 피웠는데, 꽃모양은 별로 볼 폼이 없지만 향기가 대단하여 한 달가량 그 향기를 즐길 수 있었다. 그 해 1월에 나에게 잊지 못할 행운이 찾아와 행운목 꽃의 의미는 더해졌다.
무심코 꽃나무를 보다가 깜작 놀라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올해 또 행운목이 꽃을 피우려고 기다란 잎 뒤에 꽃대가 솟아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반갑든지 아내에게 기쁜 마음으로 꽃소식을 전하니, 아내는 미소를 띠며 빤히 보더니 자신은 벌써 알고 있었단다. 신기한 듯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하고 되물었다.
기가차서 “내가 눈이 없나 코가 없나, 나는 뭐 새로운 것 찾아내면 안 되나.” 평소 내가 뭘 찾는 데는 어눌하지만 오늘은 완전 눈뜬 당달이 봉사 취급을 하였다. 이를 때는 모른 척하며 함께 처음 보는 것처럼 관심을 가지고 반갑게 이야기 하면 어디 덧나는지 모르겠다.
꽃소식을 알려 주는 것을 잊어 버렸다나 어쨌다나. 아무튼 가끔 분위기 파악 못하고 김 빼는 데는 소질이 있는 아내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뜰에 가서 잠간동안 여러 가지 식물들을 바라보며 여유를 즐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매일의 일상이 되었다, 평소 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는 나는 꽃들을 바라보다 어쩌다 마음이 내키면 가끔 한 번식 나무와 꽃에 물을 주기도 한다.
요즘처럼 미세먼지가 자주 발생하는 날에는 푸르름이 가득한 뜰은 집안의 공기 청정기 역할과 산소를 공급해 준다. 외출을 하고 눈이나 머리가 아플 때 집에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면, 어느새 나아 버리는 고마운 치유의 공간이다.
발코니의 큰 창문으로 부산항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정경과 잎이나 모양이 다양한 식물이 어우러진 이곳에 있으면 마음에 여유와 평안을 얻고 마음이 풍성해지는 뜰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아침 꽃향기가 온 집안 가득하고 하얀 화려한 꽃들로 장식된 거실의 분위기와 꽃에 정신이 팔려, 매일 가던 뜰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늘 푸르름과 안식을 주던 고마운 뜰을 외면한 채, 아름답고 새로운 것을 보면 그만 정신이 팔려 버리는 모습이 세 살짜리 어린 손자 이든 이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호흡이 있는 한 새롭고 아름다운 것에 관심을 가지는 습성은 인간의 특성인지 모르겠다.
아침을 먹을 때 가정에서 조그만 소품 하나가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어 버린다고 하드니, 식탁위의 은은한 백합꽃 향기와 꽃들로 아늑한 봄의 무드로 전환 되어 버렸다.
뜰이라는 평온한 꽃밭에서 여유를 누리면서 너라는 예쁜 꽃과 함께 남은 길을 동행하고 싶다. 내가 뜰을 좋아하고 사랑 한다는 속내는 이미 꽃나무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편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자연스럽게 꽃들을 바라보고, 정겨운 하루의 일들과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여기까지 온 것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아내의 뜰이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나니까.
[부산수필문예 여름호 (2019년 6월7일 발행)에 실린 수필입니다.]
첫댓글 꽃을 사랑하는 행복한 가정!! 남편과 아내!!
그런데 글을 쓰고나니 ㅍㅂㅊ 같은 느낌이....ㅎㅎ
꽃을 가꾸는 아내의 마음도 이쁘지만
그 상황을 글로써 아름답게 표현하는 여유로움이 더 멋지네요
감사합니다. 신록의 유월, 자연과 함께 삶의 향기를 만끽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