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복시장 포목점 '여명상회' 정진순(2006년, 92세)씨
*2006년 8월 3일 인터뷰
정진순 할머니는 한국전쟁 때 경기도 연천에서 피난 내려왔다. 1951년부터 방물장수를 시작하여 양은그릇장수, 보따리장수를 거쳐 통복시장에서 포목점을 열어 지금까지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자녀들을 잘 키워 제5공화국시절에는 장한어머니상을 수상했다.
필자) 할머니 약력을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정)저는 경기도 연천이 시댁이요. 친정도 근처에 있었지. 19살에 혼인하여 31살까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남편이 병에 걸려 죽어버렸지. 홀몸으로 아들 셋과 시부모님, 친정동생을 건사하다가 6.25가 났어요. 그래서 피난 내려온 곳이 평택이지.
필자)피난생활은 어떠했어요?
정)우리는 1.4후퇴 대 피난 나왔는데 그 때 내 나이가 36살이었어요. 시아버지허고 아들 삼형제, 친 남동생 그리고 심부름꾼이 한 명 있었지. 정부에서 피난민들은 트럭에 태워서 이곳 저 곳에 내려놨는디 우리는 합정동 쪽박산(됏박산) 아래 피난민 수용소에다 내려주더만.
필자) 그럼 피난와서 곧바로 장사를 시작했나요.
정)그럴 수가 있었나. 뭘 가진 게 있어야지. 먹고 살게 막막혀서 멍하니 있었드니 시아버님이 피난올 때 땅 밑에다 묻어둔 재봉틀이라도 가져가야겠다며 연천으로 다시 갔지. 그런디 그곳이 전쟁터 아니었남. 결국 열흘만에 빈손으로 돌아왔지. 우리가 피난올 때는 보름이면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혔어. 그래서 패물이고 돈이고 죄다 땅속에 뭍고 왔었지. 그걸 시어버님이 찾으러 갔던 게야. 그러구 있는디 수용소가 철뚝너머 창고로 옮겨가게 되었어. 폭격으루 지붕만 남은 창곤디 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어. 나중에는 안성으로 가라고 하드만. 그려서 우리는 갈 수 없다고 하였드니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급을 줄 수 없다고 하드라고. 결국 버티다가 배급을 못 받게 되었지.
필자)그러면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정)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어서 재빼기(평택시 죽백1동)로 이사했지. 아무래도 피난민 수용소보다는 낮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지. 거기서 남의 광을 빌려 8개월쯤 살았을 꺼야. 먹을 것은 배급타서 해결했고.
필자)그런데 왜 8개월밖에 살지 않았어요?
정)그동네는 물도 없고 땔나무도 없어. 도저히 살 수가 있어야지. 농지도 많지 않았고. 피난온 이듬해(1951년 10월)부터 장사를 시작했어. 처음엔 방물장수를 혔어. 가진 것도 없고 혀서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거이 그것밖에 없었지. 물감, 실, 잿물, 참빚같은 것을 팔았어. 처음 청룡말(평택시 청룡동)으로 팔러 갂어. 가는 길도 몰라서 주인여자가 데려다줘서 겨우 장사를 혔어. 처음에는 남자들 있는 집은 겁이나서 들어가지도 못혔고 오막살이집만 다니면서 장사를 혔지.
필자)장사를 시작했을 때 통복시장 상황은 어떠했어요. 유엔군 폭격 때문에 말도 아니게 변했다던데요.
정)내가 장사하던 해(1951년 가을)에 시장이 옮겨왔어. 그 때는 장날마다 나와서 물건을 떼갔기 땜에 잘 알지. 뚝너머장(평택장)은 폭격 맞아서 못쓰게 되었거든. 시장이라고 혀서 가봤더니 말이 아니더만. 장날이면 거 땡땡거리라고 있잖어. 시장로타리쪽으루. 그쪽에서 노점들이 쭉허니 앉아서 장사를 혔어. 이쪽(시장방면)으로다가는 군(郡, 평택군청)에서 장터를 만들고 있었고. 장터래야 복숭아밭이던가 사과밭이이던가를 밀어버리고 만든 것이라 다들 얼기설기 지은 하꼬방들이었지. 그래도 싸전이 큰 편이었어. 장터 가운데는 싸전이 있었거든. 서울에서 도매상들이 차 몇 대씩 대놓고 쌀을 실어갔지. 말감고도 여럿이었어.
필자)우시장은 어떠했어요?
정)우시장. 우시장은 쪼끄맷지. 지금 라이온스 공원 자리에 있었는디 전쟁 때는 소도 몇 마리 없고 쪼끄멨어.
필자) 포목점은 언제부터 했어요.
정)전쟁 뒤에는 포목점도 몇 집 안 되었지. 한 서너 집 되었나. 어물전이나 채소전도 얼마 안 되었는디 나중에 늘드만. 지금은 옛날 허던사람 없어. 다 그만뒀지.
필자)방물장수하다가 곧바로 포목점을 하셨나요.
정)아니여. 양은장수도 혔고 보따리장수도 허다가 포목점을 열었어. 장사혀서 벌은 돈으루 시장 안에 초가삼간 사가지구 시작혔지. 한쪽에는 살림집이고 한쪽에는 점방하고. 그려두 시아버지가 피난 와서 1년두 안 되야서 돌아가셨으니께 그냥 살었지.
필자)포목점 해서 돈좀 벌으셨어요.
정)그럼, 옛날에는 돈좀 만졌지. 내가 서른 한 살 되던 해에 남폈이 죽었는디도 까딱없이 살았으니께. 애들 클 때는 서울에다 집 사놓고 공부시켰어. 다 대학교꺼정 다녔고. 전두환이가 대통령 헐 때는 장한어머니상도 받았어, 내가. 청화대로 오라고 허더만 밥 맥여주고 상주더만.
필자)시장은 어느 때 장사가 가장 잘 되었어요?
정)장사, 그려두 박정희 때허구, 전두환 때가 젤 잘됐다고 봐야지. 싸전마당 있을 때. 그 때는 장날이면 양편으루 노점들이 하두 많아서 걸어댕기두 못혔어.
필자)자녀들은 어떻게 되었어요?
정)4남 1녀인디 남매는 어려서 죽었고, 아들 셋은 모두 대학나왔어. 큰아들은 장사허고, 둘째는 고려대학교 알어, 고려대학교서 교수혀. 셋째는 외국어대학교 나와서 대한항공에 있어. 지점장인가 뭔가 허지.
필자)오랜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