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불멸의 가수...문평일( 본명 이평일) 가수명: 문평일( 본명 이평일), 1943~2019년 출생지: 거제시 능포동 바닷가 히트곡: 1966~1971년 ‘붉은입술’, ‘미련이 있어’, 사나이는 안울어‘, ’이별이 괴로워도‘ 수상: 제1회KBS TV고운노래대상,제3회TBC가요대상 붉은입술... 원곡자 문평일 (리바이불 나훈아) 밤을 새워 지는 달도 별을 두고 가는데 배 떠난 부두가에는 검은 연기만 남어 맺지 못할 사연두고 떠난사람을 이렇게 밤을 새워 울어야 하나 잊지 못할 붉은 입술 나를 두고 가는 사람 원망도 했다만은 헤어질 운명이기에 웃으며 보냈지 단 하나의 사랑만은 믿어주세요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던 잊지 못할 붉은 입술
내고향 능포 문평일씨가 살았던 가옥...어머님이 이곳에서 구명가게를 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3대 어정중의 하나였던 능포...지금은 초라한 현수막만... 능포의 심볼...고래( 삶괭이) 능포부락을 막아주는 양지암 1949년 1학년 신입생 모습
문평일 씨는 능포동이 고향이다. 능포마을은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지점으로 풍요로운 항구였다. 능포어장은 궁중에서 관리하는 궁방어장(황실어장)이었다. 1889년 한일통상장정으로 일본인(케시이겐타르)이 들어와 황실과 계약을하고 어업권을 가져가 버렸다. 해방이 되자 거제수산주식회사는 대표로 서순영씨가 간사는 피난민 배정섭씨가 맡아 운영하였다. 그 뒤 능포수산은 배정섭씨가 진흥수산은 이진규씨가 맡아 운영하였다. 어장터가 좋아 멸치, 조기, 고등어, 삼치, 대구, 고래, 갈치, 넙치, 방어, 가자미등이 많이 잡혔다.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삼락회라는 장학회를 만들어 많은 학생에게 혜택을 주었다. 노철용(전경향신문 사장), 하광열(대통령비서실장), 김병석, 김기춘(범무부장관), 배길송 등이 혜택을 받았다. 능포(菱浦) 항구는 마름이 있는 몽돌항구로 해송이 길게 늘어서 있으며 양지암이 있어 물고기가 놀기에 좋은 곳이었다. 항구는 풍요로웠고 밤이면 동네 청년들이 기타를 메고 바닷가에 나와 한 여름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능포에는 문평일(이평일)씨 외에도 허필구라고 하는 동네가수가 있었다고 한다. 장승포초등학교 제30회(1955.3.23.)졸업생이다.
문 씨는 "부친이 제법 규모가 있는 수산업을 하셨는데 당시 벌이가 괜찮았어. 게다가 내가 외아들이다 보니 경제적인 요인 등 모든 부분에서 비교적 자유로웠지. 노래가 하고 싶다고 해도 집에서 만류하지 않더라고. 그래서 가수의 꿈을 이루는 데만 모든 초점을 맞췄어"라고 20대 왕성했던 젊은 시절을 더듬어 기억해냈다. 장승포 항구 능포 조각공원 능포 튤립공원 능포의 심볼...양지암 등대 갈매기 우는 항구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로 서울로 노래공부 하기 전에 부산에서는 미화당백화점 5층에서 주말마다 가요콩클이 있어서 아마추어 등용문이 대기도 했다. 아마 거기 출신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청아가씨를 부른 신경자씨도 거기에서 발탁이 된 것 같다. 우리 동네 한 친구도 그곳을 드나들면서 가수의 꿈을 키웠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1960년대 말 서울에 잠간 머물 때 같이 하숙생 한 분이 김영광 작곡가 사무실에 다니면서 수련을 한다고 하였다. 그 사람 말로는 남진이가 가요계를 망쳤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가수가 되려고 하면 작곡가 사무실에 다니면서 수련을 하여 자기곡을 취입하고 나면 각 방송사에 다니면서 홍보를 해야 했다. 한달 홍보하려고 하면 논 세마지기를 팔아야 되고, 그래도 곡이 뜨지 못하면 다시 풀칠을 해야 하니 돈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어렴붓이 떠 오른다. 현재 능포에 거주하는 윤영부씨는 가수를 해볼냥으로 문평일씨를 따라 동행했는데 그 활동비를 350만원 달라고 하여 염두가 나질 않아 내려와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가수가 되기 위해 각종 소속사, 기획사, 작곡가 사무실, 연습실 등으로 다니면서 기회를 였보지만 쉽지는 않다. 우리나라 가수는 3,000여명이고 지역가수까지 합치면 1~2만명은 될상 쉽다. 그중에서 100위권에 드는 것도 무척어려울 것이다. 거제도 출신가수 문평일, 신금자, 한동엽씨도 그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66년 서울에 입성한 문평일씨는 현철, 나훈아와 함께 오아시스레코사 전속이 되었으며 MBC 공채오기로 합격하여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68년 불멸의 노래 ’붉은입술‘로 일약 유명가수 대열에 들어서면서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게된다. 그러나 몇해 가지 않아 방송금지곡이 되면서 불운이 시작된다.
▲ MBC 공채 5기 가수 동기생들과 한 컷. 앞줄 맨 왼쪽에서 뭔가 열심히 들이키고 있는 사람이 문평일씨다(사진 맨 왼쪽). 몇년도인지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MBC 창사기념 행사에서 축하공연을 할 때 모습. 왼쪽에서 두번째(사진 가운데). 작사가 무명초(왼쪽)와의 한 컷. 무명초는 '사나이는 안울어'라는 노래에 가사를 붙였다(사진 맨 오른쪽). 1960`70년대 금지곡 '붉은입술'은 나영진 씨가 작사하고 윤음동 씨가 작곡한 문평일 씨의 1966년 첫 앨범 타이틀 곡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세상에 얼굴을 내밀자 말자 '붉은 입술'은 방송금지곡으로 족쇄가 채워지고 만다. '.60∼70년대는 군사정권과 유신체제의 국민 통제책 중의 하나인 대중문화와 출판·언론 자유의 억압으로, 정권과 조금이라도 대치되는 가수들의 노래와 각종 책들이 무자비로 갈기갈기 짓이겨졌다. '붉은 입술'도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문 씨는 "당시는 '붉은'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금지곡이 됐다"며 "특히 내 목소리가 왜색톤이라고 해 대표곡이 방송금지곡이 되는,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 있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초의 금지곡은 방송금지번호 1호를 기록한 '기로의 황혼'이다. 금지 이유는 작사가 조명암이 월북했다는 것이다. 이후 방송윤리위원회가 1962년 6월 발족되고, 그해 11월 위원회 산하에 가요자문위원회가 생기면서 방송가요에 대한 심의가 본격화 된다.
가요자문위는 표절·가사 저속·왜색 등을 이유로 금지곡에 대한 '잣대'를 더욱 강화하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등 1965년에만 116곡을 금지곡으로 묶었다. 이듬해에도 김상국의 '껌 씹는 아가씨' 등 64곡을, 1967년에도 '방앗간집 둘째딸' 등 95곡을 금지곡으로 선정했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반말을 한다는 이유로, 이장희의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이유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됐다. 조영남의 '불 꺼진 창'은 창에 불이 꺼졌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으며,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저속한 창법과 불신감 조장이라는 항목으로 금지 조치됐다. 더욱 '기막힌 이유'로 금지곡이 된 노래들도 있다.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역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그렇다면 지금은 행복의 나라가 아니라는 뜻인가'라는 이유로 금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느냐,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면 사회에 우울함과 허무감이 조장된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금지곡도 많다. 정미조의 '불꽃'은 공산주의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배호의 '0시의 이별'은 통금이 있던 시절 '0시에 이별하면 통행금지 위반이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금지곡으로는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이 있다. 이유는 '단신인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 씨는 대중가요의 금지 조치와 관련해 "당시 정부의 방침이 그러했기 때문에 가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로 여겼다. 말 그대로 '울며 겨자먹기'였다. 하지만 금지 조치 이유가 기가 막힌다.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하는 식이었는 데다 가사 단어 하나만 마음에 안들어도 금지 조치가 내려졌기 때문에 제약이 너무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웃음만 나온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거제도 불멸의 가수 문 평일 씨를 생각하며
거제도 출신 가수는 많지 않다. 문평일, 신금자, 한동엽, 강산에 등이다. 강산에 씨는 피난민으로 지세포에 살다가 부산으로 이주하였기에 거제도 출신 가수라는 명칭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중적인 인기를 먹고 사는 가수라는 직업은 대단히 어렵다. 트로트가 수의 90%는 수년간 무명 생활하다 인기 대열에 들어설 수도 있고 평생을 그렇게 살다 가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딴따라( 연예인 비속어)라고 했으며 천한 직업이라 대부분 사람은 천시 여겼다. 불멸의 노래 ’붉은 입술‘은 금지곡이 되어 방송이 뜸해지자 군입대하고 잊혀가는 가수가 되어 낙향하여 미역양식을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나도 능포 바닷가에서 미역양식을 하였다. 나는 홀짝 망했는데 문 평일 씨는 성공했다고 한다. 그 뒤 서울을 다시 가지 않고 어촌생활하다 옥수동으로 고현으로 지세포로 전전하다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름있는 가수로 남기 위해서는 타고난 소질도 중요하지만, 금전적으로도 뒷받침이 되어야 하고, 작곡가나 기획사도 잘 만나야 하고 시대도 잘 타고나야 한다. 예를 들면 미스 미스터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톱7에 들면 성공한 셈이 된다. 그러나 그보다 더 훌륭한 가수도 있다. 실력도 중요하지만, 홍보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고로 가수가 되는 길은 어려우며 더욱 이름있는 가수가 되기란 더욱 힘든 일이다. 현대사회는 열심히 노력하고 힘들고 고된 일자리는 싫어한다. 대중적인 인기가 있으면서 수월하게 직업을 가지고 인기 있는 생활을 하는 직업이 대부분 사람이 바라는 직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청운을 꿈을 안고 한양에 진출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한 님의 영전에 ’붉은 입술’을 뛰어 봅니다.
2022년 2월 11일 글. 사진 옥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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