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시
층층나무단풍 외 4편
정계원
이마에 붉은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들이
핏빛 같은 함성을 지르며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나는 매미가 울던 자리에서 그들을 맞이한다 춤을 추며 나에게로 내려오기까지 그들은 영혼을 태우며 8월을 통과했으리라 가끔, 우박이 그들의 가슴을 관통하는 상처와 가을비에 붉은 울음을 풀어내는 일도, 무서리에 잎맥이 체중계 바늘처럼 떠는 날도 있었으리라
때론, 벌목공들의 톱날에 직립의 나무들이 쓰러지던 날엔, 산에 적막이 쌓이거나 가슴 조이며 밤새 몸을 뒤척이기도 했으리라 이젠 허공을 가로지르던 기러기떼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흰 눈이 거리에 인적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시간에 지친 붉은 그들,
다시 초록을 꿈꾸며 12월의 강을 건너가고 있다
거문고 여섯 줄 타는 시인
정계원
초허가 그의 첫 시집 『나의 거문고』 속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1번 선은 울분의 적벽가를 연주하는
스무 살 적 분노이고
2번 선은 초허가 자정보다 늦게 책을 읽고
새벽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C단조의 가락으로 이립而立*의 시간이다
3번 선은 마흔살로 이념의 강을 건너는 소리다
한낮에도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통금이 질곡 된 시간이다
4번 선이 울린다 번뇌다 그것은
휴화산이 뿜어낸 입김으로 무궁화가 시들고
서리가 내리는 들판의 아우성이다
5번 선은 식민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비명이다 그것은
몸속에서 해방의 꽃이 피는 소리다
6번 선이 운다 운명이 이탈하는 소리다
망우리로 떠나며 초허가 부르던 노래다
그 노래로 망우산이 가라앉는다
저녁달, 조등이 되어 중천에 걸려 있어도
여전히 시집 속에서 거문고 소리가 들려온다
*30세
비빔밥이 생불이다
정계원
암자의 비빔밥은 붓다의 법문이다 그러므로
그 비빔밥은 황조리마을 정신의 곳간이고
월급날, 광부의 입술에 핀 푸른 웃음꽃이다
두견새의 울음을 들어주는 석등이고
초파일 비빔밥은 등받이 없는 안락의자다
가시를 거둬들이며 반성하는 장미꽃,
비빔밥은 뭉게구름이 삭발한 이유이고
귓불 세워 설법을 들으며 흔들리는 풍경이고
비빔밥은 돌아가야 할 산제비들의 둥지다
앉은뱅이호박꽃의 가슴을 적시는 새벽이다
초파일 비빔밥은
대웅전 섬돌 아래에서 무리 지어 서식하며
어둠을 몰아내는 흰 달빛,
팔순의 노모가 넘었을 극락고개이고
법당 뒤뜰에 마른 우물을 달래는 소낙비이고
벚나무들의 땀을 닦아주는 손수건이다
비빔밥은 생업의 지친 개미들의 저녁휴식이고
활자들이 모인 금강경의 기도문이다
폐타이어들이 하루종일 쉬는 빈 공터이다
비빔밥은 허공의 허기를 채우는 생불이다
붓다의 경전을 만나다
정계원
초파일에 아이들의 사주에 이끼가 끼지 않게 하려고 도계 황조리 마을 도덕정사 붓다를 찾아갔다
동자승이 목어를 두드리며 산기슭에 숨어 사는 산짐승들에게 길을 내어주고 있다 그때 깊은 계곡에서 내려온 열목어가 불전함에 정화수 한 바가지를 보시한다 어젯밤, 도시의 뒷골목에서 찾아와 법당을 서성거리던 쉰바람과 함께 나는 두 손 모아 합장을 한다
잣나뭇가지에서 108배를 드리는 청설모, 아랫마을 짜장면집 철가방이 달아 놓은 연등도 보인다 밤 열두 시의 어둠과 치열하게 싸우던 법당의 촛불은 눈이 충혈되어 있다 오늘따라 암자의 담장을 끼고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붓다의 설법으로 들린다
늪의 발을 씻어주던 연꽃이 잘 왔다는 듯이 초록 귀를 펄럭이며 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화석에 가을여자가 피었다
정계원
검은 돌에 내가 국화꽃으로 피어 있습니다
지하 어둠이 수억 년 동안 내가 먹고 자란
저녁밥입니다
암반 밑에서 물방울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끔, 세상 밖 사람들의 신발 끄는 소리도
들려왔지요 그럴수록
이 어둠을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죽순처럼
자랐습니다 그러나
돌에 핀 국화꽃이 되기 위해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에 얼굴을 묻고
한평생 살았지요
두 눈이 실명되도록
돌에 핀 국화꽃이 되려고 했으나
신은 나의 업을 씻어주지 않았지요
어느 날,
돌 깨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오고
사람들의 검은 손이 지하의 내 몸쪽으로
뻗어왔습니다
침묵의 어둠마저 더 채울 수 없는 이곳,
한 줄기의 낯선 빛이 내 몸에 닿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영혼이 시들지 않는 돌꽃으로 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