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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패 없는 아파트
수5:1-12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여호수아서 5장 말씀 중심으로 <문패 없는 아파트>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합니다.
문패 없는 아파트.
문패가 없어졌습니다. 옛날만 해도, 제가 살던 집만 해도 제 아버님 성함이 새겨져 있는 문패가 대문 기둥 옆에 달려져 있었습니다.
근데 요즘은 개인주택이라는 자체를 도저히 우리가 구분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대한민국 천지가 다 아파트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자세히 따져 들어가서 골목 골목 찾아가 보면 그런 주택들이 있기는 하겠습니다마는 문페를 보면서 살기가 참 어려워졌습니다.
그리고 아파트들은 이름 대신에 그냥 호수가 적혀있거나 뭐 호수는 적혀있지 않아도 이미 동 자체가 호수고 층 자체가 숫자로 표기되어 있고 다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익명의 숫자들만 남아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문패 없는 아파트.
근데 이것이 영적으로 적용이 될 경우에 우리 마음에 문패가 없을 경우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래서 우리 마음에 반드시 문패가 달려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오늘 여호수아서 5장이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이제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법궤가 요단강에 도달하자 법궤를 짊어진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닿자 요단강이 갈라지게 되고 이제 그렇게 건넜는데 이렇게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이야기를 아모리 족속들과 가나안 족속들이 다 듣고는 마음이 녹았다고 합니다. 마음이 녹아내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지금 묘맥을 거두는 그 시절 그러니까 물이 창궐할 땐데 그 물이 갈라져가지고 그 마른 땅을 지나서 지금 요단을 넘어왔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족속이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땅이라고 해가면서 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러 들어왔는데 아니 세상에 물이 갈라졌다. 그러니까 간담이 서늘할테지요.
이런 상황에서 왜 할례를 행합니까?
할례가 여러분 뭡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8절에 보면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라고 했어요.
남자 성기의 표피를 잘라냅니다. 그러면 며칠 동안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또 그 당시 약도 제대로 있지 않았을 때인데.
그러면 지금 전쟁을 앞두고 적군들이 지금 계속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 할례를 행해버리면 꼼짝을 못하게 되는데 이건 적들이 쳐들어오면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야곱의 자식들이 자기의 누이가 세겜의 추장의 아들에게 성추행을 당하게 된 것이 화가 나서 결혼할 것을 허락을 하지요. 여동생을 그 추장이 연모하니까.
그런데 조건을 내걸지 않습니까? 남자란 남자는 모두 다 할례를 받아야지 결혼을 한다.
그래서 할례를 받았는데 그 사이에 가서 다 도륙을 해버리잖아요. 열두 형제가 가서 다 도륙을 해버렸습니다. 성 하나 전체 남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 정도로 할례라고 하는 것은 일단 받고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꼼짝 못하는 것입니다.
근데 적들이 이스라엘을 주시하고 있는데 할례를 받았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안 돼지요.
근데 이 성경 기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말씀이 뭡니까?
우리가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가 지금 오늘 11월 16일 아닙니까? 오늘 하루 복되게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큰 적은 누구냐?
하나님의 선민들에게는 밖에 있는 가나안 족속들이 아니에요. 경제형편이 어렵다거나, 내 몸이 어떻거나 이런 게 아닙니다. 할례받지 못한 마음이라는 거예요. 할례 받지 못한 마음이 가장 큰 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적이 도사리고 있어서 거기에 위협을 느낍니다마는 그것은 사실 우리를 해롭게 할 수가 없고 제일 무서운 적은 내 마음이 하례를 받지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것이 제일 무서운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 할례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할례는 '소유'에요.
하나님의 소유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기 자신을 늘 잊지않고 살아가는 거 이게 바로 할례 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소유다 라고 하는 것이 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소유인지 아닌지 여러분 어떻게 압니까?
그냥 법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다 라고 하나님이 써놓으셨으니까, 세례 받고 예수님 믿었다고 하고 교회 다니고 하니까 법적으로 하나님의 소유다 라고 써놓은다고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에요.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가 종교가 무엇이냐 라고 말할 때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포인트는 궁극적 관심이라는 말도 중요하지만 사로잡힌다는 말이 중요한 거예요.
사로잡히는 정도에 따라서 궁극적 관심은 사람에 따라 다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업하는데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는 종교가 되는 것이에요. 자식 문제에 마음이 온통 뺏겨있으면 그것이 종교가 되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자녀의 소유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는 사실 하나님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얘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돈 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면 돈에 대한 관계에서 내가 할례 받은 자입니다. 아무리 좋은 걸 갖다 줘도 안 통한다는 거예요.
사람이 좀 도덕적으로 살아야 되지 않느냐, 윤리적으로 살아야 되지 않느냐? 사기 그만 치고 세금 꼬박꼬박 내며 살아야 되지 않느냐?
근데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돈으로 할례를 받아버렸습니다.
자식으로 할례를 받아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식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마음에 소중한 게 없어져 버리는 겁니다. 이게 다 사로잡히는 것이고 그 소유가 되는 것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얘기 종종 합니다마는 길가를 지나가다가 아름다운 코스모스를 봤습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코스모스 꽃 한 송이를 꺽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내가 코스모스를 잡고 있지만 내 마음은 코스모스에 붙잡혀 버렸습니다.
이게 그 순간에는 할례를 받는 거예요.
내 마음을 온통 다 뺏기고 있는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면 그 문제에 내가 할례를 받은 거예요. 그 문제에 소유가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지금 마음이 누구의 소유냐 알려면 여러분이 지금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가 보면 된다는 겁니다.
가령예를 들어 주님께서는 누구의 소유였겠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며 사셨겠습니까?
주님이 목회를 생각하셨을까요? 저 같은 모자라는 목사처럼? 그러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만 고민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할례를 받으신 분이었지요. 아버지의 소유가 되셨던 겁니다.
아버지의 소유가 된 것과 너무나 대조적으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다양한 것들에 대해서 소유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인데 문패가 없다는 거예요.
왜 문패 얘기를 하느냐?
이상하게 오늘 본문은 할례와 유월절 사건을 이어서 얘기합니다. 유월절 명절을 지킨 사건을 할례와 붙여서 얘기합니다.
여러분, 유월절 사건이 뭔지 아시잖아요?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는 그 심판의 영이 임합니다. 죽음의 영이 임합니다.
그런데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집마다 그 죽음의 영이 들어가지 않고 넘어갑니다.
근데 할례가 소유를 말하는데 이 소유를 말한 할례 사건 이후에 바로 유월절 사건을 붙여버립니다.
이게 뭐예요? 문패 사건이라는 거예요.
유월절이 뭡니까?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죽음의 영이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피를 바른다는 것과 문패가 무슨 상관이냐?
언젠가 말씀 드린 기억이 납니다마는 그 문 앞에 문패를 단다는 것은 예를 들어 홍길동이다 그러면 홍길동의 핏줄이 사는 장소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제가 집이 있어서 태승철이라고 했으면 거기 누가 살겠습니까? 태승철이의 핏줄들이 사는 거예요. 피붙이가 사는 것이지요. 그 뜻이라는 거예요. 식솔들이 사는 것이다. 소유를 말한다는 겁니다. 가문상의 소유를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문패를 말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할례와 유월절 사건이 일맥상통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유월절이 뭡니까?
어린 양 되시는 주님의 피를 바른다. 그러므로 여긴 누가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의 핏줄들이 사는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해주는 사건이 바로 유월절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어떤 일이 오늘 본문에 일어납니까? 여러분.
만나가 끊어지고 가나안 곡식을 먹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에요.
무슨 얘기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이 할례를 안 하고 있다가 할례를 행한 뒤에 그 다음에 그 하나님의 소유됨을 유월절로 다시 확인을 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에 무엇을 먹습니까? 가나안 땅에서 난 곡식을 먹게 됩니다.
가나안 땅은 지금 눈으로 보기에는 다른 하나님을 모르는 족속들이 이미 주인이 되어서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내자마자 만나가 끊어지고 가나안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게 됩니다. 만나가 이제 끊어졌습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소유됨 다시 말해 내 마음에 하나님의 소유라고 문패를 붙인 모든 사람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소유하시고 이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소유인 그것들을 당신의 자손들에게 허락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와 결심을 말하는 거예요.
그 전에는 땅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하늘에서 내려왔잖아요. 만나라는 게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제 하나님의 소유됨을 분명히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것에 대한 당신의 그 주장을 하시면서 당신의 소유된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주시겠다고 아예 결정을 내리시고 계약을 한 것과 마찬가지 사건이라는 겁니다.
만나 사건은 먹고 사는 일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오늘 이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자 하늘의 만나가 끊어졌다는 것은 이미 이 땅에 기존하고 있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 마음대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주머니에 있는 돈이라도 여러분 것이 아니라 태목사에게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주실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누가 갖고 있든지 간에 그게 그 사람들 돈도 아니고 그 사람들 물질도 아니고 나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라고 마음에 문페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 마음에 문패를 달고 다니는 그 사람들 하나님 이라고 문패를 붙여서 그 마음의 방 안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 있는 모든 물질들을 당신의 뜻대로 주실 것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만나가 이 땅의 물질로 바뀐 거지요.
광야 땅은 아무 것도 없는 땅이잖아요. 근데 하늘에서 만나를 먹이셨잖아요.
근데 이제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는 게 아니라 이 땅에 기존하고 있는 그런 물질들, 또 곡식도 자라게 하시는데 이런 모든 물질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임으로 당신의 소유된 백성에게 당신 마음대로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에요.
어떤 백성에게? 당신의 소유된 백성.
당신의 소유된 백성이 뭡니까?
내 마음의 집에다가 문 앞에 문패를 다는 사람들. 나는 하나님의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핏줄입니다, 이 마음에는 하나님의 핏줄로서 살아갑니다 라고 하는 그런 문패를 단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그러한 약속을 지켜나가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을 보면 문패 없는 아파트같아요. 마음의 집에 아무나 막 들어와요.
여러분, 마음은 오직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 다시 말해 님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근데 마음에 온갖게 다 들어가요. 문패가 없어 아파트가. 아무나 들어가면 임자입니다.
남편이 들어가, 아내가 들어가, 자식이 들어가, 일이 들어가, 심지어는 이런 긍정적인 거 말고도 마음에 원수도 들어옵니다.
시누이가 들어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시누이와 또 싸워요.
또 친정 문제 때문에, 친정아버지 때문에... 이런 모든 문제 걱정 근심 생각의 대상들이 마음에 마구잡이로 들어와요. 그래서 이 마음이 완전히 문패없는 아파트 임자 없는 아파트야. 아무나 들어오면 되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백성이 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마음에 문패가 뭡니까?
주님의 십자가 아닙니까?
여러분, 그건 경험해보시면 너무너무 참 신비하고 그렇게 그렇게 감사하고 좋을 수가 없어요.
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제가 이 땅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그러면 유월절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정말 자식도 안 들어와요. 여러분.
그걸 주님의 십자가로 마음을 보고 있노라면 자식도 안 들어와요. 단지 자식에 대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뜻이 알려질 뿐이지 그럼 그대로 행하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있는 동안 자식도 안 들어오고요, 돈도 안 들어오고요, 심지어는 선교회 문제도 안 들어오고요.. 선교회를 내 마음에 끌어들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선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내가 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근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내가 선교회를 마음에 내 일로서 가득히 담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 뜻을 가르쳐 주세요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대로 선교회를 운영하려면 선교회를 마음에 담지 말고 하나님을 담아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담으려면 유월절 사건에서 처럼 내 마음에다가 어린 양 예수의 피를 발아야 돼요. 주님의 십자가로 문패를 달아야 되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문패처럼 내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선교회가 안 들어와요. 하나님이 들어오세요.
하나님이 들어셔야 선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뜻을 실현시켜나가시게 되지요.
모든 일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계속해서 마음으로 기억해보시면 마음에 아무 것도 안 들어오고 유월절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하여간 아세요. 죄가 뭡니까?
마음 안에 하나님 말고 다른 게 들어온 것이 죄예요. 하나님 말고 다른 일 걱정하는 거, 하나님 뜻 말고 다른 뜻을 생각하고 다른 의도를 갖는 거 이거 다 죄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죄를 이긴다고 하는 게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있으면 그것들이 다 막혀버리는 거예요.
너무 죄를 추상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겁니다.
죄가 극복된 상태의 행복한 삶을 살지를 못하는 겁니다. 너무 추상적으로만 배우고 있으니까. 막연하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이런 것들... 회개할 때도 이런 것들만 회개를 해요. 회개할 때 보니까 진짜 거짓말 한 거, 잘못한 거, 다른 사람을 돕지 않은 거 이런 것만 얘기하는 거예요.
회개할 때 하나님보다 나라를 더 사랑한 거,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 거, 하나님보다 나의 인생을 더 사랑한 거,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 회개해야 돼요. 그게 다 죄란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문패없는 아파트가 같아서 아무나 막 들어오려고 하는 이러한 사실 이러한 현상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정리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온 후에 할례를 행합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내게 됩니다.
두 가지 사건은 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할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유를 말합니다.
소유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이 지금 뭔가 사로잡혀 있는 상태가 그것에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있는 모든 물질들을 뜻에 따라 필요한 대로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와 관계하시려고 하시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기 위해서는 문패를 달아야 됩니다.
그게 유월절 사건의 어린 양 피를 문설주에 바른 거 아닙니까?
그 문패를 달아야 되는 사건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내 마음이 항상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내 마음 앞에 문패를 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 마음에 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세상 것 중에 아무 것도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만 충만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 있는 동안만 하나님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에요.
성령 자체를 명시적으로 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는 거 이게 뭐예요? 회개 아닙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러니까 성령은 선물이기 때문에 선물 주세요, 선물 주세요 이렇게 좇아 다닐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근데 주님의 십자가 붙잡는 게 회개에요. 그것이 문패를 다는 거 아닙니까?
문패를 달게 되면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고 그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뜻이 내가 만나는 모든 환경에 대해서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소유!
내 마음에 문패 없는 아파트 상태로 아무나 막 들어와서 내 마음을 사로잡게 내버려두지 마시고 우리의 마음의 문패되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 앞에 늘 기억하고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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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할례로 땅의것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하나님으로
인도받고 살아야할 자손이란 고백은 당연하지만
마음에 할례가 아니고 코스모스할례란 말이 너무
적절한 설명이 감동이 됩니다 분명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문패 십자가를 담고 살아감이 가나안의
주인으로 살아감이 할례 받음으로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