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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 반역 세력의 뿌리
1919년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이 창설되자 전 세계에 공산주의 바람이 불었다.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은 국경을 초월하여 국제공산당이 되자’는 달콤한 선전 선동에 양심을 자랑하는 어설픈 지식인들이 이른바 진보세력을 자처하면서 호응했다. 1924년, 안동공고 출신 김재봉이 코민테른 밀명을 받고 서울에 와서 ‘조선공산당’을 지하에서 창당했다. 일본 경찰이 이들을 체포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감옥을 들락이면서 지하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해방을 맞자 공산주의자 여운형이 재빨리 나서서 일본 총독으로부터 치안과 행정을 인수받겠다며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을 조직했지만, 곧장 박헌영에게 조직을 빼앗겼다. 박헌영은 ‘건준’을 ‘인공’(인민공화국)으로 바꾸었다. 붉은 완장을 찬 인공 요원들이 대세를 굳히며 세도를 부렸다. 미군정이 통치에 나서고 이승만이 귀국하면서 이 ‘인공’은 지하화하여 남로당으로 성장했다. 제주도에서는 팔로군을 모태로 하는 무장병력 350명이 인민군을 자처하면서 마을로부터 지원을 받아 장기 유격전을 폈다. 당시 제주도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열악하여 제주도 사람들끼리만 결혼하다 보니 동성결혼이 만연했다. 모두가 친척이기 때문에 마을의 한 사람만 남로당에 포섭되면 마을의 80% 이상이 포섭됐다. 마을 전체의 지원을 받는 한라산 무장 유격대를 토벌한다는 것은 장기 소모전일 수밖에 없었다.
북조선은 소련군이 먼저 진주함으로써 1946년 2월에 이미 김일성을 간판으로 하는 소련의 위성국이 돼 있었다. 이승만은 소련의 지능적인 방해를 극복하면서 남조선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위해 헌법을 기초하는 제헌국회부터 설치하려고, 1948년 5월 10일을 선거일로 정했다. 소련과 김일성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살인과 폭동을 전국적으로 주도했다. 선거 방해를 위한 폭동은 제주도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무장한 한라산 유격대가 12개 경찰서 및 파출소를 일시에 공격하며 수많은 경찰과 가족들을 학살했고, 마을 유지들을 학살했다. 초대 인민군 사령관 김달삼(23세)이 북한 황해도 해주로 잠입한 후 뒤를 이은 2대 사령관 이덕구는 갓 출범한 대한민국을 상대로 반란 전쟁을 선포했고,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육지에 있는 경비연대들을 투입했다. 갓 태어난 국가에 무슨 군대가 있었겠는가?
미군정은 각 지역에 마다 연대 단위를 설치하여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주도 사람들로 구성된 제주도 제9연대는 그 80% 정도가 남로당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연대장 김익열 중령은 한라산 사령관 김달삼의 졸개역할을 했다. 인력을 공급해주고 무기와 탄약까지 공급해준 것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있던 제14연대를 제주도에 투입시키려 하자 연대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총구를 거꾸로 향해 연대 간부들을 살해하고 이어서 여수와 순천의 공무원과 경찰 가족을 잔인한 수법으로 학살한 후 백운산으로 도주하여 장기 유격전 단계로 돌입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에 충격을 입은 이승만 대통령은 즉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4차례에 걸쳐 숙군작업을 하여 7천여 명을 숙정하였지만, 공비토벌 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준장은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즉시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했다.
6.25 직전의 한국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의혹이 매우 짙다. 이 의혹은 군번1번 이형근 대장의 회고록 55~57쪽에 ‘10대 불가사의’라는 제목으로 제기돼있다.
① 일선부대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적정 보고를 군 수뇌부가 계속 묵살했다.
② 전쟁 발발 2주 전, 전후방 모든 사단장과 연대장을 모두 일시에 교체했다.
③ 전후방 모든 부대를 이동시켜 낯선 지형에서 6.25를 맞게 했다.
④ 6월 11일부터 발령 중인 비상경계령을 6월 24일 00시에 해제했다.
⑤ 6월 24일, 전 장병 50%를 휴가보냈다.
⑥ 전후방 중령급 이상 장교들을 6월 24일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불러 밤을 새워 양주와 댄스를 즐기게 했다.
⑦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적진을 향해 병력을 살라미식으로 잘게 분리하여 축차 투입시켜 쉽게 사살당하게 했다.
⑧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국군이 계속 밀리기만 했는데도 국군이 반격하고 있다는 허위방송을 해서 군과 국민을 혼란시키고, 한강변에 피난차 나와 있던 유지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남로당원들에게 학살당하게 했다.
⑨ 병력과 군장비와 대포와 군수품이 한강 이북에 있는데도 한강교를 조기 폭파했다.
⑩ 명령을 받고 한강교를 폭파한 최창식 공병 대령을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하여 증거를 인멸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이 무모한 행동을 지휘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이는 불가사의이기도 하지만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이변 중의 이변이었다. 이런 상식 이하의 돌출적 행동을 하는 집단이 따로 남한사회 요소요소를 장악하고 있는 공산주의자요 간첩들이다.
1965년에는 간첩들이 버젓이 '통혁당'(통일혁명당)을 창당했다. 통혁당 요원들은 1967년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김대중을 당선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통혁당 당수 김종태는 북한에서 공공연히 영웅으로 떠받들리고 있다. ‘김종태 전기기관차공장’이 대표적인 상징이다. 통혁당 조직국장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조기 석방되어 한국 사회에서 버젓이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2017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문재인은 북한의 내각 총리 김영남과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을 청와대로 초청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배경은 청와대 벽을 가득 채운 초대형 그림이었다. 신영북의 서화와 한반도기가 그려진 그림이다. 이 벽화를 배경으로 찍은 문재인과 김여정의 사진 한 장 그리고 같은 벽화 앞에서 찍은 문재인–김영남–김여정의 사진 한 장이 김정은을 향한 충성 맹세였다. 이것도 모자라 문재인은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국빈들의 만찬 행사에서 분위기와 격에 어울리지 않게 뜬금없이 신영복을 극찬 찬미하는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올림픽 참가자들에 하는 연설이 아니라 김정은에 보내는 충성의 연설이었다. 문재인은 또 너무나 유명한 거물 간첩 윤이상(작곡가)의 묘가 있는 독일에 가서 부인 김정숙으로 하여금 동백나무를 심게 하는 퍼포먼스까지 펼쳤다. 이 역시 김정은에 보여주는 충성 메시지였을 것이다. 얼마 후에는 아예 윤이상 유골을 독일에서 파다가 통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동산에 묻었다. 그 동산에는 윤이상 음악단지가 대형건물들로 장식돼있다. 통영시 전체가 윤이상의 고장이 돼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북을 위해 충성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대통령 노무현은 차라리 김정일의 직속 부하라 해야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노무현은 김정일을 만나 NLL을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충성심을 표했고, 주한미군을 서울에서 지방으로 추방시켜버렸다고 자랑도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기하려고 애를 쓰는 중이고, 미군과의 작전계획 5027를 폐기시켜버렸다고 자랑을 했다. 이런 노골적인 반역자를 ‘민주화 대통령’이라고 추종하는 국민이 너무 많다.
대통령 김대중은 또 어떤가? 2000년 6월 15일의 정상회담 댓가로 4억 5천만 달러를 국민 몰래 주었다. 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단 한 푼도 준 적이 없다고 엄포를 놓다가, 미국이 발견해주니까 침묵했다. 유명한 저널리스트 손충무 씨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10억 달러를 주었다고 폭로했다. 이는 몰래 준 돈이고 공개적으로 통치 행위임을 가장해 북에 넘겨준 달러가 수십 억 달러가 될 것이다. 개성 관광 사업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통해 국민 주머니를 털게 했고, 금강산 독점사업권이라며 현대상선에 9억4천2백만 달러를 북한에 건네주라 했다. 쌀, 비료를 합쳐 10만 톤 규모를 보냈고, 기업들을 닦달해 북한에 조공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드디어는 제2연평해전을 통해 대한민국 해군 장병 6명의 귀한 생명을 김정일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 바쳤다. 2001년 말 북경비정이 NLL을 침범했다가 우리 해군의 포를 맞아 연기를 내면서 견인돼 간 적이 있다., 김정일은 이 원수를 '천배백배' 갚겠다며 거품을 품었다. 김대중은 김정일에 설욕의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북한 경비정이 보이면 500m까지 다가가서 기동만 하고 절대 먼저 쏘지 말라"는 참으로 유치한 명령을 내려 대한민국 해군 장병의 목숨을 김정일 기분 좋아하라고 바친 후, 바로 그날 일본으로 윌드컵 축구 구경한다며 골수 공산주의자 임동원을 데리고 손 흔들며 일본행 비행기 탔다. 이런 저질 반역자가 대한민국 민주화의 화신이 돼 있는 이 기막힌 사실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국민이 왜 대한민국에 많지 않을까?
좌파는 왜 숙명적으로 반일전쟁을 해야 하나?
좌파의 절대신은 김일성, 김일성의 신화는 항일유격전이다. 따라서 좌파의 숙명은 일본을 끝없이 모략하여 격하시키는 것이다. 일본을 야만으로 격하시키려면 조선은 아름다운 나라가 돼야 하고, 조선왕들은 훌륭해야만 한다. 조선왕들이 훌륭했는데 어째서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 이완용이라는 매국노가 필요했다. 왕 모르게 이완용 등 을사5적이 나라를 도둑질해서 일본에 넘겼다는 것이다.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 문서의 서명자는 조선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통감 자작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양쪽 서명자 모두가 각국의 왕으로부터 위임받은 외교장관들이다. 이후 1주일만인 8월 29일 순종은 조선을 일본에 바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왕이 능력이 부족하여 조선 백성을 행복하게 해줄 도리가 없으니 백성은 이후 문명이 발달한 일본국의 통치를 받고 일본법을 준수하면서 행복을 도모하라”는 요지의 국가이양 선언이었다.
당시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미국 선교사 Homer B. Hulbert는 [대한제국, 최후의 날]에서 이 장면을 설명했다. “1910년 8월 22일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의 홍복헌에서 순종이 대신들과 함께 어전 회의를 열었다. 그의 마지막 어전 회의였다. 더위에 눌린 듯 한참 침묵이 흐른 다음 순종은 다음과 같은 조칙(詔勅)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써 서로 합하며 일가(一家)가 됨을 서로 만세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이로 생각하고 이에 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순종은 전권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일임할테니 통감 데라우치를 만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는 동안 대신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물러난 이완용은 오후 4시에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조약 문서에 조인했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前條)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날은 이처럼 어이없이 저물어갔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것은 이때가 아니다. 1907년의 정미(丁未) 신조약으로 사법권과 행정 인사권을 넘겨줬을 때 조선은 이미 국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1905년 4월의 을사 보호 조약을 맺기 이전부터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884년 겨울 고종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본 미국인 퍼시벌 로웰은 고종과 순종을 본 인상을 기록했다. “고종의 얼굴은 뛰어나게 부드러워 보였다. 첫눈에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황태자였던 당시의 순종에 대한 첫인상도 기록했다. “그가 나를 접견했을 때 두 대신이 그의 양옆에 서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대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그의 귀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를 속삭여주곤 했다. 그러면 그는 동상처럼 무표정하게 서있다가 앳된 목소리로 대신들이 속삭여주는 말을 그대로 따라 외우는 것이었다.”
합병 당시 고종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종은 궁내 대신 이재극에게 “정부 대신들과 잘 협의하라, 합병은 천명이다. 지금은 다른 도리가 없다.” 이렇게 말했다. 당시 두 임금(고종, 순종)과 이완용은 오로지 왕실에 대한 예우와 고관대작들의 처우에 대해서만 일본과 흥정했을 뿐이었다. 백성에 대한 운명에 대해서는 그들이 낯 뜨거워서라도 왈가왈부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런데도 역사책들은 ‘순진하고 무기력한 순종’이 매국 대신들에 놀아났다고 매우 편협하고도 근시안적인 평가만 담고 있다. 왕은 훌륭한데 이완용 등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하고 해괴하고 유치한 이런 해석이 정사로 자리잡아 온 것이다. 마치 1980년을 전후하여 최규하 대통령이 바지였고 전두환과 신군부가 국권을 장악했기 때문에 최규하가 재가(결제)한 것은 모두 전두환의 책임이라는 1997년 좌파 대법관들이 내린 판결과 판박이인 것이다. 왕이 바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약육강식 시대에 왕이 바지였다면 그 어느 열강국으로부터라도 먹히는 것이 자연의 순리가 아니겠는가? 당시는 영국,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세계 열강들이 다 만만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다른 식민국가들은 다 식민통치국과 문화가 맞아서 잘 지내는데 왜 유독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만 일본을 원수로 생각하는가?
멸망 당시의 조선왕은 주변 신하들과 경호 인력을 믿지 못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여 거기에서 국정을 보기도 했고, 영국 공관과 미국 공관에 안전 대책을 구걸하면서 국가는커녕 일신의 안전마저 의탁할 곳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만주로 도망가자고 신하들을 조르지 않았던가. 이런 처지가 되다 보니 조선왕은 자신과 왕족의 안전을 담보해주겠다는 일본이 믿음직하고 고마웠을 것이다. 조선왕 27명 중 정말로 훌륭한 왕이 있었다면 518년 동안이나 이씨가 정권을 대물림해 왔는데 어째서 왕이 사는 서울이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로 질척거렸고, 악취 나는 우물물을 마시면서 전염병에 시달려 시체를 시구문 밖에 내다 버리는 것을 일상화해 왔는가? 조선왕이 훌륭했는데 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적장에 절을 여러 번 하였는가? 조선왕이 훌륭했는데 어째서 백성의 90%를 노예로 삼아 짐승처럼 일 시키게 하고, 짐승보다 싼값으로 거래하게 하고, 양반으로부터 늘 물질과 성을 수탈당하게 만들고, 곤장 맞게 하고, 불타는 인두로 고문당하게 했는가?
이런 나라를 주운 것이 과연 순리인가, 범죄인가? 조선은 구조적으로, 운명적으로 일본에 먹히게 돼 있었다. 이씨 성을 가진 27명의 왕이 518년 동안 누적시켜온 구조적 적폐에 대한 책임을 이완용이라는 한 개인에게 홀딱 다 뒤집어 씌우는 이 야만이 어찌하여 역사의 정사로 대물림해 왔는지, 그것이 불가사의하다. 이 언어도단의 논리는 오로지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데에서 파생된 억지다. 조선왕은 개화를 적대시하여,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가 기른 개화파 유길준, 김옥균, 서재필 등 유학생들을 비참하게 탄압하고 학살했다. 조선에 호의적이었던 그래서 조선 병합을 반대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에 슬퍼하고격분하여 ‘조선 왕조를 멸망시켜야 조선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는 조선 백성들의 생물학적 후예들이다. 아마도 우리의 90%는 조선 왕들과 양반들에 신음했던 조상들의 후예들인 것이다. 조선왕들과 양반들에 신음했던 조상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다시는 동족의 세도에 신음하지 않는 삶의 터전을 만들어 후대에 전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옳다. 일본과 사이좋은 나라로 공동협력하여 경제와 안보를 공동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우리의 적은 일본을 격하시키고, 반일감정을 부추겨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남한 내의 좌익 세력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일본이 아니라 일본을 모략하는 남한 공산당이고 북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