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 동화 (隨筆)
예진당 황해숙
유년시절 겨울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찢어진 창호지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 일이었다. 밤사이 마당에 소복하게 쌓인 눈을 확인하는 날에는 이불을 박차고 마루로 달려가서 탄성을 질렀다. 내가 마룻바닥을 쿵쿵 뛰면서 눈을 맞이하는 세리머니를 하면 부엌에서 아침밥을 짓고 있던 엄마가 ‘눈이 그렇게 좋으냐?’하고 화답했다.
산골 마을의 겨울은 고요 그 자체였다. 산과 밭과 논이 모두 휴식이었다. 아이들이 논에서 얼음을 지치고 언덕에서 눈을 다져서 미끄럼을 탈 때 지르는 환호성이 고요를 비집고 들어올 뿐이었다. 아이들은 해가 떠오른 아침부터 해가 서산으로 숨어드는 저녁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온종일 눈을 구르고 얼음을 타고 놀았다. 아이들은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을 하나씩 쥐고 칼싸움을 했다. 놀다가 목이 마르면 고드름을 한 번씩 핥아먹으면 그만이었다.
산골 마을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었다. 그 동산이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작은 여자아이들은 햇볕이 잘 드는 주인 모르는 무덤에서 소꿉놀이를 했다. 사금파리 조각을 주워다가 밥공기와 국대접을 만들었다. 밤송이 안에서 밤으로 여물지 못한 쭉정이를 꺼내어 작은 나뭇가지를 끼워서 숟가락을 만들었다. 떡갈나무 아래에서 다람쥐가 챙겨가지 못한 도토리도 귀한 소꿉놀이 재료가 되었다. 작은 고사리손이 찬 바람에 톡톡 트고 상처 안에 선홍빛 핏물이 배어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우 내 소꿉놀이를 했다.
남자아이들은 그 동산에서 타잔 놀이를 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 가지를 잡고 옮겨가면서 타잔이 동물들을 부를 때 내던 소리를 질렀다. 타잔 놀이가 시들해지면 전쟁놀이를 했다. 그때 TV에서 방영되던 유명한 ‘전우’라는 프로가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전우’의 등장인물이 되어 호령하면서 전쟁놀이를 했다. 나무로 만든 총을 적에게 겨누고 입으로 ‘OO, 빵’하고 총을 쏘았고 총을 맞은 사람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 전쟁의 결말은 언제나 우리나라가 이겼다.
그 동산에 작은 돌이 있었다. 잔디밭에 판판하게 자리 잡은 그 돌은 나만을 위한 의자가 되었다. 나는 그 위에 앉아서 독서를 하곤 했다. 그때 나는 왜 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지 않았을까. 동무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때 책에서 시인을 만나고 문학의 안내를 받았을 것이다.
겨울밤은 길어서 좋았다. 엄마 품속으로 파고들어 엄마 냄새를 맡으면서 꿈나라 여행을 즐겼다. 엄마가 동생을 보고 돌아누워 있으면 투정을 부리면서 나를 보고 누우라고 떼를 썼다. 동생이 찡찡거리면 엄마는 이내 동생을 보고 돌아누웠다. 밤새 엄마 품을 차지하기 위해 실랑이를 했었다. 이따금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저녁 식사로 수제비를 끓이는 날에는 밀가루 반죽을 둥글납작하게 펴서 아궁이 불을 지핀 재 위에 얹어 구워 먹었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순 밀가루뿐이었지만 빵 냄새를 풍기는 구수한 맛이 좋았다. 자녀들에게 그 밀가루빵을 준다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먹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산사에서 밀 개떡을 사 먹을 때 자녀들은 맛이 없다고 먹지 않았다. 밀 개떡에 콩이 송송 박혀 있었고 단맛도 났었는데 자녀들은 아무런 맛을 느낄 수 없다고 푸념했었다. 그러니 순 밀가루 반죽을 구운 밀가루빵은 더 말해 무엇하랴.
어린 나는 엄마가 밥을 지을 때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을 지피면서 엄마를 도왔다. 엄마가 가마솥에 쌀을 씻어 앉히면 삭정이를 꺾어 넣고 바싹하게 마른 솔잎 한 줌을 불쏘시개 삼아 성냥으로 불을 지폈다. 한 참 불을 때면 가마솥이 끓고 밥물이 흘렀다. 그때가 되면 불 때는 것을 잠시 멈추어야 했다. 엄마가 밥물이 끓어 넘치면 불 때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가 시간이 흐른 후 아주 약하게 불을 살짝 지피는 것이 밥을 맛있게 짓는 것이라고 일러줬다.
부엌에서 뒤꼍으로 난 문을 열면 장독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장독대는 돌계단 몇 칸을 올라가야 할 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다. 우리 장독대는 엄마의 성지였다. 양쪽에 커다란 철쭉나무가 있어서 늦은 봄에 연분홍 꽃이 폭발하면 장독대가 빛났다. 장독대의 가장 큰 항아리 위에는 흰색 사발에 담긴 정화수가 있었다. 그 정화수 안에 낮에는 태양이 머물고 밤에는 달과 별이 유영했다. 엄마는 맑은 정화수에 하늘을 끌어들이고 가족을 위해 합장했다.
농부의 아낙 엄마는 농번기에도 짬을 내어 장독대 돌아가면서 과꽃을 모종하고 봉숭아를 심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유년시절 아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다가 장독대에 숨어들어 엄마의 성지를 엿보곤 했다. 눈이 내린 날에는 장독대에도 하얀 세상이 되었다. 장독대마다 욕심껏 눈을 한가득 머리에 이고 있었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사랑방에 작업실을 차렸다. 짚을 방안에 가득 들여놓고 새끼를 꼬았다. 나는 안방 아랫목에 누워서 사랑방에서 들려오는 차락차락 볏짚 부딪히는 소리와 아버지의 기침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자곤 했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농번기에 쓸 삼태기도 만들었다. 가마니를 짤 때는 엄마와 동업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농번기에는 밭으로 논으로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일했다. 겨울 농한기에도 아버지의 노동은 멈추지 못했다.
겨울밤 잠들기 전 엄마가 찐 고구마를 한 소쿠리 가져왔다. 커다란 항아리 안에서 꺼낸 동치미를 양푼에 담아 왔다. 한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쥐고 한 손에는 길쭉하게 자른 동치미를 들고 고구마 한 입 먹고 동치미 한 입 베어 먹었다. 그래도 목이 막힐라치면 동치미 국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살얼음이 동동 떠 있는 동치미 국물을 들이켜면 목에 막혀 있던 고구마가 쑥 내려갔다. 작은 배가 볼록하게 부르면 아랫목에 파고들어 강아지처럼 꼬물꼬물 잠을 잤다. 아버지와 엄마의 품속에서 노닐던 내 유년의 겨울은 따뜻한 동화다. -끝-
2. 산다는 것이 예술이다
예진당 황해숙
시간에 끌리고 밀리면서 숨 가쁘게 지내는 일상이다. 겨울이 채 꼬리를 거두지 못한 시점에 양지쪽에 샛노랗게 웃고 있는 복수초를 보았다. 잠시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나는 아직도 두꺼운 겨울 외투를 걸치고 있는데 너는 만지면 사그라들 것만 같은 가녀린 꽃잎을 바람 앞에 선보이고 있구나. 내가 정신없이 사느라 너를 챙기지 못해 미안하구나. 네가 연녹색 새싹을 피우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어. 아무리 바쁘다 한들 한 번쯤 고운 눈길 건내었야 했어.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네 일을 하고 있었구나.” 복수초 노란 꽃과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하고 자조하는 날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더 이상 사심 없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사 남매를 양육하고 가정의 울타리를 든든하게 지켜냈다. 나는 가정이 평안해야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신념을 간직하고 긴장했다. 부모님께 내가 하는 모습이 자녀에게 간접적인 교육이었다. 내 입으로 일일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내가 남긴 발자국을 자녀들이 보고 따라 걷고 있다. 참으로 다행이다. 뿌듯한 희열을 느낀다.
천안 효 교육원에서 효와 인성을 배우고 강사가 되었다. 예전에는 가정에서 효에 대해서 따로 배울 것 없이 부모를 보고 따라 하면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 가정이 분열되어 보고 따라 배울 대상이 없다. 가정에 화기애애한 사랑이 고갈되고 그 여파로 학교에 참다운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부재중이다.
인정이 메마르고 내로남불이 판치는 현실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정을 흘려보내고 서로 기대고 살 수 있는(人)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효 인성 교육이 절실해졌다. 내가 효 인성 강의를 하려면 가정을 더 튼튼하게 지켜야 하지 않겠나. 내가 살아온 세월이 내 자산이 될 것이고 그것을 강의 자료로 꺼낼 작정이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다.
부여에 있는 천년 고찰 무량사 신도회장을 맡아 봉사한 세월이 어언 20여 년이었다. 무량사의 큰 부처를 모시고 살면서 매사 살피고 헤아리는 일이 내 삶이었다.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밟으면 안 된다는 것이 생활신조가 되었다. 자신이 한 일은 시간이 지나면 수면 위에 떠오르기 마련이라는 것을 시간 속에서 터득했다. 참으로 귀한 깨우침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면 본인은 물론이고 자녀와 자녀의 자녀 대까지 삼대에 걸쳐 화가 미친다는 것이다.
천안 효 교육원에 갈 때 보령에서 신영 시인님과 최 관수 원장님과 동행한다. 더러는 보령에서 오는 우리 셋을 보고 좋은 사람들이라고 칭찬한다. 우리를 향하여 인성의 향기가 아름답게 풍겨온다는 말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품격의 칭찬이다. 우리 삼인방은 있는 듯 없는 듯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칭찬에 민망하기 그지없다. 내가 더 몸을 사리고 납작 엎드리고 지내야겠다고 다짐하게 한다.
작년 연말에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수상 소식을 접하고 더 열심히 봉사한 사람에게 돌아갈 상이라고 한사코 거절했다. 주최 측에서 봉사 경력과 쌓인 점수가 월등하니 수상 자격이 충분하다고 하여 억지 춘향으로 받게 되었다. 오랜 시간 봉사하면서 내가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내 작은 혼 그릇을 비우고 또 비우는 세월 속에서 더 큰 그릇이 되었고 그 큰 그릇 안에 가득 채워진 행복을 소유하게 되었다.
봉사 활동을 하다 보면 관공서에 가고 공무원을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 시간 속에서 공무원들이 수상하면 업무 경력이나 진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여 내게 오는 상이 그들에게 돌아가서 그들의 어깨에 날개를 다는 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수없이 망설였다. 이만하면 내 오지랖도 꽤 넓다는 것을 느끼고 실소를 짓는다.
사람 사는 것이 예술이다!
작은 꽃 한 떨기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후 얻은 교훈이다. 겨우내 얼었던 땅을 비집고 나와 아직 찬 바람 속에서 당당하게 꽃을 피운 복수초가 온몸으로 전해준 언어이다.
나도 그런 꽃 한 떨기 피워낼 수 있을까.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끝없이 자맥질했던 몸부림이 그 꽃씨를 뿌리는 거룩한 시간이었을까.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별것도 아닌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언행 심사 살피고 또 삼갈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