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목련꽃에–동화 시 지혜심정옥임
1
벌써 4월인데 아직 살 에이게 추웠다.
“이러다 봄이 영 안 오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게요. 은근 걱정이네요. 요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어요.”
목련 나무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2
요 며칠 눈비가 내려 가지에 얼음이 붙어 있다.
그 속에서 꽃 촉이 봉곳 올라와 있었다.
“드디어 사신단이 오시네요.”
“어서 오세요!”
가지들이 한마디씩 하며 반겼다.
3
며칠 지나자 나뭇가지 마디마다 꽃 촉이 오뚝오뚝 자리를 잡았다.
나뭇가지들이 두 팔을 활짝 벌려 꽃봉오리를 안았다.
“올해는 더디 오셨네요. 멀리까지 나가 기다렸답니다.”
4
센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마다 들락거리며 말끔히 청소하며 말을 건넸다.
가지에 쌓인 먼지들을 깨끗이 털고 반들반들 닦았다.
“이제 가지들이 어깨 위 꽃봉오리를 열어 예식을 올릴 거예요.”
5
나무는 꽃들이 예복을 갖춰 입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도 성대한 예식이 될 겁니다.
비록 동장군이 버티고 있지만, 내일은 따뜻할 거라는 일기예보네요.”
6
다음 날은 예고대로 푸근했다.
가지마다 열 지어선 여신 단의 단장이 밀서를 열어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7
가끔 되풀이되는 흥을 돋우는 후렴구는 모든 여신이 함께 읊었다.
노랫가락 같았다.
“새 봄날엔 새로운 꽃이 피어나죠.”
8
진달래 개나리를 선두로 계속 이름을 불렀다.
잔 나무 산 나무 한해살이 꽃들까지 수많은 꽃 이름을 불렀다.
“유독 올해는 더 많은 꽃이 한꺼번에 필 거래요.
더디 온 만큼 급한 꽃들이 모두 나서서 신청한다고 합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꽃들이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밀서 전달식은 사흘 동안이나 이어졌다. 엄숙하고도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벌써 치맛자락을 펴 파티 준비를 하는 여신님도 있었다.
9
겉 꽃잎 하나가 활짝 펴져 있다.
일주일째 되는 날 모두 아홉 겹 치맛자락이 펼쳐졌다.
백목련 자목련이 아홉 장 꽃잎을 일제히 펼쳤다.
10
다음 날은 비바람이 몹시 불었다. 자주색 꽃잎이 한 겹씩 떨어졌다.
땅에 기도하는 불자의 손등처럼 엎어져 쌓였다.
그저 며칠 반짝 화려한 파티는 곧 시들해지고 있었다.
11
목련꽃은 한 겹씩 한 겹씩 낮은 꽃들의 거름으로 벗어주었다.
나뭇가지는 씨방을 세우기 시작하여 연초록 여린 순을 힘껏 밀어 올렸다.
“반짝이는 잎들이 넓혀지고 있었다. 아직 새순이 꽃샘바람을 싫어할 거예요.”
“조금만 더 감싸줘요. 아직은 얼굴이 시려요.”
나무와 잎들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서로를 위로하며 차근차근 열매를 키울 준비를 했다.
12
날씨가 따스해지자 커다란 잎에 가려 목련 씨가 자라는 걸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무는 커다란 잎들만 키우는 것처럼 보였다. 아기 손바닥만 하던 잎들이 이제 커다란 두툼한 어른 손바닥만 해졌다.
“어쩌면 목련 잎들이 하나같이 꽃잎 모양이네요.”
13
윤이 나는 나뭇잎에 가려 아무도 목련 씨앗을 볼 수 없었다. 새들도 빽빽하고 빳빳한 목련 잎을 젖힐 수가 없었다. 벌레도 미끄럽고 반짝거리는 목련 이파리는 눈이 부셔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속에서 목련 씨는 통통하게 주황색을 띠고 여물어 갔다.
14
나무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씨앗을 키웠다. 허투루 떨어진 씨 하나 없이 꽃보다 울긋불긋 예쁜 옥합에 싸여 익어갔다.
15
아이가 지나다 나무 앞에 우뚝 섰다.
바람이 불어 가지가 부러져나온 씨앗이
톡 아이 머리 위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아이가 머리 위에 떨어진 묵직한 열매를 보았다.
“아빠! 이게 무엇처럼 보여?”
“글쎄! 매우 큰 씨앗 같은데.”
한 무더기 사람이 지나가는 사이로 비집고 달려가
아이는 손바닥을 펴 보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씨앗인지 아시나요?”
모두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는 신기하여 손바닥에 귀한 보물을 감싸듯이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묻고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수록 아이는 씨앗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16
마침 연장을 들고 지나가는 공원지기 할아버지를 보았다.
“할아버지! 이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그건 목련 씨앗이지.”
“그런데 어른들에게 물어도 아무도 모른다고 해요.”
“목련 나무는 씨앗을 극진히 키우니까 그렇단다. 가지에 부딪혀서 떨어졌나 보다.”
“정말 예쁘고 신기해요.”
“귀한 씨앗이란다. 목련 나무는 엄마가 아기를 뱃속에 감추듯 아무도 모르게 키운단다.
잘 간직했다가 오는 봄에 심어라. 좋은 보물이 생겼다. 너 참 운 좋다 허허!”
17
보라색 점이 찍혀 있고 벌어진 씨방 사이로 반짝이는 주황색 씨앗.
소중히 두 손에 받쳐 들고 공원을 내려가는 아이의 발걸음이 통통 튀었다.
사람들은 나무의 꽃만 기억한다. 화려한 목련꽃만 추억한다.
봄이 오면 목련꽃만 기다리며 꽃만 기억하는 사람들!
목련 나무는 사람들이 알아보거나 말거나 다음 해에도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씨앗을 두꺼운 잎에 감추고
열심히 씨앗을 키울 것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