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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텃밭시학상 ∥ 심사평
감정과 실재, 혹은 멜란지(melange)의 시
모든 감정의 저변에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안셀름 그륀에 의하면, 그리움(desiderium)은 별을 의미하는 시데라(sidera)에서 나왔습니다. 하늘과 땅을 결합시키고, 지상을 넘어 천상을 향하는 그것은, 서정시의 근본 기분-현상입니다. 딴은, 사물-초점의 내외와 경계로서 시, 멜란지(melange)의 시에는 서로 다른 색상의 실을 여러 겹 합쳐 꼬아 놓은 주름[紋]이 있습니다. 언어와 감정을 혼합해 직조해 낸 이 마음의 무늬와 결은 얼마나 새롭고 공교로운 것인지요. 서정시의 현은 노래이자 밝은 어둠이며, 현존재입니다. 서정-시의 아름다움과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알고 느끼며,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문제는 서정시의 새로운 전통과 시선, 말과 삶의 조화, 구상화의 정도 등을 염두에 두고 충분히 논의한 결과, 다수의 투고작 가운데 공미의『노을 시계』와 김정화의『꽃의 실험』을 최종적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먼저, 공미 씨의 시는 인간적 시간과 자아를 본위로 한 말과 삶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말의 안과 밖, 그에 따른 마음과 사물의 관계로 보아 그녀에게 시는한밤중 아득히 넘어가는/ 꽃 여는 소리(「거울 앞」)를 애써 듣는 일입니다. 혼자서 듣는 그 소리는 놀(노을)이 갖는 양가 감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움과 외로움, 기쁨과 슬픔, 존재와 부재 사이에 그녀는 온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이러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초점화와 밀도 있는 구성, 언어의 운용 등은 향후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김정화 씨의「애인」외 4편(「꽃의 실험」,「구름 가족 관계 증명서」,「매화」,「푸르게 닿는」)은 내적인 절실함에 기반한 정서의 깊이와 길의 이미지가 새롭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녀에게 시는 일몰의 이미지에서 보듯이 생명의 탄생에 따른 피로, 뜨거운 불-길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 결과 비롯되는하늘빛 말입니다. 침묵의 언어와 배경적 이미지, 서정적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애인」에서 애인은 첫사랑과 시인의 다른 명명입니다. 검은 빛의 그는 낮과 밤의 사이 존재로서 다문 입술이 전부입니다. 깊은 못 위로 천상의 달빛은 휘어지고, 심리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떨림과 초조의 순간, 애인이, 시가 내게로 왔다.「꽃의 실험」에서 모던한 서정시의 면모는 자아와 현실의 불협화음이 정중동의 기대 심리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스치는 이 하루의 순간이 영원입니다. 그리고 그(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공동(空洞) 심리가 이른 사망 신고로 인한 반(反)감정과 함께 고조되면서, 그리움의 도를 더해가는「구름 가족 관계 증명서」.풍류는 추운 것이라는 말처럼, 바람과 꽃의 대비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친연성을 부각시키는「매화」의 경우, 매화의 아름다움과 고절(孤節)한 면모 보다는, 동병상련으로서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마지막으로,「푸르게 닿는」이란 제하의 시는 발상이 새롭고 참신합니다.그물 같은 잎줄기가 닿소리 같다는 도입부에서 시선을 멎게 하는 이 시는 자연과 사물, 사라진 언어(모국어)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긍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홀소리에 닿아야 나는 닿소리, 홀로 날 수 있는 홀소리의 의미를 진작에 알고 있는 그녀는, 말과 사물에 새로운 아름다움과 힘을 부여하고 있습니다.풀빛은 잎줄기 놀이/ 노래로 가는 첫 줄은 하나의 묘처입니다.
아무쪼록 영예의 수상자에겐 갈채와 작약(雀躍)을, 아쉽게도 선에 들지 못한 분들께는 위로와 차후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정하해 / 김상환(글)
제3회 텃밭시학상 수상작
애인 외 4편
김정화
눈부신 하얀 배꽃 얼굴로 왔다
바람이 창가에 누운 꽃잎을 만질 때,
산 그림자 바라보던 멀건 눈망울
깊은 못을 말하고 싶었지만,
물속 꽃잎이 떠올라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에 피던 애틋한 입김
눈썹과 눈썹 사이 낮달로 왔다
그 떨림, 스치는 손끝
몇 방울 설레며 왔다
다문 입술은 고요를 깨고
애인은 달빛 휘어진 그 밤에 왔다
꽃의 실험
소리마디가 가득한 길턱에서
겨우 하나 받았다
5, 4, 3, 2,
1,
0.5
하얗게 덮어쓰고 앉은 침묵
아름다운 꿈길에 앉아 새가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뽀글 파마 정거장에서 헤맸다
저마다 별로 가려고 몸을 싣고
지긋이 눈 감고 별맞이 기차를 탄다
스치는 이 하루만을 본다
꽃을 여는 길
이곳이 그리운데 멀리 와 버렸다
뚜껑을 열자
사십 분짜리 꽃봄
하늘과 땅 사이, 꽃 덤불 핀다
그 사람
돌아선 가을은 붉은 길이었네
다시없을 뭉게구름과 함께
와 곱네, 등 뒤에서 말하던 바람
아직, 두 눈에 들일 마음은 적지만
고운 옷 입고 떠나려 하는 이파리
노을에 젖은 산 그 사람 닮았네
아련히 붉게 물던 보고 싶은 그 사람
붉은 물 뒤에 숨겨 둔 슬픔 하나
잊는다 말해 놓고 울어버린 그 사람
매화
바람이 불자 꽃나무가 소리를 지른다
등성이 한 바퀴 돌고 온 자리
그때 겨울 나도, 매화도 추웠다
바람은 치근거리듯 웃고
눈물로 들썩이며 새벽에 안겨 울던
싸늘하던 그 밤 나도, 매화도 추웠다
푸르게 닿는
그물 같은 잎줄기가 닿소리 같다
잎 다섯 달걀꼴은 홀소리이겠지
말마다 힘줄 다 드러낸 나뭇잎
닿다가 홀로 모여서 숭숭 난 구멍
바람이 들어오면 옹크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풋풋한 닿소리
촘촘하게 쌓이는 ㅂ ㄷ ㄱ……
한 칸 한 칸 별빛으로 얼기설기 짜며
저 단단한 심줄 같은 글 바탕 될 결
풀빛은 잎줄기 놀이
노래로 가는 첫 줄
내 빛깔 내 소리가 흐르는 시를 쓰고 싶다
날마다 종이에 끄적이고 토닥토닥 글판을 두들기지만 늘 돌아보는 몇 마디. 내가 쓸 자격이 있나? 시를 알기나 하는가? 더 배우고서 써야 하지 않을까? 난 뭘 쓸 수 있을까? 늘 뭐라도 적어 보는데 글이 될는지 모르겠다.
둘레에서 “이런 시가 좋아요.”라든지 “이 시처럼 써 보세요.” 하면 어느새 눈이 간다. 좋다고 하는 시집을 읽고 나면 ‘좋다고 하는 기성 시인처럼’ 쓰려고 든다. 이런 시를 읽다가, 아뿔싸! 내 목소리는 사라지고, 이쁜 옷을 걸치고 뽐내려는 듯하다.
둘레에서 잘 보아줄 시가 아닌, 내 삶 자리에 있는 하루를 다시 생각해 본다. 마음에 떠다니는 목소리를 고스란히 꺼내자고 다잡는다. 내 빛깔 내 소리가 흐르는 시를 쓰자고 생각한다.
길지 않아도 좋지. 멋이 안 나도 되지. 스스로한테 되묻기를 거듭하면서 내 목소리를 담아내면 어느덧 저절로 노래로 나아가는 글을 쓰는 길이 열릴지 모른다. 그렇게 쓰고 싶다고 바란달까. 자꾸 뭔가 꾸며대거나 붙이는 쪽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더라도 그쪽을 쳐다보지 말자고, 나는 내 길로 가자고, 사람들하고 다른 길로 거꾸로 가는구나 싶어도 내 삶과 내 글을 사랑하자고 돌아본다.
열 해나 스무 해 뒤를 떠올린다. 우리 집 아이들이 내 글을 물려받아서 즐길 수 있을까? 맑은 물은 다른 맑은 물을 보태지 않아도 맑은 물이다. 맑은 말을 덧바르지 않아도 찬찬히 내 마음을 담아낼 수 있겠지. 오늘 심는 말씨가 앞으로 열매로 맺을 수 있겠지. 울타리를 뛰어넘고 싶은 시인이다.
삶이 벅찰 때 숨구멍 같은 시가 버팀목이 되어 길을 잃지 않게 잡아 주는 줄을 문득문득 느낍니다. 시집『꽃의 실험』을 뽑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텃밭시학》에 고맙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도록 천천히 걸어가겠습니다.
「작품론」
되찾은 서정의 시간, 되돌아 본 서정의 감정
임창아 시인
사물 하나하나는 저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필요로 하는 기관을 우리에게 현전하게 한다. 또한 그것을 보고 듣게 하기 위해 필요한 눈과 귀를 열어 두게 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시를 낳는(「낳다」) 노을을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아픈 말마다 뼈”(「2월 꽃사람」) 의 신음이 들렸고, 그럴 때 마다 “그 사람이 피어나”(「목련」) 마음을 다하여 시가 탄생한다. 김정화의 시는 현대시에서 한동안 방기해 왔던 꽃, 구름, 바람과 같은 서정의 빈도가 높은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방기라는 말을 걷어 내고 언어는 스스로를 통해 시의 좌표를 확인한다. 언어에 의해 소환되는 내면은 시의 전제 조건이면서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중추적 기능에 기여하는데, 이것을 감정의 개진이라고 바꾸어 표현해 보자.
언젠가 한국시의 타성을 문제 삼으면서 다른 서정에 대한 기미를 포착하는 기획을 읽은 적 있다. 이른바 ‘미래파’ 또는 그 에피고։넨 (Epigonen)들이 양산하는 호흡이 긴 시, 난해한 시, 소통 불가능한 시에 대한 안티(대타)로서 시의 대중화가 감정의 대중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위기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였다. 대체로 시에서 독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나의 이야기와 같다거나 나의 감정과 같다고 생각할 때다. 문학이 주는 유사성이 날카로운 보편성과의 마주보기라 한다면, 하나의 사실로서가 아니라 아마 그럴 것이라는 것 정도겠다. 연장선에서 독자는 보편성의 의미를 떠올리게 되어 그 의미를 넘어서는 감정을 감지하게 된다.
감정은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침묵과 인식과 이해가 동반되어야 가능하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 받지 못하게 되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어서 정확한 인식만이 제대로 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적 기능이다. 공감 또는 감동과 같은 감정의 작용들은 어쩌면 이 세계에서 보조적이거나 부수적인 기능에 속한 것인지도 모른다.
근원적으로 작품에 속해 있지 않은 시선과 작품이 그 본질에 대해 염려하는 시간에 속해 있지 않은 시선은, 가능의 세계를 방치하는 것이다. 외면하는 것이다. 가능의 세계는 곧 이미지의 가능이고 문학의 기능으로 작동한다. 모든 것이 호명되고 모든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도록 모든 세포를 열어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이가 시인이다.
자신의 경험이 주는 위험을 무릅쓰는 시인은 세계로부터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잃었다고 느끼고,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자신의 부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출구 없는 세계에서 평생의 내달림과 한순간 맞닿기 위해서 일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이 끝나지 않는 것의 발견이라면 이 영역에 들어서는 작가는 보편적인 것을 향해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어떤 명료함을 무작정 따라 보다 화려한, 보다 멋진, 정당화된 세계로 나아가지 않는다. 다만 나를 대체하는 그, 그것은 누군가를 대신하여 숨김의 외현이 되도록 드러남의 역할을 하게 된다.
시집 『꽃의 실험』에서 김정화가 보여준 전체적인 시 세계는 “서정을 통한 내면 찾기”로 규정된다. 더불어 “‘전통과 현대 사이, ‘은유와 환유 사이’, ‘역설과 해학 사이’로 난, 모호한 시의 길이 존재”한다고 피력한다. 더불어 오늘날 서정시가 나아가야 할 중요한 지점을 찌른다는 말을 더듬어 보면서 김정화의 작품에 다가가려 한다.
다채로운 무늬를 직조한 김정화의 시에서 서정은 특별한 온도와 무게와 부피를 가지고 있다.
서정의 농도와 온도
시집 전체엔 서정을 모티프로 하기 위해 시의 농도와 언어의 온도를 높인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시어를 다듬은 흔적을 엿볼 수 있다.“꽃의 실험”에서 행간에 드러나는 돌출적인 언어가 그렇고, 행간과 행간의 건너뜀이 그렇다. 어떻게 시를 써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부합하는 대답을 똑 떨어지게 내놓기엔 다소 애매하지만, 이 애매함은 난해함이나 이론적 이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엔 정의하지 못한 여러 마디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등산을 떠 올려보면 시는 초입부터 딛고 올라가는 산행이 아니라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건너뛰는 형식이라고 말할 때, 김정화의 건너뜀은 언어와 언어의 건너뜀이고, 행과 행의 건너뜀이며 이는 곧 ‘서정의 건너뜀’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다 말하지 않아도 의미를 벌려주는 역할에 기여하고, 언어에 의해 발화하는 서정의 온도를 체감하게 한다. 이러한 작품을 쓰는데 특별한 이론이나 자질이 필요할까? 서정을 활성화시키는 효과적인 구조로 서정적 상상력이라고 붙이면 어떨까 싶다. 어떤 일이 있기 전에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소리마디가 가득한 길턱에서
겨우 하나 받았다
5, 4, 3, 2,
1,
0.5
하얗게 덮어쓰고 앉은 침묵
아름다운 꿈길에 앉아 새가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뽀글 파마 정거장에서 헤맸다
저마다 별로 가려고 몸을 싣고
지긋이 눈 감고 별맞이 기차를 탄다
스치는 이 하루만을 본다
꽃을 여는 길
이곳이 그리운데 멀리 와 버렸다
뚜껑을 열자
사십 분짜리 꽃봄
하늘과 땅 사이, 꽃 덤불 핀다
-「꽃의 실험」 전문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꽃이 봄을 실험한다. 이 과정에서 존재론적 사건으로 말미암아 서정이 발생한다. 미처 그 의미를 알지 못했던 “침묵”의 진실이 뒤늦게 밝혀져 화자에게 압력을 선사한다. 기다림이라는 압력, 그리움이라는 압력, 진실의 압력 속에서 그 진실에 충실하기 위해 침묵은 “지그시 눈 감고” 모종의 꿈을 소환한다. 멀리 와 버렸기 때문에 “별맞이 기차”를 타야 한다. 꿈을 통과해 가는 것이 봄이고, 꽃이고, 나이다. 봄과 꽃과 내가 꿈길을 간다. “뽀글 파마”를 하고, 현실이란 꽃처럼 아름답지도 향기롭지도 않다. 더더구나 생의 중턱을 넘어선 중년의 여성에겐 더더욱 그렇다. 그리하여 “새가 오기를” 기다린다거나 미용실을 찾는다. 김동원 시인 또한 그의 해설에서 꽃의 실험은 “실존의 주체성을 회복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은폐된 현실의 욕망을 실험을 빌려 하늘과 지상 사이에 드러낸다.”고 한다. 인간은 세계와 화해하거나 합일하는 순간들을 서정적 예술 양식으로 새기고 창조해 왔다. 봄이 되었으니 꽃이 피고 새가 울 듯, “멀리 와 버린” 나도 힘겹게 꽃을 피워 세계와의 합일을 꿈꾼다. 이 꿈은 “꽃의 실험”을 통과하면서 창조로 비약한다. “사십 분”이면 인간과 세계가 화해하거나 합일하는데 족하다는 듯이,
서정에게도 의지할 무게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적 양식의 대표 장르인 시는 우리에게 서정의 순간을 현현한다. 그러니 시적 경험이란 서정적 경험이다. 우리는 시를 통해 자연과 합일하고 타인과 연결되며 삶과 화해하는 경험을 한다. 따라서 서정에게도 의지할 무게가 필요하다. 정치적 싸움, 역사적 싸움 등에서 경험한 바와 같이 모든 싸움은 패배의 끝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시는 그런 승리와 패배에는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사랑은 정말 사랑으로 잊을 수 있을까? 서정은 정말 서정으로만 시의 종착역에 다다를 수 있을까? 우리는 삶의 환경이나 조건들과 늘 싸운다. 지치고 힘들어서 나쁜 환경 혹은 충족시키지 못하는 조건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싸우다가 그것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 한다. 싸움이란 언제나 녹록지 않아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렇고 그런 싸움에서 이겨 원하는 대로 삶을 조금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그 싸움에서 져 좌절하고 방황하기도 한다. 세계와의 대립과 대결만을 경험해야 한다면 신음밖에 남는 게 뭐 있겠는가, 그래서 시는 이해를 넘어서는 이해나 이해에 앞서는 언어에 의지하게 된다. 존 버거 역시 시는 소설보다는 기도 쪽에 더 가깝다고 했다.
눈부신 하얀 배꽃 얼굴로 왔다
바람이 창가에 누운 꽃잎을 만질 때,
산 그림자 바라보던 멀건 눈망울
깊은 못을 말하고 싶었지만,
물속 꽃잎이 떠올라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에 피던 애틋한 입김
눈썹과 눈썹 사이 낮달로 왔다
(하략)
-「애인」 부분
불가피하게 애인을 사랑해서 “물 속 꽃잎”이 떠오른다 “낮달”은 대체 누구의 애인이던가? “배꽃”이고, “낮달”이던 애인은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가? 물속 꽃잎이 떠오르는 동안 생각에 잠긴다. 다소 비밀스럽고 다시 “애틋”하다. 알겠다 그리고 모르겠다 이런 구조로 혼란을 안긴다는 말이 아니다. 김정화의 시는 웬만해선 감정에게서 등 돌리지 않고 당당하게 버틴다. “깊은 못을 말”하는 파문이나 “달빛 휘어진” 고통을 상대할 때에도 좀처럼 담담하게 서술한다. 정직이라는 말이 믿음과 결부되어 중요시하면서도 우리는 다 말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다문 입술은 고요를 깨고” 아무리 물어도 아무리 들어도 애인이란 단어는 시들지 않는다. 시들지 않음이 삶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삶에 도움이 될 수는 있다. 때로 정직함을 덜어내고 진실을 말해도 진실을 모르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참음이나 숨김이 미덕은 아닌데도 그렇다.
우리는 때로 사랑에 실패하고 상대방과의 화해에 실패한다. 현실에 적응하거나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 실패한다. 꽃처럼 사는 것도 실패하고 꽃을 사는 일에도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확인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각성한다. 끊임없이 세계와 대립하고 대결하지만 수시로 화해하거나 합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신이 세계의 일부이며 세계가 자신의 일부라는 이중구조를 확인하며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 할 힘을 비축한다.
바람이 불자 꽃나무가 소리를 지른다
등성이 한 바퀴 돌고 온 자리
그때 겨울 나도, 매화도 추웠다
바람은 치근거리듯 웃고
눈물로 들썩이며 새벽에 안겨 울던
싸늘하던 그 밤 나도, 매화도 추웠다
-「매화」 전문
시인은 시를 통한 세계와의 합일, 즉 서정을 지양한다면 그것은 그가 시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는 증거다. “바람이 불자 꽃나무가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그리하여 서정과 현실 사이는 춥다. “나도 매화도” 춥다. 춥지만 이전부터 살아왔던 방식 그대로 꿈이란 걸 꾸며 버틴다. 우리 삶에서 꿈이란 그저 고통을 마비시키는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새벽에 안겨 울던” 서정은 다름 아닌 시의 본질이다. 삶의 본질이다. 시가 무엇인지 묻지도 않는데 서정을 지양하기에는 무리가 없지 않다. 시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일은 시인 자신과 삶 또는 세계의 관계를 냉철하고 정직하게 묻는 일과 상응한다. “등성이 한 바퀴 돌아”왔을 뿐인데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계절에 피어나는 매화처럼 견딤이란 말이 도착해 있다.
나의 없음을 서정에게
그러니까 서정은 본질을 모르는 실존의 불안과 침묵에서 잠시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살아갈 명분을 찾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한다. 행복이 신의 선물이라면 어째서 불행이 존재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시인은 이 세계에서 계속 살아나가려는 의식으로 애인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냈다. 시 속 주체가 세계와 화해하거나 합일하는 방식으로 화자는 자기를 세계에 투사하거나 세계를 자기와 동화시킨다. 물론 시 속 주체가 투사나 동화를 통해 대상이나 삶을 쉽게 타협하기 위한 대체물로 세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서정이 시인의 견고한 사상이나 투철한 정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방편으로 삶의 의미는 서정의 형식을 빌려 발견되고 감정을 고무시키는 어떤 것들이다. 물론 서정은 어떤 제스처, 뉘앙스 혹은 타성적인 포즈여도 안 된다. 요컨대, 인간은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하지만 또 순간순간 세계와 화해하며 세계 속에서 계속 살아나간다. 살아남는다.
그물 같은 잎줄기가 닿소리 같다
잎 다섯 달걀꼴은 홀소리이겠지
말마다 힘줄 다 드러낸 나뭇잎
닿다가 홀로 모여서 숭숭 난 구멍
바람이 들어오면 옹크리고
(중략)
한 칸 한 칸 별빛으로 얼기설기 짜며
저 단단한 심줄 같은 글 바탕 될 결
풀빛은 잎줄기 놀이
노래로 가는 첫 줄
-「푸르게 닿는」 부분
서정의 원리를 구현하는 어떤 통로에 닿기 위해 내는 소리가 “닿소리”다. “노래로 가는 첫 줄”은 서정시의 모범구문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소리는 “잎줄기”나 잎맥을 통해 “홀소리”에 닿는다. 닿소리와 홀소리가 관통하는 잎맥들, 맥에서 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언어와 언어가 협력하여 서정의 성채를 이루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바람이 들어오면 웅크리고” “별빛으로 얼기설기”짜여진 “바탕”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는 사람은 서정의 첫줄에서 빛을 잃는다. “촘촘하게 쌓이는” 우리로 대체되는 닿소리는 참혹하다. 참혹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전부인 하나를 얻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한다 해도 여전히 서정은 숭고하다. 그리하여 서정은 부피를 가지고 있다. 잘 알지 못하는 부피는 우리가 재현해야 할 서정을 객관적으로 보존하는 태도를 취한다.
좋은 시는 삶에 대한 경외를 피력한다. 삶의 엄연함에 대한 겸허한 수긍을 보여주는 시가 좋은 시다. 좋은 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살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으로부터 쓰여 진다. 물론 모든 시에서 주체와 세계의 합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많은 시인들이 그 합일을 회의하거나 부정한다. 우리는 수많은 시에서 서정에 대한 위반을 목도하곤 한다. 물어 볼 수는 있지만 대답할 수는 없는 그런,
그 사람 하늘 구름에 알린 지 닷새가 되는 이른 아침
나는 동사무소에 들렀다
이 세상 남은 자국이 지워진 그 사람 빨간 수평선
김상우 사망
(부분)
그 먼 곳 바람 호적에 그렇게도 빨리 올려주고 싶을까
그 사람 하늘에 알린 지 닷새가 되는 이른 아침에
―「구름 가족 관계 증명서」 부분
삶과 죽음의 심리적 거리를 재는 척도가 서정이라면, 서정성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자아와 세계의 거리가 가깝다는 뜻이다. “구름”에게 알리고, “바람”의 호적에 올렸음에도 그와 나 사이 마음의 거리는 여전히 가깝다. 특히 ‘사망자’로 인해 눈물바다가 만든 “빨간 수평선”의 비유는 무척 놀랍다. 구름과 같은 지인들에게 부고를 알리고, 바람과 한 가족이 된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명료하다. 슬프고 아픈 말들은 이미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말 보태기가 버겁다. 고인을 추모하는 구문을 “김상우 사망”외 더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사망”이라는 두 글자를 받쳐 줄 척추 같은 것이 언어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런 바람이 빚어낸 시들 쪽으로는 얼마든지 마음과 영혼의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어렵게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런 시를 읽는 데 얼마간의 서정을 할애할 용의가 있다.
지금까지 김정화 시를 통해 서정의 시간을 되찾으며 서정의 감정을 되돌아보았다. 들뢰즈는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새로운 경험이란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한 것에 빗댄 수동적인 정념이 아니라 능동적인 노력을 말할 것이다. 숙고해보면 경험에 있어서 재현과 재구성은 어떤 견고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도 얼마간 접근할 수 있겠다. 자유로운 감정에서 다른 생각과 뒤섞일 수 있는 서정을 추구하는 전제조건으로 말이다. 성숙한 시심을 토대로 할 때 진정한 서정이 가능한 것은 “글쓰기의 모든 이전의 방식에서, 심지어 자기 글의 과거에서 유래하는 완고한 잔상(殘像)이 현재 내 말들의 소리 속에 잠겨든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시인이 재구성한 서정, 서정이 재구성한 시인으로서 김정화 시인을 보다 적극적으로 ‘서정의 살뜰한 수호자’라고 명명하고 싶다.
임창아 약력 ; 2004년 《아동문예》 동시와 2009년 《시인세계》 시로 등단, 시집 『즐거운 거짓말』, 동시집 『담과 담쟁이와 고양이』, 『부엉이를 만났다』, 『하나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산문집 『슬퍼할 자신이 생겼다』 등을 냈다. 대구교육대 출강
〈신작시〉
매직아이 외 2편
김정화
1
물레방아 따라 돌다가, 하얀 수국 젖가슴에 손을 얹고 더듬다가, 질린 얼굴을 보았다. 볼을 쓰다듬으려다 풀이 움직여 매직아이처럼 이마를 찡그리고 눈을 반쯤 떴다. 아득한 도랑 풀밭을 스캔하는 동안, 푸른 옷을 입은 독사 한 마리가 긴 몸을 구부리고 돌벽 앞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옹달샘 조롱박에 분홍 패랭이꽃 하나 띄워 보냈다. 법당 옆문에서 염불을 듣는 뱀을 보며, 우리는 왜 가깝게 지내지 못하는지 얘기 나누고 싶었다.
2
비파를 뜯고 있는 돌부처 앞에 두 손 모으고 절을 했다. 소원을 빌어 보라지만, 두 손을 모으다가 깜박 잊어버렸다. 저 높은 풍경소리를 들으면 꿈이 떠오를까? 그때 몸을 뚫는 숲은 목소리가 휘청이며 기우뚱했다. 귀가 멀어 버렸을 그 젖은 나뭇가지로 몸을 바꾸었다. 살아서 건너갈 수 있을까 그 바람은,
3
돌이 많고 탑이 많은 연못을 지나 소원문으로 들어갔다. 맞은 개가 절을 하는 동안 눈빛이 젖어있었다. 목줄을 묶인 그 개는, 납작 엎드리고 발등에 턱을 괴고 있었지만, 어딘가 보고 있었다. 나는 영취암에서 주운 불성을 개한테 주었다.
4
아득하였으리라! 세 군데 아니 네 군데, 그 개 얼굴을 빠르게 넘겼다. 돌아앉은 구름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뒷산은 물비린내 올라오고 비가 그치면, 귀뚜라미 노래에 매직아이가 되겠다고 하였다. 초점을 잃은 그 꽃도, 절간 탑을 돌며, 왜 싫어하는 계곡물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온다
아버지가 온다, 금성산 골짜기 구름바다
저녁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아버지가 온다.
흠흠, 헛기침 두어 번 하고 고샅길 어스름 걸어 오신다
장독대에 떨어진 감잎 주워 들여다보다
민망해하던 아버지
경주 수막새 웃음 닮은 아버지
여느 때처럼 새벽 네 시에 나가서 들 밭일 하느라
해 빠진 줄도 모르고 늦지나 않을지
ㅡ한 해 만이네
삼켰던 말 다 그러모아도 이 하루면 넉넉하다
시름시름 일곱 달 만에 잠든, 책만 보면 벽에 기대 읽던 그 아버지가 가을에 온다
그곳은 구월이지요, 여긴 시월 마지막 날이에요
오늘 모처럼 밥을 잡수시는 얼굴 보겠네요
현관문을 제가 열어 놓을게요
아직도 말보다 기침이 편하면
둘째 셋째 넷째가 하는 이야기
절 받으면서 가만가만 들어도 괜찮아요
떠돌다가
처음에는 뒷문으로 살금살금 나가서
마을을 돌아보고
골목을 느끼면서
햇볕을 듬뿍 쬐고
풀벌레 소리도 들었다
비슷한 때에 살금살금 나가서
같이 뛰놀던 이웃 아이들은
다 집으로 왔는데
한 아이만
돌아오지 않았다
집이 어디였을까
깃들던 자리는 어디였지
내내 집에서만 지냈기에
처음 바깥바람을 쐰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냄새를
찾아내지도
맡지도 못했다
이날 밤
떠돌고 또 떠돌다가
별이 돋은 하늘을 보았다
말로만 듣던 별이
하늘에 하나둘 돋으면서
어둡던 길이 달라 보인다
하룻밤 이틀밤 사흘밤
한달밤 두달밤 석달밤
어느새 길에서 지내는 나날이 익숙하고
스스로 길을 느끼고 찾아보기도 한다
발이 닿는 대로 간다
눈이 닿는 대로 본다
한 걸음씩 떠돌고
한 군데씩 돌아본다
■ 김정화(숲하루) → 《문장21》시 등단(2021). 시집『꽃의 실험』, 자연에세이집『풀꽃나무하고 놀던 나날』. 아르코 문학창작(발간)기금 수혜(2022년),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2023년). 대구시인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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