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숭배하는 유교국가에 불교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숱한 고난을 격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차돈은 내 목에서 흰 피가 나오면 불교를 인정해라 할정도로 최초 우리나라엔 종교가 들어올때 고난이 컸다.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유교 국가는 아니었다. 위정자들이 좋아서 받아들인 유교는 아무런 제재 없이 들어 온것이고 자연스레 성균관이나 향교를 짖고 확산된것이다. 그래서 권력이 무섭다는 것이다.
아물며 우리나라만 그랬겠는가? 유럽도 한때 종교전쟁이라는 큰 전쟁까지 있었고, 구교신교 사이에서 서로 싸움도 많았다.
조선시대 천주교 최초의 순교터에 세원진 전주 전동성당은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배척 받고 고난을 겪었던 자리에 세워진 곳이라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이 성당은 조선시대 천주교의 순교터에 세운 성당으로 사적제288호로 지정되어있다.
원년(1801년)에 호남의 첫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윤치헌(프란치스코)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 ?던 곳이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 신망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으며, 권상연은 안동이 고향으로 문학과 윤리를 공부하다가 고종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다.
이는 숭유정책으로 유교가 국교이다시피 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양반가를 유지하는 골격을 이루는 사회에서 분주폐제(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우리 역사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왔다.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다. 그리고 신주는 목수가 만든 목편(木片-나무조각)에 불과하니 죽은 영혼이 물질적인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없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사상 맨 처음 있었던 공식적인 호교론(護敎論)이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동생 유관검은 역전모의죄로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김유산과 이우집은 불고지죄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이로써 이곳 전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의 7인이 순교한 성지가 되었다.
평면은 장방형을 기본으로 후진부를 만들기 위하여 5각으로 모를 죽였다 정면 중앙에는 높은 종탑을 세우고, 양측 아일부에는 작은 탑을 세웠는데, 이종탑의 지붕은 12개의 채광창을 돌린 12각형의 드럼(Drum)위에 12각형의 뾰죽돔을 얹어 마무리하였고, 작은탑은 8각형 드럼위에 8각형 뾰죽돔을 얹었다. 몸채의 지붕은 평함석 이음으로 마감하였다.
전주는 당시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주 감영이 위치하고 있어 보두네 신부는 전주에 곧바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주 근교인 대성리(완주군 소양면)에 머물면서 전교 사업을 시작하였다.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전동성당은 1908년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 공사를 마쳤다. 성당 건립의 공사 청부는 중국인이 맡았다.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벽돌을 직접 구워서 썼고,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남문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
이로써 1791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을,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를 지켜보았던 그 성곽의 돌들이 하느님 성전 건립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이다.
전동성당 완공은 보두네 신부가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 바쳐 노력한 결과였다. 그 후 모든 시설을 완비하고 축성식을 가진 것은 1931년으로, 완공하기까지 23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내부는 네이브(Nave)와 양측랑(Aisle)으로 나누고, 네이브의 천장은 반원 배럴볼트(Barrel vault)이고, 기둥이 선 구획마다 리브(Rib)로 구획하였다.
네이브와 아일의 경계에는 8각석주를 세우고, 반원아취로 마감하였다. 아일의 천장은 리브볼트(Ribed vault)로 제대(祭臺)뒷쪽의 8각석주들과 연결되어 있다. 제대부와 신자석 사이는 벽돌쌓기로 구획하였다.
성당 건물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동서양의 융합된 모습이어서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한국 전쟁 중에는 인민군이 이 성당을 점령하여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및 차량 정비소와 보급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1980년 중반 이후에는 전라북도 지역 내에서 '민주화의 성지'로 도민들의 아낌없는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88년 10월 10일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본당 설립 100주년(1989년)을 맞아 기념사업과 함께 성전 보수를 시작하여 1992년에 보수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푸른 잔디로 잘 가꾸어진 성당 뜨락과 고풍스런 건물은 마치 유럽의 한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환상적이어서, 최근에는 각종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어 많은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당 맞은편에 태조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이 있으며, 전북의 상징인 풍남문과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한옥마을이 어우러져 예향의 도시 전주의 맛과 멋을 만끽할 수 있다.
휘어질 정도로 많은 반찬으로 이름난 한정식은 전라도의 맛깔스런 맛과 정에 흠뻑 취할수 있을 것이다. 여행정보 1> 위치: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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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천의 바람흔적 원문보기 글쓴이: 바람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