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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동일한 행동 유전자>의 줄거리:
사도바울은 선민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민인 유대인 당사자들은 이방인들과 자신들이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들의 이런 차별화된 선민의식에도 불구하고 선민과 이방인이 차별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도이 똑 같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처럼 동일한 행동이 나오는 이유는 뭘까요? 바로 동일한 행동 유전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행동 유전자
(롬2:1~16)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동일한 행동 유전자>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혹시 <행동은 어디까지 유전될까?>라는 제목의 책을 보신 적 있습니까?
‘행동과 습관을 지배하는 유전자의 비밀’이라는 것이 부제입니다.
‘야마모토 다이스케’라고 하는 행동 유전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라고 하는 분이 쓰셨는데, 우리 인체상의 유전자가 사람의 행동과 습관에 영향을 주고 이끌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 습관이 우리의 정신적인 의지나 결심이나 이런 것들의 결과라고 보는데, 그게 아니라 생물학적인 유전자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예를 하나 드는데, 한동안 유행했던 ‘아침형 인간’이라는 것도 유전자가 결정한다는 겁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게끔 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 목사님들의 직업별 평균연령이 제일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목사님들이 새벽기도 하러 일찍 일어나시듯이 그렇게 일찍 일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거예요.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도 있고,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에서 정말 설득력 있게 여러 사람에게 권장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참으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침마다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고 잦은 지각 때문에 애를 먹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침형 인간이 이미 유전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인체 안에는 인체의 시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행성과 야행성 같은 생물의 일주성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이것과 관련돼서 영향력을 미치는 유전자가 퍼(per)유전자라고 합니다.
유독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진행성 수면 위상 전진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핀란드에서 이러한 가계를 하나 선정해서 실험한 결과 퍼 유전자 암호 중에서 한 개가 보통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는 겁니다.
또 거꾸로 일본에서는 유독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진행성 수면위상 후퇴 증후군’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역시 퍼 유전자 암호에 변화가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이 실험을 통해서 이분이 주장하는 게 뭐냐 하면, ‘사람들의 생활패턴의 차이도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는 어떤 유전자에 의해서 지배되어지고 있는 가능성이 높다’ 이게 결론입니다. 글쎄요,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어요.
리처드 도킨슨이라는 분의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책이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유전자의 노예다, 유전자가 이기적으로 자기를 보존해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게끔 하기 위해서 인간을 그냥 그 유전자를 담고 있는 기계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고 그런 기계로 유전자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결국 인간이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글쎄요, 이런 생물학적인 유전자의 노예로서 인격이 전락한다면 좀 비참해보여요.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생물학자들이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유전자가 있다는 거예요.
특히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선민의 행동이 같을 때, 이게 설명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는 기독교인들, 그 옛날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사느냐?
가정에서 시장에서 직장에서 똑같이 행동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일인데, 그것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뭐냐 하면, 유전자가 동일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도바울은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3절에서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라고 합니다.
마치 어떤 특정한 인물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것을 가상의 대화자를 선정해서 그 가상의 인물에게 말을 걸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설득력 있게 해가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의 요지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한다, 또 3절에 또 ‘같은 일을 행한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온 세상 것들의 임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이방사람들과 온 세상 것들, 내가 하루하루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의 임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유대인이 이상하게도 행동이 똑같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다른 줄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선민의식의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모세의 율법을 받았다는 겁니다.
바울은 이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한 별반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어요.
더구나 못 지킬 율법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 대단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 이유는, 모세의 율법을 갖고 있지 않아도 이방인들도 자기 양심에서 비롯되는 율법을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율법을 지키지도 못한 채 율법을 갖고 있다는 것만을 자랑삼아서 우리가 선민이라는 의식에만 사로잡혀있을 바에는 율법이 아무 소용도 없는 이유는 이방인들도 율법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삼강오륜 같은 것, 군신유의라고 하면 임금에 대한 충성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정몽주와 이방원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 아니겠어요? 여기에도 율법이 있다는 거예요.
죽어도 그 율법을 지키면서 죽는 이방인들도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가 이방인들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라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말을 써나가고 있는 사도바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앞 장에서, ‘십자가 밖의 영역은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된 영역이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율법을 갖고 있고, 할례를 받고 있는 선민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고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예외적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너희가 지금 선민이라고 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하나님의 진노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6절에) 너희가 하나님이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인내하심을 가지고 지금 당장 진노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너희를 마음에 맞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해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결국 십자가 안으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동족인 유대인들도 다 들어와야 된다는 얘기를 지금 힘주어 강조하려고 이 얘기를 꺼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목사님들이 심방을 하게 되면, 심방을 맞이하는 집사님과 권사님들의 모습은 보일 수 있는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꾸미고 계십니다. 집에서 잠자고 일어났을 때와 목사님을 맞이할 때는 딴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이 나올 수가 있겠는가? 하는 얘깁니다.
여기에 바로 유전자가 있다는 거예요. 똑같은 행동을 하게끔 하는 유전자가 있다는 겁니다.
이방인에게 들어있는 그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있고, 그 행동을 하게 하는 동일한 유전자가 선민들 속에도 있다는 거예요.
그 유전자가 어디서부터 생기느냐? 임자가 안 보이는 햄버거를 먹어치웠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어제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이 점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똑같이 돼버렸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이 임자인 것들에 대해서 멋대로 내 마음 안으로 담아버렸다는 얘깁니다, 임자가 안 보이는 햄버거를 뚝딱 먹어치우듯이 하나님이 임자인 내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마음대로 내 마음 안으로 담고, 그것들을 내가 생각하고, 내가 걱정하고, 내가 이끌어가려고 하는 데서부터 유전자가 발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임자인 것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에 내 멋대로 담게 된 그 사실로부터 생긴 유전자에 의해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행동이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는 거예요.
불의가 뭡니까? 임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것이 불의입니다.
의는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사업을 대한다고 할 때, 그 사업의 임자는 하나님이신데, 그 사업을 내 마음속에 담아두고 내 마음대로 사업을 진행해나간다는 것이 바로 불의이고, 역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역리이고 불의한 것이 이방인이나 임자를 알고 있는 선민들에게나 똑같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아, 이게 이상한 겁니다, 여러분!
이상한 것은 마음 안에 담은 것이 똑같으면 행동이 똑같아집니다.
예를 들어서 마음에 돈을 담았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과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생겨나는 거예요. 마음속에 담겨진 돈으로부터 내 행동을 지배하는 유전자가 생겨납니다, 생각을 지배하는 유전자가 생겨나는 거예요.
그래서 애나 어른이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똑같아지는 거예요. 한 푼이라도 더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하고, 한 푼이라도 더 뜯어내려고 합니다. 엄마 아빠는 죽겠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자기 주머니에 한 푼 더 들어오면 일단 입이 벌어집니다.
거래처 직원이 아무리 죽는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일단 그 사람 손에서 내 손으로 돈이 옮겨오면 좋은 겁니다.
교수님, 얼마나 고상하십니까? 학문에 전념하시는 분의 마음 안에 돈을 담잖아요?
그러면 그분을 고상하게 했던 지식과 연구 활동 모두 아무 의미가 없고, 지식도 연구 활동도 다 장사가 돼버리고 맙니다. 시장에서 생선 파시는 분들과 마인드가 똑같아진다는 거예요.
의사 선생님이 마음에 돈을 담잖아요?
존엄한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의술은 사라져버리고 장사로 바뀌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일단 돈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가면 똑같은 행동을 하게 하는 유전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심지어 목사님이 마음에 돈을 담으면 목회도 장사가 돼버리고 맙니다.
목사님뿐만 아니라 스님도 마찬가지에요, 추기경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황 성하도 마찬가지십니다. 교황 마음에 돈이 들어가면 교황 직책에서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장사가 돼버리는 겁니다. 이상한 거예요. 똑같은 것을 마음에 담으면 똑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되는 유전자가 발생합니다.
자식을 마음에 담잖아요, 그러면 엄마들의 행동이 똑같아집니다.
좋은 학원이 있다고 하면 물밀 듯이 몰려갑니다, 치맛바람 똑같습니다, 열성 극성 똑같습니다.
에이! 아닌 엄마도 많다고요? 아닙니다. 그 경우에는 엄마 마음속에 자식보다 비중이 더 큰 다른 무엇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속에 담고 있는 것이 같으면 같은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유전자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행동이 다르다면 분명히 뭔가 다른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행동이 비기독교인의 행동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마음 안에 담은 것에서 차이가 안 나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참 보통일이 아니죠.
율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아주 귀한 겁니다.
지키라고 주셨다는 것은 다 알아요, 그런데 문제는 왜 율법이 안 지켜지는가를 우리가 모른다는 거예요.
왜 율법이 안 지켜집니까?
율법은 임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나온 말씀입니다.
이 율법을 지키려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전자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전자는 어디서 생기는 겁니까? 바로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실 때 내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생각과 행동과 같아질 수 있는 유전자가 생겨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쉬는 날 좀 일찍 일어나서 동네에 있는 샘터에 올라가서 운동도 좀 하고 약수도 좀 길어오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들어먹지를 않는 아들 녀석이 애인이 생기자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서 온갖 치장을 다 하고 집을 나서게 되는 겁니다.
내 마음 안에 담는다는 게 사랑한다는 거예요.
내 마음 안에 담고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게 되면, 그때 행동이 다 똑같아집니다.
7절 말씀에 보면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는 말이 나와요, 썩지 아니한다는 게 뭡니까?
이 땅에 있는 것 중에는 썩지 않을 게 없어요, 그러므로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썩을 것들인데, 그것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갈 때 거기로부터 생기는 유전자로부터 나오는 행동은 믿지 않는 자들과 똑같기 때문에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선민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좋아해서 마음 안에 하나님을 담는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 완전히 다른 행동이 비로소 나타나게 된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복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복음의 의미가 이 맥락에서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마음에 담기 전에, 예를 들어 자식이 눈에 보여요, 돈이 보여요, 내 건강이 보입니다, 근데 그것들을 마음에 담기 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마음에 담게 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임자 되시는 하나님 이외의 모든 대상들이 내 마음 안에 있다가도 다~ 쫓겨나가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을 잊지 않고 있는 동안 내 마음 안에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것도 들어와 자리 잡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인해서 완전히 내 마음이 이 세상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 안으로 비로소 하나님이 들어오게 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들어오게 되시면 율법뿐만 아니라 매순간마다 내 눈앞에 보이는 하나님이 임자이신 모든 상황, 돈이 없는 상황, 돈이 잘 벌리는 상황, 인간관계가 뒤틀려 있는 상황, 시어머니와 한바탕 싸우고 난 뒤의 상황, 이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임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내가 행동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고백을 계~속 하고 있으면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의 임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따라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내가 계~속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함을 잊지 않고 있다 보면 내 수중에 들어오고,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대상들 사물들 하나하나에 대해서 임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올라타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처리해나가게 될 수 있다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마음에 돈을 담고 살아갑니까?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똑같이 되도록 하는 유전자가 우리를 지배하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마음에 자식을 담고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자식사랑에 의한 행동과 똑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유전자에 의해서 우리의 하루는 지배당하고 말 것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이고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임자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담을 것이지, 그 임자가 만들어놓으시고 허락해 놓으신 이 세상의 어떤 상황 어떤 사물도 어떤 사람도 내 마음 안에 넣고 살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진노 아래 있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행동 유전자를 십자가를 통해서 온전히 끊고 온전한 영생의 복이 약속되어지고 임자이신 하나님께서 ‘너 진짜 내 마음에 든다’고 말씀하시는 영역 아래서 살게 되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주님 사건이 너무나 복음입니다.
이 주님과 연합하여 죽었음을 끝없이 고백하면서 내 마음 안에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어떤 상황도 들어오지 않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 만물의 임자이신 하나님과 같은 생각 같은 뜻을 따라 행동하는 복된 하늘 백성들로써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를 제로원의 복음의 말씀으로 온전히 승리할 수 있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