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17-22 (전쟁의 승리자)
성경본문 예레미야애가 4: 17-22
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18.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
19.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 쫓고 광야에도 매복하였도다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21.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잔이 네게도 이를찌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22.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
앞으로 이런 일을 있어선 안되겠지만 남과 북이 싸운다면 어디가 이길것 같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쪽의 편을 드실까요? 우리가 이겼으면 하는 마음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드실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여보 당신은 나의 어떤 면이 좋나요? 나의 미모인가요? 아니면 나의 고상한 지성입니까?”이에 남편은“그래 당신은 참 아름답고 지성도 뛰어나지”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당신의 유머감각은 누구도 따를 수 없어”
자신이 자신을 모르고 산다는 것 그리고 남이 알아주었으면 하는데 알아주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1950년 6월25일의 전쟁. 이 전쟁의 49주년을 맞이하는 그 날, 잠실에서는 미국에 유명한 가수, 마이클 잭슨이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이 공연의 입장료가 자그마치 3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6·25날 하는지, 또한 그 전쟁의 아픔을 아는지, 지금도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고 그때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지금도 있는데, 그리고 북한의 사람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공연을 하는지를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하기를“우리는 이 공연을 통해 그래도 우리나라가 평화롭게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자유국가이고 소비가 미덕인 자본국가라고 하지만 조금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 세계가 보고 있다면, 그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작년 한해동안 우리나라와 북한이 군사비로 쓴 돈이 북한은 25억불이고 남한은 140억불입니다. 북한은 그 군사비의 절반으로도 그 굶주리는 주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남한도 그 절반인 70억불만 가져도 실직자와 생활보호 대상자들을 어느 정도는 도와줄 수 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 속에서 남과 북이 통일되지 못한 책임을 물었을 때 물론 세계 냉전구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한민족들이 민족 주체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되는데 그것이 부족해서가 아닙니까?
세계 나라가운데 아직까지도 분단되어 있는 국가는 우리나라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늘 노래할 때“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고 하면서도 그 통일을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까? 잘산다고 하는데 우리는 통일비용을 얼마나 준비했습니까?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남과 북의 분단은 한 민족의 수치일 뿐 아니라 신앙 양심상 범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사 속에서 우리는 용납 못할 비극적 희극을 하고 있는 꼴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술 취한 사람이 길에 누워 있습니다. 얼마나 먹었는지 인사불성이 되어 움직이지도 않았습니다.
밤새 사람이 누어 있는 것을 본 순라군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시체 안치소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술 취한 사람이 깨어보니 여러 시체들 속에 자신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내가 여기 왜 와 있지? 내가 죽은 시체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내가 살았다고 하려고 하니 주변에는 모두 시체들 뿐이고.. 내가 죽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왜 오줌이 마렵지?”살았다는 것입니까? 죽었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정신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내가 살아있는 목적은 무엇인지,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바른 일인지 그른 일이지, 앞으로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될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는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어서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다이옥신 파동이 정육점에서나 음식점에서 고기를 팔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랬더니 누가 하는 말이“담배 한대 피면, 그 담배한대 속에 있는 다이옥신은 얼마인줄 아는가 고기 속에 들어있는 10-20배가 된다”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담배 판매량이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어린 초등학생, 중학생 까지도 담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담배를 정부에서 전매하고 있습니다. 세계 사람들이 어떻게 얘기하겠습니까? 담배는 더 많이 피우면서 다이옥신이 어쩌니 저쩌니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6·25기념주일을 지내면서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전쟁에서 패배를 하고 나니 그 아픔과 고통이 너무 커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애 4:1“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정금이 변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정금처럼 화려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 과거에는 보배롭고 고귀한 인생들이었는데 지금은 보잘것 없는 질그릇의 인생이 되었다, 과거에는 풍요로운 부모들이었는데 지금은 젖먹이들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는 배가 고파 아이를 삶아 먹기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북한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과거에는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좋은 옷을 입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를 헤매며 거름더미에서 뒹굴게 되었다, 과거에는 피부도 히고 건강한 사람들이 지금은 숯과 같이 검고 뼈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상처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화려함과 비교해 볼 때 전쟁의 고통은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래서 9절 말씀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지고난 후에 그 아픔과 고통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후부터는 전쟁의 상처 속에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렘 41:4-5에 보면 유대 멸망 다음해인 585년에 80여명의 사람들이 수염을 깎고 몸에 상처를 내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곡식과 향료를 들고 와서 성전에 바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대 멸망의 날을 기념하는 행사는 계속 이어져 내려와 후손들에 의해 유대의 관습과 전통이 되고 유대인의 중요한절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이 날의 아픔을 다시 생각하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하면서 그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지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왜 전쟁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군대가 약해서 그렇다 그러니 빨리 군대를 증강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이것은
우리들의 죄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심판하신 것이다”그러므로 6절 말씀에“...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도 중하고..”11절“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 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전쟁의 아픔은 우리의 죄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는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두 가지로 말씀 드립니다.
1.보배로운 정금으로 살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누가 보배로운 정금입니까? 누가 그렇게 가치 있고 귀한 사람입니까?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까? 세상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금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권력은 변하는 것입니다. 원시시대에는 권력이 폭력이었습니다. 힘센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독재자입니다.
산업혁명이후에 권력은 재력, 돈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돈이 최고입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지력입니다.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남보다 많은 정보를 가져가 사는 사회입니다. 이처럼 힘이라는 것은 시대를 따라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21세기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이 될지 궁금합니다. 세상은 조금씩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정금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보배로운 정금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2절에“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더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변하는 세상이 우리에게 정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주먹의 힘이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정금이라고 귀하게 여기고 그 사람 앞에서 꼼짝 못하고 그들을 높였습니다. 어느 때는 돈 있는 사람 앞에서 비굴해져 그 사람만이 귀한 것으로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정보 앞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보배로운 정금이라고 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가 예쁘다고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예뻐합니다. 남이 볼 때는 예쁘지 않아도 부모는 예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의 모습이 고슴도치라고 별스럽지 않게 생겼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보배로운 정금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한다면 그저 믿는 것입니다.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넬슨 제독의 부하 중 늘 문제를 일으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훈계해도, 때려서도, 징계를 줘도 고쳐지지 않는 부하였습니다. 그래서 넬슨은 할 수 없이 군기문란 죄로 그를 죽이겠다고 하면서 군인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죽이는데 찬성하느냐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이 손을 들고 얘기를 했습니다.
“각하, 각하께서는 이 말썽꾸러기 군인을 위해 훈계도 하셨고, 매도 때렸고, 감옥에도 가두는 등 모든 것을 다 동원해 보셨다고 했지만 한가지 하지 않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해 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넬슨은 정말 그렇다고 하면서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후 놀랍게도 그 군인은 자신의 죄를 용서 받은 그 날로부터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늘 감사하면서 넬슨 제독을 위해 늘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죽어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보아도 나는 용서 받을 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감격스러우니 기쁨이 생깁니다.
창조적인 머리가 생기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보배로운 정금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발하면서 살아야 하고 소금처럼 맛을 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지 삶의 목적을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정금처럼 사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의 삶에 목적은 4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① 가지기 위해 사는 사람 : 가짐의 가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있어야 옷도 사 입고 먹기도 하고 집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권력을 가지려고 합니다. 돈을 보다 더 쉽게 가지려면 권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인 권력도 가지면 돈을 더 많이 가지게 된다고 해서“정경유착”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또한 돈이나 권력으로는 얻어 질 수 없는 것인 명예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가지려고만 하는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들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빈부의 차가 생기는 등 결국은 다 망하고 말게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다 떨쳐 버려야 하겠습니다.
② 되어지기 위해 사는 사람: 됨의 가치
사람이 철들기 시작하면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내가 무엇이 되게 되면 갖는 것은 어느 정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된 사람은 더 가지려고 한다면 더 추해보일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장관 부인들의 옷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장관부인들의 옷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관 부인이라는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그 자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것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입었고 먹었는지를 따지면 사람이 추해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도 약속하셨습니다. 마 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 의인으로 바르게 살면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③ 나누어 주기 위해 사는 사람: 나눔의 가치
나누는 것은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사랑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지고 풍부해 집니다. 사랑뿐만이 아니라 평화도 그렇고 자유도 그렇습니다. 나누면 더 평화롭고 나누면 더 자유로와 지는 것입니다. 나눔에는 신비한 매력이 있습니다.
나눔으로 좋은 것은 더 커지고 나쁜 것은 더 작아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은혜와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과 슬픔은 나눌 수록 작아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나누는 것, 나눔에 인색하지는 않았습니까? 남이 잘 되면 시기하고 배 아파 하기 때문에 기쁨도 잘 표시하지 못하고 슬픔은 더 나누지 못해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일반적으로 자연인으로 살았습니다. 소유하려는 욕심과 무엇이 되려는 욕구에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변했습니다. 영적인 눈이 띄어지고 난후에는 나누는 사람이 되었고 그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기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④ 섬기기 위해 사는 사람: 섬김의 가치
예수님이 섬기기 위해 오신 것 처럼 우리도 섬기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께서 손수 자신의 발을 씻기시려 할 때 안된다고 사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내가 만일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하시니까 제자는 온몸까지 씻겨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 만이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주님이고 그런 사람 속에서 예수생명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전 정말 못살겠습니다. 이혼할까 합니다. 남편이 날 알아주지 않고 자식들이 속을 썩이고 시댁식구들도 저를 비난만 합니다.”그래서 저는 대답했습니다.“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답게 생각하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사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교사의 사명을 주었다. 당신은 오늘부터 그 가정에 선교사가 되시오.”라고 했습니다.
한 생명의 구원을 위해 목숨 바쳐 헌신하는 그 선교사들 처럼 말입니다. 그 선교사들이 무슨 대접을 바라겠습니까? 선교사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하여 다른 생명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정에서 좋은 선교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이 사는 것입니다. 남편이 살고 아내가 살고 부모가 살고 자식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향해 보배로운 정금, 보배로운 인생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IMF가 터지면서 수출은 안되고 빚은 늘어만 가고 어떻게 해야 사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니 나라는 금 모으기 운동을 했고 백성은 금 내놓기 운동을 했습니다. 저희 집에도 찾아 보았습니다. 아들의 돌 반지와 저의 아버지가 물려주신 반지를 내놓으면서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님이 더 기뻐하심을 상상하면서 나라도 살리고 그것으로 교회에 건축헌금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 모르지만 세계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IMF를 금새 극복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신앙인들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가짐에서 됨으로, 됨에서 나눔으로, 나눔에서 섬김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벨탑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지혜를 짜내어 튼튼히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입니다.‘내 이름이 날리기’를 원하지만 내 이름은 내가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높여 주셔야 높아짐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인과 불신앙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불신앙인의 목표는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내는 것이 목표이고 방법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도 인간적이고 세상적인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허무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삶의 목표는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 하고 그를 즐거워 하면서 영화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방법과 힘으로 사는 사람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보배로운 정금입니다. 오늘날 이 민족의 국가적인 위기는 경제적인 풍요만을 중요시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의 대한 하나님의 경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625의 아픔을 잃어버리고 경제적인 성공이라는 자기 도취에 빠져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민족에 대한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금처럼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습니까? 625이후 폐허 속에서 시작된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지금의 풍요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하며 사는 여러분 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배로운 정금처럼 사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아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면 안됩니다. 아이가 엄마와 같이 어린이 대공원에 갔는데 너무나 사람이 많은 탓에 엄마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미아보호소로 갔습니다. 아이를 진정시킨 미아보호소 원장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얘야 엄마 치마만 꽉 잡았으면 엄마를 잃어버리지 않잖니?”그러니 아이가 말했습니다.“엄마 치마는 너무 짧아서 처음부터 잡을 수 없었어요”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짧은 치마입니다. 하나님만을 잡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전쟁에서 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7절 말씀에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고 했습니다.
유대나라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당시 왕과 지도자들 하다못해 선지자들 까지도 이집트에게 군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사였습니다. 성에서 도망쳐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군인들에게 모두 붙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을 가리켜‘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고향을, 친척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하다못해 자신의 조카와 더불어 좋은 땅을 고를 때에도 조카에게 양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할 때 바치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이삭의 하나님’이라면 달라집니다. 이삭의 특징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비하면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나이 40세가 되도록 자신의 짝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가 정해주는 대로 장가를 간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바친다고 하니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을 보면 조금은 위안을 가지게 됩니다. 이 사람처럼 자신도 특별한 것이 없어서 여러 사람들 앞에 서면 괜히 열등감이 느껴집니다. 왜소해 보이기도 하고 자꾸 부족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러다가도 이삭을 보면 소망이 보입니다.‘하나님께서는 저런 사람도 사랑했는데...’그래서 이전에는 내가 뭔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하고 노력하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속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마음상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이삭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평범하고 부족한 나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에 순종하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이삭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도 아니고 결단력도 아니며 그저 순종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은 야비하고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의 복을 받고 외삼촌을 속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눈앞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자 않는 사람입니다. 아주 이기적이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고통도 겪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고향과 부모를 떠나야 했고 외삼촌에게 결혼의 속임을 당하고 자식들에게 속임을 당해 가장 아끼는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사실로 알고 살아가고 자신의 외동딸 디나는 원치 않는 강간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참으로 험악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또한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영적인 생활이 별로 없습니다. 성격이 아주 편협하여 자식들도 편애를 했고, 아내들 조차 편애하여 한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자식들에게 조차 고통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아니면 못살겠다고 하는 이런 야곱에게도 하나님이 계실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향해 끊임없이 기다려 주셨습니다.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은 도와주시려고 사자를 보내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자라고 생각지 못하고 적군이라고 생각하여 밤새도록 씨름을 하다가 결국 이른 아침 한 손에 환도뼈가 부러지니 그제서야 하나님의 사자임을 깨닫고 복을 달라고 애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이 하나하나 깨어져나갔습니다. 내 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감을 느끼고 그의 삶이 조금씩 변합니다. 놀라운 변화는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빨리 달려가서 아들을 보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제단을 쌓고 감사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할 줄 아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나를 기르신 하나님, 환난 중에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사기꾼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좋으신 주님 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럴 것입니다.“김정일이 죽으면 통일 될 텐데...”그러나 그가 죽으면 통일된다고 누가 그럽니까? 하나님이 역사 하실 때 통일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가운데 남을 미워하거나 정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는 아브라함도 있고, 이삭도 있고, 야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주시면 다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주님의 시간에 그의 뜻 이뤄지길 기다려.
하루 하루 살 동안 주님 인도하시니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기다려 그 때를 그의 뜻 이뤄지길 기다려.
주의 뜻 이뤄 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 아름답게 변하길 기다려.
주님의 뜻 안에서 그 때에 모든 것이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이런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야곱도 변화시켜 주시는데 하나님이 나와 내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이북의 김정일까지도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망을 얻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는 하나님이 손을 들어주시는 자입니다. 보배로운 정금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며 선교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변화시킬 때까지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위로하고 격려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최종의 승리자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의인 10명으로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주님, 여러분 때문에 이 민족이 사는 귀한 역사가 있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